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김경미
신작시: 근황 / 안녕 월요일 / 기념 타월
자선시: 비망록 / 취급이라면
[시인론] 김효숙 “일인칭의 슬픔”
신작시
근황
벼락을 맞았습니다
단 하루 만에
가을로부터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길쭉한 소매 덕분에
기차를 발견했습니다
창가 좌석
이제 단풍들 앉을 차례인데
순식간에 또 벼락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또 목숨을 건집니다
오늘은 두터운 양말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덕분에
슬픔과 우울을 발견했지만
미운 곳이 하나도 없는 저녁
덕분에
매일 건지는 날들
버릴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안녕 월요일
얼마나 고생들이 많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월요일이어서 미안합니다 월요일을 좋아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나이와 관심은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어서
내 월요일에도 다른 무게와 깊이가 생겨버렸습니다
문이 많아 즐겁습니다
주말 내내 참고 견딘 복통도
멈춰선 냉장고에서 녹아내리는 물줄기도 다 들여보내 주니
번호표 벨 소리가 얼마나 신선한지
무사히 변경되는 것들
다른 궁금한 사항은 없습니까 있어도
당신을 응대하는 직원은 당신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존중해주세요
우체국에도 관공서에도 편의점에도 곳곳마다
나도 모르는 내 자녀들이 일해서
뭐든 다 통과될 것 같은
존중의 영수증을 얻고 뒷굽을 갈고 고기 앞에
줄을 서는 월요일
사과할게요 일주일 내내 등산복 차림이면서
빠르게 굴러가는 바퀴를 더 좋아해서
진정한 인생은 월요일로부터
월요일은 제2의 인생
인생의 천직은 월요일이어서 사과드립니다
모두 다 월요일이 병인 그대들 덕분임을
월요일이 비애였던 내 지난날들도
내 자녀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잊지 않고 미안합니다 월요일이어서 처음 만나는 나이 든 월요일이어서
기념 타월
‘못내 쓸쓸한 날입니다’라고 새긴
기념 타월을
삼백 장쯤 주문하는 날
다 돌리고도 남아서
매일 하루에 한 장씩 쓰고 버려도 남아서
누구든 집어가세요 길가에다 내다놓을까
오늘은 또 한 장 새로 꺼내
가로수를 닦아볼까
길고양이를 닦아볼까
며칠이고 몇 달이고 산더미같이 닦고 나면
다른 기념 문구가 떠오르고
새로운 기념 타월이 도착하리라
그때까지 ‘못내 쓸쓸한 날입니다’로
말끔히 말끔히 얼굴을 닦는 날들
자선시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주저앉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김경미 l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등이 있음. 〈노작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김종삼문학상〉 등 수상
.
시인론 / 김효숙
일인칭의 슬픔
ㅡ김경미의 시
1. 슬픔이 나를 이끈다
시는 시인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바라본 언어다. 패턴화한 언어가 비시(非詩)라면, 시는 패턴을 일껏 흐려 놓는다. 해석하려 할수록 의미가 빠르게 사라지는 이 언어는 읽는 것이기보다 듣고 느끼는 것이다. 그 의미를 밝혔다 하더라도 동시에 이 각주들이 사라져야만 시가 된다. 김경미의 시 중 해석을 거부하는 듯한 시가 우리에게 올 때도 이 같은 경로를 따른다. 말은 가라앉고 감정이 대신 그 말을 전하는 듯한 시에서 주요 정동은 슬픔이다.
슬픔은 예전의 기쁨으로부터 생기는 거라면서 슬픔이 슬픔을 변화시킨다는 횔덜린 식의 인식은 김경미의 초기 시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고통은 타인의 것일 뿐이라며 그 고통에 무감각한 인간을 성찰한 아렌트 식도 아닌, 고통은 타자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우세한 편이다. 달콤함이나 평화·안정을 구하기보다 불행하다는 감각과 자괴감으로 얼룩진 주체의 내면을 보면 슬픔은 그 자체로 고스란히 그의 삶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이후 진전된 의식으로 슬픔의 연원을 사유하게 되면서 자신과 타자 사이, 시인과 생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감정이 눅진하지도 참담하지도 않게 시종 시에 어룽거린다. 시적 주체는 슬픔으로 하여 삶을 실감하고, 타자가 있기에 자기를 알게 되지만, 동시에 타자와의 거리 두기로 상처를 방어해야 한다. 슬픔이야말로 정화된 기쁨을 위해 청명해지는 일이라고 한 횔덜린 식 사유1)는 최근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2024년 김종삼문학상을 수상한 김경미는 문학 내적으로는 모더니즘이, 외적으로는 라디오 방송 종사자로 생계를 꾸렸다는 점이 김종삼과 비견될 만하다. FM 라디오 구성작가인 김경미(시인이자 아나운서인 김경미는 동명이인이다) 시에서 주체는 번번이 이 세계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가고, 일상사에도 줄곧 슬픔이 배어 있으나 그 상황이 구체적이지는 않다. 특히 초기 시는 시현실에 범람하는 슬픔을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게 한다. 출판사 편집부 직원, 음악 방송 종사자라는 전기에 비추어 시를 읽으면 구체성이 은폐된 정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전기와 시를 매개하는 언어가 있는 한 시적 진실과 사실은 무난히 일치하기 어렵다.
시는 시일 뿐. 한 편의 시는 시인의 사유 과정에서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낸 언어다. 김경미 시에는 슬픔이 살아서 움직인다. 슬픔이 삶보다 강하고 죽음보다 깊다. 신이 사라진 시대의 비극을 새겨 넣은 듯한 그의 시에 넘치는 슬픔이 막상 자본주의 물신이 팽배한 시대를 노골화하지는 않아서 그 의미를 명쾌하게 추려내지도 못한다. 시인이 정신적으로는 신앙을 계승하는 것 같으면서도 경험적으로는 회의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직접 경험과 슬픈 생각이 수시로 전도되는 도정에서 그의 시가 태어났다면 얼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인에게는 사회적·개인적·철학적, 그리고 종교적 작용들이 누락할 수 없는 슬픔의 심리적 표현을 두루 가능케 한다.
첫 시집(『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1989)을 출간한 1980년대에는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을 뒤섞어, 슬픔을 말하기보다 당시 사회인에게 익숙한 절망, 그리고 행복·안정·평화에 좌절하는 불행의 감각을 사실적으로 묘파한다. 공포 정치, 여성 노동자에게 가하는 자본 주체의 폭력, 성고문 사건을 비호하는 법질서의 역행을 제시하고, 귀부인이냐 하녀냐 매춘부냐는 3분법으로 여자의 성분을 판별하는 시대를 들추는 등 직정적인 언어로 사회적 근육을 지닌 시를 썼다. 시인이 요약한 대로라면 이 시대는 회색 인간 또는 오입쟁이의 검은 속이 횡행하던 무렵이다. 병중인 아버지, 그의 사후 어머니 중심의 신앙 가족 구도가 선연한 이 무렵의 시에서는 관계들 간 상호 작용도 매우 사실적이다.
6~7년의 시차를 두고 일곱 권의 시집을 내면서 자타 간 관계의 산물인 고통과 슬픔을 다양한 사건들에 녹여냈다. 첫 시집의 구체성을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1995)에서는 은폐로 돌린다. 1980년대로부터의 출구 전략이라고나 할까. 이전 시대를 털고 나와 서정적 모더니즘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매우 낯선 어법을 구사한다. 이는 타자적 속성을 지닌 모든 개인·가족·종교·직업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슬픔에 관하여 랑그를 흐려 놓고 파롤을 구축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면서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주관화하여 그에 따른 고통을 일반화하는 것은 어렵다고 전한다. 자기화한 고통이야말로 진짜 고통이라는 것. 고통을 앓고, 고통을 살면서도 고통 때문에 죽지는 않게 되므로 고통이야말로 삶의 동력인 셈이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엔진을 ‘슬픔’(「귓병」)이라 하면서 이 감정이 자신에게서 나와 생애를 휘젓는다고 쓴다. “누르면 아무 데나 물 나오는 / 친수성”(「멸치의 사랑」)이 그 슬픔의 성격이다.
먼저 전화를 걸지 않고 “매일 전화기 옆에 산처럼 쌓여 슬픔을 집대성”(「소식」)하는 심리를 보더라도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방어를 더욱 굳건히 부추긴다. 자유를 얻기 위한 행위가 스스로 무서워져 울기도 하고(「출분」), “사랑도 오늘은 너나 혼자 해!”(「슬픔이 너무 큰 날은」)라고 말하는 근거도 타자와의 관련으로 깊어질 상처를 서둘러 차단하는 행위다. 이 같은 사정의 발단은 사회의 어느 뒷면을 보게 된 날에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진심이 / 둘 이상”(「하이힐」)인 분열사회에서는 유일한 진실은 실종되기 때문에, 진실 찾기는 두 개의 진심이 몸 바꾸기를 하는 기만으로 나타난다. 특히 두 번째 시집은 슬픔의 이유를 기표화할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듯 고통의 이유가 음소거된 채 감정으로만 언표된다. 어쩌면 이는 “팔공년의 나라”와 “구공년의 나라”(「틈에서」)의 틈에서 찌꺼기처럼 누적된 구습이나 악습에 기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흔적으로 어룽거리던 슬픔이 다시 구체성을 입고 나타난 것은 『쉬잇, 나의 세컨드는』(2001)부터다. 자아의 속성을 지뢰에 비유하면서 타자 파괴를 자행하는 자아에 자기혐오를 느낀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아파하던 자아가 역으로 상처를 주는 자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런 이유로 직접적인 대면을 대체하는 상상적 만남의 장을 마련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단독자 의식이 자리잡혀 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의식이 사회로 확장하면서 무력 앞에서 촛불의 힘으로 맞서는 조용한 항거의 방식을 시화하기도 했는데, 이는 자아의 객관화와 사회화를 가능케 한 것이 마이너리티 의식임을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고통의 원인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았던 시인이 신에게로 시선을 돌린 건 매우 당연한 일일 테다. 시인은 애초에 신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신이 그를 돌보지 않았을 뿐이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2008), 『밤의 입국 심사』(2014)에서 이뤄지는 신에게로의 도약은 상처와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초월의식의 반영이다. 사과 대상이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점에서 이 슬픔은 일반적이지 않다. 근심하는 자만이 오직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쓴 경전을 들면서 슬픔의 연원이 “근심”에 있음을 시사한다. 근심이 많은 자의 내심에는 상호 간 오간 말이 양면 거울을 사이에 두고 상흔으로 잠재해 있다. 관계들 간 가학과 피학이 교차할 때의 슬픔이 그를 아프게 하고 깨어 있게 한다. 육식종 인간의 잔인성, “한 장의 활엽수”(「진화론」) 같은 푸른 지구를 발견한 뒤 눈이 맑아지는 경험을 하기까지 그는 무수히 분열하는 타자와 사회를 경유했다. 타자와의 차이로 존립하는 자기, 타자에게 늘 거슬리는 자기를 발견한 시인이 시 바깥의 직업인이기도 하다는 경계적 인식도 표명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도 천천히 숨을 쉬며 말을 아껴 시를 쓸 수 있는 힘, 오후 네 시 정각에 어김없이 직업인의 자리를 벗어나 시인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도 시를 쓰는 사람이기에 자처하는 외로움이다.
클래식 FM 구성작가 시절에 써서 송출한 시를 묶은 시집(『카프카식 이별』(2020),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2023))은 방송 문화와 결합한 시 장르의 출현을 선도한다. 자아에 함몰된 채 슬픔이 자신의 삶을 이끈다고 믿었던 시인은 이제 이유 없는 슬픔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경험을 누군가 자신을 용서한 덕분에 알게 되었고(「용서의 냄새」),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간격을 유지하는 이유는, 자신의 기분은 모두 자기 사정에 따르고, 친구가 없더라도 맑은 하늘은 열리며, 넘치는 약속보다 한갓진 고독이 더 즐거워서다. 슬픔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홀로 있는 이 시인의 쓸쓸함은 초월적이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과 거리를 둔 사람이 우울에 빠지지 않고 “고독해서 재밌는”(「약속이라면」) 자신을 고백할 때 그에게는 외부와 수신을 끊은 채 홀로 처해야 하는 사정이 개재한다. 특정 학설에 대한 신봉, 의미가 고정된 세계에 반발하면서 매우 개별적인 언어로 이런 점을 전달한다. 탄생·삶·죽음으로 이어지는 행로에서 그 누구도 홀로인 존재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단독자 의식. 하여 슬픔이 삶의 조건이 되어 버린 사정을 김경미 시인은 이야기한다.
2. 신이 사라진 곳에 오는 시
하이데거가 찬양한 횔덜린이 시인 중의 시인이었던 건 그가 존재의 본질이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순수성과 성스러움을 자신의 시에 담아낸 데 연유한다. 시인이 “이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고 한 횔덜린 시에서 거주의 의미를 하이데거는 “신들의 현재 안에 서 있으면서 사물들의 본질 가까이 관련되어”(79쪽) 있다고 풀이한다. 신이 사라져 궁핍해진 시대에 시인이 쓰는 말이 성스럽다는 의미는, 시인의 언어로 근원에 가 닿고자 하는 데 있는데, 신의 결여가 시인을 도와 그 일이 가능해지므로 선물과 같은 것이라는 것. 있으나 멀리 있어서 성스러움이 결여된 신 대신에 시인이 성스러운 말을 쓴다는 것이다. 만유를 마음에 품은 횔덜린의 정감, 근원의 자연을 향한 회귀 의식 등은 김경미의 최근 시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시인은 등단작 「비망록」에서 인간을 버렸거나 방치하면서 무관심해진 신, 더불어 슬픔의 근원인 타인도 철필로 긁어 쓰듯이 기록해 두었다. 등단작에서부터 신이 사라진 시대의 세계관과 대타 의식을 표명한 셈이다. 그는 일찍이 근본적인 결핍에 민감한 시인이다.
비극을 하나의 놀이라고 한 루카치가 비극을 신이 구경하는 놀이라 했을 때, 신은 인간의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에 불과하다. 그 신은 인간의 언행에도 개입하지 않는다.2) 신이라는 전체 속에서 낱낱이 부분일 뿐인 인간이 슬픔의 연원을 찾게 된다. 그는 「비망록」에서처럼 신과 숨바꼭질 놀이를 했기 때문에 생애를 적시는 슬픔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파스칼이 “숨은 신”의 뜻을 “현존하며 동시에 부재하는 신”(골드만, 49쪽)이라 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는 듯한 장면이 아래에 펼쳐진다.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ㅡ「비망록」 부분
여자는 스물네 살. 신과 숨바꼭질도 하고, 사내와 거짓 겨루기도 해 보았다.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관심조차 놓아 버린 듯한 “거만한 술래”인 신은, 또 다른 시 「귀가」(『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1989)에서 “가난과 싸움과 기도 소리만 들끓는 집”으로 들어가기 싫은 주체가 지닌 어린 시절의 무서움·불안·절망과는 다른 감도를 유발한다. 비망록의 여자에게 신은 놀이 상대이므로 그녀가 버려지고 방치되는 비극을 만든 장본인이다. 반면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려 외톨이로 남은 「귀가」의 주체는 신의 외로움을 상연한다. 비망록의 여자는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기다림과 고독의 화신이 되었으나, 「귀가」에서 단독자는 환경이 결정하는 범위에서 공포의 주체로 남아 있다.
비망록의 여자는 “사내”와 거짓 겨루기를 하면서 사랑의 외장을 두른 어떤 게임을 벌이기도 한다.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타자가 없이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를 낳고 싶었”을 여자. 이는 스물네 살에 성모 같은 여자가 되고 싶었던 상상이 낳은 아이일 것이다. 어쩌면 여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과 닮은꼴의 감정놀이를 그 사내와 했을지도 모른다. 곧 녹아 버릴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처럼 순결한 사랑을 말이다. “아무 일 아닌 듯”과 “해도”의 간격을 훌쩍 벌려 놓은 데서 보듯이 마음의 공터에는 여전히 “행복과 거짓”의 자리가 비어 있다. 하여 거짓을 써 없애며 행복을 구하지는 않았던 투명한 자아가 그 자리를 자신의 마음으로 채울 편지글을 쓰고자 한다.
김경미는 신이라는 전체성 안에서 미물에 불과한 인간 개체의 슬픔을 매우 실존적으로 표명한다. 어린 시절에 내면화된 버림받은 자라는 절망,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막연함이 이 슬픔의 근원이다. 자기 안으로 도피하여 외부를 만들면서 안전하게 자기 안에 거하는 여자이면서도 이 미약한 존재자는 「파트모스」 송가에서 “심연 위에 가볍게 지어진 / 난간 다리를 건너”(횔덜린)는 것처럼 기적을 꿈꾼다. 이는 잃어버린 신으로 하여 불신이 깊어지면서 더불어 삶도 깊어졌다는 반응일 테다. 그러므로 절벽에 꽃을 피우고, 강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겠다는 상상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증상을 앓는 자의 포부라 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여자가 시인이라는 걸 알고도 남는다. 기껏해야 행복의 뒷면만 보았거나, 써 없애지 못한 행복이나 거짓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 앞에서 사심 없이 웃어 줄 자는 곧 녹아 버릴 “눈발 같은 아이”처럼 마음이 투명해야 한다. 신이 사라져 궁핍을 절감하는 시인은 신의 사멸이 아닌 부재의 궁핍을 앓는다. 신이 사라져 캄캄해진 밤에 슬픔의 근원인 타인이 있어 시인은 모든 “이유 없는 눈물”조차 마를 날이 없다. 마음을 다해 철필을 꾹꾹 누르며 새겨 쓴 “편지”를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은 다중을 향하지 않는다. 시인의 말로 쓴 편지가 시임은 너무도 자명하며, 이것은 어느 쓸쓸한 한 사람의 가슴에 당도할 것이다.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주저앉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ㅡ「취급이라면」 부분
잘못 발음한 말이 이 세계를 순식간에 개조할 때가 있다. 마음의 위안이 필요했던 주체와 미장원에 온 의도가 상충하는 지점에서 마음 깊이 내재된 말이 튀어나온다. 그가 아는 세계는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곳이다. 그의 시각대로라면 미장원에 놓인 잡지는 현란한 이미지로 행복의 표상을 만들어, 채도가 낮은 흑백을 불행의 표상으로 대비하고 있는 것 같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부풀려 물질의 세계로 그를 현혹하지만, 그는 잡지가 취급하지 않는 것 쪽으로 한층 마음이 기운다. 빗소리, 바다, 그리고 작약 같은 것들. 그에게 작약이나 빗소리는 오래 바라볼수록 바다와 구분되지 않는, 자신과 혼연일체의 사물이다. 하지만 이것을 소포로 부쳐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빗소리와 작약과 바다의 세계가 커질수록 자아는 희미해져 사라질 테고, 자상을 입은 치욕도 심연으로 가라앉을 테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므로 꿈을 꾸거나 기대하는 마음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주체에게는 지금 이 질문이 가장 절실하다. 당신의 마음은 요즘 무엇을 취급하나요? 쓸쓸한 사람을 쓰다듬어 줄 묘약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나요? 김경미에게 슬픔의 변증법은 있으나 없는 신에게서 출발하여, 그 근원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서로를 포함하는 원칙 아래 가동한다. 있으면서 없는 모든 존재와 관념들이 만드는 비극적 세계관 속에 슬픔의 근원으로 향하는 다양한 질문들이 놓여 있다. 행복을 취급하는 자가 세간에 내놓은 물신이 “잡지”인 점을 들어 아주 작은 단위로 행복을 질문한다. 근원으로 향하는 이 물음은 막중한 응축력을 지녔다.
3. 신생의 하루를 맞이하는 감각
시원으로 향하는 시인의 사유가 모든 ‘시작’들 쪽으로 관심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안녕 월요일」에서는 월요일을 “비애” 감정으로 맞이하는 주체가 월요병을 앓는 정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병을 타자 존중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감을 안기면서, 신생의 하루는 “처음 만나는 나이 든 월요일”로 변주된다. 이 월요일은 어김없이 처음 맞이한 날이면서도 나이를 먹었는데, 이는 회귀하는 시간을 반복 경험하는 또 다른 하루의 표상이다. “진정한 인생은 월요일로부터” 시작하므로 이날은 “제2의 인생”이 시작하는 날이며, 그런 이유로 월요일을 “인생의 천직”처럼 기꺼이 맞이하게 된다. 새날처럼 도래하는 월요일에 도처에서 일을 시작하는 이들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 보라는 요청으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기념 타월」에서처럼 쓸쓸한 사람은 이 기분을 기념한다면서 성실하게 쓸쓸함을 닦아낸다. 하지만 슬픔의 근원에 플러그인된 자에게는 이것을 말끔히 닦아내겠다는 기대와 시도가 오히려 이것을 지속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제 날마다 닥치는 슬픔이 필연인 “하루”를 다행이라며 기꺼이 맞아들인다. 이제껏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시간을 그는 하루라 부른다. 변하지 않는 것이 안정과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든, 변하는 것만이 살아남는다고 믿든, 어느 쪽도 이 새로운 날이 필연이므로 여기에 무감할 수는 없다. 아래 시는 하루하루가 벼락 치는 모습으로 닥치는 인간의 시간을 그린다.
벼락을 맞았습니다
단 하루 만에
가을로부터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길쭉한 소매 덕분에
기차를 발견했습니다
창가 좌석
이제 단풍들 앉을 차례인데
순식간에 또 벼락을 맞았습니다
다행히 또 목숨을 건집니다
오늘은 두터운 양말 달린
크리스마스 캐럴 덕분에
슬픔과 우울을 발견했지만
미운 곳이 하나도 없는 저녁
덕분에
매일 건지는 날들
버릴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ㅡ「근황」
무언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듯한 정경이 눈앞에 있다. 시현실에서 벼락을 맞는 일과 하루는 등가다. 존재론적 주체는 기차가 시간 표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처럼 신생의 하루가 도래할 때 다행히 “또” 목숨을 건졌다며 안도한다. 하루는 새로이 시작하는 시간에 대한 명명이며, 그 하루가 “매일”이 되는 이치는 이것이 언제나 시원으로서 시간을 뜻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루하루가 새날의 현현이므로 그도 거듭 목숨을 구해 낸다. 그의 어제는 죽었으므로 오늘 태어나 갱신의 하루를 맞았다. 사라짐과 도래의 시간이 동시에 벼락같이 닥치는 틈에서 간신히 자신의 시간을 건져낸 것이다.
더불어 슬픔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의 슬픔은 어제의 것, 오늘의 슬픔은 오늘의 것으로 다시금 도래하여 마를 날이 없다. 그 본질을 알게 되었기에 우울을 유발하지만 알고 보면 “미운 곳”도 “버릴 데”도 없는, 존재의 시원에서부터 이미 친숙해진 감정이다. 슬픔이 삶을 이끌 것이라는 그의 기대는 계절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길쭉한 소매”를 타고 흐르는 가을 기운을 살갗에 새기고, 어느결에 거리에서 울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자신이 누린 모든 “덕분”의 가치를 헤아려도 본다. 그런 그가 자신의 근황을 하루의 구원, 하루의 희망, 하루의 기대로 전하고 있다.
이렇게 읽고 보면 김경미 시에 흐르는 쓸쓸함과 슬픔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에 따른 것이다. 이 실감이 얄따란 기쁨으로 끝나지 않도록 비축해 두고 슬픔을 말하는 방식으로 그는 시를 쓴다. 하루분의 목숨은 하루분의 슬픔과 같은 값으로 주어지고, 시인의 말이 지닌 근원적 울림은 슬픔과 연접한다. 삶을 버티게 하는 완벽히 독자적인 생명력이여, 해맑은 슬픔이여. 오늘도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면서.
1)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 역, 『횔덜린 시의 해명』, 아카넷, 2009, 49쪽.
2) 루시앙 골드만, 송기형·정과리 역, 『숨은 신』, 연구사, 1986, 50쪽.

김효숙 l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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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