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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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정희성

  신작시: 봄맞이 / 누구나 죽으면 王이 된다 / 보름달이 뜨기 전에

  자선시: 귀울음(耳鳴)  /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시인론] 권성우 “시대의 격류를 응시하는 단정한 시편들”

 

 

 

 

 

 


 신작시 


 

 

 

 봄맞이

 

 

 

     

 

  머지않아 봄이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4월에 선거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뭇잎이 푸르렀다가

  가을이 와서 구절초 피고 눈이 오고

  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오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새봄을 맞기 위해 서둘러

  봄이 올 자리를 비워둬야겠습니다

 

 

 

 

 

 

 

 

 

 

 



 

 

 누구나 죽으면 王이 된다

     

 

 

 

 

  살아서 한 획을 그었던
  그가 흙바닥에 몸을 눕히자
  세상이 숨을 죽이고
  비로소 글자가 완성되었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이틀 전
  늦어도 내일까지는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는 날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을 
  파묻을 구덩이를 파놓았다

  총이 필요하다
  땅속 깊이 폭력을 파묻고
  그 위에 굳건히 평화의 탑을 세울

  총이 필요하다
  지구상의 철기시대를 종식시킬 
  총이 필요하다

  
 

                             
 
* 이 글은 영화 〈총을 든 스님〉을 보고 쓴 것이다

 

  

 

 

 

 

 

 

 

 

 


 자선시 


 

 

 

 귀울음(耳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

  대지가 갈라지는 소리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

 

  그 소리 얼마나 커서

 

  풀벌레 울음소리 삼켜버리고

  뭇 새들 우는 소리 묻혀버리고

  아이들 울음소리 안 들렸을까

 

  오 하느님

 

  탐욕이 집어삼킨 세상

  비명과 한탄과 고통으로 가득한 여기

  온갖 빛이 침묵하는 여기에* 

  
 

                             
 
* 단테 지옥편 제5곡에서.

─ 《시와함께》 2020년 가을호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 이상국 시 「그늘」의 첫 행

─ 《가톨릭문학》 2012년 창간호

 

 

 

 

 

 

 

 

 

 

정희성  l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답청(踏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 『그리운 나무』 『흰 밤에 꿈꾸다』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불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시인론 / 권성우 


  

 

 

 

 

 

시대의 격류를 응시하는 단정한 시편들

ㅡ 정희성 시인의 신작 시를 읽으며

        

 

 

 

  

  1.   

   

  1970년 시 「변신」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한 정희성 시인의 시력(詩歷)은 올해로 어언 55년에 이른다. 등단 반세기를 훌쩍 넘겨 이제 팔순에 도달한 노시인이 시대의 격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쓴 신작 시편을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첫 시집 『답청(踏靑)』(1974)에서 발원하여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시를 찾아서』(2001), 『돌아다보면 문득』(2008), 『그리운 나무』(2013)를 거쳐 『흰 밤에 꿈꾸다』(2019)로 이어지는 정희성 시인의 시적 도정은 늘 시대의 뜨거운 현실과 생생한 아픔을 절제된 언어로 응시한 시간이었다. 등단 이후 지금에 이르는 5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단지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다는 것은 정희성이 꽤 과작의 시인임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정희성이 그만큼 한 편 한 편의 시가 지닌 언어의 밀도와 완성도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정희성의 시는 대체로 명료하고 쉽게 읽힌다. 하지만 그의 시편은 결코 쓰기 쉬운 시에 속하지 않는다. 시대와 인간에 대한 곡진한 이해와 절제된 시적 언어로 가다듬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그런 작품이 정희성의 시편들이다.

  그의 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녀온 입장에서 이 격동기에 시인이 발표한 신작 시들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2.  

   

  치열한 역사의식, 현실에 대한 담담한 시선을 담고 있으면서도 단아하고 명료한 서정시를 써온 정희성 시인의 시적 태도는 이번 신작 시편에서도 여전하다. 먼저 「봄맞이」를 천천히 읽어본다. 이 시에는 지난해 연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격변의 흔적과 이를 접하는 마음의 행로가 진하게 스며 있다.

 

  봄맞이

   

  머지않아 봄이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4월에 선거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뭇잎이 푸르렀다가

  가을이 와서 구절초 피고 눈이 오고

  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오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새봄을 맞기 위해 서둘러

  봄이 올 자리를 비워둬야겠습니다

(「봄맞이」 전문)

 

  이 시는 2025년 1월쯤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월에 선거가 있고”라는 대목이 이런 유추를 가능케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계엄 선포와 탄핵 이후의 대통령 선거가 4월 중순이나 4월 말에 열릴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일반적이었다(그 이후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4월 4일로 예상보다 늦어지며 대선은 2025년 6월 3일로 결정됐다). 시인은 시편 첫머리에 “머지않아 봄이 올 것입니다 / 아니 이미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라고 적었다. 이 대목에서 당시 한국 사회에 몰아닥친 엄청난 변화를 다가올 희망(봄)으로 느끼던 시적 화자의 태도가 오롯이 드러나 있다.

  지난해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후, 계엄에 대한 저항과 탄핵, 헌재 선고를 위한 기다림의 과정에서 분출했던 시민들의 열기, 상식과 정의를 도외시했던 구체제의 몰락과 새로운 희망의 분출이라는 시대적 감각이 시인의 마음 한편에 크게 자리했던 것이리라. 봄이 “이미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는 희망적 예감을 담은 시구에는 급박한 현실의 흐름 속에서 의식적으로 미래에 대한 어떤 낙관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투영돼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뭔가 거창한 변화라는 맥락보다는 평범한 일상의 지속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 선거 이후의 세상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나뭇잎이 푸르렀다가 / 가을이 와서 구절초 피고 눈이 오(는)” 곳일 테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도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들은 태어나고 누군가는 세상을 뜨리라.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연의 순리이자 세상의 이치다. 이 같은 시적 태도는 이 시를 시대에 항거하는 저항시의 맥락보다는 한층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게끔 만든다.

  시인은 시대의 격류에 쉽게 절망하지도 않고 쉽게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는 희망이 새롭게 분출하는 상황, 역사의 봄날이 다시 도래하는 징후를 담담하게 마주한다. 이런 태도가 단지 격동적인 시대의 흐름에 대한 방관에 그치는 건 아닐 테다. 시인은 명백히 새로운 희망을 일구는 편에 서 있다. 하지만 그 태도는 격정적 실천 쪽이라기보다는 ‘은근한 편들기’에 가깝다. 이런 존재 방식은 때로 적극적 동참 못지않게 귀한 태도이리라.

  이 시의 마지막은 “새봄을 맞기 위해 서둘러 / 봄이 올 자리를 비워둬야겠습니다”라는 시구로 끝난다. 시인은 현실의 혁명적인 변화와 그 파장을 기꺼운 태도로 받아들인다. 이 역사의 급박하면서도 도도한 흐름은 시인이 간절하게 원했던 과정이다. 그래서 어떤 다른 것이 차지한 자리를 비워둘 정도로 새봄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것이다. ‘서둘러’라는 부사에 시인의 이런 마음이 그대로 배어 있다.

  시 「봄맞이」를 관류하는 정희성 시인의 감성에서 생의 말년에 이른 시인의 담담한 지혜와 성숙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그는 위태로운 역사의 파고들, 여러 대통령의 생사와 굴곡진 행적, 파란만장한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체험해 왔다. 그로 하여금 민중시라 불리는 시적 세계를 지속적으로 일구게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땅의 현대사와 만난 시적 운명이었다. 이런 험난한 세월을 거치며 시인에게는 역사와 정치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선, 동시에 시를 짓는 그만의 방법과 자세가 형성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봄맞이」는 정희성 시인의 이 같은 시선과 시적 자세가 낳은 가편(佳篇)이다.

   

  3.  

   

  또 다른 신작 시편인 「보름달이 뜨기 전에」 역시 정치·사회적 맥락을 면밀하게 조회하며 해석해야 그 온전한 시적 의미가 체득되는 작품이다. 시 전문은 이렇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이틀 전

  늦어도 내일까지는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는 날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을

  파묻을 구덩이를 파놓았다

 

  총이 필요하다

  땅속 깊이 폭력을 파묻고

  그 위에 굳건히 평화의 탑을 세울

 

  총이 필요하다

  지구상의 철기시대를 종식시킬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전문)

 

  명료하지만 상식적인 사실, 어떻게 보면 심오한 진리를 전달하는 시편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총’은 단지 물리적 수단이나 사람을 살상하는 도구만을 의미하지 않으리라. 그건 ‘악의 근원’을 파묻기 위한 저항의 열정과 단단한 의지를 표현하는 시적 상징에 가깝다. 시인은 선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땅속 깊이 폭력을 파묻고 그 위에 굳건히 평화의 탑을” 세우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강력한 힘이 아니면 악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항적 주체의 단합된 힘과 투철한 의지, 조직적 지혜가 없으면, 악을 떠받치는 세력들은 언제든지 호시탐탐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다시 파시즘이 고개를 든다. 그게 세상사의 냉엄한 이치다. 순수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나약한 정의가 얼마나 자주 패배해 왔던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생각건대 이 땅의 험난하고 굴곡진 역사와 민주주의의 지난한 과정도 그 자명한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동시에 정의를 향한 의기와 치열한 저항이 처절한 실패나 원통한 죽음, 비참한 궤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의기와 저항이 없었다면, 시인이 2020년에 「귀울음(耳鳴)」이라는 시편에서 묘사한 “탐욕이 집어삼킨 세상 / 비명과 한탄과 고통으로 가득한 여기”를 바꾸기 위한 어떤 비전과 희망도 발견하기 힘들었으리라.

  2024년 12월 3일 예기치 못한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목숨을 걸고 국회로 달려간 수많은 시민의 용기를 기억한다. 남태령에서, 헌법재판소 앞에서, 광화문에서 밤을 지새운 청춘들의 존재를 기억한다. 그들의 단단한 의지, 즉 명백한 불법 계엄에 대한 맹렬한 저항정신을 품은 ‘마음의 총’이 아니었더라면 이 땅의 역사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지 않았을까.

  시인은 「보름달이 뜨기 전에」의 마지막 연에서 “총이 필요하다 / 지구상의 철기시대를 종식시킬 / 총이 필요하다”고 읊었다. 이런 구절은 이 시를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적 맥락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문명사적 의미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총 역시 철기로 된 물질이다. ‘지구상의 철기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도 철로 만든 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비유컨대 근대성 이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진실과 통한다. 그렇다면 철기에 해당하는 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넓게 보면 “철기시대를 종식시킬 / 총이 필요하다”는 표현이 시사하듯이 이 시는 기후 위기 등으로 인한 인류세 시대의 종말이라는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시대의 현실과 정치에서 출발한 정희성의 시적 관심은 늘 더 넓고 깊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오랜 세월 궁굴려 이제 자연스럽게 체화된 그만의 시적 기법이자 깊은 메시지이지 싶다.

     

  4.  

 

  정희성 시인은 『그리운 나무』(2013)에 수록된 「시인」이라는 제목의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시인

 

  그대에게 가닿고 싶네

  그리움 없이는 시도 없느니

  시인아,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아라

(「시인」 전문)

 

  아마도 이 시적 메시지는 시인 자신에게 던지는 자기 다짐이기도 할 테다. 정희성이야말로 한평생 시적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늘 청년의 마음으로 간직하며 살아온 시인이 아니던가. 앞으로 남은 시인의 생에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 그리움이 시적으로 개화하고 시인이 건강해서 조만간 정희성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에 해당하는 새로운 시집을 읽게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다.

  이제 시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완연한 봄날이다. 지난 계절의 지난한 저항과 의기, 지혜가 과연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똑똑히 지켜보아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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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  l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저서  『비평의 고독』 『낭만적 망명』 『​​​​​​​비평의 매혹』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등이 있음. 〈임화문학예술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서울대 대학문학상〉 등 수상. 현재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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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VOL.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