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김은상
신작시: 너에게 가겠다 / 한여름의 아트만 / 거미
자선시: 한여름 밤의 서정곡 / 비정성시
[시인론] 이병국 “사랑하는 자의 피투성이로 나아가다”
신작시
너에게 가겠다
한여름의 폭설처럼 너에게 가겠다
눈발들의 서러운 사이로 너에게 가겠다
흰 눈에 뒤덮여 동사한 사람의 체온으로
그 옆에서 사랑을 짖다 잠든 개의 결로
너에게 가겠다 눈송이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은 모든 세계의 아침, 그 공중의
가장자리처럼 너에게 가겠다
존재란 사소하고 또 사소해서 도(道)가
도(道)이면 도(道)가 아니었으니 폭설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의 부리로
피가 땀으로 젖어 드는 시시포스의 어깨로
너에게 가겠다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기도가
겨우 윤회라면 도축장을 뒤척이는 돼지 떼로
연야달다가 손에 든 머리로 너에게 가겠다
그리하여 내가 잠든 눈보라 속에서도
한 잎의 눈물이 피었다 질 수 있다면
오직 사랑하는 자의 피투성이로 너에게 가겠다
한여름의 아트만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 고양이들을 화분에 심었다
며칠 새 구더기 몇이 방을 기어다녔고
오늘은 파리 떼가 해피트리 위를 윙윙거렸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는데
창문을 열자 우수수
바람을 타고 떠오르는
한여름의 아트만들,
아기 고양이들의 육신이 날개를 얻었으니
저 공중의 소실점들도 고양이의 육친이겠지
이내 이 파리들… 이파리들… 잎… 아이들 같은
생각 없는 자를 중얼거리다가
태양을 향해 야옹거리는 화분을
이리저리 돌렸더니
베란다에 갇혀 있던 나의 브라만이
나무줄기처럼 이리저리 굽었다
화분에 기대 창밖을 내다보던
고양이가 쓱,
다리에 점점 작아지는 동공을 비비고
문득 지구가 카르마로 휘청거리고
나는 나를 그 곁에 묻었다
고양이의 눈이 폭풍의 언덕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거미
— 앉아 있던 거미가 바람 위로 몸을 던졌다.
그것을 신의 기투라 한다면
인생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사사로운가.
그 거미의 나를 훔치고 있소
그 거미의 입술은 뜨겁지 않아 좋소만
그 거미의 혀는 불안하기만 하오
그 거미의 나는 거미이지만
그 거미의 거미는 세계라오
그 거미의 일요일이 외롭다 하면
그 거미의 거미는 우울이라오
그 거미의 눈알과 마주치면
그 거미의 콧노래가 등을 간질이오
그 거미의 알들이 부화하오
그 거미의 내가 새끼들을 낭비하오
그 거미의 거미를 갉아먹으며
그 거미의 사라지는 눈을 보오
그 거미의 구멍이 웃는 입술을 하여
그 거미의 교미를 증오라 하오
그 거미의 발가락을 사랑이라 하오
그 거미의 세계가 나의 멸절이기 때문이라오
자선시
한여름 밤의 서정곡
— 은유는 공간으로부터 유예된 시간이며
환유는 그 시간들의 뒤척임이다.
그리하여 나는 전복된 비유를
삶의 인과율로 몽상할 뿐이다.
단지 이곳에 당신이 머물지 않기를 바라면서….
매미가 흘러간다.
쓸모없는 생을 견디느라 꼬박 하루를 잤다.
버드나무 둥치에 벗어놓은 허물의 바깥을 매미의 내면이라 생각하면 매미들의 울음이 세상보다 더 깊고 넓어진다.
어제는 누나에게 인생을 제대로 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누군가를 해하거나 속이며 살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나 똑바로 살라고 되돌려주었지만,
분노는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와 폭염처럼, 폭풍처럼, 폭우처럼, 목울대를 쥐고 휘청거렸다.
지천명에 도착하기까지 기식했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인생은 있고, 금치산자와 같은 삶을 환호하는
문명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매미의 허물을 살아간다.
땅속으로 울음을 잠재운다. 오늘의 육신이 한 줌의 흙이 된다 해도 미련 같은 건 없다. 오히려 고통은
삶의 가장 위쪽에 아카시아 이파리를 어머니로 남겨두는 일이다. 나는 너무 일찍 인생을 알았고
생의 유일무이한 가치가 죽음에 있음을 깨달았을 때 희망 같은 건 버려 버렸다. 그리고 한때…,
나의 꿈은 혁명가였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프지 않은 세상. 이를 위해 아라베스크 자세로 선 히키코모리가 됐다.
육식과 채식을 미식과 윤리적 식사로 개명한다고 해서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공식품으로 배를 채우면
머릿속에 동물권과 포스트휴먼과 애도가 떠돌지만, 너무 게을러서 비건(Vegan)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를 살게 하는 팔 할은 변명이었다.
오늘은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제주흑돈가에 앉아 삼겹살을 구우며 고양이들의 히키코모리아를 생각했다.
탈레스(Thales), 솔론(Solon),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제논(Zenon),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피타고라스(Pythagoras).
이들도 모두 자신이 살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떠도는 고대의 고양이였다. 하여 그치들의 우어슈토프(Urstoff) 또한 각자의 히키코모리아가 아니었을까.
뮈토스(Mythos)가 로고스(Logos)가 된다고 해서 세계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한 적이 없으므로 사라질 수도 없다.
집 앞의 공원을 서성거리다가 수양버들 곁에 떨어져 파닥거리며 우는 매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헤게시아스(Hegesias).
그리고 오늘의 유머는 Memento mori! Carpe diem!
땅속의 한평생을 짧은 울음으로 다 써버린 매미에게 세상은 어떻게 바라보든 니힐리즘이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상징학연구소》 2024년 겨울호
비정성시
― 당신을 신의 분열증이라고 찬양하면 이 세계의 잔혹함도 성스러운 제단으로 아름다워졌다.
1
내가 입술을 가졌을 때 세계는 불행하였다.
어둠을 말하면 빛이 오고 빛을 속삭이면 어둠이 번져오는 전능의 고독, 나는 나로부터 기원을 잃을 자라.
영혼의 형상을 빚어 흙을 불어 넣었으니 아! 아!
영원이라는 지루함을 이겨낸 신의 파멸이 사람이었다.
흑암에 지문을 그리고
불멸을 흙과 나눈 생경한 육신과 신생의 기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체온은 두려움이었다. 올리브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목소리가 몸의 내부에서 울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입술을 움직였다.
아담.
태초의 아니마가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야훼라 불렀다.
야훼와 함께 동산을 돌아보며 만물을 그 모양대로 발음하였다. 바람은 바람이었고, 꽃은 꽃, 나비는 나비였으니
만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충만하였다.
야훼는 그곳을 에덴이라 불렀다.
내가 들에 누워 손으로 빛을 가리려 하니
먼 공중에서 저녁이 번져왔다.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니
손끝이 닿는 곳마다 별자리가 돋아났다.
숱한 반짝임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세계의 잠이 서편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2
저녁은 대지의 소란을 잠들게 했으므로 나는
밤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한낮의 동굴을 사랑하였다.
동굴 속에서 아담을 속살거리면
나는 야훼의 맥놀이로 밤의 끝에 닿아 출렁거렸다.
그곳에서 푸른 이끼들을 베고 눈을 감으면
똑,
똑,
똑,
꿈의 밀실을 두드리던
물방울의 시간들,
기이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한가롭게 풀을 뜯던 사슴이 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려 바동거리고 있었다. 까마귀 떼가 날아와 배고픈 공중을 선회했다. 반짝이던 사슴의 눈이 생기를 잃었을 때, 그 눈동자 안에는, 사슴을 온몸으로 움켜쥐고 울부짖는 뱀이 있었다.
나는 이런 알 수 없는 풍경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 고통들에 골똘할수록
야훼는 지상의 얼룩으로 선명해졌다.
꿈은 한낮의 예언일까 아니면 내면의 현재일까. 깨어있음과 잠들어 있음이 모두 꿈과 같았으니
사망을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손은 사망에 있었다.
야훼는 그런 때에 번져왔다.
야훼를 어루만지면 부풀어 오른 몸의 중심에서 축축한 달빛이 쏟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문장의 야훼가 비릿한 아침을 토해냈다.
네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니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눈을 떴을 때 곁에 한 형상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형상을 그 모양대로 하와라 불렀다.
3
그리하여 하와가 깨어나고 야훼가 잠들었다. 나는 하와에게 에덴의 이름들을 알려주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와는 고개를 끄덕이었지만 자신의 손끝에 닿는 생명을 발음하지 못했다. 대신에 온힘을 다해 입술을 움직이다 자주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눈물이 하와의 야훼라 믿었다. 하와에게 일러준 마지막 이름은 금기의 나무였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다. 뱀이 밤낮없이 그곳을 지켰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나무와 생명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나는 죽음을 알지 못하였으나 하와의 죽음을 생각하면 잠든 야훼가 궁금해졌다.
동산 중앙에 다다랐을 때 잔잔한 선율이 발걸음 위로 내려앉았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들이 동굴 속으로 울려 퍼져 물방울의 시간에 닿았다. 똑, 똑, 똑. 마치 꿈꾸듯이 눈부신 공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따가운 햇살들이 목덜미를 깨물었다. 뱀이 생명나무 꼭대기를 휘감고 하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흉측한 형상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운율, 나는 어느 편이 뱀의 악의인지 알 수 없었다. 뱀이 하와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하와가 등 뒤로 숨어들었다. 생기를 잃어가던 사슴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하와의 손을 움켜잡았다. 나는 내가 추방해야 할 낙원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서 뱀의 유일한 벗은 생명나무 앞에 드리워진 연못이었다. 찾는 이가 없었으므로 뱀의 콧노래는 오른손이 왼손에게 들려주는 외로움이었다.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도 그랬다. 하와를 만난 후 뱀의 심장은 하와를 향한 두근거림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연못의 수면 위에 하와의 얼굴을 그려 넣으며 해맑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잔잔해졌을 때, 뱀은 처음으로, 내면의 동요와는 무관한 표정으로,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는 야훼를 만났다. 겁에 질린 하와의 얼굴이 수면 위를 스쳐갔다. 뱀의 심장에서 활짝 피어났던 꽃잎들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향방 없이 꽃잎들을 흩트렸다.
하루는 하와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뱀이 다가갔다. 화와가 두려워할 줄 알아 풀숲에 몸을 숨기고 말했다. 두려워 말라. 에덴의 지혜자가 너의 야훼를 찾으리라. 하와가 놀라 도망하려 할 때 뱀이 하와가 원하는 말로 붙들었다. 동산 중앙의 열매를 먹은 즉 네 눈이 밝아져 에덴의 생명들을 이름하게 되리라. 나에게 야훼가 있음은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고 지혜를 얻음이니 너의 야훼도 온전해지리라. 하와는 에덴에서 아담 외에 말하는 생명을 보지 못하였다. 뱀을 따라갔다. 선악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나에게도 가져와 보였으니,
그것은 아니마를 잃어버린 아니무스의 환대였다. 죽음과 함께하기 위해 죽음을 깨물었다. 하와는 기쁨으로 야훼를 기다렸고 나는 두려움으로 죽음을 마중했다. 뱀의 말대로 눈이 밝아졌다. 우리의 기쁨과 두려움은 모두 알몸이었다. 부끄러움이 육신을 완성했다. 올리브 잎을 따서 몸을 가렸으나,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이 더욱 더 서로의 체위를 어루만지게 했다. 신의 아니무스가 자신의 아니마를 탐했다. 아니마의 눈망울에 아니무스가 고일 때까지. 그리고 아니무스가 아니마의 노래로 젖을 때까지. 곧 견딜 수 없는 희열이 범람해 에덴의 이름들을 무너뜨렸다. 그때 알았다. 하와의 목소리는 내 속에서 들려오던 야훼였다.
4
눈이 밝아질수록 배가 고팠다.
모든 생명이 죽음으로 생을 얻었으니 선악나무와 생명나무는 근친이었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을 길렀다.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하와를 기쁘게 했다.
아들들이 하와의 손에서 장성하여 아버지를 대신해 생명나무를 얻고자 했으니
어머니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자해였다.
나는 하와의 장자가 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강물 위로 에덴의 뱀이 지나갔다.
나는 화와의 장자가 되고 싶었다.
또 이런 다짐을 하면 사지를 잃은 뱀이 늑골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카인은 혈기가 넘쳤고 아벨은 온화했으므로 카인에게 가서 뱀의 혀로 유혹했다.
하와가 아벨의 어린양은 받고 너의 곡식은 들판에 버렸으니 오직 아벨의 생명나무가 하와에게서 자라는 도다.
잠시 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갈라진 혀로 카인의 심장을 핥았다.
생명나무에 앞서 선악나무가 있으니 네가 선 가운데 있으면 생명나무를 얻으리라.
카인이 대답했다.
당신이 이르신 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니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까.
카인의 손에 선악의 열매를 올려놓았다.
누구에게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니 네 마음의 열매를 그대로 행하면 생명나무를 얻게 되리라.
카인과 아벨이 서 있는 들판에서 태양이 똬리를 틀었다.
5
나는 돌의 적멸을 쥐고 있었다. 우리 중 여자가 하나이고 남자가 셋이니 장자인 내가 아담이 되리라. 그가 든 지팡이 위에서 햇무리가 이글거렸다. 하와가 땅의 소산이 아닌 어린양을 기뻐하였으니 이는 아담이 하와의 열매를 먹음과 같도다. 확신에 찬 목소리에 웃자란 곡식들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눈부셨고 나의 격정은 고아가 됐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가를 뒤척였다. 손을 들어 닦아내려 하는 순간, 그의 두려움이 나의 망설임을 앞질렀다. 들판의 비명이 명치를 후려쳤다. 그가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끌어안았다. 그를 부를수록 그의 이름은 칠흑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의 숨이 모두 사라졌을 때 긴 그림자 하나가 들판 끝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어린양이 울고 있었다. 선한 것은 악하고 악한 것은 선하니. 뼈아픈 노을을 끌고 까마귀 떼가 날아들었다. 나는 아벨의 장자였다. 사람의 죽음을 낳은 후에야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근친이 되었다. 피 묻은 돌을 들었다. 세차게 피 묻힌 손을 내리쳤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울음이 뒤섞여 공중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추축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나의 눈물은 사방을 헤매며 소리쳤다.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이니까.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의 출입문에 하와가 선악나무처럼 산들거리고 있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으니 너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뱀의 길에 핏빛 하늘이 드리워졌다.
6
내가 아직 신이었을 때 너의 이름은 혼돈이었다.
선악나무는 나의 소멸을 위해
생명나무는 너의 영생을 위해 있었으니
나는 아담의 하와였고 카인의 아벨이었으며 에덴의 뱀이었다.
그날 상심한 뱀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수면 위에 그려 넣은 얼굴에는
기쁨도 슬픔도 담기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몇 번이고 저주하다가
뱀은 자신의 사지를 물어 뜯어냈다.
그리고는 생명나무 앞으로 가서
피 흘리는 달을 던져놓았다.
배로 기어 연못으로 들어갔다.
멀리 퍼져가는 물결이
뱀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나는 누구의 아니무스이며
너는 누구의 아니마인가.
고요한 파문의 가장자리처럼
나는 나로부터 기원을 잃은 자이니,
사람은 뱀의 연못에 바쳐진 어린양이었다.
─ 《상상인》 2022년 하반기호
김은상 l
2009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유다복음』 『그대라는 오해를 사랑하였다』 등이 있음. 제1회 〈상상인작품상〉 수상.
시인론 / 이병국
사랑하는 자의 피투성이로 나아가다
“꽃이 마음인 줄 알았는데 / 꽃 진 자리, // 그 아득함이 마음이었다”(「꽃 진 자리」, 『그대라는 오해를 사랑하였다』)고 한 김은상 시인은 2009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매체가 지닌 사회적 함의가 곧바로 시인의 시적 지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앞에서 인용한 시와 같이 꽃의 화려함이 아닌 “꽃 진 자리”의 “아득함”에 마음을 담는 시인의 시적 지향은 사적 층위에 언어의 자리를 마련하기보다는 세계 바깥에 자리한 어떤 부재나 결여에 언어가 가 닿기를 바라는 데 있음을 짐작할 만하다.
이를 위해 시인은 첫 시집 『유다복음』 이래로 조금은 거칠게 세계와의 투쟁을 지속적으로 도모해 왔다. 그 연장에 놓인 자전시 「비정성시」는 “나는 나로부터 기원을 잃은 자”라 칭하는 아담을 내세워 창세기의 서사를 전복적으로 사유하는데 이는 단지 아담과 하와, 아벨과 카인의 신성을 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똬리 튼 욕망과 혼돈을 응시하고 그로부터 불안하고 위태로운 세계의 한 축을 고발하는 데 기여한다. 시인은 “바람은 바람이었고, 꽃은 꽃, 나비는 나비”로 “만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충만”하였던 때를 존재의 기원으로 삼지만 기실 그것은 낙원으로 포장된 어둠 속에 존재를 잠식하기만 할 뿐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언제나 타자로서 신의 요구에 복무하게끔 할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화자가 뱀의 고통과 욕망, 유혹을 내면화하여 “모든 생명이 죽음으로 생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이 “사람은 뱀의 연못에 바쳐진 어린양”이라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기원을 잃은 자”로서 기왕의 것을 거부하고 다른 역사를 새롭게 다시 쓸 수 있는 가능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인의 부정 의식은 존재를 잉여의 자리로 내몰 수도 있다.
「한여름 밤의 서정곡」의 화자는 “쓸모없는 생을 견디”고 있다며 자신을 잉여적 존재로 여긴다. 그는 “버드나무 둥치에 벗어놓은 허물의 바깥을 매미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며 “매미들의 울음이 세상보다 더 깊고 넓어”지고 있음을 감각한다. 이는 제사(題詞)에 적힌 “은유는 공간으로부터 유예된 시간이며 / 환유는 그 시간들의 뒤척임”임을 수용하는 언어적 인식에 기반하지만, 그것이 “전복된 비유를 / 삶의 인과율로 몽상할 뿐”인 화자에게 세계를 돌파해 나갈 원동력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해하거나 속이며 살아오지 않았”다는 자위는 그저 분노의 양태로 자신을 감싸 “폭염처럼, 폭풍처럼, 폭우처럼, 목울대를 쥐고 휘청거”릴 뿐이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인생”이자 “금치산자와 같은 삶”을 화자는 “매미의 허물”이라고 말하곤 “땅속으로 울음을 잠재”우며 “생의 유일무이한 가치가 죽음에 있”다고 인식한다. 그런 이유로 화자는 “땅속의 한평생을 짧은 울음으로 다 써버린 매미”에게 ‘죽음을 설득하는 자’라는 별칭을 지닌 “헤게시아스(Hegesias)”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곁에서 “Memento mori! Carpe diem!”을 부르짖는다고 해도 그것은 “오늘의 유머”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잉여적 존재로 자신을 내모는 일은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프지 않은 세상”을 꿈꾸며 “아라베스크 자세로 선 히키코모리”가 된 화자의 부정 의식에 기반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저 위악의 정동은 혁명 혹은 변혁의 희망이 좌절된 존재가 허물만 남은 채 울부짖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는 시의 마지막 언술은 니힐리즘에 매몰된 것과 다른 층위에서 발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 분노는 “유예된 시간”과 그것의 “뒤척임”이 “삶의 인과율”로 존재를 구속하는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곳에 당신이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연동되어 “꽃 진 자리”의 “아득함”을 어루만지는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층위로 전환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한여름의 폭설처럼 너에게 가겠다
눈발들의 서러운 사이로 너에게 가겠다
흰 눈에 덮여 동사한 사람의 체온으로
그 옆에서 사랑을 짖다 잠든 개의 결로
너에게 가겠다 눈송이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은 모든 세계의 아침, 그 공중의
가장자리처럼 너에게 가겠다
(……)
그리하여 내가 잠든 눈보라 속에서도
한 잎의 눈물이 피었다 질 수 있다면
오직 사랑하는 자의 피투성이로 너에게 가겠다
— 「너에게 가겠다」 부분
김은상 시인은 신작시 「너에게 가겠다」의 첫 구절을 “한여름의 폭설처럼 너에게 가겠다”라고 적는다. 한여름과 폭설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사유의 충격이 상당하다. 저 역설의 문장은 이어지는 구절인 “눈발들의 서러운 사이”로 인해 계절의 간극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어떤 삶의 위기를 가시화한다. 한여름의 폭염에 노출된 고통에 폭설을 더하는 세계에게 존재의 서러움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폭력으로 인해 타자화된 존재의 곁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타자의 몫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을 주체의 의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은상 시인은 “기원을 잃은 자”의 정체성을 지닌 채 잉여로 전락한 존재의 부정 의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부정하며 다른 삶의 층위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그 연장으로 시인은 “흰 눈에 덮여 동사한 사람의 체온으로//그 옆에서 사랑을 짖다 잠든 개의 결로” 타자화된 존재의 곁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흰 눈에 덮여 동사한 사람의 체온으로”는 ‘너’를 따뜻하게 덮여줄 수 없겠지만, 차갑게 식은 존재의 체온을 부정하고 이를 거부하기보다는 그렇게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어떤 굴곡과 사연을 ‘나’의 내면으로 가져와 “그 옆에서 사랑을 짖다 잠든 개의 결로” 보듬는 마음은 다른 삶의 층위를 가능케 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눈송이 하나가 사뿐히//내려앉은 모든 세계의 아침, 그 공중의//가장자리”로 떠밀리는 삶을 예외로 간주하지 않으려는 시적 의지와 결부되어 “눈보라 속에서도//한 잎의 눈물이 피었다 질 수 있”게 하는 “오직 사랑하는 자의 피투성이”의 간절로 전유된다.
이때의 ‘피투성이’는 그저 희생적 삶의 결과만이 아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의 부리”와 “피가 땀으로 젖어 드는 시시포스의 어깨”를 포함하는 것이자 “도축장을 뒤척이는 돼지 떼”와 미혹된 존재인 “연야달다” 등 가해와 피해로 양분하여 대립될 수 없는, 가장자리로 떠밀린 모든 타자의 고통을 포용하는 삶의 양태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포용의 삶은 “죽은 아기 고양이들”(「한여름의 아트만」)의 곁에 자신을 내어놓는 수행적 사고로 확장된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 고양이들을 화분에 심었다
며칠 새 구더기 몇이 방을 기어다녔고
오늘은 파리 떼가 해피트리 위를 윙윙거렸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는데
창문을 열자 우수수
바람을 타고 떠오르는
한여름의 아트만들,
아기 고양이들의 육신이 날개를 얻었으니
저 공중의 소실점들도 고양이의 육친이겠지
이내 이 파리들… 이파리들… 잎… 아이들 같은
생각 없는 자를 중얼거리다가
태양을 향해 야옹거리는 화분을
이리저리 돌렸더니
베란다에 갇혀 있던 나의 브라만이
나무줄기처럼 이리저리 굽었다
화분에 기대 창밖을 내다보던
고양이가 쓱,
다리에 점점 작아지는 동공을 비비고
문득 지구가 카르마로 휘청거리고
나는 나를 그 곁에 묻었다
고양이의 눈이 폭풍의 언덕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한여름의 아트만」 전문
「한여름의 아트만」의 화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 고양이들을 화분”에 묻는다. 시인은 이를 “심었다”고 표현한다. 심는다는 행위는 뿌리를 땅속으로 묻어 그 토대를 단단히 하거나 싹을 틔워 다른 무엇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기반을 둔다. 단순히 대상을 보이지 않도록 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화자는 먼 곳의 어딘가가 아닌 베란다에 자리한 화분에 죽은 아기 고양이들을 심음으로써 그들을 세계로부터 삭제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다른 존재로 전화(轉化)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화자는 “며칠 새 구더기 몇이 방을 기어다”니다가 그것들이 “파리 떼가” 되어 날아다니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죽은 아기 고양이들의 몸이 파리로 육화된 것은 아닐진대 화자는 이를 “아기 고양이들의 육신이 날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파리를 “알을 깨고 나온 새”로 감각하고 이를 다시 “한여름의 아트만들”로 전유하여 아기 고양이의 영혼에 날개가 달려 “바람을 타고 떠오르는” 것이라 믿는다. 이 믿음의 근거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 파리들… 이파리들… 잎… 아이들 같은” 언어유희적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이와 같은 환유적 연쇄는 ‘전복된 비유를 삶의 인과율로 몽상’하는 것을 넘어 카르마의 전회를 불러오는 사유에 기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화자는 “베란다에 갇혀 있던 나의 브라만이/나무줄기처럼 이리저리 굽”어 뻗어나가는 것을 마주하고 “고양이가 쓱,/다리에 점점 작아지는 동공을 비비”는 것을 감각한다. 이처럼 화자는 타자를 감각하고 이를 삶의 한쪽에 나란히 둠으로써 강고한 세계의 틀이 강제하는 고착화된 삶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그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구가 카르마로 휘청거리”는 것을 느끼고 “나를 그 곁에 묻”음으로써 카르마에 기반한 인과적 업보를 돌파하는 전회를 모색한다. 혼돈과 모순, 세계의 강제와 갈등으로 뒤덮인 “폭풍의 언덕”과 같은 삶에 우리가 재구성해야 할 잠재적 가능태로서의 시적 수행이 무엇인지 김은상 시인은 “한여름의 아트만”의 사유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창틀에 앉아 있던 거미가 바람 위로 몸을 던”지는 “기투” 너머 사사롭기만 한 “인생이라는 말”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는지에 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거미」).
그 거미의 나를 훔치고 있소
그 거미의 입술은 뜨겁지 않아 좋소만
그 거미의 혀는 불안하기만 하오
그 거미의 나는 거미이지만
그 거미의 거미는 세계라오
(……)
그 거미의 세계가 나의 멸절이기 때문이라오
— 「거미」 부분
시인은 「거미」의 제사에서 거미가 바람 위로 몸을 던지는 것을 ‘신의 기투’로 인식한다면 인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사사로운 것인지 묻는다. 이 물음 뒤로 이어진 구절이 “그 거미의 나를 훔치고 있소”이다. 바람에 몸이 날리는 것을 바람 위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그리하여 그것을 신의 기투로 인식할 때, 기실 “그 거미의 나”는 기투‘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신의 의지에 따라 바람 위로 몸을 던져야 하는 거미는 피투‘된’ 존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거미는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거미의 나”를 훔치고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아니 훔친다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이 카르마적 전회를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화자는 “그 거미의 나는 거미이지만//그 거미의 거미는 세계”라고 인식한다. 이를 통해 화자는 ‘나’라는 존재를 개별적인 것, 즉 사사로운 인생으로 제한하여 바라보며 “그 거미의 거미”를 세계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으로 확장하여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들의 관계가 따로 떨어진 것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 거미의 일요일이 외롭다 하면” 그것은 개별적 존재의 외로움에 국한되면서도 그것이 모여 이루는 ‘거미’의 세계 역시 “우울”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연동된 관계는 카르마적 윤회의 굴레에 속해 있기에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그 거미의 나”를 훔쳐 다른 자리에 옮겨 놓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훔치고 있”는 행위는 훔친 행위로 전환되지 않고 그저 지연될 따름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그 거미의 알들이 부화”하여 “그 거미의 거미를 갉아먹으며” 거미라는 세계를 전복하려 든다. 그리하여 남는 것 없이 사라지는 “그 거미의 세계가 나의 멸절”을 가져온다. 피투된 거미를 훔치고 있는 것은 갉아먹어 지워내는 다른 거미의 기투라는 수행이다. 그것은 개체의 카르마를 공동체적 카르마로 전회하는 행위가 된다. 이 행위 속에서 “나의 멸절”은 “그 거미의 세계”를 영속케 하는 과정이지 결과가 되지는 못한다.
이처럼 개별적 존재의 인생이란 그 얼마나 사사로운 것일까. 그러나 그 사사로움이 결국 공동체적 이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행위를 불러옴으로써 세계를 영속할 수 있게 한다. 다만 다시 물어봐야 할 점은 그러한 세계가 영속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다시 「비정성시」의 마지막 행을 덧붙여 볼 필요가 있겠다. “사람은 뱀의 연못에 바쳐진 어린양이었다”. 시인의 시적 응시 안에 기입된 개별적 존재의 삶은 비정한 세계에서 잉여적 자리를 피할 길이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나의 멸절”이 단지 개별 존재의 죽음으로 전락하지 않으리라는 것, “사랑하는 자의 피투성이로 너에게 가겠다”(「너에게 가겠다」)는 의지로 전유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꽃 진 자리’의 아득함으로 세계 바깥의 결여를 능동적 주체의 기투로 삼아 잉여적 삶을 공동체적 삶의 층위로 옮겨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세계라면 영속을 위한 과정에서 “나를 그 곁에 묻”(「한여름의 아트만」)을 수도 있으리라, 김은상 시인의 시적 세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병국 l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시집 『이곳의 안녕』 『내일은 어디쯤인가요』, 평론집 『포기하지 않는 마음』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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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호(VOL.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