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함명춘
신작시: 금암빌딩 / 옥잠화 / 동주 누나 / 옥비녀 / 곳
[시인론] 장정일 “ 그 ‘곳’을 찾아서 ”
신작시
금암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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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팔다리는 나사못이 되어 박혀 있고 송두리째 혓바닥이 뽑혀 나간 아가리와 항문엔 굵은 로프가 매달려 있다 내장까지 말끔히 수거해 간 뱃속엔 수십 개의 버튼이 달렸고 반 평 남짓한 공간이 전혀 다른 장기처럼 들어와 있다 누군가 버튼을 눌러줘야 움직일 수 있고 아무리 일탈의 꿈을 꾸어도 제자리다 하루 수십 번 문이 열려도 몸도, 머릿속의 그 어떤 생각도 내리지 못한다 일 층에서 사십 층까지의 이륙과 착륙만이 있을 뿐이다 누가 이곳에 매달아놓은 걸까 |
옥잠화
처음 한강변에서 그를 본 건
어디서 두들겨 맞았는지 피멍 든 얼굴로
땅 위에 토사물처럼 널브러져 있을 때였다
두 번째로 한강변에서 그를 본 건
한자로 빼곡한 불서(佛書) 같은 걸 앞에 두고
무념무상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때였다
세 번째로 한강변에서 그를 본 건
그의 몸이 바람만 불어도 종잇장처럼 날아갈 듯
가죽만 남았을 때였다
다섯 번째 아니 일곱 번째였던가
그가 사라진 자리엔 몇 겹의 담요 같은
그늘을 깔고 옥잠화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옥잠화가 되려고 그가 그 자릴 지킨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원래 옥잠화였던 것일까
내 기억의 기억 속까지 뿌리내린 옥잠화는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지지 않았다
동주 누나
키 작은 동주 누나가 왔다
얼굴을 볼라치면 여전히 부끄럼이 많아
나무 뒤에 숨었다 손으로 가리며 마당까지 왔다
두 달에 한 번 묵었다 가는 고향집
여전히 누추한 건 못 참는
동주 누나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먼지를 털고 있다
마루며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다
빗자루 들고 뒤꼍까지 쓸다가 불어터진
손을 호호 부는 소리에 와락 문을 열면
어느 사이 또 숨어 버린 동주 누나가 왔다
군용차에 치여 꽃조차 못 피운 채 눈 감은
다음 생애엔 꼭 바람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누비고 싶다던
키 작은 동주 누나가 왔다
올해 팔순을 넘겼어도 한 가마니 감 정도는
아직도 너끈하게 쑥쑥 낳는
감나무 잎 밤새 흔들었다가 갔다
옥비녀
살아온 길과 살아가야 할 길을
잠시 모자처럼 벗어놓고
텅 빈 하늘을 가슴에 들이는 일이 왜 이리도 힘든 것이었더냐
생각하며 산길 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한복을 입고 곱게 쪽머리를 한 여인이
절벽으로 끊어진 외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풍경을 보기 위해 그런가 보다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의 옥비녀가 떨어져 있어 얼른 주워들고 뒤쫓아 가보니
그녀는 없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절벽 끝에 서 있었다
삶은 찰나, 산길에서 절벽까지 걸어가는 동안
저렇게 한 생애가 저물 수 있고
크게만 보였던 내 마음속의 힘듦과 기쁨도
감쪽같이 사라지는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이었구나
되뇌며 생시 같은 꿈인지 꿈 같은 생시인지 모를
산길을 한없이 걸어간 적이 있었다
곳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말하지 않겠다
어떨 때 가야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말하지 않겠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왜 가야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나 외엔 그 누구도 가지 못한 곳
크기와 높이는 얼마만 한지 말하지 않겠다
지명은 있는지 말하지 않겠다
지도에는 나와 있는지 말하지 않겠다
날씨는 어떤지 말하지 않겠다
가서 무엇을 먹는지 말하지 않겠다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말하지 않겠다
얼마나 좋은지 나쁜지 말하지 않겠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냥 곳
하루에도 몇 번씩 갔다 오는 곳
함명춘 l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 『무명시인』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종』이 있음. 〈편운문학상〉 수상.
시인론 / 장정일
그 ‘곳’을 찾아서
함명춘 형의 신작을 읽었다. 이번에 본 시들은 올해 봄에 나온 그의 네 번째 시집 『종』(걷는사람, 2024)과 이어지는 주제와 발상을 갖고 있다. 그가 내게 보내준 다섯 작품의 순서와 이번 호 《공정한 시인의사회》에 실리게 될 순서가 일치한다면, 독자들은 맨 처음으로 「금암빌딩」이란 시를 보게 될 것인데, 이 시는 『종』에 실려 있는 「믹서기」를 떠올려 준다.
어느 틈으로 들어온 걸까
바닥에 배를 깔고 조용히 있거나
몸을 숨기고 있다가도 누군가가 들어오면
지느러미를 흔들며 솟구쳐 일어나
톱날 같은 입 속 이빨로 물어뜯고
뼈째 씹어 산산조각 내어 버리는
성난 파도처럼 벽을 할퀴고
튀어나오려 뚜껑을 들이받는 백상어
바다로 돌아가기 위한 격한 몸짓이다
고막이 나갈 것 같은 굉음은
바다가 그리워 우는 소리이다
폭파시켜 버릴 듯 백상어가
꿈틀거리는 믹서기를 보면
난 자꾸 뚜껑을 열어주고 싶다
믹서기 속의 회전날[刀]과 백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이 유사하게 보이는 것에서 착안한 이 시에서 시인은 바다를 빼앗긴 채 믹서기 안에 구속되어 있는 백상어의 성난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보고 듣는다. “성난 파도처럼 벽을 할퀴고/튀어나오려 뚜껑을 들이받는 백상어/바다로 돌아가기 위한 격한 몸짓이다/고막이 나갈 것 같은 굉음은/바다가 그리워 우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믹서기 속의 백상어가 엘리베이터의 모습으로 변신한 자매편이 「금암빌딩」이다.
사십 층짜리 금암빌딩에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는 한군데 붙박여 있으면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그것도 누군가가 버튼을 눌러주어야만). 엘리베이터가 가진 기계적 속성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원리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도시인/직장인에 대한 환유가 되면서, 이 시는 순식간에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로테스크를 내뿜게 된다. “누군가 버튼을 눌러줘야 움직일 수 있고 아무리 일탈의 꿈을 꾸어도 제자리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부여 되었느냐, 아니냐는 가장 오래된 신학적 질문이면서,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끈질긴 철학적 질문이다. 인간은 주체일까, 구조일까. 시인은 “누가 이곳에 (나를) 매달아놓은 걸까”라는 마지막 결구를 통해, 아무리 잘나봤자 주체는 구조의 일부라고 결론지은 듯하다.
그럼에도 『종』이 감동적인 것은 구조 속에 흡수당한 이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현대라는 기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열망하고 부품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읽은 신작에서도 그와 같은 열망과 거부를 볼 수 있는데, 시인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는 현대에 저항하는 방법은 꽤나 유형화되어 있다.
첫째, 많은 시인들이 그래왔듯이, 현대를 벗어나는 적극적인 시도는 고향으로의 귀거래(歸去來)이다. 「동주 누나」가 그 예인데, 시 속의 화자는 “두 달에 한 번”씩 고향의 옛 집에 묵으러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 어릴 때 한동네에 살았던 친척인 동주 누나는 군용차에 치여 눈을 감은 지 오래지만, 넋이 된 동주 누나와 도시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한데 묶어 주는 것은 옛집 마당에 서 있는 변함없는 감나무다. 『종』에도 이런 발상과 주제를 가진 「선바위」가 있다.
여주강에 가면
아직도 바위가 서 있어요
완행버스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면
한달음에 뛰어나와 날 맞아 주던
자두 먹고 탈난 밤,
달처럼 뜬 눈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주던
내가 원하면 달까지라도 날 업고 갈 것 같던
조금씩 집에 갈 날이 다가올수록
식사도 드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내가 짐을 싸고 나서면
여주강처럼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저만치서 손 흔들어 주던
세월도 끝내 들어내지 못한
외할머니가 서 있어요
방금 본 시에서 동주 누나는 외할머니로, 감나무는 선바위로 바뀌어 있다. 현대인은 도시에서 벗어나 여성과 동격인 고향에서 돌봄을 받으며 도시 생활에 구속되었던 자기를 회복한다. 하지만 동주 누나도 외할머니도 지금은 살아있지 않다. 그러니 고향이라고 온전할 것인가. 귀거래는 쓸쓸하다. 시인은 늘 도시로 돌아온다(쓸쓸해서가 아니다. 밥벌이가 거기 있어서다!).
두 번째 방법은 신작인 「옥잠화」와 「옥비녀」가 과시하는 구도(求道)와 해탈이다. 한강변의 노숙자 혹은 장기 실직자에서 소재를 얻은 듯한 「옥잠화」에서 시인은 노숙자를 성공과 거리가 멀고 경쟁에서 낙오한 패배자로 보는 일반적인 상식을 비웃듯, 도를 깨우치기 위해 무소유를 선택한 구도자로 간주한다.
시인이 자본과 기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마음속에 종교적 구도와 해탈을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은 「옥비녀」에 가서 한층 또렷해진다. 삶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산을 찾았던 이 시의 화자는 절벽으로 끊어진 외길에서 한복을 곱게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게 되고, 그녀가 떨어트린 게 분명한 옥비녀를 주워들고 그녀를 뒤쫓게 된다. 그런데 절벽 끝에, 방금 전에는 젊었던 여성이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되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삶은 찰나”이며,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극화한 이 시는 우리에게 구도와 해탈을 삶의 방식으로 고려해 보기를 권한다. 「옥비녀」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 시가 신라 시대의 향가 「헌화가(獻花歌)」의 설정을 빌려온 패러디로 보인다는 것이다. 「헌화가」 속의 수로부인(水路夫人)은 장관의 부인이었으니 부귀 영화를 누렸을 것이며, 병과 노쇠를 비껴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헌화가」를 비튼 새로운 판본에 따르면 수로부인도 생로병사를 피하지 못할 운명이다. 인생무상이라는 평범한 주제를 갖고 있는 「옥비녀」는 이처럼「헌화가」와 겹쳐 읽어야만 우러나는 쓴 맛을 느낄 수 있다.
「옥잠화」와 「옥비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인의 구도와 해탈에 대한 갈망 역시 『종』의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불교·도교·가톨릭의 말씀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데, 여기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시화한 「고승」을 뽑았다.
소파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보니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에
고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면벽을 하고 있다
검은 염주알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번민으로 출렁거렸던 일들을 지우고
목탁 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희노애락으로 들끓던 날들도 끊어 버리며
합장을 한 채 염불을 외고 있다
별빛 한 점 없는 칠흑의 바다로 걸어 들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고 있다
심해어처럼 더 깊은 내면을 향해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독자들은 함명춘 시인이 천작하는 주제가 무엇인지와 함께, 그에게 특정한 발상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방금 본 「고승」을 비롯해 『종』에서 가져와 소개한 시들이 모두 그렇거니와, 이번에 발표되는 신작 역시 하나같이 시인의 환시나 환각에 기대고 있다. 다섯 편의 신작시에는 나오지 않지만 『종』에 실려 있는 「봄바람」·「핸드폰」 같은 시를 보면, 시인은 환시·환각만 아니라 환청도 동원한다.
시인들의 특권인 환시·환각·환청은 시인의 기원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샤먼(무당)은 환(幻)을 통해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한다. 환시·환각·환청을 잘 경험하는 자가 샤먼이고, 그들이 부르는 치유의 노래가 시의 기원이다. 실제로 함명춘 형의 시에는 도시와 직장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해주는 시가 많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의 시에 가득한 환시·환각·환청이 샤먼 혹은 치유자로서의 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직장 생활로 소진된 현대인의 망상이나 편집증을 나타내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색다른 해석도 해보고 싶어진다. 이런 접근법이 재미는 있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그의 시 문법이 너무 전통적이고 안정되어 있다는 반론이 따를 수 있다(그가 좀 더 내지르면 좋을 텐데…).
분명한 것은, 함명춘 시인의 환시 · 환각 · 환청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는 현대에 저항하는 그의 세 번째 방법이라는 것이다. 「금암빌딩」에서 보듯이 이런 방법은 그로테스크한 도시전설(都市傳說, urban legend)을 만들어낸다. 도시전설은 고도로 밀집되고 개발된 현대 사회에서 생겨난 그럴듯한 낭설이나 미신 등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도시전설의 제작은 자본과 기술 세계에 대한 교란과 그것을 통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주며, 상상적인 대안을 제시해준다(그가 쓴 이런 시를 더 많이 봤으면 좋겠는데, 그의 그로테스크 미학에는 그로테스크에 꼭 필요한 유머가 적다).
도시전설은 아니지만, 이번 호 ‘이달의 시인’에서 독자들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작품인 「곳」은 시인이 추구해온 주제와 발상을 이 완벽하게 일치·구현하고 있다. 마치 허먼 멜빌의 바틀비가 그랬듯이, 오로지 “~않겠다”라는 부정문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이 시는 자본과 도시와 기계로 전체주의화된 문명에 대한 시인의 완강한 거부를 드러낸다. 시인이 “나 외엔 그 누구도 가지 못한 곳”이라면서, 저 혼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갔다 오는 곳”이라는 그 ‘곳’은 대체 어디일까? 환이 불러낸 게 확실한 이 부정의 장소는 묘하기만 하다. 답을 알 수 없는 나는, 인간은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배치(=구조) 속에서 지워지게 되리라고 장담했던 한 철학자에게 답을 대신 쓰게 하고자 한다.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 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 라고 부르고자 한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 47쪽)
‘헤테로토피아(heterotopie)’는 heteros (다른)와 topos(장소)가 합쳐진 말로, 그리스어 ou(아니다)와 topos(장소)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유토피아(utopia)’의 결점을 넘어서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없어야 존재’ 할 수 있다. 실현되면 가치를 상실하고 말기에 상상으로만 가능한 장소가 유토피아다. 그에 반해, 헤테로토피아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 우리가 실제로 살고 일하는 공간 안에서 생겨난다. 지배와 억압이 일어나는 배치에 거역하고, 현실의 공간을 정화하거나 전복하는 이 반(反)공간으로서의 헤테로토피아는 거창하거나 소소할 수 있다. 1969년 8월 15~17일 사이에 열렸던 우드스턱음악예술축제가 전자라면, 아이들이 아파트 마루에 쳐놓은 작은 난방 텐트는 후자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바로 소확행(小確幸)이 실현되는 이질적인 공간과 시간이다.
「곳」에서 시인은 문명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자기만의 소확행, 자기만의 헤테로토피아를 가꾸어 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함명춘 형과 내가 근 6년 가까이,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장소가 옥수동에 있는 ‘카페 소확행’이다. 혹시 그 ‘곳’이 그 ‘곳’일까. 나하고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늘 그 카페에 가 있거나, 카페 앞에 있는 한강 산책로를 서성대는 것을 보면, 그 부근이 그 ‘곳’이 맞을 것 같다.

장정일 l
1984년 《언어의세계》에 시 발표로 작품 활동 시작.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외 다수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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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