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강성은
신작시: 구덩이 / 재생 반복 / 눈보라
자선시: 미귀가 / 당신 집의 모든 것
[시인론] 조대한 “불안의 자리”
신작시
구덩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구덩이를 피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며칠 사이 새로 생긴 것으로 마을 사람 여럿이 구덩이에 빠졌다고 했으며 그중 하나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삽을 들고 구덩이를 덮었으니 안심하라는 말도 들었다 우리는 분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기쁨을 감추고 길을 살피며 조심조심 걸었다 거리는 어두워졌고 이따금 가로등이 아무도 없는 길 위를 비추고 있었다 구덩이도 그 무엇도 없었다 구덩이가 생기면 덮고 덮고 덮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덩이는 생겨나고 생겨나고 생겨나서 우리는 구덩이가 없어도 깊숙한 곳에 자꾸만 발이 빠지곤 했다 저 멀리서 아이를 잃은 집들이 환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금세 닿을 것 같아 우리는 캄캄한 길에 알 수 없는 밤에 구덩이에 누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서둘러 발을 내밀었는데
재생 반복
사촌은 감기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널고 마른 옷을 개는 동안 어제 듣던 음악이 또 흘러나오고 창밖은 고요하다 폭설이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제 시끄럽게 복도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오늘은 유령처럼 지나간다 그사이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나는 밥을 조금 먹고 잠을 많이 자느라 기억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재생되고 있는 것을 모른다 어디선가 나쁜 냄새가 난다 이 냄새를 기억한다 불안의 냄새 뉴스에는 비슷한 옷을 입은 비슷하게 생긴 남자들이 계속 나온다 전쟁이 난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거리에 있다 감기에 걸린 줄 알았는데 무서운 병이었다고 한다 또 겨울이다
눈보라
도로 한가운데 자동차들로 둘러싸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달려가던 채로
정지해 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자동차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문득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그건 산 사람의 일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가야 할 곳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잃고 서 있다
눈보라 속에 있다
자선시
미귀가
빈방에 잠이 짐처럼 쌓여가고
발 디딜 곳이 없어 여자는 문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알람이 울리면
퇴근길이 출근길이 되고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모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아는 골목으로 나온다
골목과 골목 사이
알다가도 모르겠는 시간이 흐르고
짐보따리 하나를 든 여자가 잠옷 차림으로
서울역 앞에 서 있다
겨울바람이
한밤중 흰 새들을 마구 떨어뜨린다
새들을 밟고 손을 호호 불며
막차를 타려고 사람들이 뛰어간다
ㅡ 《시와사상》 2023년 봄호
당신 집의 모든 것
그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가족들은 그가 집에 머무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집에서 죽는 것을 반대했다 죽은 그가 한밤중에 소리를 지를까 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그가 집을 떠나지 않을까 봐, 죽은 그가 여전히 밤마다 무언가 하려고 할까 봐, 알 수 없는 침묵이 비 내리게 하고 집안 공기를 싸늘하게 하고 층간소음으로 이웃을 괴롭힐까 봐, 폴터가이스트로는 해명되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반대했다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반대했다
그가 죽기 전 간절히 원했던 것은 집에서 죽는 것뿐이었는데
죽고 나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집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은 반대했다
그를 두고 이사했다
오늘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가
집으로 향하고 있다
모두가 반대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ㅡ 《포엠피플》 2023년 겨울호
강성은 l
2005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단지 조금 이상한』 『Lo-fi 』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가 있음.
시인론 / 조대한
불안의 자리
편혜영 소설가의 『홀(The Hole)』이라는 작품이 있다. 표제인 ‘홀’은 여러 가지 함의로 해석 가능하나 일단 직접적으로는 등장인물이 마당에 파고 있는 구덩이 그 자체를 가리킨다. 사연인즉슨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난 딸의 남편이자 반신불수가 된 사위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딸 부부의 삶을 끔찍한 비극으로 몰아간 여행과 교통사고가 실은 사위의 불륜과 배신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복수를 위해 집 마당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덩이는 식물인간에 가까워진 사위를 실로 식물처럼 심어두기 위한 자리일 수도 있고, 죽은 딸을 기리는 봉분의 터일 수도 있겠다. 또 작품 속에서 ‘홀’은 인물들의 마음에 생겨난 검은 구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한 뒤 느끼는 허무한 감정 같은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각기 그 마음의 공동을 메워보려 애를 쓰지만 뻥 뚫린 공허함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고 결국 그들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즉 마당의 구덩이든 마음의 구멍이든 그것은 보통의 삶과 일상이 온전하고 평화로운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코 바깥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어떤 어둠인 셈이다.
강성은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신작시의 첫 작품 또한 「구덩이」라는 표제로 시작된다. 해당 작품 안에서 ‘구덩이’는 마을 사람들이 피해 다녀야 하는 대상이자 구전으로 떠도는 불길한 소문으로 묘사된다. 며칠 사이 생겨난 구덩이는 많은 이들을 공혈에 빠트렸고 사람들 중 일부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주변을 떠돈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 몇몇이 함께 나서서 구덩이를 메웠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가이 길을 나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깊숙한 곳에 자꾸만 발이 빠지곤 했다”. 아무리 크게 눈을 뜨고 조심조심 걸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우리들의 발걸음을 재차 어둠 속으로 잡아당긴다. 눈 밝고 용기 있는 이들이 앞서 수많은 구멍들을 “덮고 덮고 덮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구덩이는 생겨나고 생겨나고 생겨나서” 결국 우리들은 무지와 불안이 뒤섞인 캄캄한 진창 위를 헤맬 수밖에 없다.
다음 작품인 「재생 반복」에서도 불안의 징후는 계속된다. 긴 잠에 들었던 ‘나’의 주위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억의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 유독 선명한 것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나쁜 냄새”이다. 무의식적인 본능 탓인지 혹은 불쾌한 냄새의 강도 때문인지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나는 그 냄새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불안의 냄새”이다. 그 냄새는 제복을 입은 듯한 무리의 남자들과 “전쟁”의 총탄에서 피어나는 화약의 냄새일 수도 있고, 감기와 비슷한 증상으로 사촌을 죽게 만든 “무서운 병”의 악취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의 불가해한 구덩이처럼 직접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징후이자 유령과 같이 집안을 떠도는 불길한 낌새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나’가 주변으로부터 일정 부분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사람들이 거리로 흘러나오고 나쁜 냄새가 이리저리 풍겨오는 와중에도 나는 빨래를 하고 마른 옷을 개키고 밥을 먹으며 고요한 일상을 영위한다. 동면에 빠진 동물들처럼 긴 잠에 빠져 있다 깨어난 나의 시간과, 반복 재생하듯 내 주변을 지나가는 존재들의 시간 사이에는 모종의 시차가 놓여 있는 듯싶기도 하다.
도로 한가운데 자동차들로 둘러싸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달려가던 채로
정지해 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자동차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문득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그건 산 사람의 일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가야 할 곳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잃고 서 있다
눈보라 속에 있다
― 「눈보라」 전문
인용된 위의 시편에서도 주변과 단절되어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은 되풀이된다. 나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아포칼립스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사람들이 증발한 도시에 홀로 남아 서 있다. 반복되는 겨울의 시적 배경과 눈 내리는 날씨 또한 그 고립감과 적막감을 심화시킨다. 다수의 존재들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이전과는 달리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어딘가에 빨리 다다르려 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동차들은 “모두 달려가던 채로 / 정지해 있다”. 죽거나 사라진 이들은 응당 운전을 할 수 없고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그건 산 사람의 일”일 텐데, 주인을 잃고 버려진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마치 “가야 할 곳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옹기종기 서 있다. 나는 도로 위에 갇힌 영혼이 되어 흔적으로만 남은 그들의 텅 빈 질주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강성은 시인의 신작시 세 편은 각각의 시적 공간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별개의 매혹적인 작품이지만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범박하게나마 중첩되는 몇몇의 요소들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각 작품들의 한가운데에는 마당에 파인 구덩이처럼 깊이를 알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기보다는 불길한 징조와 낌새가 되어 작품의 분위기를 내리누른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이동하는 또는 부유하는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는 구덩이가 있음에도 아이들은 집을 향해 걸어간다. ‘나’가 잠이 들기 전에도 아이들은 뛰어다녔으며 잠에서 깬 후에도 유령처럼 내 옆을 지나간다. 운전자가 사라진 자동차조차 자신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멈춘 뒤에도 여전히 어딘가로 달려갈 것처럼 도로 위에 모여 있다. 반면 나는 멈춘 채로 서 있다. 아니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주변의 존재들과 상반되는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다른 이들이 기계처럼 주변을 반복하여 돌아다니는 동안에 나는 잠에 빠져들고, 그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서야 홀로 잠든 이들의 곁을 맴돈다. 아마도 나는 여타의 존재들과는 다른 시간의 시차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시차의 연유를 명료하게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일단 나와 그들의 대비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움직이는 이들의 거센 맹목성이다. 그들은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반복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생이 다한 뒤에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제스처를 멈추지 않는다. 이를 ‘불안’과 연관지어 본다면 이런 가정도 가능할 것이다. 불안의 구덩이가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 바깥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심연이자 현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공포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 두려움을 애써 잊으려 바삐 다리를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잠잠한 불안의 낌새를 감각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움직임과 둔감함으로 심연의 구멍들을 덮어버리기 위해 좀비 같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불안의 구덩이는 단순히 일상을 침범하여 붕괴시키는 외부의 구멍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지탱하는 내부의 은밀한 중핵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일상을 허무는 공백이자 인생에 생겨버린 커다란 공동이 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그 구멍을 메워보려 애쓰는 방식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속시키기는 원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 숭숭 뚫려 있는 불안과 공포의 구멍들은 이곳의 평온한 현실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중심축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구덩이는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등에 남은 상처처럼 스스로 만지고 감각하기 힘든 세계의 맹점인 까닭이다. “우리는 캄캄한 길에 알 수 없는 밤에 구덩이에 누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서둘러 발을 내밀”(「구덩이」) 뿐이다. 시인이 유독 그 불안의 낌새들을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현실의 속도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불안의 직접적인 정체보다는 그것을 감지하는 시인에게 향해야 한다. 시인은 어째서 사람들과 반대되는 자리에 놓여 있어야 했을까. 왜 강성은의 시적 주체들은 세상과 한 발자국 단절된 거리에서 깨어나고 현실과는 다른 시차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인용된 세 편의 시와 앞서 나열한 억측만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이는 시인의 또 다른 텍스트와 연속된 시적 주체, 한국시사의 맥락이 별도로 추가된 긴 작가론적 논의가 필요한 일이기에 제한된 지면에서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일인 듯하다. 아쉽지만 여기서는 시인이 고른 자선시 두 편에 약간의 첨언을 덧붙이는 것으로 논의를 추슬러야 할 것 같다.
「미귀가」라는 시편에서도 뚱하니 세계로부터 돌출되어 나와 있는 듯한 ‘나’가 등장한다. 나는 잠이 들었다가 갑작스레 깨어나 상경한 사람처럼 “잠옷 차림으로 / 서울역 앞에 서 있다”. 멍하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바쁘게 주위를 걸어 다닌다. 출근길의 첫차와 퇴근길 막차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새들을 밟고 손을 호호 불며” 이리저리 급하게 거리를 쏘다닌다. 제시간에 움직이는 그들과는 달리 나는 마치 움직이면 안 되는 시간에 배회하는 몽유병 환자처럼 “골목과 골목 사이”, “알다가도 모르겠는 시간” 사이를 헤매고 있다. 잠시 일별하였을 뿐이지만 이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강성은 시인 고유의 시적 풍경이라 할 만하다. 시의 감상은 이렇게 완료해도 충분하나 여기에 ‘집’이라는 상징 하나를 더해보자.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이다.
그는 집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가족들은 그가 집에 머무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집에서 죽는 것을 반대했다 죽은 그가 한밤중에 소리를 지를까 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그가 집을 떠나지 않을까 봐, 죽은 그가 여전히 밤마다 무언가 하려고 할까 봐, 알 수 없는 침묵이 비 내리게 하고 집안 공기를 싸늘하게 하고 층간소음으로 이웃을 괴롭힐까 봐, 폴터가이스트로는 해명되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반대했다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반대했다
그가 죽기 전 간절히 원했던 것은 집에서 죽는 것뿐이었는데
죽고 나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집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은 반대했다
그를 두고 이사했다
오늘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가
집으로 향하고 있다
모두가 반대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 「당신 집의 모든 것」 전문
위 시편의 주요한 시적 대상이자 피관찰자는 ‘그’이다. 그는 집에서 태어났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간절히 집에 머물기를 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족들 누구도 그를 집에 두길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한밤중에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이 잠든 밤마다 유령처럼 온 집안을 달그락거리며 돌아다니고, 기이한 침묵으로 집안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고, 폴터가이스트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무언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불안과 공포를 바깥으로 추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집’은 대개 한 사람이 태어나 최초로 맞이하는 사회적 공간이자 안식처일 것이다. 허나 그에게 집은 공동체와 자신의 어긋남을 마주하고 그들로부터 배제된 장소였을 따름이다. 앞서의 작품 「미귀가」를 떠올려보자. 잠옷 차림의 ‘여자’가 망연자실하게 거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발 디딜 곳이 없어”져 버린 자신의 방에서 그녀가 도망치듯 내쫓겼기 때문은 아닐까. 그와 여자는 간절하게 집에 머물기를 바랐으나 끝내 쫓겨난 방랑자가 되어 골목과 거리 여기저기를 떠다닐 수밖에 없었다.
죽음 이후에야 귀가에 성공한 그는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갇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집을 떠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지박령 신세가 되어버린 그는 감옥과도 같은 그곳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듯싶다. 결국 가족들은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반대”하게 된 셈이다. 다만 그런 거센 반대와 부정에도 그들이 두려워하던 존재들의 여파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갓 “태어난 아이가 /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후반부의 구절은 그들 “모두가 반대하는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고, 불안의 씨앗 역시 온전히 계승될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이 시는 마치 시인의 시적 주체가 탄생하게 된 전사이자 프리퀄을 보는 듯한 묘한 기대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강성은의 시 세계에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잠옷 차림으로 막연히 세계와 마주 섰던 젊은 시절의 여자가 되기도 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려움 속에서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아갔던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며, 모든 침묵이 눈처럼 내려앉은 고요한 집 안에서 세상과 괴리된 채 영원히 자신의 수의를 짜는 유령이 되기도 한다. 그의 시가 탁월한 것은 우리가 애써 지우고 덮어두려 했던 불안의 자리를, 어느 순간 잃어버렸던 기억의 편린들을, 우리 삶에 달라붙어 있는 몽환의 이질적인 풍경을 이토록 아름답고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조대한 l
2018년 《현대문학》 문학평론 등단. 비평집 『세계의 되풀이』, 공저 『시, 인터-리뷰』가 있음.
—
2025년 2월호(VOL.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