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유계영.png](/files/attach/images/2025/11/01/92b5f5d074e005eafd9c562448b112f0.png)
[이달의 시인] 유계영
신작시: 자연사박물관에 없는 자연 / 섭섭해요 / 둥둥……
자선시: 늘어놓기,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늘어놓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늘어놓기…… / 요가원에서
[시인론] 박혜진 “야생 시”
신작시
자연사박물관에 없는 자연
산책 시 야생종이를 만나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난다
친구야, 나의 침실에 없는 것이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다
의자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줄 요약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침대와 테이블과 서랍장 성미 급한 내가 사 모은 것들이지
길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 같은 걸 주워 먹고 살아도
비참을 모를 각오
곰팡이처럼 뜯겨나갈 각오
그러나 이 거리는 깨끗해서 주워 피울 꽁초 하나 없다
다른 꽃들이 향기를 섞지 않는 것은 매년 새로 심기 때문이야
집만 많은 베드타운에도 집 없는 사람이 나무 벤치 위에 웅크려 잔다
땡볕에 두꺼운 패딩을 벗지 않는 그 사람이 겨울의 혹독을 조심시키지
친구야, 내가 잠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옹이 속에 있다
활발하기를 좋아하는 지네들은 문밖에만 있다
악몽에 깊이 찔렸을 때
이 느낌을 단단히 붙잡고 매달려 있을 수 있다면 다른 차원으로 깨어날 수 있지
포크에 찔려 내 입속으로 들어온 살코기처럼
악몽이 부스러기가 되기 전에 개미가 개미 세상을 만들려 뚫어놓은 작은 구멍
눈이 어두운 내가 크래커의 구멍을 이용해 멀리 볼 수도 있지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죽은 개와 산책하는 사람은 알지
십 년 전에 죽은 개의 눈곱을 십 년 동안 떼어준 그는
나무의 전체를 바라보려면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허공의 새가 떨어뜨린 작은 그림자를 주워 돌려주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작은 새의 피부 밑엔 얼룩이 남을 텐데
빈 곳이 드러난다는 것은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 것일 텐데
산책 시 야생종이를 만나면 천천히 등을 보여준다
마주 보게 된다면 마음대로 접혀 새가 되거나 거북이가 되거나
그러다 두 발로 꼿꼿이 일어서는 걸 보겠지
큰일이 닥친 것도 아닌데 너는 새파랗게 질려 주저앉는구나
저기 너 대신 야생종이 걸어간다, 친구야
지도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이 대부분이다
깊은 잠에 들면 나의 몸이 펼쳐지는 이유를 알겠지
안전한 나의 침대 위에 내가 없다
섭섭해요
아버지 귓불이 두둑하고 풍만하였다면
부족함 모르고 자랐을 텐데요
얇고 축 늘어진 부처님 귀예요
내가 매일 조물거렸어요 수제비 떼듯
잡아당겼어요 너머가 비칠 때까지
얇게 떴어요
눈코입 어디서 얻어올까요 사물의 고향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겨갔대요
내가 태어난 곳 옛 이름은 미추홀이고요
넘어진 자리에 돌부리
웃는 얼굴 같아요
어떤 사람은 육십갑자 넘도록
뒤통수도 닦아야 한다는 걸 모를 수 있대요
배꼽이나 귓바퀴
닦는 법을 아들에게 배우기도 한대요
소용돌이 속에
손가락을 비집으면
땅속에는 아직도 발견을 기다리는
보물들이 있단다
엉겅퀴 칡덩굴 민들레
할머니 말씀이에요
쓰레기 매립지 언덕을 오르는
현재의 아이처럼
깨끗한 마음이에요
오래전의 할머니들이
잠든 나의 머리맡에 세워둔 토템
낮에는 앞장서서 걷는데요 그림자처럼
나의 어디가 구멍인지를
슬쩍 보여주어요
입가를 핥다가 혀끝에 달라붙은 가루를
별생각 없이 삼킨 적 있지만
거울을 보다가 놀라기는 해요
가루의 가루들 떨어져
뺨뼈 위에 내려앉은 것을 봐요
뼈가 바깥에 있다면
머리는 열매
심장은 전갈이겠죠 하지만
두 뺨이 얼고 있어도
심장은 불타는 꽃나무래요
둥둥……
성묫길에 따라나선 어린이로서
다리를 떨었어
친척들이 웃었지 쟤 봐 저 잔망 좀 봐
나는 힘입어
박수 소리 사이 손뼉
사이 손뼉
이마도 한 번씩 쓸어주면서
더 빠르게 다리를 떨었어
돌탑에선 번개 같은 기도가
가장 작은 돌에 실려
까치발로 서 있어
나는 내가 없는 곳을 향해
팔 뻗을 수 있고
내가 있는 곳으로 불현듯
팔은 돌아오기도 하는데
홍옥의 촉촉한 엔젤링을 딛고 서서
앞다리를 치켜드는 사마귀를 봤어
작은 물방울 머리에 얹고 일어서는 잔디
실로폰처럼 떨리면서
굽고 찌고 무치고 삶고 데치고 버무린
채소 반찬을 들고
깊이 더 깊이
들어간 곳이었는데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걸을 때
어디로들 가나요? 묻지 않고
도착할 수 있나요? 묻는 버릇은
그때부터였겠지
고두배(叩頭拜)의 싱그러운 등덜미
모르는 사람들의 무덤
앞에서 개다리춤을 춘 것뿐인데
이슬들 떨리고 있겠지
도착한 빛을 잘게 튕겨내면서
흩어버리면 흩어지는 것인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먼 데서 다리를 떨며 오고 있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 일이지
자선시
늘어놓기,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늘어놓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늘어놓기……
길이 그렇게 해
비비추를 본 적 없어서 끝없이 비비추 그리는 일
비비추와 기억 없어서 끝없이 비비추 흔적 남기는 일
같은 식의 반복이지
매일 저녁 편의점 앞으로 짱구가 지나간다
(길은 어째서 그를 짱구라고 부를까
머리가 짱돌처럼 크기 때문일까)
발효취를 풍기며 떡진 머리를 긁적이며 오면
안녕,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은 잘 지내길……
나는 중얼거려
죽은 친구에게 목소리 편지를 띄우듯이
가슴 가죽을 땅에 질질 끄는 닥스훈트와 함께
짱구가 오는 거야
오소리를 본 적 없어서 끝없이 길어지는 오소리 사냥개의 길이
오소리와 기억 없어서 끝없이 멀어지는 오소리 사냥개의 코를 끌고
술 한 병 들고 가는 거야
한 손에는 막걸리 한 손에는 오양맛살 들고
윤기 흐르는 닥스훈트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거지
햇빛, 구름, 미래, 슬픔 같은 목록으론 그를 증언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쓰기 쟁점인데
이상해, 자꾸 음악이 발생하는 거야
플라타너스가 옆구리로 툭툭
폭소하는 거야
길이 사랑하는 학생들 중에
주정뱅이 있고
고아 노인 있고
겁먹은 선생 있고
쿠왁 툿 칵 툿 폭력배 있는데
탐미의 시기에는 탐미에 빠지고 싶어
비미의 시기에는 비미에 놀라고 싶어
멜로디처럼
길이 그렇게 하는 거야
기보법을 배우지 않아도 우는 법을 아는 식이지
먼지를 세는 개별 단위가 없어서
먼지는 처음부터 입술 위에 앉는 식이지
나비 고치의 내부에는
애벌레의 기억 쥬스가 고여있다는데
길은 언제나 조금 젖어있을 뿐
매일 저녁 편의점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막걸리를 사가지고 돌아가는 사람이
한동안 오지 않는 것을
길은 염려하지 않는 법이지
안녕, 친구여,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은……
음
음
음
요가원에서
미간과 콧등에 모인 생각이 많아서죠 앞으로 고꾸라질 듯 걷는 이유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도 그렇죠?
두루마리 문서처럼 안쪽에 쥔
말을 놓아주기 위해
투쟁 중이죠?
그러니까 놓아준다는 것, 말입니다
나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죽은 채로 태어난 송아지의 붉은 핏기가 검게 마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처럼 말입니다
침대 위로 쓰러지기 전에
삽날을 세우고 발로 콱콱 밟는 이미지가 먼저 옵니다
어둑한 구덩이 안쪽에 흰 발가락이 하나씩 착륙하는 이미지는 그다음
한 끼 식사 앞에서는
동물을 돌로 내리쳐 따뜻한 숨을 거두어 가는 손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미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기다리기
굶주림에 무릎이 꺾일 때까지
암퇘지의 앞다리를 수탉의 창자 안으로 말아쥘 수 있을 때까지
이미지의 실패 아닌 나의 실패와 눈 맞추며
뿌리는 단단히 박혀 있고 나뭇가지는 멀리 간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지만
나의 신체는 도무지 나무라고 할 수 없는데요
물관 없고 옹이 없고 이끼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니는데요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성하다고
선생님, 제가 안쪽으로 말린 어깨를 펴려면 창문을 열어주셔야죠
책을 눈앞에 펼쳐 쥐는 것 대신 바닥에 활짝 엎어놓은 뒤 기다리면
아, 기러기가 창밖으로 날아갑니다 죽은 송아지의 아직 남아있는 온기가
태양을 경배하기 위해 돌아갑니다
어젯밤 파놓은 구덩이에서 개미 한 마리 기어나와 미간과 콧등 위로 올라섭니다
고요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에요
유계영 l
2010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 『무궁무궁』이 있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시결작품상〉 수상.
시인론 / 박혜진
야생 시
1. 시인의 괴로움
시인 김수영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언젠가 둘째 아들과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문인의 가족에게 제일 궁금한 것이야 뭐 뻔하다. 가족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 독창성 없는 나는 무턱대고 물었다. 김수영은 어떤 아버지였냐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시인이 작고한 지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아버지와의 기억이라 해 봐야 까마득히 어린 시절의 편린이 대부분일 텐데도 그가 들려주는 얘기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둘째 아들에게 김수영은 대체로 따뜻했던 아버지로 기억됐다.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도 마당에서 함께 캐치볼 하던 순간이라고. 물론 그런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더니 아버지가 머리를 빡빡 민 채 집으로 들어오더란다. 무언가에 단단히 신경질이 난 모습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그에게서 내가 읽은 것은 다정함과 기이함이 공존하는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곤란함’이었다.
언젠가 또 한번은 EBS 다큐드라마 「명동백작」을 보다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명동의 한 바(bar)에서 동료 작가들과 함께 시와 철학을 논하던 시인 김수영이 그 바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문을 열자 화면은 일순긴 다른 차원으로 채워졌다. 바깥은 한국 전쟁 이후 폐허의 밑바닥. 그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라 전근대와 근대를 가로막는 벽이거나 적어도 미로였던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의 괴로움일 것이다. 김수영에 대해서라면, 요즘 들어 나는 그를 조금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괴로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일생 전통과 현대, 전근대와 근대의 부조화 안에서 시대를 못 견뎌하듯 스스로를 어쩔 줄 몰라 했다. 부조화야말로 그의 문학을 추진한 동력이었겠지만, 그가 쓴 산문들은 그러한 괴로움에서 비롯된 신경증과 멜랑콜리의 풍경을 낱낱이 증언한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카락을 다 밀어 버리고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도 그런 풍경의 하나였을지 모른다.
문학이 기술이 아닌 예술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작가의 열정과 광기, 이른바 괴로움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작품을 이해하는 마지막 지점에는 작가의 괴로움을 응시하는 과정이 남게 된다. 내가 처음 유계영의 시를 읽었을 때, 시인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솔직히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읽은 유계영의 시는 어쨌든 고통에 몸부림치는 시는 부류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대신 유계영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의 독창성으로 신선함과 자극을 주고, 그로 인해 개성을 평가받는 시인이었다. 가령 유계영의 시에서 ‘나’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다. 분절된 감각과 경험, 그리고 시간 속에서 ‘나’의 변형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유계영의 시는 언제든 전체론적 사고를 벗어난 다원적 인식의 실험이 펼쳐지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시에서는 기존의 특징들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계를 껴안으려는 시도는 여전하되, 그때 발생하는 균열과 균열의 자리에서 움트는 괴로움이 먼저 보인다. 신작시 한 편을 읽어보자.
친구야, 나의 침실에 없는 것이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다
의자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줄 요약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침대와 테이블과 서랍장 성미 급한 내가 사 모은 것들이지
길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 같은 걸 주워 먹고 살아도
비참을 모를 각오
곰팡이처럼 뜯겨나갈 각오
그러나 이 거리는 깨끗해서 주워 피울 꽁초 하나 없다
다른 꽃들이 향기를 섞지 않는 것은 매년 새로 심기 때문이야
-「자연사박물관에 없는 자연」 부분
일찍이 분절된 감각, 부분의 발견을 통해 ‘전체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유계영이 세상을 향해 최대한의 감각을 열어 두는 것은 완성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기성의 언어에도 제한되지 않음으로써, 미완성인 존재들끼리의 결합이 빚어내는 하모니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분절이 이제는 존재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자연사박물관에 없는 자연」의 배경은 “야생종이”를 만날 수 있는 바깥과 “내가 사 모든 것들”로 채워진 “나의 침실”, 이렇게 두 공간으로 두 공간으로 구분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맞서야 할 대상 앞에서 물러나거나 등을 보이는 회피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대결하고 부딪힐 “각오”를 했을 때에는 정작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인식하는 세계와 경험하는 세계가 엇갈리는 것은 이 시의 주요 형식인 동시에 그 자체로 주제가 된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틈과 모순을 동시에 인식하되, 그것이 통합되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시적 분리불안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은 극복의 대상으로 거부되지 않는다. 오히려 응시와 탐구의 대상이다.
2. 자연스럽다는 말
리와일딩(rewilding)은 말 그대로 ‘야생을 복원하는’ 개념이다. 단순히 자연을 되살리는 환경 운동을 넘어 생태계의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흔히 포식자를 ‘잡아먹는 존재’로만 이해하지만 그것은 포식자에 대한 편협한 관점일 뿐이다. 생태학에는 ‘두려움의 경관’(landscape of fear)이라는 말도 있다. 포식자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피식자는 공간을 다르게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과 경로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표현으로, 이러한 긴장감이 곧 생태계의 균형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리와일딩은 관계망의 회복, 즉 자연과 인간 모두가 원래의 상태에 가까운 ‘자연스러움’을 되찾는 사유 방식이자 실천이다. 안정되고 편안함과 동의어로 ‘자연스러움’을 이해했던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줄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주장은 낯설지 않다. 일찍이 메리 올리버에게 시란 자연을 재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의 감각 속으로 자신을 다시 돌려보내는 일이었고, 「기러기(Wild geese)」나 「숲속에서 잠자며(Sleeping in the forest)」에서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다시 ‘야생의 리듬’을 느끼는 순간을 노래했다. 시를 읽으며 우리는 기러기가 집으로 돌아가듯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이 절망과 외로움이 있는 만물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조금 더 ‘터프’한 관점을 드러내는 시인으로 테드 휴즈도 있다. 그는 이성과 문명의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명의 폭력적 에너지’를 탐구했다. 대표작이기도 한 「생각 속의 여우(The thought fox)」에서 시인은 여우가 눈 속을 가르며 다가오는 이미지를 통해 시가 논리나 사유가 아닌 야생적 감각의 출현임을 보여 주는 한편, 「횟대에 앉은 매(Hawk Roosting)」에서는 매가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을 ‘통제자’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 통제감이 자연의 폭력성과 긴장을 드러내는 장치임을 드러낸다. 이들이 보여 주는 생명력에는 어제나 불안과 두려움, 공포와 긴장감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시를 다시 읽어 보는 것은, 지금이 바로 시가 감각의 생명력을 회복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장선 위에 유계영의 시가 있다. 유계영은 통제되지 않은 세계의 리듬 속에 스스로를 데려다놓은 뒤 언어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감각의 회복을 시도한다. 「둥둥……」은 성묫길에 따라나선 아이의 눈에 비친 무덤의 풍경을 통해 경계와 한계가 희석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발랄하면서도 사려 깊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비애감을 품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아이는 친척들 사이에서 개다리춤을 춘다. 시체들이 즐비하게 묻혀 있는 엄숙하고 무거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이 경박한 몸짓은, 그러나 어떤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자연의 풍경으로 스며든다. 개다리춤을 추며 몸을 떠는 아이의 이미지는 “앞다리를 치켜드는 사마귀”를 지나 “작은 물방울 머리에 얹고 일어서는 잔디”를 거쳐, 다시 무덤에 절하는 사람들을 건너 “떨리는 이슬들”로 바뀐다. 궁극에 “도착한 빛을 잘게 튕겨내”기에 이르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 빛은 뭘까. 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 먼 데서 다리를 떨며 오고 있는 것은 / 내가 알지 못한 일”이라는 결구로 마무리한다.
인간이 비인간 생물들, 나아가 죽음 너머의 존재와도 연결되고 있다는 순환 그 자체를 그리고 있는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몸의 리듬’으로 세계를 감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 속에서 시는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비인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에 대한 예감 등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알 수 없는 세계를 함께 진동시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파로서 ‘둥둥’이라는 표현은 세계의 다양한 층위를 울리며 퍼져나간다. 이때 “고두배”라는 단어로 상기되는 불교적 세계관은 이미지와 연기(緣起)의 관계 속에서 그 소리의 동심원이 지향하는 바를 상기시킨다. 세계는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고 관계 맺는 리듬으로 존재한다는 진실이 그것이다. 「늘어놓기, 가로둥이 꺼질 때까지 늘어놓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늘어놓기……」에서도 언어의 리듬과 반복은 의미 이전의 감각을 생성함으로써 기억과 언어, 대상이 맞닿지 못한 지점에서의 떨림을 드러낸다. 질서와 통제의 언어를 넘어 감각과 리듬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리와일딩적 사유의 결과물이자 유계영식 ‘두려움의 경관’이며 그로써 완성되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중립적 의미라 할 만한다.
3. 시적 리와일딩
‘야생으로의 복귀’는 단순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아니라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적 행위와 맞닿아 있다. 모든 포식자가 사라진 한국의 산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지만, 그만큼 ‘두려움의 경관’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인간은 안전하게 정돈된 산책로를 걸으며 통제된 풍경 속에서 감각의 예민함을 잃어버린다. 리와일딩의 핵심은 바로 그 통제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하고 생생한 감각을 자신에게 다시 허락하는 데 있다. 유계영의 시 또한 이와 같은 감각의 복원을 추구한다. 그의 시에서 언어는 제도화된 의미를 벗어나 다시 살아 움직이며 시는 그 야생의 언어가 숨 쉬는 공간이 된다. 「섭섭해요」는 바로 그러한 시적 리와일딩의 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아버지 귓불이 두둑하고 풍만하였다면
부족함 모르고 자랐을 텐데요
얇고 축 늘어진 부처님 귀예요
내가 매일 조물거렸어요 수제비 떼듯
잡아당겼어요 너머가 비칠 때까지
얇게 떴어요
-「섭섭해요」 부분
「섭섭해요」에서 유계영은 초인적·집단적 서사, 신화와 토템의 세계를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행위로 전환한다. “매일 조물거렸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부처님 귀에 얽힌 구전적·무속적·초자연적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몸의 행위 속에서 신비성을 잃는다. 그러나 그 상실은 단순한 박탈이 아니라 신화가 현실의 감각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으로 보인다. 신체적 행위는 과거와의 관계를 매개하며 역사적 기억과 개인적 감각이 중첩, 확장되기도 한다. 「요가원에서」에서는 그런 태도가 한층 더 몸에 대한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몸과 의식, 언어와 이미지가 분열되는 순간 화자는 통제 불가능한 존재의 불확실성을 몸으로 감각한다. 요컨대 유계영의 시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인식하고 공존시키려는 태도가 있다. 그의 시에서 감각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과 타자와의 관계를 품은 매개로 작동하며, 이러한 경험은 통제된 세계 속에서 둔화된 감각을 되살리는 행위이자 언어의 야생성을 회복하려는 시적 리와일딩의 한 형식이 된다.
모든 포식자가 사라진 산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듯 인간은 통제된 풍경 속에서 감각을 잃는다. 시적 리와일딩은 인간이 만든 질서와 통제에서 벗어나 언어와 감각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행위다. 유계영의 시는 세계를 하나의 닫힌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의 언어 안에서 사물과 인간, 삶과 죽음, 실재와 비실재는 서로 스며들며 미묘한 진동을 일으킨다. 이는 단지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의 틈에서 새로운 존재 감각을 되살리는 일이다. 유계영의 시를 통해 재발견되는 ‘자연스러움’은 전원적 평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상태들이 팽팽히 맞부딪히며 공존하는 역동적인 평형 상태. 그 긴장 속에서 언어는 다시 살아 움직이고 감각은 세계를 새롭게 촉발한다. 유계영의 시는 바로 그 순간—언어가 스스로의 경계를 벗어나 야생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시적 리와일딩의 현장인 것이다.

박혜진 l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젊은평론가상〉〈현대문학상〉 수상
—
2025년 11월호(VOL.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