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고재종
신작시: 빛의 궁전 / 빛, 바람숲길에서의 연가 / 얼레지꽃-빛
자선시: 폐교의 빛 / 저녁, 산방의 기록
[시인론] 고봉준 “빛의 조율”
신작시
빛의 궁전
어디에서 오는가, 그대가 말하는 빛은
도심에 우뚝한 성당 첨탑의 십자가에서 오는가
백양사 대웅전 부처님의 육계에서 오는가
지리산 달궁 골짜기를 마구 밀고 올라가는
연두 초록의 날비린내며
모래와 꽃, 시간과 별 그리고
울음의 명치끝을 찌르며 달려오는
그대가 말하는 빛은
그대의 눈에서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생동(生動)들
그것이 발간 수밀도의 정수리를 관류하는 강물이든
금방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자수정 빛 상처이든
그것은 죄다 장엄
그 눈빛에 나는 내 꿈을 덧칠하지 않는다
빛의 빛에 관통당한 궁전을 세우고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록을 마련해놓고
삶에 목이 졸려 바동거리는 내 경각을
프리즘을 거친 듯 형형색색의 빛으로 전복하는
그대라는 나라
백합꽃 뜨락엔 팡파르의 향기
압도하는 빛의 찬란에 세계가 눈먼다네
빛, 바람숲길에서의 연가
일렁거림 하나로 세계를 압도하는
바람 나무여
빛의 무한파동이여
모든 숨탄것들의 처음이름을 부르고 싶구나
이런 숲길에서 연애는 자연 과목
네 두 눈이 세계라면 나는 세계-내-존재다
너는 기도 밖의 타인을 품는다
네 눈 속에 일렁이는 빛의 호수를 부를 이름은 없다
아주 오래전에 달려와서
내일을 당겨쓰는 오늘의 바람 노래여
얼레지꽃-빛
누군가 우연히라도 부르지 않는다면
바람 한 자락 일지 않을 이곳에서
내게 세상은 너무 적습니다.
이름조차 희미해져 불리지 않습니다.
다만 은산철벽의 좌선과
절망이 절망에 갇혀 절망을 낳는 곳,
이름조차 사치스러운 마음 절역(絶域)에
아닌 듯 긴 듯 오신 당신이라는 빛, 그 빛은
가장 사적인 서사를 품은 듯한 보랏빛이던가요?
독보적인 향기를 탑재한 바람이던가요?
바람난 처녀, 바람나지 않고서야
문밖에서 으르렁거리는 야생음의 반쯤은
내 고독이라는 짐승의 신음성이지 싶은 곳에
“나 여기 있어요”라고 반짝이는
빛의 부름으로 오실 리야 있겠어요?
내게 세상이 조금은 더 생길 것 같습니다.
자선시
폐교의 빛
시간의 풍금 소리에 맞춰
환해지는 빛을 듣는다
빈 운동장, 모래알로 이는
알알이 빛의 소리
청청 유리 하늘의 빈터와
지상의 정적 사이로는
운동화짝 솟구치는 꿈
잉잉거리며 빛을 읊는 벌나비
저 속에 거주하는 누군가는
라일락 향기를 세공하고
저 속에 여백으로 충만한 빛은
한가득 초록 침묵이다
학교 앞 서지 않는 시골버스
아이 하나 없는 텅 빈 구령대
포플러는 하늘과 내통할 뿐
시간의 풍금 소리에 맞춰
빈 교실에 밀생하는 바람 소리며
비껴드는 빛의 음률은
간간 멧비둘기 울음으로 떨린다
모든 공부가 끝났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다만 저 빛의 조율 속에 쉴 것이다
저녁, 산방의 기록
애저녁에 듣는 별들의 침묵,
스치는 라일락 향기,
느릅나무 둥치에 기댄 어떤 성애의
가만가만 일렁이는 잎새들의 시
달빛 가득한 정적이라면
때론 추억 한 모금의 미뢰에 떨고
삶이라는 직업의 부당함에 울기도 하지
돈을 내고 남의 고통을 관람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을 떠나
오뉴월 장미의 붉은 독재를 지지하는
나는 장미 중독자*
어제는 궂은 일기에 길 잃은
고라니 어린것이 찾아들고
오늘은 저녁 능선을 적시는 밀감빛 놀에
과잉된 그리움도 있긴 있다
모든 질문의 책, 무용한 말들을 삭제하는
다만 멧비둘기들의 구슬픈 노래여
어둠과 숲과 밤의 박물을 열어
가끔은 영원을 엿보게 하는
바람 한 자락쯤은 안다고 기록하리라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에서
고재종 l
1984년 《실천문학》 『환절기의 판화』에 「동구밖 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 『독각』, 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혼자 넘는 시간』, 산문집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감탄과 연민』, 시론집 『주옥시편』 『시간의 말』 『시를 읊자 미소 짓다』가 있음.
시인론 / 고봉준
빛의 조율
― 고재종의 신작 읽기
2022년에 출간된 고재종 시집 『독각』(문화연대, 2022)은 “혼자 있는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시집을 펼치면 한 사람이 산 위로 번지는 황혼을 배경으로 “푸른 장미라거나 붉은목풍금새라거나 그 꿈으로도 환치되지 않는 노래들과 마주하”(「푸른 장미의 노래」)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저녁바람 일렁이는 대숲에 / 서걱서걱 / 별빛 듣는 소리”(「나의 원음(原音)」)나 “그때 마침 배시시 / 배적삼 빛, / 봉창이 밝아진다”(「봉창이 밝아진다」)라는 진술처럼 자연 속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소리’와 ‘빛’으로 온다. 『독각』에서는 그 가운데 유독 ‘빛’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선홍빛(「장미와 롤리타」), 배적삼 빛(「봉창이 밝아진다」), 보랏빛(「보랏빛 향기」), 선홍빛(「장미의 천지간」), 연둣빛(「구증구포」), 양귀비꽃빛(「한 뼘 고요」)…….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 세계는 어쩌면 거대한 “빛의 궁전”인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오는가, 그대가 말하는 빛은
도심에 우뚝한 성당 첨탑의 십자가에서 오는가
백양사 대웅전 부처님의 육계에서 오는가
지리산 달궁 골짜기를 마구 밀고 올라가는
연두 초록의 날비린내며
모래와 꽃, 시간과 별 그리고
울음의 명치끝을 찌르며 달려오는
그대가 말하는 빛은
그대의 눈에서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생동(生動)들
그것이 발간 수밀도의 정수리를 관류하는 강물이든
금방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자수정 빛 상처이든
그것은 죄다 장엄
그 눈빛에 나는 내 꿈을 덧칠하지 않는다
빛의 빛에 관통당한 궁전을 세우고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록을 마련해놓고
삶에 목이 졸려 바둥거리는 내 경각에
프리즘을 거친 듯 형형색색의 빛으로 전복하는
그대라는 나라
백합꽃 뜨락엔 팡파르의 향기
압도하는 빛의 찬란에 세계가 눈먼다네
— 「빛의 궁전」 전문
고재종의 신작에서 자연 세계는 “빛의 궁전”이고 시인은 ‘빛’에 매료된 독각자(獨覺者)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그 ‘빛’의 기원에 대해 묻고 있다. 지리산 골짜기를 밀고 올라가는 “연두 초록의 날비린내”와 “모래와 꽃, 시간과 별 그리고/울음의 명치끝을 찌르며 달려오는” ‘빛’, 그것은 과연 어디에서 도래하는 것일까? 시인에게 빛은 단순한 시각적 현상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빛’은 “그대의 눈에서/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생동(生動)들”에서 기원하며, 그런 한에서 그것들은 “죄다 장엄”하게 느껴진다. ‘생동(生動)’과 ‘날비린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화자에게 자연의 빛은 생명력의 표현 그 자체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화자의 시선은 근대적인 질서에서 탈구되어 있다. 근대 또는 근대적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은 일반적으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이해된다. 이때 자연은 인간의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거나 개척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에서 인간의 역사와 진보란 결국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개척한 파괴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또한 이 관계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자연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이 관계에서 자연은 생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동적 대상으로 이해된다.
반면 이 시에서 화자가 ‘자연=빛’에서 읽어내는 것은 ‘날비린내’와 ‘생동(生動)’으로 요약되는 자연의 역동성과 생명력이다. 화자는 이러한 자연에 대해 “그 눈빛에 나는 내 꿈을 덧칠하지 않는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자연’에 자신의 ‘꿈’을 덧칠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인간적 방식으로 전유하지 않겠다는 것, 가령 자연적 대상에 인간적 의미를 투사하거나 서정적 동일시를 시도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에게 ‘자연=빛’은 “삶에 목이 졸려 바둥거리는” 자신의 일상적 감각을 “형형색색의 빛으로 전복하는/그대라는 나라”이다.
근대적 인식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감각은 「빛, 바람숲길에서의 연가」와 「얼레지꽃-빛」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자에서 화자는 바람숲길을 걷다가 불현듯 “일렁거림 하나로 세계를 압도하는/바람 나무”의 존재를 지각한다. 숲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일렁거리는 ‘빛’이 뒤엉킨 세계, “빛의 무한파동이여”라는 진술처럼 화자에게 그곳은 하나의 세계로 다가온다. 또한 화자는 그 세계에서 자신이 “세계-내-존재”임을 실감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그렇듯이 근대적 의미에서 ‘세계’는 실존론적 세계, 즉 인간이 중심인 시공간이다. 반면 「빛, 바람숲길에서의 연가」에서 ‘세계’는 “네 두 눈이 세계라면”이라는 진술처럼 인간을 포괄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세계-내-존재”는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세계와 다르다. “네 눈 속에 일렁이는 빛의 호수를 부를 이름은 없다”라는 진술은 실존론적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동시에 그 세계보다 근원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너=세계’가 ‘이름’, 즉 언어로 지시될 수 없음을 뜻한다. 시인은 이런 근대적 관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에 ‘너’ 또는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를 부여한다. 가령 “아닌 듯 긴 듯 오신 당신이라는 빛, 그 빛은/가장 사적인 서사를 품은 듯한 보랏빛이던가요?”(「얼레지꽃-빛)라는 진술이 그렇다. 이 시에서 화자는 “은산철벽의 좌선과/절망이 절망에 갇혀 절망을 낳는” 외딴 곳에서 ‘얼레지꽃-빛’을 발견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시인에게 자연적 대상, 즉 ‘꽃’은 이미-항상 꽃-빛이다. 그래서 화자는 쇠처럼 검은빛을 띠는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뿌리내리고 있는 얼레지꽃을 ‘얼레지꽃-빛’으로, 혹은 “당신이라는 빛”으로 호명한다.
애저녁에 듣는 별들의 침묵,
스치는 라일락 향기
느릅나무 둥치에 기댄 어떤 성애의
가만가만 일렁이는 잎새들의 시
달빛 가득한 정적이라면
때론 추억 한 모금의 미뢰에 떨고
삶이라는 직업의 부당함에 울기도 하지
돈을 내고 남의 고통을 관람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을 떠나
오뉴월 장미의 붉은 독재를 지지하는
나는 장미 중독자
어제는 궂은 일기에 길 잃은
고라니 어린것이 찾아들고
오늘은 저녁 능선을 적시는 밀감빛 놀에
과잉된 그리움도 있긴 하다
모든 질문의 책, 무용한 말들을 삭제하는
다만 멧비둘기들의 구슬픈 노래여
어둠과 숲과 밤의 박물을 열어
가끔은 영원을 엿보게 하는
바람 한 자락쯤은 안다고 기록하리라
— 「저녁, 산방의 기록」 전문
산방(山房)의 저녁은 ‘빛’과 ‘소리’와 ‘향기’가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이다.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으면 “별들의 침묵”과 “달빛”이 숲의 세계를 지배한다. 낮-노동의 시간 동안 인간의 활동을 지탱하던 ‘눈=시각’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축소되고,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청각과 후각 등의 감각이 중요해진다. 또한 산방의 저녁은 목소리를 높이는 발화의 시간이 아니라 “저녁 능선을 적시는 밀감빛 놀에/과잉된 그리움”을 느끼기도 하고, 달빛 가득한 정적”을 배경으로 “추억 한 모금의 미뢰에 떨고/삶이라는 직업의 부당함에 울기도” 하는 고독과 성찰의 시간이다. 숲속의 ‘산방’에서 화자는 “어둠과 숲과 밤의 박물을 열어/가끔은 영원을 엿보게 하는/바람 한 자락”에 관해 기록한다. 이때의 영원성은 시간 바깥의 영원, 즉 초월적인 영원이 아니라 시간의 주름 속에 응축되고 접혀 있는 시간이 끝없이 풀려나오는 내재성에 가까운 것이다. 가령 그 시간 속에는 “느릅나무 둥치에 기댄 어떤 성애의/가만가만 일렁이는 잎새들의 시”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 있고, “궂은 일기에 길 잃은/고라니 어린것이 찾아”든 이야기도 포함된다. 시간의 질서에 따라 한 인간의 내면에 응축되어 있는 작은 시간들이 ‘밤’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마치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풀려나오는 사건이 화자에게는 영원성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산방의 저녁은 또한 “모든 질문의 책, 무용한 말들을 삭제하는” 침묵의 시간이며, 동시에 그 침묵을 배경으로 “멧비둘기들의 구슬픈 노래”가 들려오는 시간이다. 이처럼 산방의 저녁은 인간이 침묵하면 자연이 존재의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근대적 문명이 주도권을 상실하면 비로소 자연이 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화자에게 이 순간은 간혹 영원성의 시간과 대면하는 경험으로 인식된다.
시간의 풍금 소리에 맞춰
환해지는 빛을 듣는다
빈 운동장, 모래알로 이는
알알이 빛의 소리
청청 유리 하늘의 빈터와
지상의 정적 사이로는
운동화짝 솟구치는 꿈
잉잉거리며 빛을 읊는 벌나비
저 속에 거주하는 누군가는
라일락 향기를 세공하고
저 속에 여백으로 충만한 빛은
한가득 초록 침묵이다
학교 앞 서지 않는 시골버스
아이 하나 없는 텅 빈 구령대
포플러는 하늘과 내통할 뿐
시간의 풍금 소리에 맞춰
빈 교실에 밀생하는 바람 소리며
비껴드는 빛의 음률은
간간 멧비둘기 울음으로 떨린다
모든 공부가 끝났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다만 저 빛의 조율 속에 쉴 것이다
— 「폐교의 빛」 전문
빈 운동장, 아이 하나 없는 텅 빈 구령대, 빈 교실……. 화자는 인적 없는 폐교에서 “시간의 풍금 소리에 맞춰/환해지는 빛을 듣는다”. 사람이 없어도 빛은 존재한다. 빈 운동장에서는 모래알로 굴러다니는 빛의 소리가 들리고 “청청 유리 하늘의 빈터와/지상의 정적 사이”에서는 벌나비가 “잉잉거리며 빛을 읊”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거주하고 있는 존재는 “라일락 향기를 세공”하고 있고, 그곳에 “여백으로 충만한 빛은/한가득 초록 침묵”을 발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일까? 우리는 흔히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거나, 설사 어떤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무의미하고 생각한다.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은 이런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라는 질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면서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그곳에 없으면 무의미하거나 ‘지각’ 행위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숲에는 인간 외에도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으며, 나무가 쓰러지거나 천둥 번개가 치는 등의 자연적인 사건들은 인간 없이도 이미-항상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들에게 의미 있는 사건으로 경험된다. 이 시에서 화자가 인간의 흔적이 지워진 ‘폐교’와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빛’의 흔적을 읽어내는 장면도 그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흔히 ‘폐교’라는 단어에서 종종 낡고 버려진, 그리하여 아무런 실용적 가치가 없는 퇴락한 흉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시에서 폐교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모래알로 이는/알알이 빛의 소리”와 “라일락 향기”와 하늘의 빈터와 지상의 정적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충만한 빛”과 “한가득 초록 침묵”, 그리고 “빌 교실에 밀생하는 바람 소리”와 “비껴드는 빛의 음률”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폐교’는 인간에 의해 버려진 세계이지만 동시에 인간 아닌 존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하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에게 ‘빛’을 통해 이 세계를 읽는 행위, 유용성 같은 인간의 잣대가 아니라 ‘빛’이라는 자연의 기준에 따라 세계를 인식하는 행위는 ‘공부’이다. 그리하여 “모든 공부가 끝났을 때”라는 진술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 즉 인간적 또는 근대적인 관계의 바깥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때 화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근대적인 사고에서 ‘인간’은 자연의 바깥에 위치하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반면 이러한 근대적 사고방식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 무수한 생명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화자가 말하는 사태는 존재 망각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저 빛의 조율” 속에서 살아갈 것임을 상상한다. 조율(調律)이란, 가수 한영애가 “알고 있지/꽃들은/따뜻한 오월이면/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알고 있지 철새들은/가을 하늘 때가 되면/날아가야 한다는 것을”이라고 노래했듯이 더 큰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룬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고봉준 l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평론집 『유령들』,『비인칭적인 것』, 『문학 이후의 문학』 등이 있음.
—
2025년 9월호(VOL.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