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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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김경인
  신작시: 농담 / 라푼젤 / 슬픔이여. 안녕

  자선시: 오답 노트 / 겨울 방학

 
  [시인론] 방민호 “앞선 것들과의 비평적 거리”

 

 

 

 


 신작시 


 

 

 

 농담

  

 

 

 

       

  먼 곳이 될게

  지겨운 꿈의 영사기가 토해내는 풍경 말고

  이웃의 식탁 위에 얇게 저며져 아삭아삭 씹히다가

  달콤한 피 흘리면서 사라지는 여자들은 말고

  대대로 내려온 아버지들의 튼튼한 위장 속을

  물구나무선 채 역류하는 독한 농담이 될게

  어둡게 허물어지는 얼굴이 좋아

  반백 년 전쟁을 겨우 마치고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의 국경선이 좋아

  주인 없는 실패가 좋아

  잠이 커다란 날개로 꿈을 가로질러 펄럭펄럭 날아갈 때

  헐벗은 침대의 네 귀퉁이에 버려진 다정한 낱말 몇 개

  내가 아는 이름이 소복소복 쌓이다가

  내가 아닌 이름이 소복소복 나를 지우는 밤

  누군가 따뜻한 문장의 손바닥에 내리는

  제일 무거운 눈송이 하나

  가장 멀리 달아나는 발자국

  나는 나에게서

  가장 먼 곳의 소문

 

 

 

 

 

 

 

 

 

 

 



 

 

 라푼젤

     

 

 

 

  세상 끝까지

  숨 막힐 듯 펼쳐진

  푸른 상추밭

 

  너머

  피투성이 치마 속에서

  시든 아기를 꺼내

  바구니 겹겹 포개 내다 파는

  진짜 엄마가 살아

 

  싱싱하게 돋아난 청춘의 연한 이파리를

  몽땅 훔치다 엄마가 되어버린 여자가 살아

 

  이웃집 착한 마녀는

  사냥꾼에게 잡혀간 지 오래

 

  하늘에는 뾰족한

  탑에 찔려 솔기가 터진 구름

 

  깨진 유리창 비스듬히 꽂힌

  가스 요금 독촉장에

  하얗게 내려앉고

 

  창문 밖으로

  여자의 몸이 휘영청 기운다

 

  자욱한 머리카락,

  그 질긴 밧줄을

  세상에 던지듯

 

 

 

 

 

 

 

 

 

   

 



 

 

 슬픔이여, 안녕

   

    

 

 

 

  물뿌리개에 가득 담겨

  잠 위에 무수히 흩뿌려지는 영혼과도 같이

 

  네 얼굴 안에 숨은

  겨자씨 한 톨

 

  무성해진 가지마다 날개 흰 새들

  우거지는 노래의 정거장

 

 

  

 

 

 

 

 

 

 

 


 자선시 


 

 

 

오답 노트

 

 

 

 

 

  오늘 내 연필은

  내 방 말고

  옆방의 것

 

  풍성하게 부푸는 밤

  다정히 소곤거리는 창문 말고

 

  어둠이 꺼진 책상

  파란 불꽃의 시간을

  넣고 잠근 서랍의 자물쇠

  서랍 한켠에 바스라진 수많은 나의 다리

 

  내가 사랑한 어제의 것

 

    여기

                 저기

        흰 재로 날리는 말

  아는 줄 알았는데 자주 틀리는 정답

 

  내가 오늘 고쳐 적을 것은

  매끄럽고 차가운 돌의 감촉이 아니라

 

  정답지만 남기고

  사라진 문제들

 

  커튼 뒤에서만 아름다워지는 은유들

  모자 속 안 보이는 얼굴

  글자 뒤의 아버지들

 

  그러니까

  연필은 내가 아니라

  너의 것

 

  그러니까

  오늘은 너의 작은 손과

  더 작은 쌀알만 한 너의 손톱에 대해

 

  오늘은

  쌀알만 하다가

  눈사람처럼 커다래지는 그런 슬픔은 말고

 

        한 송이

                  두 송이

  폭죽처럼

  웃음처럼 터지는

  슬픔에 대해

  힘센 슬픔에 대해

 

  정답을 잊어버릴 때까지

  계속 틀린 답만을 적어내는 고집 센 학생들에 대해

 

  부서진 서랍의 자물쇠

  네가 타고 떠난 새로운 말에 대해

 

 

 

 

 

 

 

 

 

 

 


 

 

 

 겨울 방학

         

    

     

  

 

  당신의 자정을 내어 주세요.

  나는 낮을 버릴게요.

 

  가방 속엔 다 들어 있어요.

  롤러코스터 티켓과 하루치의 노을

  음… 그런 건 말고.

 

  얼음으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세계의 꼭대기까지 오르겠어요.

 

  태양이 조그만 흑점으로 돌아갈 때까지

  태엽을 되감을 거예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음악이겠죠.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없죠.

  당신에게 선물할 캄캄한 어둠 밖에요.

 

  우리는 무성한 자정이 되기로 해요.

  얼굴을 다 흘린다 해도

  모두 다 사라진다 해도

  꿈에서 풀려나지 않을 테니까요.

 

  망고 맛, 그리고 오렌지 맛

  꽁꽁 언 새콤달콤 태양을 핥으며

 

  당신의 필체로 나에게 편지를 써요.

  좀처럼 끝나지 않는 겨울 방학에

 

 

 

 

 

 

 

 

 

김경인  l

2001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있음. 〈형평문학상〉 수상.

 

 

 

 

 

 

   


 시인론 / 방민호 


  

 

 

 

 

앞선 것들과의 비평적 거리

ㅡ 김경인의 신작시들

        

 

 

 

  1.

  시를 쓰는 비평가가 다른 시인의 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어렵게 느낄 때가 있다. 김경인 시인의 경우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시가 서정시가 되어야 한다고, 적어도 자신의 시는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김경인의 시들은 자신의 믿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축조되는 시를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게 한다.

  한편으로, 비평가적 시선으로 보면 무엇보다 파울 첼란의 시에 깊이 공감했고, 황지우 시의 표현주의적 실험들을 그 시대의 감수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으며, 허수경의 시가 변모하는 과정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살피고자 했던 필자에게 김경인의 시들은 어렵게 보이는 표면을 뚫고 심부까지 내려가 닻을 내려보고 싶게 만드는 면이 있다.

  이천 년대 들어 한국의 시 비평계는 급격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비평의 변모가 그전까지와는 아주 다른 문법을 가진, 난해하거나, 색다른 비유에 도전하거나, 아주 길게 쓰는 시들의 양산에 큰 기여를 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익숙한 서정시의 문법이나 양식과 다른 시를 쓸 때도, 쉽게, ‘시간 동시적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통념은 깨지지 않았다. 물론 신동엽의 장시 『금강』이나 아니면 이상의 난해한 시 같은 ‘고전’들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한국 시단이 허용해 온 난해한 시는 정지용의 「백록담」, 「바다 2」이나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 「사랑의 변주곡」이나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같은 정도였던 것 같다고 생각된다.

  많은 경향들이, 꼭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김기림이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인문평론』, 1939.10)에서 말한 ‘두 개의 부정’을 확장해서 적용하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용납될 수 있다고 믿어졌다. 편석촌 김기림은 이렇게 말했다. “모더니즘은 두 개의 부정을 준비했다.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털 로맨티시즘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경향파 시의 내용 편중을 위해서였다. 모더니즘은 시가 위선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과 시는 문명에 대한 일정한 감수를 기초로 한 다음 일정한 가치를 의식하고 씌어져야 한다는 주장 위에 섰다.” 김기림이 믿은 모더니즘은 ‘언어에 대한 자각’과 ‘문명 비평의 의식’, 이 둘을 갖추어야 했다.

  김기림이 말한 것은 액면 그대로는 모더니즘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차라리 시 전체에 대해 말할 것처럼, 필자는 이해하다시피 한다. 김기림 자신이 기교주의화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수용 함으로써 언어적 실험에도 어떤 한계를 설정했다. 장시 『기상도』(1936)를 지나면서 문명 비평도 서정시 의 형태를 취하는 쪽에 치중했다.

  2000년대 이후 시들은 김기림이 비판적으로 언급한 “경향파 시의 내용 편중”처럼 노동문제, 여성 문제들을 ‘언어에 대한 자각’을 통과하지 못한 듯한 거칠고 성근 언어로 표출한 것이 많았다. 문학에서 언어 외에 작가나 시인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다른 방법은 없다는 의미에서 이런 시들은 동시대 현실에 대한 문명비평적 시선에 어딘가 부족함이 없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하게 했다.

  1970년대생, 1980년대생의 시들은 정치주의적 편향과 모든 시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다고 하는 양극단 위에서 진자운동을 반복했다.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는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중심으로 한 ‘정동(Affect)’의 미학과 결합해서 재현론을 기각하고 ‘강도적 힘’의 표출에 경도되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각광받는 진은영의 시들은 시인 자신이 그러한 시론을 펼쳤고, 또 그러한 시의 전형으로 수용 되었다. 진은영의 시들은 어떤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놓이는데, 왜냐하면 그의 많은 시들은 사실 시 문장을 ‘완전하게’ 읽어냈다고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난해성을 가지며, 예기치 않은 시어와 난삽한 비유는 읽는 이들은 공감 이전에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를 갖는다.

  독자들이란 그 시대의 인식장, 감정 체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독서 경향을 갖는 것 같지만 반대로 의도적인 비평과 선전, 홍보와, 언론 메커니즘의 산물이기도 하다. 1994년에 출간된 최인훈의 대작 『화두』는 당시에 이십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하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천 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시집은 더욱, 짜장면 한두 그릇 가격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주문해서 몇 장 읽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버려둘 수도 있고, 불안 속에서 읽기를 겨우 마치고는 자신 또한 시대의 유행에 뒤지지 않았다는 안도감 뒤섞인 만족에까지 이를 수도 없지 않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에 진정한 난해성, 그곳에 깃든 위대함,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미심장함을 인정받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필자가 김경인의 시를 읽는 접점은 이러한 데 있다.

  그러는 사이에 서정시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할까? 지난 십여 년 이상 날카로운 언어 감각에, 처절하고도 높은 문명 비평적 시선을 갖춘 시들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서정시, 상대적으로 짧은 시, 감성에 호소하는 시들이 본래적 가치를 지닌 ‘서정시’로 인식되는 경향이 다시 나타났다.

  김기림은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를 말하면서, 이제 언어적 실험의 ‘말류화’에 이른 모더니즘의 기교주의를 넘어서려면 도대체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이것은 문학사의 한 국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지금 직면해 있는 문제다. 어떤 시가 이 혼란스러운 시사상의 한 국면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가?

     

  2.

  이번에 김경인 시인이 내놓은 세 편의 시 「농담」, 「라푼젤」, 「슬픔이여, 안녕」에서 필자는 먼저 그 두 번째 시에 주목해 본다. 「라푼젤」은 그림 형제(Jacob Grimm과 Wilhelm Grimm)가 1812년에 내놓은 동화 「라푼젤(Rapunzel)」을 다시 쓴 것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사전적인 정보를 활용하여 축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부가 살았다. 아이를 밴 아내가 이웃해 사는 마녀의 라푼젤(들상추)을 먹고 싶어 하자, 남편은 그녀의 밭에서 라푼젤을 훔쳐서 아내에게 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녀는 태어날 아이를 자기에게 달라 하고 남편은 이를 약속한다. 아내가 아이를 낳자 마녀는 약속대로 아이를 데려가 숲속의 높은 탑에 가둔다. 이 여자아이가 바로 ‘라푼젤’이다.

  라푼젤은 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로 자라났다. 출구가 없는 높은 탑을, 마녀는 라푼젤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타고 드나든다. 그런 어느 날 한 왕자가 숲을 지나가다 라푼젤의 아리따운 노랫소리에 이끌려 탑을 찾는다. 마녀가 탑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자기도 라푼젤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타고 탑에 올라간다. 라푼젤과 왕자는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마녀가 곧 둘의 관계를 알게 된다. 화가 난 마녀는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녀를 들판으로 내쫓는다. 이를 모르고 다시 탑을 찾은 왕자는 마녀에 의해 가시덤불 위로 던져져 시력을 잃는다. 그로부터 일곱 해가 지난 후, 이곳저곳을 떠돌던 왕자는 쌍둥이 아이를 기르고 있는 라푼젤과 다시 만나게 된다. 라푼젤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왕자를 다시 눈뜨게 한다. 라푼젤과 왕자와 두 아이는 왕자의 나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산다. 

  그림 형제는 독일 민담을 채록해서 이야기로 옮겼다 하지만 「라푼젤」 이야기가 그런 민담 채록인지 아니면 창작 계열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신데렐라」처럼 「라푼젤」 이야기도 소녀가 구원받는 이야기다. 비록 계모에게 구박받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중의 마녀가 그런 계모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민담은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보통 서구 문학과 비서구 문학을 근대 이래 영향, 수수 관계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민담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표현하고 있고, 그래서 지리상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 직접 관계가 없는 지역들 사이에서도 내용과 형식이 유사한 민담이 발견되곤 한다는 것이다. 민담 분석은 그래서 인류, 또는 인간 본래의 심리 구조를 표현하는 양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주종연의 『한독민담 비교 연구』(1999)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과 독일의 민담의 공통성을 탐구한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민담이 근대 이후 채록되는 과정에서 인류 유년기나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원형적 심상에서 멀어져 부르주아적 가부장제의 원리를 수용, 이를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형태로 변질되는 면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예를 들어, 한 논문은 이러한 시각에서 라푼젤의 긴 황금빛 머리 카락을 길게 분석한다.

 

  이들 동화 속의 미녀들은 가부장 사회에 의하여 권장된 매혹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숲속의 잠자는 공주, 백설공주, 그리고 라푼젤은 “그녀를 남성들이 바라보고 싶은 곳에서 바라보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장소에 그녀가 위치해 있게 된다.” 라푼젤은 남성들의 주시와 응시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성탑 위에서 몸을 내밀고 노래를 부르면서 금빛 머리를 길게 휘날린다.(이영준, 「고전동화에 나타난 원형적 욕망과 환상의 이미지 분석: 「숲속의 잠자는 공주」, 「백설공주」와 「라푼젤」을 중심으로, 『현대영어영문학』, 2012.11, 166~167쪽)

 

  그림 형제의 동화 「라푼젤」이 전통적인 민담의 심리 및 원형적 상징 구조를 근대 부르주아적인 메시지를 내장한 형태로 새롭게 단장, 제시했다는 맥락은, 이처럼 문학작품의 역사를 페미니즘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시각을 취하면서, 남성 중심의 여성 대상화, 타자화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렇다면 「백설공주」를 「흑설공주」로 다시 쓰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라푼젤」 또한 타자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새롭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다시 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다시 쓴다는 것은 원작의 환상성을 더욱 강화하는 형태로도 이루어질 수 있고, 반면에 그 환상의 너울을 벗어내는 쪽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패러디’ 작품에서 이 ‘다시 쓰기’의 진정성을 묻는 경우가 많은데, 앞에서 말한, 환상성을 강화하고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의 환영 안에 머물러 있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패러디는 반복하되 차별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원작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즉 이야기 구조의 ‘동일성’의 구심성과 이 구조를 뒤틀려는 원심성 사이의 긴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패러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러할 때 뒤에 온 이야기, 곧 다시 쓴 패러디 작품은 그 문학적 진정성을 승인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패러디, ‘다시 쓰기’의 원리를 염두에 두고 김경인의 「라푼젤」을 보면, 이 이야기는 ‘가정’이라는 “탑”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에 물든 한 여인의 형상을 제시한다. 끝 간 데 모를 듯 펼쳐진 푸른 상추밭에 '갇힌' 탑 안에 한 여인이 있다. 이 탑은 높고 외로워야 적당하다. 그런데 이 여인의 진짜 엄마는 저 끝 모를 상추밭 너머에 있으니, 그 진짜 엄마는 어느 때나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진짜 엄마의 형상은 고통스럽고 참담하다. 피투성이 치마 속에서 시든 아기를 꺼내 바구니 겹겹 포개서 내다 판다. 「라푼젤」에 등장하는 라푼젤 엄마와는 전혀 다른 설정이고, 이 점에서는 마녀도 그렇다. 마녀는 그녀에게 덧씌워진 나쁜 여자의 환영을 벗고, 사냥꾼에게 잡혀가 버렸다. 마녀에게 나쁜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이후에 착한 왕자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쁜 마녀가 없으므로 착한, 구원의 왕자님도 등장할 수 없다. 김경인의 시 속의 라푼젤은 구원이 기약되지 않은, 창밖으로 뛰어내려서라도 가스 요금 독촉장으로 대표되는 신산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여성이다. 그녀 또한 라푼젤 특유의 머리카락을 갖고는 있으되 그 머리칼은 백색인들이 열광하는 황금빛이 아니다. 이 김경인의 라푼젤은 스스로의 머리칼을 밧줄 삼아 갇힌 집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마지막 대목에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한국 전통적인 민담적 장치가 언뜻 비친다.

  김경인의 또 다른 신작 「농담」은 현실의 나쁜 소문 속을 살아가는 또 다른 불쌍한 라푼젤의 이야기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에게 던져진 나쁜 소문들을 농담처럼 견뎌내야 한다. 이 여성을 둘러싼 시작을 알 수 없는 근원 모를 소문은 농담처럼 떠돌지만 그녀를 친친 동여매 버린다.

  도대체 이 시의 제목은 왜 , ‘농담’이 되어야 했는가? 이 시 전체를 농담으로 간주할 수 있는 독해의 방향이 없지 않지만, 응당 농담에 수반되어야 할 웃음을, 어떤 형태로든 자아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 자체는 농담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까?

  이 난해한 시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대대로 내려온 아버지들의 튼튼한 위장 속을 / 물구나무선 채 역류하는 독한 농담이 될게”라는 두 행의 시문장일 것이다. 이로써 이 시를 「라푼젤」처럼 가부장적 현실에 관련지어 읽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된다.

  이 시는 어딘지 모르게, 일제 강점기에 ‘나쁜 피’의 저주에 시달리다 타향 일본에 건너가 쓸쓸히 삶을 마쳐야 했던 작가이자 시인 김명순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평생을 남성 중심적 조선 사회의 이미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 군인이 된 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일은 그 충격만큼의 비중으로 이해되지 못했고, 전직 기생으로 양반 첩이 된 어머니를 가졌다는 출생의 기원은 여성을 마음 편하게 난도질하던 남성들의 농기 섞인 비웃음의 근거로 오르내렸다.

  김경인의 「농담」 속에 등장하는 여성 화자는 이 아버지들(남성)의 튼튼한 위장 속을 물구나무선 채 역류하겠다고 한다. 그런 농담이 되겠다고 한다. 또, 「농담」 속의 여성 화자는 스스로 “먼 곳” 이 되겠노라 한다. 이 “먼 곳” 은 나쁜 소문이 미치지 않는 곳, 「라푼젤」의 끝 간 데 모를 상추밭 너머의 곳이요, 소문에 둘러싸인 현실의 자기의 존재를 버리고 얻는 새로운 자기, “누군가 따뜻한 문장의 손바닥”에 진짜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려앉을 수 있는, 새로운 자기의 거처다.

  마지막 시 「슬픔이여, 안녕」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을 가져온 것이다. 앞선 작품을 의식 한다는 것은 일종의 비평 의식이며, 이는 곧 김경인 시인이 우리들의 삶의 현 상태를 진단하는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임을 말한다.

  자선시 「오답 노트」와 「겨울 방학」은 이 시인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속류적 인식에 대해서 깊은 위화감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답 노트」는 「농담」처럼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그 속류성 그대로 승인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언어 사용법에 연결된다. “얼음으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세계의 꼭대기까지 오르겠어요”라는 「겨울방학」의 시 구절은 가수 시아의 「snowman(눈사람)」의 애절한 도피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 불편함, 이 시들의 화자가 견딜 수 없어 하는 세계에의 감정에서 어떤 지적인 존재의 반응 방식을 읽어낼 수 없다면, 독해는 실패한 것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답지만 남기고 / 사라진 문제들”(「오답 노트」)의 해답을 밝혀내고 싶어 하는 이 시인은 지금 서정시의 한계를 시험하며 그 안과 밖을 나누는 위태로운 성곽 위를 걸어가는 듯하다. 절반쯤은 지난 이십 년의 난해에 기대고 다시 절반쯤은 서정적 화자의 전통적 희구의 목소리를 담은, 이 시인의 성곽길을 걷는 행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만약 이 시들이 페미니즘적 방향의 어떤 것이라면 쉽게 새롭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도 생각된다. 지난 이십 년은 노동문학 같은 이른바 진보파 문학을 대체한 페미니즘 시대였고, 김경인 시인의 시들은 그 경향에 접맥된 측면이 있다. 또 그렇다면 그의 시는 신국면을 향해 훨씬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라푼젤」 다시 쓰기의 비평적 안목과, 「농담」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낮과 밤, 정답과 오답의, 언어의 대칭적 상징성의 미학적 구사력이 그의 시에 관심을 갖게 한다. 느낌과 인상을 쉽게 안겨주지 않는 까다로운 언어 감각에 기대를 걸어본다. 어차피 시는 요절이 아니면 지속적 전개밖에 더 있을 게 무얼까? 그의 지성적 비평과 서정의 성곽 위 걷기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시인론_방민호.png

방민호  l 

1994년 〈창비신인평론상〉, 2001년 《현대시》 등단. 시집 『숨은 벽』 『내 고통은 바닷속 한 방울 공기도 되지 못했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등, 평론집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등, 연구서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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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