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이달의시인_김광규.png

 

 

  [이달의 시인] 김광규

  신작시: 실낙원  / 눈 치우기 / 묵언(黙言)

  자선시: 그 손 / 청 단풍 한 그루

  [시인론] 오형엽 “침묵과 묵언의 가쁜 숨소리”

 

 

 

 

 

 


 신작시 


 

 

 

 실낙원

 

 

 

 

 

  지구는 아름다운 녹색별

  하늘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 만년설 쌓여 있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

  향기로운 풀과 싱그러운 나뭇잎들

  짙푸른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은빛 고기 떼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거리에는

  파인 다이닝과 무한 리필

  배달 음식과 일회용 도시락까지

  풍성한 식탁과 향기로운 술

  불꽃놀이 찬란한 빛

 

  그러나 보아라

  깊은 바다에 버린 폐어구와 플라스틱 쓰레기에 걸려

  2백 년 산다는 거북이도 짧은 삶 마감하고

  어미 돌고래는 죽은 새끼 등에 업고 바닷가를 떠돌고

  새들은 떼 지어 하늘에서 추락한다

 

  세계의 지배자들은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고

  자본주는 공장과 빌딩 짓는 데 골몰하고

  의류업자는 과잉 생산한 옷가지를

  먼바다에 버리려고 트럭에 실어 나른다

 

  혹시 저 멀리 은하계에 누군가 있다면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이 될

  생명의 가쁜 숨소리에 귀 기울여다오

 

 

 

 

 

 

 

 

 

 

 



 

 

 눈 치우기

     

 

 

 

 

  밤새 내린 습설이 쌓여

  뒷동산 오래된 소나무 가지 뚝뚝 부러지고

  전깃줄에도 하얗게 상고대 끼었다

  강원도에서는 53중 추돌사고

  땀 흘려 일군 농가의 축사와 비닐하우스 무너지고

  블랙아이스 때문에 곳곳에서 교통 정체

  까치와 비둘기들 내려앉을 곳 없어

  날아오지 않는다

  삭막한 도시의 풍경을 하얗게 덧칠한

  은세계 바라보며

  돌계단 눈 치울 걱정

 

 

 

 

 

 

 

 

 

   

 



 

 

 묵언(黙言)

 

 

 

 

 

  바람 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

  귀 기울여 듣고

  사람이 만들어낸 소리도

  기억 속에 간직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 많은 목소리 담겨 있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것 또한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묵언도 그 가운데 하나

 

  

 

 

 

 

 

 

 

 

 


 자선시 


 

 

 

 그 손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청 단풍 한 그루

  

        

 

 

 

  물 한번 주지 않았다

  타이어 고무줄로 뿌리를 칭칭

  동여맨 채 바싹 말라버린

  어린 나무 한 그루

  신축건물 외벽과 시멘트 블록 담 사이

  마른 땅에 되는대로 꽂아 놓고

  준공검사 끝나자마자

  시공업자는 서둘러 철수했다

  그리고 긴 가뭄

  비 한번 오지 않았다

  봄이 되어도 꽃 필 줄 몰라

  죽은 줄 알았다

  목숨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이

  4월이 가고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쌀알처럼 작은 꽃과 연녹색 잎

  한꺼번에 돋아났다

  강인하구나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광야의 꿈 키우며

  제 몫의 삶 지켜가는

  청 단풍 한 그루

 

 

 

 

 

 

 

 

 

 

김광규  l

1975년 《문학과지성》 등단.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크낙산의 마음』 『시간의 부드러운 손』 『그저께 보낸 메일』 등,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안개의 나라』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프리드리히군돌프상〉(독일 언어문학예술원) 등 수상. 현재 한양대 독문과 명예교수.

 

 

 

 

 

 

   


 시인론 / 오형엽 


  

 

 

 

 

침묵과 묵언의 가쁜 숨소리

― 김광규의 최근 시

 

        

 

 

 

 김광규는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시력(詩歷) 50년 동안에『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에서 『그저께 보낸 메일』(2023)에 이르는 열두 권의 시집을 상재하며 총 9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시선집으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95), 『누군가를 위하여』(2001) ,『안개의 나라』(2018) 등을 출간했다.1) 그는 등단한 1970년대 중반부터 범속한 일상에서 시적 각성을 포착하는 독특한 개성을 통해 새로운 시적 영역을 개척하는 시인으로 주목받아 왔다.

 필자는 김광규 시 세계의 특성을 조명하기 위해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 주체가 추구하는 ‘시적 지향성’ 등을 중심으로 김광규 전기 시와 후기 시의 변별성 및 연속성을 살핀 바 있다. 김광규 전기 시의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가 ‘과거와 현재의 대비’라면 후기 시의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는 ‘과거․현재․미래의 중첩’이고, 전기 시의 지향성이 시원적 원형으로서 ‘소리’·‘물’ 상징이라면, 후기 시의 지향성은 ‘침묵’·‘풍경’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김광규 시의 전개 과정에서 전기 시로부터 후기 시로의 변모 양상을 관점별로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의 관점이 ‘과거와 현재의 대비’라는 ‘이원적 대립 구조’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중첩’이라는 ‘삼원적 혼융 구조’로 이동한다는 점, 시적 지향성이 ‘소리’·‘물’ 상징을 유지하면서 ‘침묵’·‘풍경’ 상징까지 포함한다는 점, 시적 주제가 ‘시간과의 대결’을 견지하면서 ‘시간과의 화해’까지 포함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물’ 상징은 ‘시원적 원형’의 위상을 가지면서 전기 시의 ‘소리’에 대한 지향성과 긴밀히 결부되는 동시에, ‘연속성의 추구’라는 위상을 가지면서 후기 시의 ‘풍경’에 대한 지향성과도 긴밀히 결부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매개 역할을 담당한다. 김광규는 50년의 시작(詩作)을 통해 ‘변하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소리 및 풍경의 추구’라는 큰 틀의 시적 원리 및 지향성을 견지하면서 ‘시간과의 대결과 화해’라는 주제를 ‘침묵의 소리’와 ‘물의 풍경’을 통해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2)

 김광규의 최근 시는 앞에서 정리한 중기 시의 전체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특히 환경 파괴 문제를 중점적 주제로 채택하며 생태 시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구는 아름다운 녹색별

하늘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 만년설 쌓여 있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

향기로운 풀과 싱그러운 나뭇잎들

짙푸른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은빛 고기 떼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거리에는

파인 다이닝과 무한 리필

배달 음식과 일회용 도시락까지

풍성한 식탁과 향기로운 술

불꽃놀이 찬란한 빛

 

그러나 보아라

깊은 바다에 버린 폐어구와 플라스틱 쓰레기에 걸려

2백 년 산다는 거북이도 짧은 삶 마감하고

어미 돌고래는 죽은 새끼 등에 업고 바닷가를 떠돌고

새들은 떼 지어 하늘에서 추락한다

 

세계의 지배자들은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고

자본주는 공장과 빌딩 짓는 데 골몰하고

의류업자는 과잉 생산한 옷가지를

먼바다에 버리려고 트럭에 실어 나른다

 

혹시 저 멀리 은하계에 누군가 있다면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이 될

생명의 가쁜 숨소리에 귀 기울여다오

- 「실낙원」전문

 

 이 시는 전반부(1연: 과거), 중반부(2~4연: 현재), 후반부(5연: 미래)로 구성되는데, 중반부를 좀 더 세분하면 A(1연), B(2연)-B´(3연)-B˝(4연), C(5연)로 재구성할 수 있다. 시상 전개에 따르는 의미 맥락은 ‘녹색별 지구의 아름다움’(A), ‘도시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외관’(B)-‘오염된 바다에서 죽어가는 생명체’(B´)-‘정치인․자본가․기업인의 환경 파괴’(B˝), ‘외계에 구원 요청’(C)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A(1연)에서 화자는 “지구”가 “아름다운 녹색별”이었음을 “산봉우리”의 “만년설”, “골짜기”의 “맑은 물” “소리”, “향기로운 풀”과 “싱그러운 나뭇잎들”, “짙푸른 바닷속”의 “은빛 고기 떼” 등의 구체적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역설한다. 인간의 생활 터전인 “지구”의 가치는 주로 “산”, “골짜기”, ‘바다’ 등 자연환경의 영역에서 발견되고, 그 구성 요소인 “만년설”, “물” “소리”, “풀”과 “나뭇잎들”, “고기 떼” 등 자연 현상 및 동식물의 생명체를 중심으로 확인된다. 화자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녹색”, “만년설”, “짙푸른”, “은빛” 등의 색채적 이미지를 구사하고 “맑은”, “향기로운”, “싱그러운” 등의 촉각적․후각적 이미지를 구사하며 “물 흐르는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구사한다. 전반부인 A(1연)는 제목 「실낙원」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창세기 서사를 전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순수 자연의 원형적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중반부 B(2연)-B´(3연)은 자연의 원형 혹은 순결한 모습과 대조되는 환경 파괴의 실상을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의 외관’-‘폐허로 가득 찬 깊은 바다’라는 극적 대비를 통해 드러낸다. B(2연)에서 화자가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거리”에서 발견하는 “파인 다이닝”, “무한 리필”, “배달 음식”, “일회용 도시락” 등은 “풍성한 식탁”, “향기로운 술”, “불꽃놀이 찬란한 빛” 등으로 도시적 삶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면모를 드러내지만, 내적으로는 B´(3연)에서 “깊은 바다에 버린 폐어구와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깊은 바다”의 환경 파괴로 인해 “2백 년 산다는 거북이도 짧은 삶 마감하고 / 어미 돌고래는 죽은 새끼 등에 업고 바닷가를 떠돌고 / 새들은 떼 지어 하늘에서 추락”하는 생명체의 죽음․파멸․불행이 빚어진다. 중반부 B˝(4연)는 B(2연)와 B´(3연)의 극적 대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의 외관’과 ‘폐허의 바다 속 실상’을 낳는 더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원인을 적시한다. 그것은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는 “세계의 지배자들”, “공장과 빌딩 짓는 데 골몰하”는 “자본주”, “과잉 생산한 옷가지를 / 먼바다에 버리려고 트럭에 실어 나”르는 “의류업자” 등이다. 화자가 지목하는 정치인, 자본가, 기업인 등은 B(2연)-B´(3연)에서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의 외관’-‘폐허의 바다 속 실상’ 간의 극적 대비를 생겨나게 하는 장본인들이다.

 인용한 시의 전체적 구성은 크게 볼 때 전반부(1연)와 중반부(2~4연)의 대비가 근간을 이루는데, 중반부를 다시 ‘화려한 도시 외관’(B)-‘폐허의 바다 속 실상’(B´)-‘환경 파괴의 원흉들’(B˝)로 세분함으로써 평범하고 단순한 구도에서 벗어나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구도를 가지고 시적 사유와 주제 의식을 형상화한다. 전반부 A(1연: 과거)가 중반부(2~4연: 현재)와 대비되는 기본 구도 속에서 ‘외관’(B)-‘실상’(B´)-‘원인’(B˝)이라는 세부 구도가 내재함으로써 A(1연: 원형)가 B(2연: 화려한 외관)와 대비되는 동시에 B´(3연: 폐허의 실상)와도 대비되고 B˝(4연: 파괴의 원흉들)와도 대비되는 복합적 구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후반부(5연: 미래)인 C로 인해 이 시는 좀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구도를 가지고 시적 사유와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게 된다. 화자는 “혹시 저 멀리 은하계에 누군가 있다면”이라는 구절에서 미지의 외계 존재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미래적 염원으로 표현한다. 이어서 화자는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이 될 / 생명의 가쁜 숨소리”라는 구절을 통해 지구의 몰락과 종말이 임박했다는 묵시록적 예감을 표현하고, “귀 기울여다오”에서 벼랑 끝에 몰린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외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소망을 호소한다. 필자는 후반부인 C의 표현들 중에서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이 될 / 생명의 가쁜 숨소리”에서 묘한 ‘풍크툼’을 느낀다.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풍크툼(punctum)’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다. 바르트는 사진의 이미지 중에서 관객의 무의식을 찌르며 상처를 입히는 이미지를 주목하고, 이 우연하고 돌발적인 이미지가 바로 그 작품 세계의 숨은 비밀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3)

 필자가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이 될 / 생명의 가쁜 숨소리”에서 묘한 ‘풍크툼’을 느낀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표현에서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지구의 몰락과 종말로 인해 위기에 처한 ‘인류’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자연의 생명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전반부(1연: 과거)에서 ‘녹색별 지구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그 사례로 “향기로운 풀”, “싱그러운 나뭇잎들”, “은빛 고기 떼” 등을 든 점이나, 중반부의 B´(3연: 현재)에서 “깊은 바다”의 환경 파괴로 인해 죽음․파멸․불행이 빚어지는 사례로 “거북이”, “어미 돌고래”, “죽은 새끼”, “새들” 등을 든 점에서,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을 ‘인류’가 아니라 ‘자연의 생명체’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김광규의 시적 인식이 인간 중심적 사유를 넘어서 포스트-휴먼(비-인간)적 사유에 근접했다고 생각한다. 김광규의 최근 시는 환경 파괴의 문제를 둘러싼 생태 시학에 집중하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경유하여 포스트-휴먼(비-인간)적 사유의 일환으로서 지구의 “마지막 주인”을 ‘인류’가 아니라 ‘자연의 생명체’로 간주하는 데 이른 것이다

 둘째, 이 표현에서 “가쁜 숨소리”는 일차적으로 임박한 지구의 몰락과 종말로 인해 죽음에 처한 ‘자연의 생명체’의 신음 소리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외계에 구원을 요청하는 절박한 호소가 ‘인간적 목소리나 음성’도 아니고 ‘자연의 생명체’만도 아니라 ‘비-생명체’를 포함하는 ‘자연’의 ‘침묵’ 속에서 스며 나오는 ‘숨결’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A(1연), B(2연)-B´(3연)-B˝(4연), C(5연)로 진행되는 작품의 시상 전개에서 청각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부분은 단 2곳으로 전반부 A(1연: 과거)의 “골짜기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와 후반부 C(5연: 미래)의 “가쁜 숨소리”이다. 이외의 부분에서는 색채적·시각적·촉각적·후각적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혼재되면서 등장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정리했듯, 필자는 김광규 초기 시의 지향성이 시원적 원형으로서 ‘소리’․‘물’ 상징이고, 중기 시의 지향성은 ‘침묵’·‘풍경’ 상징이라고 간주한 바 있다. 인용한 시에서 전반부 A(1연: 과거)의 “골짜기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와 후반부 C(5연: 미래)의 ‘침묵’ 속에서 스며나오는 “가쁜 숨소리”가 은밀히 접속한다고 보는 필자의 해석은 이러한 평가의 연장선에서 근거가 뒷받침될 수 있다.

 “이 땅의 마지막 주인이 될 / 생명의 가쁜 숨소리”를 ‘인간적 목소리나 음성’도 아니고 ‘자연의 생명체’만도 아니라 ‘비-생명체’를 포함하는 ‘자연’의 ‘침묵’ 속에서 스며 나오는 ‘숨결’로 해석하는 관점은 최근 시 「묵언(默言)」의 분석을 경유해야 그 구체적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

귀 기울여 듣고

사람이 만들어낸 소리도

기억 속에 간직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 많은 목소리 담겨 있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것 또한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묵언도 그 가운데 하나

- 「묵언(默言)」전문

 

 이 작품은 김광규 최근 시의 구조화 원리와 미학적 특이성을 농축하는 메타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의 구조는 기(1~4행: 과거), 승(5~6행: 과거), 전(7~10행: 현재), 결(11~12행: 미래)로 구성된다. 시상 전개에 따르는 의미 맥락은 ‘자연 소리를 경청하고 사람 소리를 기억함’(기), ‘침묵 시간이 길어짐’(승), ‘목소리 닫음과 침묵도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임’(전), ‘들을 수 없는 묵언도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임’(결)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1~4행: 과거)의 “바람 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 / 귀 기울여 듣고 / 사람이 만들어낸 소리도 / 기억 속에 간직했다”라는 문장은 ‘자연 소리를 경청하고 사람 소리를 기억함’이라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승(5~6행: 과거)의 “아무 말 하지 않고 / 가만히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라는 문장은 ‘침묵 시간이 길어짐’이라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기(1~4행: 과거)의 ‘자연 소리 경청’, ‘사람 소리 기억’과 승(5~6행: 과거)의 ‘침묵의 시간’은 표면적으로 ‘소리’와 ‘침묵’의 대비를 보여주지만, 이때의 ‘침묵’은 ‘소리 없음’이라는 의미로서 일반적․통상적 차원에서 ‘소리’의 반대어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부분을 공통적으로 시적 주체가 추구했던 과거의 ‘소리(침묵)’ 유형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즉 ‘자연 소리 경청’과 ‘사람 소리 기억’뿐만 아니라 ‘침묵의 시간’까지도 화자가 과거에 지향했던 가치라는 것이다. 이 차원들은 모두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경험하는 ‘자연 소리’, ‘사람 소리’, ‘침묵’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전(7~10행: 현재)의 “그 많은 목소리 담겨 있는 / 입 다물고 / 침묵하는 것 또한 /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라는 문장은 ‘목소리 닫음과 침묵도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임’이라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중요한 강조점은 ‘목소리 닫음’도 ‘침묵’도 아니고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에 주어진다. 표면적으로 “목소리 닫”음, “침묵”,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 등 세 가지는 등가적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에 강조점이 주어질 때 “침묵”은 포스트-휴먼(비-인간)적 사유에 근거해서 생겨난 것이므로 승(5~6행: 과거)의 ‘침묵’과는 다른 차원에 도달하여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따라서 필자는 이 부분을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현재의 ‘소리(침묵)’ 유형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결(11~12행: 미래)의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 묵언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문장은 ‘들을 수 없는 묵언도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임’이라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제목이기도 한 「묵언(默言)」은 ‘말없이 침묵한다’는 뜻이지만 말을 하지 않는 행위보다는 마음을 정화하고 내면을 성찰하며 분별심을 줄이는 데 집중하는 수행법을 의미한다. 주로 자신의 내면 소리에 집중하고 타인에 대한 경청과 자비심을 기르기 위해 실천하는 수행이다. 따라서 필자는 화자가 이 부분으로 전(7~10행: 현재)에서 제시한 포스트-휴먼(비-인간)적 사유의 “침묵”을 토대로 그것을 “묵언”이 내포하는 내면 소리에 대한 집중, 타인에 대한 경청과 자비심 등의 지평으로 확대하려는 미래적 결의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필자는 이 부분을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미래의 ‘소리(침묵)’ 유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필자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인용한 「실낙원」을 중심으로 판단할 때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시적 지향성의 측면에서 김광규의 최근 시가 초기 시와 중기 시를 중첩하면서 종합하는 차원에서 후기 시 세계를 열고 있다는 과감한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 「실낙원」을 분석하면서 도출한 시의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시적 지향성을 김광규 초기 시와 중기 시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의 측면에서 김광규 초기 시가 ‘과거와 현재의 대비’이고 중기 시가 ‘과거·현재·미래의 중첩’이라면, 「실낙원」은 ‘과거와 현재의 대비’에 ‘미래적 구원 요청’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초기 시와 중기 시를 중첩하면서 종합했다고 볼 수 있다. 시적 지향성의 측면에서 김광규 초기 시가 시원적 원형으로서 ‘소리’·‘물’ 상징이고 중기 시가 ‘침묵’·‘풍경’ 상징이라면, 「실낙원」은 “맑은 물 흐르는 소리”와 ‘침묵’ 속에서 스며 나오는 “가쁜 숨소리”를 접속한다는 점에서 초기 시와 중기 시를 중첩하면서 종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제시하는 가설을 토대로 구조화 원리로서 시간 구조․시적 지향성의 측면을 주제 의식의 측면과 연동해서 김광규 시의 전개 과정을 초기 시, 중기 시, 후기 시로 구분하여 그 변별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광규 초기 시의 시간 구조 및 주제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는 ‘이원적 대립의 시간 구조’를 토대로 자연과 문명, 청춘과 중년, 소외된 이웃과 권력․금력을 추구하는 자 등의 대립 관계를 설정하고, 현실 비판과 자기 성찰을 동시에 시도하면서 시원적 원형을 지향한다. 중기 시의 시간 구조 및 주제 의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공존·혼재·병치’하면서 중첩하는 ‘삼원적 혼융의 시간 구조’ 속에서 현실 비판과 자기 성찰을 견지하면서 자기 긍정, 운명애, 세계와의 화해 등을 함께 추구한다. 후기 시의 시간 구조 및 주제 의식은 ‘과거와 현재의 대비’에 ‘미래적 구원 요청’을 결합하는 ‘단계적 전환의 시간’ 구조 속에서 현실 비판과 자기 성찰을 견지하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와 환멸, 외계에 구원 호소, 포스트-휴먼(비-인간)적 침묵과 묵언으로서 가쁜 숨소리 등을 제시한다.

 

 

                             

1) 김광규의 시집은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아니다 그렇지 않다』(문학과지성사, 1983), 『크낙산의 마음』(문학과지성사, 1986), 『좀팽이처럼』(문학과지성사, 1988), 『아니리』(문학과지성사, 1990), 『물길』(문학과지성사, 1994),『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문학과지성사, 1998), 『처음 만나던 때』(문학과지성사, 2003), 『시간의 부드러운 손』(문학과지성사, 2007), 『하루 또 하루』(문학과지성사, 2011), 『오른손이 아픈 날』(문학과지성사, 2016), 『그저께 보낸 메일』(문학과지성사, 2023)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민음사, 1995), 『누군가를 위하여』(문학과지성사, 2001),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 2018) 등이 있다.

2) 졸고, 「시간, 소리, 풍경- 김광규 시의 구조화 원리와 지향성」, 『알레고리와 숭고』, 문학과지성사, 2021, 463~480쪽.

3)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역, 동문선, 2006 참고.

 

 

 

 

 

 

 

 

 

 

 

이달의시인_시인론_오형엽.jpg

오형엽  l 

1994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1996년 《서울신문》 평론 당선. 비평집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2026년 1월호(VOL.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