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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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최두석
  신작시: 왕나비
 / 무당거미 / 길앞잡이

  자선시: 포란반 / 홍련과 큰고니

 
  [시인론] 서강목 “꽃이 알려준 길: 내가 읽는 최두석의 시세계
”

 

 

 

 


 신작시 


 

 

 

 왕나비

 

 

 

     

 

  지리산 노고단 오르는 길섶

  왕나비가 쑥부쟁이에 앉아 꿀을 빤다

  왕나비와 쑥부쟁이가 함께 환하게 빛난다

 

  쑥부쟁이는 산길 따라 피어 한창이고

  왕나비는 나풀나풀 날아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옮겨다닌다

 

  팔랑대지 않고 느긋하게 날아올라

  너울너울 춤을 춘다

  서두르면 우아하기 어렵다는 듯이

 

  박주가리 잎을 먹고 자라

  박주가리 독을 품은 왕나비는

  새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원래 한라산에 살아

  제주왕나비라 부르던 나비

  이 왕나비의 할매는 언제 바다를 건너온 걸까

 

  지리산에 나타난 왕나비를 보며

  지구 온난화 걱정은 잠시 잊고

  왕나비를 반기는 쑥부쟁이의 환호성을 듣는다.

 

 

 

 

 

 

 

 

 

 

 



 

 

 무당거미

     

 

 

 

 

  나뭇가지 사이에

  무당거미가 거미줄 치고

  잠자리나 나비가 걸리기를 기다린다

  거꾸로 매달린 채 하염없이

 

  위쪽에는 수컷

  아래쪽에는 암컷 무당거미가

  거리를 둔 채 서로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암컷이 다가오면 수컷은 재빨리 도망간다

 

  암컷에 비해 수컷은 너무 작아 보이고

  수컷에 비해 암컷은 너무 커 보인다

  허기진 암컷에게 잘못 다가간 수컷은

  허망하게 잡아먹힌다

 

  잠자리처럼 큰 먹이가 걸려

  암컷이 먹느라 바쁜 틈을 노려야 한다

  그 순간 잽싸게 다가가

  짝짓기에 성공해야 한다

 

  목숨을 건 수컷의 모험이

  과연 몇 번이나 성공할 것인가

  바람이 차가워지면 어차피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다

 

  알록달록한 빛깔로 치장한 암컷은

  탐식하며 몸을 한껏 부풀리다가

  낙엽 질 무렵 나무껍질 사이에

  정성을 다해 알을 낳고 죽는다.

 

 

 

 

 

 

 

 

 

   

 



 

 

 길앞잡이

 

    

 

 

   

  마음 닦기에 좋다는

  암자로 가는 산길

  길앞잡이가 나타나 포르르 날아간다

 

  그늘에서도 빛나지만

  햇살에는 더욱 휘황하게 빛나는

  브로치 같은 등딱지 무늬

 

  길 따라 날아가 멈춘 곳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다시 포르르 날아간다

 

  일정은 잠시 잊고

  한참 동안 진행되는

  길앞잡이와 나의 술래잡기

 

  “네 가슴에 달고 싶은

  브로치는 뭐야?”라고 묻는 듯이

  길앞잡이는 자꾸 내 눈길을 사로잡으며

  앞서 날아간다

 

  “가슴에 달고 싶은 브로치는 없어”라고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니

  길앞잡이는 메롱 하고 놀리고서는

  재빠르게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자선시 


 

 

 

 

 포란반

   

 

 

 

 

  수원의 일월저수지

  시든 부들 잎을 층층이 엮고 쌓아

  물에 띄운 둥지 위에서

  뿔논병아리가 알을 품고 있다

 

  며칠 전까지 신나게

  춤추고 짝짓기하고

  부지런히 둥지를 짓던 한 쌍이

  포란에 들어간 것이다

 

  가끔은 몸을 일으켜

  부리로 알을 굴리기도 하지만

  다시 몸을 바닥에 바짝 붙여

  알품기에 정성을 다한다

 

  겉으로 보이지 않으나

  어미의 배에는 맨살이 드러난 피부에

  실핏줄이 지나가는 포란반이 있어

  체온과 맥박을 고스란히 알에 전한다

 

  뿔논병아리의 알품기를

  물가에서 망원으로 지켜보는 나도

  무심결에 배에 손이 간다

  어떻게 말을 품어야 시가 되는지 물으며.

 

 

 

 

 

 

 

 

 

 

 


 

 

 

 홍련과 큰고니

    

     

    

  

 

  겨울날 소소리방죽은

  큰고니의 낙원이다

 

  수백 마리의 큰고니들이

  방죽 곳곳에 흩어져

  진흙 속의 연근을 캐 먹는다

  워낙 연밭이 넓어

  먹이를 다툴 일도 없다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

  소소리방죽의 물살은 늘

  큰고니들이 서로 화답하는

  노랫소리로 찰랑댄다

 

  쉴참에는 긴 목을 구부려

  깃털을 고르거나 서로 애무하다가

  봄볕에 피가 뜨거워지면

  떼 지어 시베리아로 날아간다

 

  큰고니들이 떠난 뒤에야

  연은 순을 밀어 올리고

  소낙비 내리는 철이면

  수면 가득 넓고 두터운

  초록 우산 펼친다

 

  한여름 소소리방죽은

  드넓게 펼쳐진 홍련밭이다.

 

 

 

 

 

 

 

 

 

 

최두석  l

1980년 《심상》 등단. 시집 『대꽃』 『임진강』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꽃에게 길을 묻는다』 『투구꽃』 ​​​『숨살이꽃』 『두루미의 잠』 등이 있음. 〈오장환문학상〉 〈조태일문학상〉 〈노작문학상〉 등 수상.

 

 

 

 

 

 

   


 시인론 / 서강목 


  

 

 

 

 

꽃이 알려준 길: 내가 읽는 최두석의 시세계

 

        

 

 

1

  최두석 시인은 1955년 담양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희를 목전에 두었으니 이전 같으면 노시인이다. 그는 1980년에 등단하여 〈오월시〉 동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했고, 첫 시집 『대꽃』(1984)을 시작으로 『임진강』(1986), 『성에꽃』(1990), 『망초꽃밭』(시선집, 1991),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1997), 『꽃에게 길을 묻는다』(2003), 『투구꽃』(2009), 『숨살이꽃』(2018), 그리고 최근 『두루미의 잠』(2023) 등을 상재했다. 45년 동안 평균 5, 6년 간격으로 아홉 권의 시집을 내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일구어 왔으니 가히 그는 우리 시단의 중진이다.

  평생을 시밭 일구기와 시꽃 피우기에 바친 이의 시세계를 짧은 글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한편 외람된 일이기도 하다. 긴 시간 시의 길을 걸었으니 여러 큰길과 오솔길을 거쳐왔을 것도 분명하다. 멀리 내다보며 더 이상 가지 않은 길도 있고, 한동안 걷다 더 종요로운 길로 옮겨간 길도 있을 것이며, 아주 오래 걸어오는 길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 모든 길을 안내하는 일을 욕심내지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최 시인의 시를 읽어 온 한 독자로서 시를 읽으며 내가 같이 걸어 본 길, 지금도 흔쾌히 따라 걷는 길을 다른 독자들에게 안내해 보는 정도이다.

 

 

2

  최 시인은 흔히 ‘꽃의 시인’으로 불린다. 과연 그의 시집 대부분은 어떤 성격의 꽃이든 꽃을 표제 속에 담고 있다. 그 꽃은 실재하는 꽃, 시인이 직접 본 꽃이거나, 전설 속의 꽃 또는 시인이 상상한 꽃일 때도 있다. 그의 시들이 다루는 꽃의 종류는 너무 많아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거기다가 풀과 나무들을 더하면 식물도감을 연상케 하고, 동물까지 합하면 웬만한 박물학지가 되며, 인물과 지명까지 더하면 만물보가 된다. 그래서 그의 시를 더욱 실감나게 읽고 실답게 읽으려면 식물도감과 동물도감을 옆에 두고 읽어야 하고, 때로는 백과사전을 뒤져야 한다. 요즘처럼 빅데이터가 쉬이 제공되는 시절에도 스마트폰 두드리는 손가락품을 꽤나 팔아야 한다.

  최 시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동식물, 특히 꽃들의 시적 역할은 아주 독특하다.1) 오랜 관찰, 또는 여러 번의 대면, 때로는 많은 사전의 학습에 힘입어 시 속에 재현된 꽃들은 시인의 시적 사유와 어우러져 독자들의 시 읽기를 유도한다. 시인의 시적 사유 속에는 유년의 체험에서 깨친 깨달음, 성장하며 쌓아온 지식,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의식, 일회성의 시간 속 삶이 가져다 주는 갖가지 비애와 고뇌 등이 모두 버무러져 있다. 이른바 시인의 관념 체계2)라고 할 이 요소들은 재현된 전자의 사물들과 만나 기묘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이 화학 작용에 반응하며 일종의 미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독자들의 시 읽기이겠다.

 

  나무는 어느 순간에 두 줄기로 나뉘어 자라기 시작했다. 두 줄기는 계속 비슷한 굵기 높이로 자라나 서로의 가지들을 뻗쳐나갔고 줄기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 갔다. 뻗친 가지 틈틈이 그리움의 붉은 열매를 달고 하염없이 나이테만 돌렸다.

 

  멀어지는 것은 나무의 운명인가?

자기만을 감싸는 나이테는 나무의 이데올로기인가?

 

  어느 해 태풍이 몹시 불던 해, 고아와 과부들이 속속 늘던 해, 한쪽 줄기는 벼락을 맞아 부러져 없어지고 나무는 커다란 상처 이(齒) 드러낸 그대로 한 줄기가 되었다.

ㅡ「나무」 전문

 

  첫 시집 『대꽃』의 두 번째 시이다. 비교적 덜 주목받은 이 시는 최 시인의 많은 시들이 지닌 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또 장차 그의 시세계가 나아갈 수도 있을 길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노래와 이야기」)이라고 선언한 시인의 시답게 이 시는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 준다. 그 이야기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층위에서 나온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의 성장과 가지 벌이기를 서술하는 첫 부분은 오랜 관찰과 잦은 대면의 결과를 주로 전달하는 묘사의 서사이다. 두 번째 부분은 시인의 관념 체계에서 출발한 두 개의 의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 속에서 멀어져 가게 마련인 가족과 친구들, 아스라이 흐릿해져 가는 유년의 기억 속 사물들,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혀 동심원의 나이테를 그리는 개인과 집단들, 이 모든 것들이 ‘운명’과 필연일 수만은 없다고, 늘어나는 ‘나이테’가 ‘이데올로기’여서는 아니 된다고, 이 수사 의문문들은 강조한다. 마지막 부분은 시인의 시적 상상이 녹여낸 이미지(image, 심상) 하나를 전달한다. 이 심상 속에는 산행길에 만난 벼락 맞은 노송, 오랫동안 애정으로 보아왔으나 어느 여름 벼락으로 흉물스레 변한 둥구나무, 이 땅의 스승 된 자로 알고 가르칠 수밖에 없는 애증이 교차하는 한국의 근현대사 등이 녹아들어 있다. 일제의 강점과 분단, 동족상잔의 전쟁, 4·19의거, 군부의 개발 독재와 80년 오월의 광주의거 등으로 점철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고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시에서 한반도에 뿌리내린 분단 구조와 그것이 배태하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읽어내고, 그 흉물스런 모순을 차분히 드러내는 시의 전언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나무」를 구성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서사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최 시인의 시 대부분에 섞여 있다. 시인의 시정신이 그의 관념 체계에서 출발한 서사로 기울 때 이른바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시들이 탄생한다. 당연 서사시 「임진강」이 그 대표이겠다. 시인은 이 시에서 남북 분단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남북을 오르내린, 그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고정간첩으로 내몰린 비운의 통일 운동가 김낙중의 생애를 기록한다. 시인은 서사시적 주소(呪訴)의 부분에서 “역사의 강이여, 임진강이여 / 너의 한가운데를 굽이치는 물방울의 생애를 기록할 테니, / 응답하라”라고 노래하는데, 기실 그의 짧은 시들도 많은 경우 이들 ‘물방울’들의 사연을 기록하는 이야기들이다. 동학혁명을 다루는 「대꽃」 연작을 위시해, 대부분의 인물시들과, 설화나 역사적 사건이 얽힌 장소의 시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 시들은 역사의 강물에 휩쓸려 사라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 강물을 이루는 주인들인 민중들의 삶을 재현하거나, 그럼으로써 이 땅의 역사가 지닌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낸다.

   내가 제일 흥겹게 반응하는 시들은 세 번째의 서사가 돋보이는 경우이다. 이들 시들에서는 시인의 시적 상상이 그만의 고유한 심상을 잉태해 내며, 그 심상이 시 전체를 탄탄히 지탱해 준다. 초기의 절창들 중 하나일 「성에꽃」이 그렇다.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유달리 꽃을 사랑하는 시인은 새벽 시내버스 차창에서도 꽃을 찾아낸다. 그 꽃은 ‘어제 이 버스를 탔던 / 처녀 총각 아이 어른 /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들의 입김과 숨결이 피워낸 것이다. 그들은 의식했건 아니건 군부의 개발 독재 이데올로기와 분단 이데올로기를 호흡하며 역사의 격랑에 실려 가는 이들이고, 승객들의 정체가 구체화 될수록 밤늦은 퇴근길에 지친 몸을 실었을 민중들임이 드러난다. 그들은 군부의 개발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팽창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의 급랑에 휩쓸린 ‘물방울’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막막한 한숨’과 ‘정열의 숨결’이 피운 꽃을 이른 새벽 고단한 출근길 버스에 몸을 실었을 시적 화자가3) 보고 있다. 그가 ‘성에꽃 한 잎 지우고’ 비춰보는 것은 자신의 ‘푸석한 얼굴’이다. 그리고 그 위에 친구의 얼굴이 겹쳐진다. ‘산(山)ㅅ새처럼 날아가’ 버려4)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의 얼굴이. 시적 화자는 분단의 모순적 역사에 분개하며 그러나 답을 쉬이 찾지 못하는 우리 중 하나일까. 친구는 군부 독재와 자본의 횡포에 저항하다 붙들려간 또 우리들 중 하나일까. 시적 서사에 익숙한 독자들은 하염없이 긴 명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최 시인의 시적 서사가 이미지즘 시나 즉물시처럼 시적 대상을 그려내는 일, 즉 묘사의 서사에만 그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한국사와 한국의 지리, 생태계의 구성원들에 대한 박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시인은 늘 대상의 묘사에 성실하다.

 

   입안에 밥알 두 톨 물고 있네

   가난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입안에 밥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고난의 세월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조붓한 입안에 밥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흙에 떨구는 땀방울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ㅡ「며느리밥풀꽃」 전문

 

  며느리밥풀꽃 또는 꽃며느리밥풀이라고 불리는 이 꽃을 아는 이라면 이 시가 얼마나 그 꽃을 적실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 산지의 숲 가장자리 햇빛 바른 곳에 피는 이 꽃은 붉은 색 또는 분홍의 통꽃으로 피며, 그 통의 끝부분이 아래 위로 갈라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꽃잎에 두 개의 흰 반점이 박혀 있다. 영락없이 아랫입술에 하이얀 밥풀 두 알 묻은 사람의 입술이다. 이렇게 재현된 꽃의 심상은, 시인이 제사(題詞)로 제시하는 젯밥을 짓다 오해를 사 억울한 죽음의 길로 내몰린 어느 가난한 집의 며느리에 관한 설화와 더불어, 고단하고 곤궁한 삶을 살아간 이 땅의 모든 ‘물방울’들의 애환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 시는 마치 숲길 가 양지쪽 며느리밥풀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이제는 죽어 ‘가난’과 ‘고난’을 벗어난 그 ‘물방울’들의 위령제 장면으로 재현하는 듯하다.

 

 

3

  길지 않은 개인의 삶을 고려하면 기나긴 세월일 기간 동안 이 땅의 역사에 올 봄을 기다리며, 아니 그 봄을 만드는 법을 찾으며 시를 써 온 시인에게 궁지와 고뇌가 없을 수 없다. “말이 씨가 된다”는(『성에꽃』, 自序) 속담이 옳기를 기대하며 가르치고 쓰고, 또 가르치고 써 왔건만 새 천년을 목전에 둔 이 땅의 역사에 봄소식은 아직 아득하다. 80년 오월의 의미를 몸과 마음에 새긴 채, 운명처럼 다가온 왜곡된 역사이지만 “우리가 역사 속에서 역사를 이루어가는 주체라는 사실,” “우리가 서 있었던 시간에 바쳐진 희생들이 우리 민족,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서기 위한 기나긴 싸움에 바쳐진 성스러운 희생임을”5) 시로써 확인하려 했던 시인에게 노태우(1988-1993), 김영삼(1993-1998)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수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어름에 씌어진 시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고, 그 서사는 시인의 관념체계가 격발시킨 발화들로 기운다. 각각 어릴 적 놀이터였고, 청년시절 성장과 학습의 후경이었을 삼인산과 무등산이 “길이 남길 소중한 이야기는 인멸하고 / 지배자의 자기 합리화만 무성하며 / 무등산 같은 거인의 자취는 묻힌 채 / 삼인산 같은 소인배가 득세하는 / 그렇지만 이제로부터 기어이 바로잡아야 할 / 우리 역사”(「무등산과 삼인산」)처럼 시화되는 것이다. (삼인산에 대한 시인의 시적 평가는 차후 「삼인산」에 가서 수정된다.) 망연자실 들여다 보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 꽃들도 “개나리 꽃잎엔 최두탄 가루가 묻어 있다 / 아니 화약냄새가 스며 있다”(「개나리」)거나, “권력의 경찰서의 파출소 앞에 심겨진 / 최루탄 가루를 잔뜩 뒤집어 쓴  / 무궁화 애잔한 꽃망울”(「무궁화」) 등으로 그려진다.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들 중 하나일 얼레지조차 “얼레지 꽃이 사람의 발길을 한사코 피해 / 숲그늘에 숨어 핀다는 게 슬프다”(「오대산 얼레지」)라고 슬픔의 정조를 불러낸다. 그러나 시인의 시상이6) 허무나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지만은 않는다. 이 시절 최 시인은 “허무의 공터를 / 거친 숨결로 메꾸겠다는 듯 / 마구 씩씩거리”며 “이룩하지 못한 소망 / 이승에서의 약속을 위해 / 뜨거운 눈물을 위해”(「줄넘기」) 많은 비지땀을 흘린 듯하다. 그리고 “힘내자 너그러워지자” (「대청봉 잣나무」)고 거듭 다짐한 듯하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도드라지는 시상의 노래 한 가락을 들려준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기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ㅡ「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전문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이 땅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는 인류 역사의 어떤 단계일까. 이 땅의 민중들, ‘물방울’들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 널따란 꽃밭을 이루고, 모두 뭉쳐 넓디넓은 바다를 이루었을 때일까. 지구상의 사람 모두가 축어적 의미 그대로 지구촌 주민이 되어 화합하는 단계일까. 남북이 통일되고 세계 평화가 성취되는 단계일까.

  흔히 후기자본주의 또는 탈근대의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 지구촌 전역은 여러 가지 성격의 홍역을 앓고 있다. 곳곳에서 국지전이 진행되고, 잘 살든 못 살든 나라마다 빈부의 격차로 인한 양극화가 심각하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지구 온난화는 생태계의 균형을 임계치 너머로 깨뜨렸다. 이 땅의 역사만 해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촛불 정국,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 등을 거치며 물 속과 위를 자맥질하는 물레방아처럼 헛돌고 있다.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진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은 개인과 가족, 집단, 계급, 성별, 지역으로 갈리어 어느 나라의 대통령처럼 자기 이익 추구에만 골몰한다. 계절이 있는 곳이면 어느 땅이든 한사코 오는 봄소식이야 노루귀에게라도 물을 수 있지만 역사의 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봄이 오는 소리

   민감하게 듣는 귀 있어

   쌓인 낙엽 비집고

   쫑긋쫑긋 노루귀 핀다

   한 떨기 조촐한 미소가

   한 떨기 조촐한 희망이다

 

   지도에 없는

   희미한 산길 더듬는 이 있어

   노루귀에게 길을 묻는다.

ㅡ「노루귀」 전문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아 이 이름을 얻게 된 이 꽃은 이른 봄에 잎줄기 없이 자그마한 꽃부터 피운다. 두껍게 쌓인 낙엽을 들추어내어야만 하이얀, 연분홍의, 때로는 옅은 보라색의 꽃을 볼 수 있다. 시집 이름을 제공했을 이 시에서 시인으로 추정되는 시적 화자는 남보다 먼저 이른 봄 소식을 들었을 노루귀에게 길을 묻는다. 귀는 귀일 뿐이므로 답해 줄 입이 될 리 없고, “지도에 없는 / 희미한 산길” 또한 길임에 분명하므로 화자가 길을 모를 리 없다. 노루귀의 개화 자체를 ‘미소’와 ‘희망’으로 해석한 시인 자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소’와 ‘희망’은 이 시에서 시인의 관념 체계와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시어들이다.

  일찍이 오대산 등반의 경험에 기대어 “천이백칠십 년 전 상원사 동종에 / 비천상을 새기던 자의 희망은 / 욕망의 매운 연기 피우며 타는 / 나의 희망과 어떻게 다른가”(「희망」)라고 노래하며 개인적 이데올로기에 침윤되기 십상인 자신의 ‘희망’을 더 큰 희망으로 들어올리려 했던 시인은 꽃이 알려준 길을 다음처럼 시화한다.

 

   일종의 꽃싸움

   서로 아름다워지려는 싸움이다

   자신의 피를 맑게 하고

   세상을 더욱 다채롭고 생동하게 하는 싸움이다

ㅡ「꽃싸움」 부분

 

 현호색과 얼레지가 휘황찬란하게 수놓는 봄숲을 보며 시인은 멋진 세상을 이룩하는 이치를 간파한다. 그리하여 “친구여, 우리 꽃싸움 하자 / 위로와 격려로 적당히 다독이거나 추어주지 말고 / 혼신의 힘으로 꽃대궁 밀어 올려 / 제대로 한번 겨뤄보자”고 우리 모두에게 권한다.

 실상 생태계의 식물들은 영양과 햇빛을 위해 한사(限死)코 다툰다. 생명을 건 생존경쟁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한사코’의 싸움이 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형성하고 아름다운 꽃밭을 이룩한다. 인간 사회, 인간 역사의 꽃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명처럼 다가와 필연인 것처럼 보이는 어둠의 역사 속에 지도상의 길처럼 훤히 보이는 길은 드물다. 그러나 물 속과 위를 자맥질하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비록 물 밑에 잠겼을지라도 언젠가는 물 위로 솟구칠 것이다. 그런 믿음과 희망 속에서 ‘서로 아름다워지려’ 한사코 싸워야 할 것이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비상도 잘만 쓰면 약이 된다는 항간의 표현처럼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투구꽃」) 역사의 어둠을 걷어내려 거듭나야 한다. 그러다 보면 “동무와 함께 / 연인과 함께 / 아이와 함께 / 촛불을” 들 날이, “서로 불을 옮겨 붙이듯이 / 서로 희망을 밝히기 위해 // 꽃을 드는 대신 촛불을” 들 날도 올 것이고, “무수한 이들의 가슴에서 이글대는 불꽃”(「촛불과 희망」)을 확인하게 되는 날도 올 것이다. 어둠과 부조리의 왜곡된 역사일지라도 그 곤궁을 헤쳐나오면 세계사에 유례가 드문 성취를 이루며, 독과 약이 다르지 않은 역사적 파르마콘(pharmakon)의7) 이치도 깨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 분단과 전쟁, 뒤이은 독재 권력들의 폭력과 불의, 자본의 무제한적 집중과 민중들의 고통으로 이어진 이 땅의 역사에서 사람들이 만든 아름다운 꽃밭을 찾아보긴 단연코 어렵다. 대중들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각종, 각 층위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채 그날그날의 먹고 사는 일에 바쁘다. 이들을 역사의 주인인 민중으로 되살리려면 “거친 파도 잠재워 세상을 화평케 한” 만파식적이라도, “세상의 온갖 목마름을 적시는 / 간절하게 귀한 말을”(「어떤 시인」) 알려줄 뮤즈의 도움이라도 있어야 한다. 아니면 시인이 “산길 가다가 좋은 꽃밭 만나면”(「숨살이 꽃」) 찾는 버릇이 생긴, 바리데기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무장승의 화원에서 얻어오는 살살이 꽃과 숨살이 꽃이라도 있어야 한다.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고

   늙은 무녀의 목쉰 노래로

   귓가에 맴돌며 피는 꽃

   상처에 문지르면 살이 돋아 살살이 꽃

   가슴에 문지르면 숨이 트여 숨살이 꽃

ㅡ「숨살이 꽃」 부분

 

  설화 속의 꽃이 지상에 존재할 리 만무이다. 살살이 꽃, 숨살이 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한다(시인은 훗날 “코로나 후유증으로 / 무기력감에 시달리던 봄날”(「연령초」) 강원도 인제의 곰배령 등 그늘진 높은 산야에서 자생하는 연령초가 그날의 자신에게는 숨살이 꽃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개인은 개인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계급은 계급대로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공공의 정의를 지향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함께 ‘서로 아름다워지려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그리고 시인은 시인대로 더욱 그다워져야 한다.8) 그래서 시인은 “말길이 제대로 열려야 /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된다”고 선언하며 “시인이란 자신의 말길을 열어 / 세상의 물길과 숨길과 / 은밀히 소통하는 자이다”(「시인」)라고 자신의 책무를 재확인한다.

 

 

4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최 시인의 시적 서사는 근자로 올수록 생태계 대상의 묘사에 집중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시적 서사들도 대상의 묘사 자체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생태계 구성원들의 아름다움과 늠름함, 그 자연스러운 자유를 노래하다가도 불쑥불쑥 시적 서사는 시인의 관념 체계에서 나온 시어를 노출한다.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염증은 계속 덧났고

   가려움을 참으며 골똘히 생각하였다

   금강초롱의 학명을 하필 하나부사로 지은

   제국대학 교수 나카이의 심리의 밑바닥을

ㅡ「금강초롱」 부분

 

  시인이 제일 사랑하는 꽃들 중의 또 하나일 금강초롱에 대한 시이다. 한때 “보라 초롱을 들여다 보아 / 욕망의 불 다스리는 이치를 알고 / 흰 초롱을 들여다보아 / 꽃을 피우는 섭리를 깨달으리”라는 자기 갱신, 거듭남을 위한 기대를 품고 찾았다가, ‘조촐하고 담백한’ 금강초롱의 아름다움에 취해 “하염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 꽃초롱”만(「금강초롱」, 『꽃에게 길을 묻는다』) 보고 온 꽃이다. 이 꽃은 금강산, 설악산 등 이 땅의 고산지대에만 자생한다. 다시 금강초롱을 찾은 날은 하필 시인이 진드기에 물리는 날이다. “청초하게 고혹적인 금강초롱 본 것으로 / 행복한 하루였는데” 진드기에 물린 염증은 시인을 오래 괴롭힌다. “금강초롱의 학명을 하필 하나부사로 지은 / 제국대학 교수 나카이의 심리의 밑바닥”(「금강초롱」, 『두루미의 잠』)처럼.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시인의 각주가 알려주듯이 조선 주재 초대 공사로 일본의 조선 합병을 주도한 인물이다. ‘나카이의 심리의 밑바닥’은 내선일체, 대동아공영, 일본인 우월 등의 강령을 당연시하는 그가 빠져 있을 군국주의적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금강초롱을 하나부사로 명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금강초롱의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이다.) 그러나 그나마 바로잡힌 역사의 뒷 시간을 살고 있는 역사적 이점을 지닌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이 얼토당토아니한 사실 하나로도 역사적 왜곡의 많은 부분이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기원한다고 공분할 수밖에 없다.

  자연 속의 여러 동식물들을 자주 찾아 나서고, 때로는 가까이 또 때로는 멀리서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일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자본의 횡포가 자연을 훼손한 현장을 익히 보아온 시인의 눈에 생태계의 깨어진 균형과 무너진 질서가 보이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시인은 「바람꽃」에서처럼 “이 땅의 봄은 / 온갖 바람꽃 피며 왔다가 / 온갖 바람꽃 지며 가네”라고 휘모리 장단처럼 몰아치는 경쾌한 시를 쓰기도 하다가, “동백꽃 아무리 잘 피어도 / 동박새 없으니 허전하네 / 생의 찬란했던 / 빛나는 눈동자의 순간은 / 가뭇없이 사라졌네”(「동박새」)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젊은 날 연인과 함께 / 동백꽃 보러 갔을 때 / 우연히 만나 잘 보았는데” 나이 들어 역부러 찾아 나서니 동박새가 없다. 멸종되지 않은 새이니 어딘가에라도 없을 리 없지만 주된 서식지인 동백숲에서 찾기 힘드니 개체수가 얼마나 준 것일까. 동박새를 보아 더욱 빛났을 젊은 시인의 눈동자 그러나 이제는 가뭇없이 사라진 “생의 찬란했던 / 빛나는 눈동자의 순간”은 일회성의 삶이 주는 비애감과 더불어 동박새의 개체수 감소 현상을 심히 우려하게 만든다. 한편 이 작은 싯구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드러낸다. 시인의 사라진 젊음은 개체의 소멸을 예시(豫示)하지만, 동박새의 부재는 종의 절멸을 예고한다.

  대개의 경우 인간은 개체로서 자연에 다가가고, 자연 생태계의 구성원을 종으로 파악한다. 그 결과 개인 인간은 자신의 존재론적 특성을 유지한 채 생태계의 구성원 개체를 만나지만 생태계 구성원 개체의 존재는 추상화된다. 그래서 추상화된 대상 즉 종으로 파악된 대상에게 행하는 위해의 심각성을 덜 실감하게 된다. 이것이 인류 역사에 뿌리 깊은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존재론적 기원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내가 좋아하니 다가가고, 내가 어여쁘다 생각하니 꺾고, 내가 배 고프니 잡아먹고, 내가 필요하니 개간하고 개척한다.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하니 개발하고, 우리의 생산력 향상과 자본 증식에 필요하니 난개발하게 되는 것이다.9)

  최 시인의 시들에는 이런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예가 허다하다. 충주호의 탄생 자체를 원죄라고 단정하는 「충주호」나 함양의 엄천강 난개발을 수달의 입을 빌려 “자연이 수백만 년 조화롭게 한 일 / 함부로 망가뜨리는 망나니짓”이라고 비판하는 「엄천강 수달」은 그 드러난 경우이다. 그러나 명백히 드러나지 않아 은근하면서도 더욱 발본적인 비판의 예도 없지 않다.

 

   백로의 눈도 또렷하고

   숭어의 눈도 또렷하다

   백로도 숭어도 오직 보는 일에만 집중한다

   기쁨이나 두려움은 눈빛에 스며들 틈이 없다

 

   숭어의 꼬리지느러미는 물방울 튀기는데

   백로의 부리는 완강하고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

ㅡ「백로와 숭어」 부분

 

  얼핏 보면 밋밋하게 그려진 백로의 먹이 활동 장면이지만 이 밋밋한 장면 뒤에 자연 속 먹이 사슬의 철칙과 먹고 사는 일의 엄정함이 스며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의 순리에 인간의 개입이 란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기입되어 있다. 노란 자위 검은 동자의 백로 눈에는 획득의 ‘기쁨’도 없고, 흰 자위 감색 동자의 숭어 눈에도 먹힘의 ‘두려움’이 없다. 오직 포획과 탈출을 위한 시선의 집중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적 감정이 제거된 이 포식과 피식의 순간에 인간의 손길이 끼어들 틈은 더욱 없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란 심상이 암시하듯이 그냥 그대로 두어 둘 일이다. 함부로 다가가서도 아니 되고, 함부로 만져서도 아니 되는 자연이라면 함부로 훼손해서는 더욱 아니 될 일이다.

  그러나 인간 문명이 걸어온 길은 어떤가. 산업혁명 이후만 해도 지구는 급속한 온난화 과정을 거쳤고, 오늘날 지구 전역에서 해수면 상승 현상과 이상기후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10) 이번 여름 이 땅의 기록적인 고온 현상도 그 한 예이겠다. 그런데도 지구상의 열대 우림은 계속 남벌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자는 국제 협약은 실효성을 제대로 거두지 못한다. 실로 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되살리는 일은 난제 중의 난제이다. 한 답으로 여러 갈래의 생태론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은 노르웨이 철학자 아니 네스(Arne Naess)의 사유에 힘입어 인간들이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생명 중심적 평등의 이념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음의 원칙들을 제시한다. 1) 지구상의 인간 및 비인간계 생명의 안존과 번성은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진다. 2) 생명체들의 다양성은 이 가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한다. 3) 생명의 요구에서 나오지 않는 한 인간은 이 다양성을 축소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4) 인간의 삶과 문화가 번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위험에 처한 비인간계 삶이 지속되고 번성하기 위해서도 인구가 감소해야 한다.11) 그러나 3)은 생명의 요구가 무엇인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쉬이 합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4)는 인구 감소의 방법론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아무리 자연을 많이 찾고, 생태계를 잘 아는 시인일지라도 이런 난제의 답을 깨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답을 찾기 위한 암중모색의 과정과 한시적 결실을 시화할 수는 있다.

 

   원래 한라산에 살아

   제주왕나비라 부르던 나비

   이 왕나비의 할매는 언제 바다를 건너온 걸까

 

   지리산에 나타난 왕나비를 보며

   지구 온난화 걱정은 잠시 잊고

   왕나비를 반기는 쑥부쟁이의 환호성을 듣는다.

ㅡ신작시 「왕나비」부분

 

  인간들의 잘못으로 흐트러진 생태계의 질서가 제주왕나비를 지리산왕나비로 만들었다. 지구 온난화가 부른 결과이다. 원래 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자연의 야생성이 야만성으로 바뀐다. 허물어진 먹이 사슬 탓에 포식자의 폭력성이 드러나고, 여러 종들의 절멸이 뒤따르는 것이다. 한편 무너진 생태계 질서는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새로운 관계는 다시 새로운 질서를 낳고 그 질서 속에서 생태계는 균형을 되찾는다. 긴 세월 동안 이루어질 과정이지만 이 과정 속에 인간이 틈입할 계기는 없다. 새로운 인위성은 또 다른 야만성을 낳고 폭력을 부르기 때문이다. 앞의 시에서 제주왕나비는 다행히 멸종되지 않았다. 그리고 깨어진 생태계 질서가 불러오는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 “왕나비를 반기는 쑥부쟁이”를 만난다. 그래서 시인은 비록 ‘잠시’이지만 “지구 온난화 걱정은” 잊고 쑥부쟁이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것이다. 그 질서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일 게다.

 

   겨울날 소소리방죽은

   큰 고니의 낙원이다

   ……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

   소소리방죽의 물살은 늘

   큰고니들이 서로 화답하는

   노랫소리로 찰랑댄다

   ……

   한여름 소소리방죽은

   드넓게 펼쳐진 홍련밭이다.

ㅡ근작시 「홍련과 큰고니」 부분

 

  각각 ‘겨울날’과 ‘한여름’으로 시작하는 처음과 마지막 연으로 열고 닫힌, 일종의 수미상관적 구조를 지닌 이 시는 그 속에 오랜 질서가 정립된 생태계의 한 모습을 담고 있다. 겨울철에 한국으로 날아오는 철새 큰고니 수백 마리가 소소리방죽 곳곳에서 “진흙 속의 연근을 캐먹는다.” 워낙 넓은 연밭이라 “먹이를 다툴 일도 없다.” 안성맞춤으로 큰고니들의 먹이 활동이 수월하게 “소소리방죽의 물살은”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화답하는 노랫소리에 맞춰 함께 “찰랑댄다.” 홍련은 홍련대로 종의 소멸 걱정하지 않고, “큰고니들이 떠난 뒤에야” “순을 밀어 올”린다. 그리하여 “소낙비 내리는 철이면 / 수면 가득 넓고 두터운 / 초록 우산 펼친다.” 곧 소소리방죽은 “드넓게 펼쳐진 홍련밭,” 홍련 꽃밭이 될 것이다.

  떠들썩하게 연꽃 축제가 열리는 한여름의 소소리방죽을 방문한 사람이면 아기 얼굴만 하게 한꺼번에 개화한 연꽃들이 장관을 이룬 모습에 입을 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꽃나라의 이면으로 이 시가 드러내는 균형 잡힌 생태계의 질서를 상상한 이는 드물 것이다.

  최 시인이 이 땅의 산과 들 온갖 곳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생태계의 구성원들이 안정된 조건과 질서 속에 평화롭게 거주하는 모습일까. 그가 인간 세계에서 보고자 하는 모습도 그런 인간 꽃밭일까.

 

 

5

  운 좋게도 나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며 수년간 최 시인의 옆 방에서 지냈다. 그는 방에 있을 때나, 복도를 지날 때나, 교정을 거닐 때도 소리를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회의 석상에서도 대부분 조용했다. 대신 그는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꼬옥 손을 잡는다. 내가 잡은 그의 손은 도톰하게 느껴졌고, 항시 따뜻했고 적당히 촉촉했다. 그리고 꼬옥 잡는 손길은 정갈하면서도 굳세었다. 그의 시를 접할 때도 나는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추분 지나 뒤늦게 느닷없이 찾아온 이 가을 호젓한 들길 산길 골라 걸을 시인과 동행하고 싶다. 길섶 여기저기 눈 닿는 곳, 낯익은 그러나 이름 모를 토종 자생 초화들 이름을 묻고 싶다. 그는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묻는지도 묻고 싶다. 운 좋으면 시의 길을 엿들을 수도 있을 듯해서이다.

 

 

                                            

1) 그래서인지 최두석의 시세계를 논하는 눈 밝은 평자들은 이 자연물들의 역할과 그 변화에 주목하며, 대체로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1997)로부터 그 변화를 읽어낸다. 예컨대 “자연물로서의 대상이 그것에 역사적·사회적 무게를 담지 않고 그 자체로서 오롯이 시인과 교통하는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김예림), “사회역사적 상상력에서 생태적 상상력으로의 전환”(나희덕), “초기시편에서 그것은 역사적 상상력을 매개하는 우의적 상관물로 나타났고, 후기시편으로 올수록 생명 자체의 원리나 속성을 드러내는 쪽으로 변모해온”(유성호) 등으로 지적한다.

2) 이 낡은 표현은 알뛰쎄르(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가깝다. 알뛰쎄르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살아온 삶 속에서 획득하게 된 ‘인간과 실제적 존재 조건들 사이의 살아온, 상상적인 관계’이다. 상상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개념인데, 이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명료한 의식의 형태로 드러난 사유나 사유체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관념체계’란 용어를 쓴다. 그것이 개인의 이익과 욕망으로 경도되었을 때는 개인이데올로기, 가족구조에 함몰되어 있을 때는 가족이데올로기, 집단과 계급의 이익에 복무할 때는 집단, 계급이데올로기가 되겠다.

3) 엄밀히 말하면 시 읽기에서 시 속의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최두석의 시들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시적 화자와 시인 자신이 거의 일치한다. ‘노부부’나 ‘남편’ 등으로 대상화된 경우도 시인 자신으로 보아 무방할 듯하다. 화자가 지정된 「불두화」, 「공룡능선 마가목」, 「플라타나스와 멧비둘기」, 「엄청강 수달」 등은 그 특별한 경우이겠다.

4) 내게는 언제부턴가 이 시를 정지용의 「유리창1」에 겹쳐 읽는 습관이 생겼다.

5) 『다시는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5월시 동인지 제4집, 청사, 1984), 「책머리에」. 나는 이 4집의 책임편집자가 최 시인이었을 것이라 무작정 짐작한다.

6) 이 단어도 작업정의(working definition)가 필요하겠다. 흔히 ‘시를 짓기 위한 착상이나 구상’이란 뜻으로 사용되는데, 이 글에서는 ‘시에 나타난 사상이나 감정 일반’이란 뜻으로 쓴다. 시인의 ‘관념체계’도 그 일부를 이룰텐데, 시가 아니 문학 일반이 “비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정신의 작용과정과 대면하여...그런 과정의 적용을 완결하고 완성하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의식 속에 포함시키기 위해 자신의 주의를 확장하려 애쓰며, 달리 말해 특정한 문제의 딜레마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런 문제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스스로 해결되도록 전환시키고, 문제의 존재와 사실 자체를 새로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삼는”(Fredric Jameson, Marxism and Form, 307쪽) 변증법적 형식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또 시인 자신이 지상 최초의 독자라는 점에서 시상은 시인의 ‘관념체계’가 빠져 있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지양하고 그 너머를 지향하는 특성도 지닌다.

7) 그리스 사람들은 한방의 비상(砒霜)처럼 약과 독을 같은 단어로 표현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글을 파르마콘이라 부르며 망각에 대한 치유이면서 동시에 실재했던 말(로고스)을 지운 흔적이라고 본다. 그는 이데아론에 근거해 글보다 말을 우위에 두었는데, 이를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서구 형이상학의 뿌리 깊은 편향인 로고센트리즘(logocentrism: 말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이라고 비판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겠다.

8) 실상 후기자본주의가 지구촌을 제국처럼 지배하는 탈근대의 오늘날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네그리는 이 시대를 ‘인간-기계’의 관계가 중심적인 시대로 보며 ‘특이성’(singularity)이라고 부르는 개인들이 ‘다중’(multitude)으로 묶어세워져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에 대항하여,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소유권에 대항하여,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패에 대항”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생산양식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물적, 정신적 조건이 서로 다 다를 지구촌 전역에서 이런 가능성을 얼마나 고르게 확인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3장 및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 등 참조. 인용은 『제국』, 515쪽.)

9) 그래서 생태론의 초기 형태 중 하나인 영성생태론자들은 인간 개개인이 열대우림이 되고, 캥거루, 이끼, 산이 되어 의례를 치르는 ‘모든 존재들의 회의’(a council of all beings)를 제안했다. 그 회의에서는 참석자들이 “나는 열대우림이야..., 나는 캥거루야..., 나는 산이야..., 나는 이끼야...”라고 되뇌며 회의를 진행한다. John Seed et al., Thinking Like a Mountain: Toward a Council of All Beings (New Society, 1988), pp. 79-90.

10) 지구온난화의 주된 원인인 온실효과는 최초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만 오가는 가설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엽 스웨덴의 과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 1859-1927)는 산업혁명 이전에 비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량이 두 배가 되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섭씨 5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주장은 더이상 가설이 아니다. 현재 지구의 평균 온도는 산업혁명 이전 대비 섭씨 1도 이상 상승했고, 지금의 추세라면 2100년에 약 4~5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국제적으로 취약한 구속력만을 발휘하는 파리협약은 이 수치를 1.5도 이하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11) Bill Devall et al. Deep Ecology (Gibbs Smith, 1985), pp.6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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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목  l 

번역서 『If: 루드야드 키플링 시선집』, 『이 현재의 순간: 게리 스나이더 시선집』, 『블레이크 시선』, 『정치적 무의식』(공역), 『소로와 함께한 나날들』, 『축구의 세계사』(공역) 등이 있음. 현재 한신대 영미문화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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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