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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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박은정

  신작시: 아가미 / 도피와 도착 / 은둔 소설 클럽

  자선시: 제4의 벽(The fourth wall) / 아보카도 트랜지션

  [시인론] 최광임 “예외 상태의 일상화와 부유하는 주체의 잠재성”

 

 

 

 

 

 


 신작시 


 

 

 

 아가미

 

 

 

 

 

  내내 반짝이고 있었어요

  나무 틈새에서 날개를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의 외마디만 덩그러니 떠올랐지요

 

  찰나의 흔들림 속에서

  가까이, 당신의 이름을 불렀어요

 

  박쥐의 날개와 고래의 지느러미는 다른 형태지만

  내부 골격 구조는 같다고 했습니다

  박쥐의 날개는 물갈퀴를 닮지 않았나요

  고래의 지느러미는 구조를 닮은 게 아니라

  진정한 날개였다구요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건

  매우 민감한 감각을 가졌다는 것이지

  미개한 지느러미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겠어?

  혹등고래가 나는 걸 봤어요

  날씨가 좋으면 춤추는 것도 볼 수 있다구요

 

  총을 가진 손들이 숲속에서 우리를 보았어요

  내가 사라지면 잠든 당신을 노리겠죠

  우아하게 슬픔을 감출 수 있는 지느러미가 있다면

  내 배를 가르고 그들에게 내어줄 텐데

 

  발갛게 물든 윤슬을 지나

  긴 밤 너머 불어난 눈빛들 지나

  네가 목격한 것들을 용서할 수 있다면

  네게도 아름다운 지느러미가 돋을 거라고

 

  내 목은 늘어지고

  날개는 볼품없이 검고 무거워요

  아무리 퍼덕여도 물의 흐름을 바꾸지 못해

  눈을 뜨면 아래로 아래로

 

  균형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우리처럼?

  내내 이해는 멀고 가열찬 울음 울겠지

  그러다 서로를 가여워할지도 몰라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꽃이 떨어지고 폭우는 쏟아지는데

  누군가 화분에 계속 물을 주는 바람에

  입을 열 때마다 흙탕물이 쏟아져요

  숨어서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은

  저녁이 너무 멀다는 걸 알아 버리고

 

  꿈을 닮지 않은 꿈이라니,

  너는 내 목소리를 듣지 않고

  밤 속에서 진짜 검은 밤이 되려는구나

  사랑했던 것들을 저편에 둔 채 오직

 

  물속에서 누가 가장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 황제펭귄이라도 될 것처럼

 

  서로를 구별할 수 없을 때까지

  눈앞을 뒤척이는 물결과 다른 층위의 구름 지나

  그는 물속 깊숙이 혼자만 또 무성해지고요

 

  캄캄하게 추락하던 마음이

  물속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데

 

  ㅡ 아직 안간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ㅡ 미움을 가진 자가 이곳에 가장 오래 남겠지

  ㅡ 지느러미를 날개라고 부른 사람은 누구일까

  ㅡ 우리는 누가 꾸며낸 세계의 참혹일까

 

  누군가 잘못 호명한 이름이

  지난밤의 나였음을 깨달았을 때

  태어난 이후 가장 오래 숨을 참았다

 

  아가미가 돋으면 무궁한 말이 태어날지도 몰라

  내일은 닿을 수 없는 하늘을 궁금해하지 마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하는 동안

  수백 번의 울음을 웃음으로 가장하는 동안

 

  들판에는 마르지 않는 검은 음악

  누군가 땅을 파고 깊은 잠을 앓는다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마음에는

  스미지 못한 붉고 유약한, 빛

 

  꿈속에서 오래 살다 온 기분으로

  장마가 오면 자주 손발 젖었다

 

  아름다운 표정이 데킬라를 마시고

  레몬 조각을 힘껏 깨물듯

 

  가만히 정지하는

  너의 아가미

 

 

 

 

 

 

 

 

 

 

 



 

 

 도피와 도착

     

 

 

 

 

  기차는 막다른 곳을 회전하는 중

  반세기의 풍경이 린넨 이불처럼 펄럭인다

 

  국경 지나 빅토리아 양식 건물 지나

  다섯 개의 강철 기둥이 불타고

  창 옆으로 플라타너스, 비스킷처럼 부스러지는데

 

  낡은 기차 칸에서

  우리는 힘껏 도취된 자의 눈으로

  하늘을 메우는 연기를 보고

  서로의 팔에 새긴 타투를 쓰다듬는다

 

  꽃과 나비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할 때,

  우리보다 슬퍼 보이던 타투이스트는 말했지

  소행성보다 아름다운 광물이 될 거라고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울음이 곡선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가진 빈약한 낱말로 꾸민 연극 속에서

  관객이라곤 너와 나, 배우라고는 우리뿐

  침묵과 헤맴 사이

 

  진짜 모국어로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

 

  편하게 기대서 자

  서로의 어깨에 기대라고

  신은 사람의 머리를 작게 만든 거야

 

  네 말이 맞다면 신은 참 다정한 사람일 텐데

 

  서로의 머리를 기댈 때

  이곳은 무너진 흔적이 될까 패인 과오가 될까

  보낼 곳 없는 인사말이 될까

 

  목덜미의 촉감을 닮은 마음들이

  소란스런 사람들의 입에 망가지기 전에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것들은

  태워 버리자

  부셔 버리자

 

  인덱스를 붙인 문장을 옮겨 적던 다이어리

  주말 점심으로 먹던 구운 감자와 오믈렛

  저녁마다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며

  느리게 웃던 농담 같은 거

 

  단숨에 말할 수 있던 마음은

  이제 누구도 손대지 않아 상했을지도

  오늘도 내일도 방문객을 잊은 기계처럼

  창가에 두었던 루꼴라 화분은 잘 있을까

 

  내 심장에 해묵은 오해들 많아서

  무색해진 말들이 트램펄린 위를 날뛰고 있어

  우리만 편애하던 불행의 이름이

  운석처럼 공중에서 분해되기를

 

  기다렸지

  맹세했지

  신이 주신 가여운 피조물의 표정을 하고

  창가로 조용히 흘러내리던 빗방울이

  신기루처럼 뒤편으로 사라진다

  설명할 수 없이 조금 더 지체되는 너와 내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나고 있다

 

  오늘 밤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오로라는 죽은 전사들의 춤이라잖아

  죽음 뒤에 남아 혼자만의 천국으로 가는 대신

  이곳에서 아름답게 춤출 수 있다면

 

  몇 달 전 네게 보낸 작별 편지를

  너는 아직 읽지 않았나 보다

  회색빛 미열로 물든 소매를 접고 접으며

  너와 나는 슬픔과 사랑에 빠져 버렸는지 모른다

 

  구겨진 베갯잇 같은 눈으로

  잠든 너의 머리를 껴안고 멀어지는

  도피와 도착 사이

 

  이것은 신이 두고 간

  마지막 안부라고 생각했다

 

 

 

 

 

 

 

 

 

   

 



 

 

 은둔 소설 클럽

 

 

 

 

 

  유전 질환을 앓는 존 바에즈는 매일 아침 청색 잉크를 머금은 깃펜으로 노트가 패이도록 눌러 쓰며 다짐한다. 불행은 의심하면서 시작되고 비극은 그 의심을 확인하면서 사실이 된다. 그는 오래전 기억을 조각내고 조작하기 좋아한다. 석 달 전 연인이었던 헤르만은 광장에서 공개 처형당했고, 억압과 암울의 시대 아래 시민들은 파시스트들의 감시를 피해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허약한 신의 겨드랑이에 칠면조 날개가 돋았고, 그럼에도 신앙과 사랑을 저버리지 못한 멍청한 어머니는 붉은 실로 끊어진 인연을 이으려고 밤마다 뜨개질을 했다. 내 딸의 방탕과 방황을 용서해 주시고 그 어둠의 끝에서 보살펴 주시옵소서. 뜨거운 햇볕 아래 물오리들이 호수 위에 떠다닌다. 보드라운 무취향. 미래에는 과학 대신 무속이 창궐하여 분명한 바보들을 쾌락에 빠지게 할 테지만, 아직은 설익은 과실과 짙푸른 잎사귀들이 제 색을 드러내는 시절. 인간을 사랑하도록 유전된 존에겐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는 닥치는 대로 세상의 사랑을 제 노래로 사랑하였다. 기타를 메고 올라가지 않는 음역대의 멜로디를 기가 막히게 망쳐 버리는 자신마저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였다. 어느 날 그는 ‘은둔 소설 클럽’을 결성했다. 멤버들은 모두 은둔자여야 했으므로 한 번도 모일 수는 없었지만, 매일 한 페이지씩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존은 더 이상 자신이 노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들은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소설이 언제 끝날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의 루틴처럼 글을 쓰고, 찢고, 씹어 먹으며 은둔 생활을 즐겼고, 자신과 똑같은 루틴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외롭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글은 굉장히 지루하다 못해 도발적이었다.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었고, 인과 관계가 없었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페이지만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기억은 단순하게 각색되고 문자는 감정어부터 삭제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뒤 그 원고를 펼치자 모두들 똑같은 문장만을 쓰고 있었다. 모든 문장은 나를 모독하였으므로, 나는 오래전 나를 죽였다. 파시스트들이 제정한 우생학법에 따라 그들은 한 정신병원에 모여 처음으로 서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곳에는 낡은 피아노 한 대가 먼지를 얹은 채 놓여 있었다. 존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도 모르게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리다 도리 없이 슬픈 마음에 엎드려 울었다. 모두의 침묵이 오래 흘렀고, 빛무리가 창가에서 눈부시게 흔들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누군가는 끌려 나가고, 누군가는 다시 입실하였다. 은둔 소설 클럽은 진짜 삶을 이해하면서 소설의 첫 페이지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하찮고 볼품없이 늙은 존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랑은 오래전 자신이 불렀던 노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의심이자 확인이었다.

 

  

 

 

 

 

 

 

 

 

 


 자선시 


 

 

 

 제4의 벽(The fourth wall)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흐르는 밥그릇을 아직 죽지 않은 고양이가 핥는다. 등잔 밑이란 가장 밝고도 위험한 증거이기도 해서, 누구도 진실에 관여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어둠을 엿본다. 사방이 막힌 마음이란 게 가끔 살아 있다는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밤은 깊어지고 음악이 어둠의 심약한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축축한 마음을 벽에 널지도 못한 채 무한히 오갈 데 없는 책장을 넘긴다. 공쿠르상 수상 작가가 쓴 음악의 시원과 본질을 제4의 벽을 바라보며 읽는다. 이 선을 넘으면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나요. 누군가 내민 손을 따라가면 무언가 쿵,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어제 우리가 나눈 대화의 끝은 기억나지 않지만 함께 웃었던 기억만은 상처처럼 남았습니다. 함박눈을 기다리는 피곤한 어른의 이마. 그 하얀 빛처럼 세상 밖은 아직 고요하다. 눈꺼풀이 감기고 있는 작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전생에 내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마지못한 용서를 내뱉었는지, 훔친 꽃들이 방구석에서 시들어갈 때 더없이 싱싱해져 가던 악한 마음까지. 시적인 것의 과장과 시적인 것의 거짓과 시적인 것의 행세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밤이다. 한 문장에서 다음 페이지를 넘어가도 고양이는 빈 밥그릇을 핥고 있다. 아직도. 영원히 잠들지 않고 밥그릇만 핥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저것은 가엾고 지루하다. 하릴없이 책장만 넘기고 있는 나 역시 빈 밥그릇을 핥고 있는 저것과 다르지 않다. 사카모토는 며칠 전 죽었다. 죽은 그가 여전히 살아서 읊조리는 빈 밥그릇의 리듬. 모든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충분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 여분의 벽, 빈방을 돌고 돌아도 만져지지 않는 벽들. 다시 돌아오는 중인 나는 기억하는 나와 일치하는가. 이제 당신은 나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인식, 충격적인 몰입감, 하나의 벽을 부정하자 모든 벽이 사라졌다. 두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짓은 창피한 인간만이 하는 변명이니까. 류이치 사카모토는 1952년생이다.

 

 

 

 

 

 

 

 

 

 

 


 

 

 

 아보카도 트랜지션

  

        

 

 

 

  건강에 좋다는 아보카도를 한 봉지 샀다

  멕시코가 원산지인 이것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많은 건강 과일이니,

  나는 어제보다 탄력성을 찾고 오늘보다 조금

  푸르러질 것이다

 

  이틀쯤 상온에 두면 말랑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몸도 마음도 말랑해질 것이다

  손으로 눌러 보니 아직 단단한 바깥

  ‘안녕?’이라고 말을 건네면

  몇 번쯤 마음의 형체를 바꿀까

 

  친구들과 네컷사진관에 갔다

  그중 너와 나는 오래된 커플이다

  서로의 포즈를 잘 아는, 포즈를 취하고

  쑥스러워 고개를 저어 버릴 거라는 것도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포즈가 자연스럽게 찍혔으면 좋겠다

 

  너는 아보카도를 좋아하고 나는 싫어한다

  나는 곱창을 좋아하지만 네가 싫어하기에

  곱창집에는 가지 않는다 이대로 저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 다른 맛집이 나올 테니까

  그 기대의 반은 맞고 대부분은 틀렸다

 

  일기장에는 너와 함께 간

  카페와 맛집의 메뉴가 기록되고

  일기의 마지막에는 그럴싸한 문장을 쓰고 싶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비슷한 문장이 반복된다

 

  너는 나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내 뒤통수에 총을 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말한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내가 말했다, 싸가지 없는 새끼

  다른 말인데 똑같은 문장으로 읽힌다

  손끝에는 어제의 온기가 흉터처럼 남아 있다

 

  오늘은 도래하지 않은 일기까지 쓸 것이다

  우리는 오래전 헤어졌고 집 천장에는 비가 새고

  빌라 계단참에는 누군가 버린 휴지조각이 그대로 있다

  일기장에 얼굴을 얹고 졸던 고양이가 일어나

  문밖에 향해 오래 울었다

 

  책상 위에는 헝클어진 수건이

  서랍 안에는 몇 달 전 영수증이 접힌 채

  빛을 바라지도 물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소리 없이 자라고 있다

 

  낮잠을 자면 일주일이 지나고

  밤잠을 자고 나면 한 계절이 지나도록

  영원을 꿈꾸던 호흡은 누가 가져갔을까

  불수의적 마음이 창틀에서 흩어진다

  그만큼의 빛을 잃고 독을 품는다

 

  비가 새는 집에는 입구가 없다

  대부분의 날들은 일기 속에만 살아 있다

  냉장고에서 썩고 있는 아보카도 몇 개를 버린다

  검고 허연 곰팡이가 나를 닮은 악담 같다

  한 번쯤 저버리기 좋은 날이다

 

 

 

 

 

 

 

 

 

 

박은정  l

2011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밤과 꿈의 뉘앙스』 『아사코의 거짓말』이 있음.

 

 

 

 

 

 

   


 시인론 / 최광임  


 

 

 

 

 

예외 상태의 일상화와 부유하는 주체의 잠재성

— 박은정의 신작시를 중심으로

        

 

 

 

   

  현대 사회에서 주체는 더 이상 단일하고 고정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의 거대한 격자망 속에서 개인은 수치화된 데이터나 기능적 기표로 해체되며, 존재의 고유성을 증명하던 ‘이름’은 끊임없이 타자에 의해 오독(誤讀)되거나 지워진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처럼 사회적·언어적 보호 체계로부터 누락되어 생물학적 생명(Zoe)만 남겨진 존재를 ‘호모 사케르’라 명명했다. 주권 권력이 법의 효력을 정지시킨 ‘예외 상태’를 일상화할 때, 주체는 고립된 방과 익명의 거리로 밀려나 이름 없는 비명을 견디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한다.

  박은정의 시의 지형도 위에서 떠도는 주체들도 더 이상 안온한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다. 근작시 「제4의 벽」은 예술과 실재 사이의 안전한 경계가 붕괴한 자리에서 타자의 죽음을 빈 밥그릇처럼 핥아야 하는 실존적 허기를 드러낸다. 「아보카도 트랜지션」은 말랑해지기를 꿈꾸던 관계가 냉장고 속에서 곰팡이 핀 ‘악담’으로 부패해가는 생활의 파국을 맞는다. 이어지는 신작 3편은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든 ‘숨 쉬는 법’을 발명하려는 주체의 변이를 보여준다. 이들은 익사하거나 사냥당하는 대신, 스스로 아가미를 틔우고 기차에 몸을 싣고 은둔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배제되었던 공간을 잠재성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신작 「아가미」와 「도피와 도착」, 「은둔 소설 클럽」은 제도나 권력 혹은 관계에서 배제된 자들이 파국을 유예하며 자신만의 호흡법을 찾아간다. 화자는 “누군가 잘못 호명한 이름이 지난밤의 나였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태어난 이후 가장 오래 숨을 참으며, 물속에서도 죽지 않는 새로운 기관인 ‘아가미’를 틔운다. 그것은 권력이 부여한 가짜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비정상적 존재로 변형시키면서까지 지켜내려 한다. 도피는 패배가 아니라 이동이며, 은둔은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연루다.

     

  사냥당하는 생명에서 변이하는 주체로  

   

  시 「아가미」의 공간은 존재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이다. “총을 가진 손들이 숲속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곳, “내가 사라지면 잠든 당신을 노리”는 위태로운 사냥터다. 이곳에서 주체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위협 속에 놓여 있으며, 타자에 의해 이름 붙여진 가짜 정체성으로만 간신히 부유한다. 화자에게는 “아무리 퍼덕여도 물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균형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우리”는 서로 간의 이해조차 부족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저편에 둔 “사랑했던 것들뿐”이다. 이 막막한 고립 속에서 화자가 선택한 생존의 기술은 도망이 아닌 ‘변이’다. 그는 박쥐의 날개와 고래의 지느러미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녔다는 ‘상동 기관’의 원리를 적용해 자신의 신체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기 시작한다.

  시적 화자는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벌거벗은 생명’의 초상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비극적 정의를 넘어서는 ‘부정의 잠재성’을 발휘한다. 잠재성이란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요된 호흡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동경하기를 멈추고 지느러미를 날개라 부르며 물속에서 유영하기로 한다. 자신을 사냥감으로 규정한 세계의 질서에 항의하기보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가 경계 밖으로 나감으로써 주체를 획득하는 방법을 취한다. 바로 “누군가 잘못 호명한 이름이 / 지난밤의 나였음을 깨달았을 때” “태어난 이후 가장 오래 숨을 참”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타자의 언어에 의해 오독된 자신을 죽이고 스스로 ‘비결정적 존재’가 되어서야 “무궁한 말”의 탄생을 고대할 수 있게 된다.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하”고 “수백 번의 울음을 웃음으로 가장하”며 생존법을 익힌다. 그 사이 누군가는 “땅을 파고 깊은 잠”으로 사냥당한다.

  박은정의 ‘아가미’는 배제된 생명이 극한의 예외적 상황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실존적 기관이다.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동시에, 기존의 비행(날개)과 유영(지느러미)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무너뜨리는 저항의 실체다. 아가미는 공기 중에서 질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심연의 어둠 속에서 발명한 가장 고독한 호흡기이자, 권력의 포획망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주체만의 ‘비밀한 언어’가 거처하는 통로가 된다.

  아가미는 “입을 열 때마다 흙탕물이 쏟아”지던 참혹함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장마가 오면 자주 손발 젖”는 상태다. 그러나 여기서 지느러미와 아가미는 더 이상 씻기지 않는 상처의 흔적이 아니다. 비극적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이시킨 ‘진화된 신체’다. 신체는 움직이는 것이다. “가만히 정지하는 / 너의 아가미”는 멈춤이 아니다. 파국적인 세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진실을 길어 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버티고 있는 ‘치열한 정지’ 상태의 역설이다.

  박은정의 화자는 닿을 수 없는 하늘(이상)을 갈구하기보다,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이 짙은 어둠 속에서 숨 쉬는 법을 고수한다. 아가미가 돋으면 태어날 것이라 믿는 “무궁한 말”은 권력의 이름 붙이기에 저항하는 주체의 마지막 영토다. 시인은 사냥당하는 생명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이와 은둔을 통해 주권적 질서가 결코 포획할 수 없는 ‘불가능한 비행’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선로 위의 유예된 시간과 가장 슬픈 유예  

   

  「아가미」가 물속이라는 심연을 향한 수직적 변이를 보여주었다면, 「도피와 도착」은 수평적 이동을 통해 주체의 위치를 교란한다. 기차, 플랫폼,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고정된 삶의 좌표를 해체하는 장치들이다. 기차라는 폐쇄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을 통해 주체가 처한 ‘예외 상태’를 공간적으로 확장한다. 시 속의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는 현대적 교통수단이 아니다. “막다른 곳을 회전하는 중”인 미로의 형상이다. 창밖으로 “반세기의 풍경이 린넨 이불처럼 펄럭”이고 “강철 기둥이 불타”며, “비스킷처럼 부스러지”는 풍경은 주체를 둘러싼 세계의 질서가 해체되고 있음을 시각화한다. 아감벤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기차는 주권적 통치 구역 안에서 법의 효력이 정지된 채 부유하는 ‘이동하는 수용소’ 혹은 ‘비결정적 영토’와 같다. 「아가미」에서 화자가 “누군가 잘못 호명한 이름이 / 지난밤의 나였음을 깨달았을 때” 가장 오래 숨을 참았다면, 「도피와 도착」에서는 그 숨 참기의 시간이 방향을 얻는다. 정지의 시간이 이동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예외 상태가 일상화된 세계에서, 가만히 있는 존재는 가장 쉽게 포획된다. 따라서 이 시의 도피는 피신이라기보다 ‘위치의 재배열’로 읽을 수 있다.

  이 잠재적 공간은 “서로의 팔에 새긴 타투를 쓰다듬는” 몸의 감각을 통해 생성된다.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소행성보다 아름다운 광물이 될거라”는 타투이스트의 예언을 통해 세계는 더 이상 절대적 중심이 아니게 된다. 중심은 상대화되고 주변은 잠재적 공간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차 안의 화자들은 “빈약한 낱말로 꾸민 연극 속에” 있다. “진짜 모국어로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가진 언어는 이미 “누구도 손대지 않아 상했”거나 “해묵은 오해들”로 오염되어 있다. 아감벤이 지적했듯, 로고스(이성적 언어)가 주체를 포획하고 모독할 때 남는 것은 의미가 소거된 비명과 침묵뿐이다. 그러나 박은정은 이 절망적인 언어의 파산 지점에서 육체의 다정함을 길어 올려 파산을 방어한다. 오직 ‘벌거벗은 자들의 연대’만이 힘이 되듯 “서로의 어깨에 기대라고 / 신은 사람의 머리를 작게 만든 거야”라고 깨달음으로써 거창한 구원이나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참 다정한 사람”일지 모르는 신의 안부를 놓고 파국을 유예시킨다.

  시인은 “비스킷처럼 부스러지는” 세상의 소란 속에서 “목덜미의 촉감을 닮은 마음들”이 망가지기 전에 태우고 부숴버리자고 말한다. 그것만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보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진짜 모국어로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주말 점심으로 먹던 구운 감자와 오믈렛”, “느리게 웃던 농담 같은” 것이 그립고 “창가에 두었던 루꼴라 화분”이 잘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가여운 피조물의 표정으로” 맹세하고 기다렸던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에서였다. 불행이 공중에서 분해된다면 “설명할 수 없이 조금 더 지체되는 너와 내가”, “천국으로 가는 대신”, “이곳에서 아름답게 춤”추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몇 달 전 네게 보낸 작별 편지”를 보낸 나나 “아직 읽지 않”은 너인 우리가 사랑한 것은 슬픔일지 모른다는 자각은 이 시가 도달한 가장 슬픈 유예의 미학이다. “회색빛 미열로 물든 소매를 접고 접”으며 도착지에 닿기 전까지 최대한 파국을 늦추겠다는 것 아닌가. 이 “도피와 도착 사이”에는 신이 두고 간 마지막 안부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적 자살과 노래라는 비결정적 잠재성  

  

  시 「은둔 소설 클럽」은 앞선 시들이 보여준 신체적 변이와 공간적 유동성을 ‘기록’과 ‘서사’의 차원으로 심화하며, 사회적 말살과 개인적 실존 사이의 격렬한 길항을 그려낸다. 이 시의 무대는 국가적 효율과 질서라는 명목하에 부적격자로 판명된 생명들이 각자의 처소로 격리된 거대한 폐쇄 회로다. “멍청한 어머니”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붉은 실로 끊어진 인연을 이으려고” 밤마다 기도를 반복하지만, 세상은 무감하고 변화는 오지 않는다. 권력이 생명의 가치를 규격화하고 재단할 때 그 생명을 담아내야 할 언어 역시 박제될 수밖에 없다. 은둔자들이 매일 한 페이지씩 소설을 쓰며 자신을 증명하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그들의 서사에서는 “감정어부터 삭제되었다.” 이는 주권적 힘이 인간의 내밀한 영토를 어떻게 탈취하고 황폐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로고스(언어)가 존재를 구원하는 통로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감금하고 관리하는 ‘언어적 수용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고립된 공간에서 주체들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쓰기에 매달리지만, 그 서사는 권력의 포획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동질화된다. 진정한 연대 없이 각자의 은신처에서 “자신과 똑같은 루틴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외롭지 않았다.”라는 서글픈 공모만 있을 뿐이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 서로의 원고를 펼쳤을 때 마주한 경악스러운 진실은 “모두들 똑같은 문장만을 쓰고 있었다”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이 똑같이 도달한 문장, “모든 문장은 나를 모독하였으므로, 나는 오래전 나를 죽였다”라는 자살 선언은 언어에 의해 소외된 자들이 마주한 최종적인 파산 보고서다. 언어가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주체를 “모독”하는 흉기가 될 때, 인간은 언어적 죽음을 통해 스스로를 지워나가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없는 것인가. 박은정은 그것은 소설이라는 정교한 문법이나 체계가 아니라, 신체에서 터져 나오는 순수한 소리로서의 ‘목소리(Phōnē)’를 통해 자살 파국을 막는다. “인간을 사랑하도록 유전된 존에겐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로고스와 구분되는, 신체적 생명 그 자체의 비논리적 분출인 ‘목소리’의 잠재성에 주목한 아감벤처럼 그는 결국 “세상의 사랑을 제 노래로 사랑”하게 함으로써 파산의 국면을 타개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수용 시설에 모이게 된 은둔자들이 낡은 피아노 앞에서 마주한 것은 박제된 문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눈물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도리 없이 슬픈 마음에 엎드려” 운 존의 행위는 어떤 기표로도 환원되지 않는 생생한 실존의 증거다. 이 통제되지 않는 노래와 울음이야말로 언어의 감옥을 뚫고 나오는 비결정적 잠재성의 실체다. 

  결국 “은둔 소설 클럽은 진짜 삶을 이해하면서 소설의 첫 페이지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주권적 서사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자 ‘살아있는 서사’의 탄생이다. 과거의 소설이 고립된 방에서 쓰인 죽음의 기록이었다면, 수정된 첫 페이지는 박제된 문장을 찢고 터져 나온 노래와 눈물 위에서 시작된다. 은둔은 더 이상 단순한 사회적 격리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가 도저히 포획할 수 없는 곳에서 자기만의 리듬을 발명하는 잠재성의 시간이 된다. 박은정은 소설이 실패한 자리에서 음악이 시작되듯, 로고스가 파산한 자리에서 인간의 존엄이 다시 시작됨을 역설한다. 아가미 생존법을 익히고 사랑을 유예하며 눈물의 목소리를 찾은 주체들은 이제 권력이 호명한 가짜 이름이 아닌 스스로 발명한 목소리로 “무궁한 말”의 첫 줄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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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임  l 

2002년 《시문학》 등단.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도요새 요리』, 디카시 해설집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 『풍경에서 피어난 말들』이 있음. 〈대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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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호(VOL.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