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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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문성해
  신작시: 기적 / 모래, 노래 / 눈사람

  자선시: 흙 필요한 분 / 숨의 방식

 
  [시인론] 김건영 “슈뢰딩거의 시학”

 

 

 

 


 신작시 


 

 

 

 기적

  

 

 

      

  

  4월은 끝이 없어요

  연둣빛 하늘 아래 당신의 이마는 시리도록 희구요

  슬픔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에요

 

  당신은 아름다움을 길게 늘여

  오래 가지는 특기를 가졌고

  나는 그것을 잠깐씩 탄식의 곁눈질로 훔쳐보는 취미를 가졌어요

 

  언덕은 두루뭉술한 허리를 뾰족한 새싹들로 치장하는 재주를 가졌구요

  대기는 지구라는 늘어진 풍선 속으로

  연둣빛 날숨을 지치게 불어넣어 줘요

 

  4월은 이렇다 할 취미나 특기 없는 자들에게도 눈곱만큼의 흥미를 가지게 해요

  하루종일 놓여 있던 댓돌 위의 신발에겐 마당을

  누워 있는 사람에겐 식은 죽을 내밀어 줘요

 

  저수지 속의 물을 하루 종일 반짝거리게 하구요

  냇가의 모난 돌멩이들을 둥글게 만들어요

  새의 부리 속엔 곡물을 쪼는 딱딱함을,

  민들레를 피운 돌절구를 근사한 화병으로 만들어요

 

  구름에겐 마냥 부푸는 속치마의 주름을,

  버려진 나뭇가지에겐 나아갈 방위를,

  탈영병에게는 복귀할 초록숲 부대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긴 줄인

  저 낡은 트렁크들에겐 받아들일 국가를 주세요 부디,

 

  창가에 놓인 물컵처럼

  하루종일 섭섭한 나에겐

  ㅡ 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이런 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해요

  이 불가항력의 4월엔

 

 

 

 

 

 

 

 

 

 

 



 

 

 모래, 노래

     

 

 

  

  옛날의 노래는 모래였다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파고들었다네

 

  누군가 와서 상한 깃털 같은 마음을

  모래 속에 파묻고 가면

  파도가 데려가 씻기고 씻기고

 

  햇볕은 말리고

  바다는 절여주고

  갈매기는 품어주었다네 흰 알처럼

 

  옛날의 노래는

  하루종일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네

  그 위에 뒹굴 수 있었다네

  부드러운 요처럼

 

  부서져 내린 노래는

  스스로 마을로 흘러들어

 

  부뚜막에도

  뜨락에도

  요대기 위에도 포슬포슬 기어들어

 

  까슬까슬 눈동자 속을 파고들었다네

  심장 속에도 붉게 박혔다네

 

  어떤 노래는

  아주 사적이라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퍼갈 수 없었다네

 

 

 

 

 

 

 

 

 

   

 



 

 

 눈사람

       

   

    

 

   

  나는 이 겨울이 조금 불편하다

  얼어붙은 눈바닥 위, 해가 뉘엿하도록 그 여자가 아직도 두부며 콩나물을 팔고 있다는 것이,

  어디에도 돌아갈 수 없는 여자가 언 발목을 종종거리며 이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천 원짜리 콩나물을 집어 드는 내게 집에서 만들었다며

  만 원짜리 청국장이나 쑥떡을 강매하려 드는 여자가 나를 호구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겨우 콩나물에 생각지도 않은 도토리묵이나 기껏 하나 더 사서 돌아서는

  내 뒤에서 삐죽거릴 입술이,

 

  달빛 아래 먹거리들을 딱딱한 화석처럼 만들며

  기어이 밤을 새워서라도 다 팔고 가겠다는 저 기막힌 근성이,

  흩날리는 눈발을 여분의 옷가지로 바꾸며

  동지 지난 한파가 그 여자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 겨울 이 정권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더욱 견고해져만 가고

  여자는 하필이면 내가 지나다니는 골목을 막고 서서 월요일마다 잔돈을 준비하게 하는가

  왜 나의 장바구니를 매번 콩나물과 두부로 채우게 하는가

 

  나는 불편하다 이 겨울이,

  어느 날부턴가

  내 안에 발이 얼고 허리가 얼고 목소리가 얼고 귓볼이 어는

  미확인 물체 하나 버티고 있다는 것이,

  집에 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때도

  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여자가 하나 있다는 것이,

 

  그만 벗어나고 싶다

  지나가기만 하면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점액질의 눈동자에게서

  누군가의 찰진 손가락에 의해 직조된 이 겨울에게서,

 

  와글와글한 햇멸치 떼로 와서

  봄이여,

  얼음판에 눌어붙은 저 둥근 엉덩이를 어서 좀 떼어 가다오

 

 

  

 

 

 

 

 

 

 

 


 자선시 


 

 

 

흙 필요한 분

 

 

 

 

 

  “흙 필요한 분”

  마사토 흙집을 지나다 보았네

 

  내게도 흙이 필요해

  열 손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흘러내릴 흙들이

 

  가슴이었고 뼈였고 단단한 허벅지였던

  뿌리였고 허물이고 돌멩이 같은 맹세였던

 

  내게도 접붙일 흙이 필요해

  연골연화증의 무릎을 감쌀

  캐시밀론의 무릎 덮개 같은 흙들이

 

  올망졸망 붉은 화분들이 필요해

  얽히고 섞인 뿌리들의 집이

 

  떠올려본다

  화분 하나 없었던 집

  흙 하나 없었던 베란다와

  광합성을 모르는 노오란 낯빛

 

  아버지,

 

  화분을 안고 나오는 젊은 부부

  저들의 뿌리가 든든하게

  엉켜가는 뒷모습을 돌아본다

 

  흙이 흙을 받쳐 들고 간다

 

ㅡ 《시산맥》 2023년 여름호

 

 

 

 

 

 

 

 

 

 

 


 

 

 

 숨의 방식

        

   

    

 

 

  바다를 보면 내 숨의 깊이가 알고 싶어졌지

  모슬포 바다 위로 둥근 테왁을 띄우고

  해녀들이

  제 숨의 깊이만큼만 물속에 머물다 나온다

 

  언젠가 나도 내 숨의 깊이를 알아보려

  나 속으로 뛰어든 적이 있었지

 

  물에 불은 손가락들로

  울퉁불퉁한 심연을 더듬으며

  나도 나의 심해가 안녕한가 궁금했지

 

  나는 눈부시게 바라보았지

  푸른 정어리 떼처럼 솟은 여자들이

  젖지 않은 숨을 공중으로 뱉어내는 것을,

 

  허파에서 아가미로

  조금씩 바뀌어 가던 그 숨의 방식을

  (이것은 진화일까, 퇴화일까)

 

  허파에 숭숭 구멍이 뚫릴 때까지

  땅의 숨만 쉬다 갈 내 앞에서

 

  몸의 숨을 누리다 온 해녀들이

  숲을 헤치고 들어간다

 

  숲 깊은 마을에선

  숨의 방식이 바뀐 누군가

  붉은 심장을 지상에 두고 가기도 한다

 

  ㅡ 《아토포스》 2022년 겨울(창간)호

 

 

 

 

 

 

 

 

 

문성해  l

2003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작품상> 수상.

 

 

 

 

 

 

   


 시인론 / 김건영   


  

 

 

 

 

슈뢰딩거의 시학

 

 

 

 

 

  시인의 시선은 무엇보다도 앞서서 시의 언어를 끌어당긴다. 지금 본 것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나 가상의 무엇을 대상을 놓고 보더라도 시인은 내적 관조를 통해 시를 직조한다고 믿는다. 현재이거나 과거, 그리고 미래의 알 수 없는 감각을 바라보며 시인은 사유한다. 문성해 시인의 시는 특히 봄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첫 시집 『자라』의 서시부터 「봄밤」이다. 「봄날」과 「입춘에」도 첫 시집에 들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목련과 벚꽃, 민들레 등 봄꽃과 관련된 묘사가 발견된다. 두 번째 시집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에서도 「봄」이라는 시편을 찾아볼 수 있다. 세 번째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도 역시 「봄꽃들」과 「봄밤의 냄새」가 눈에 띈다. 또한 첫 시편 「산수유국에 들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민들레」 역시 봄의 대표적인 꽃 중의 하나이다. 네 번째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에서도 「이번에는 목련이다」와 「목련의 상부」라는 목련에 대한 아름다운 시편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근작인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은 전면적으로 봄을 내세운 시편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봄의 이미지가 내장된 시편들을 몇몇 찾아볼 수 있지만 굳이 그것을 한데 묶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사실 봄이 등장하건 등장하지 않건 그것들을 주목해서 읽는 것은 독자인 내가 한 일이다.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한정 짓는 것 같은 이 일들은 무척이나 폭력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의 많은 시편들 안에서 봄뿐만 아니라 다른 계절도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저 독자는 편향적으로, 감각적으로 읽어내고 그것을 오해한다. 하고자 한다면 마음껏 오해할 수 있다. “모든 잎들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알베르 카뮈의 문장으로 알려진 유명한 저 문장을 통해 가을은 봄과 같아질 수 있다. 여름은 또 어떤가. 봄의 들끓음의 연속이며 봄의 결과이다. 겨울마저도 사실 봄의 예비 단계이면서 가장 극적인 봄의 사전 무대가 될 수 있다.

  시선은 무해한 것처럼 보이나 반드시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 이를 떠올리게 한 것은 시나 문학 이론 때문이 아닌 우연히도 읽게 된 천체물리학 서적들에서 읽게 된 양자역학에 관한 부분들 때문이었다.

  양자역학에 대해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의 사고 실험일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불리는 이 사고 실험은 사실 양자역학의 주장의 불완전성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개념이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적확하여 많은 사람이 예로 들곤 한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밀폐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들어 있는 유리병, 그 유리병에 연결된 망치와 방사능을 검출하는 가이거 계수기가 있다. 한 시간마다 절반의 확률로 방사능 물질이 붕괴하여 가이거 계수기가 망치가 청산가리가 든 병을 깨뜨리거나 깨뜨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밀봉된 상태의 상자 안의 고양이는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

  양자역학을 모두 공부해서 그 복잡한 수식들이나 실험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해석과 이론적 변화를 모두 따라갈 수도 없다. 그저 겉핡기만으로 양자역학을 간단히라도 이해하지 못한다. 비전문가인 내가 이러한 내용을 길게 늘일수록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유들이 문학적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알레고리로 읽힌다는 사실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려고 한다.

  견자(見者)는 고요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처럼, 관찰자의 시선 자체가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의 상태를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풍경을 관찰하는 일도 그와 같다. 풍경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그 풍경들을 관조하고 관찰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물러나면 대상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다. 이는 견자(見者)의 태도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논리적으로 많은 계산을 해야 하는지를 새삼 떠올려 본다. 

 

4월은 끝이 없어요

연둣빛 하늘 아래 당신의 이마는 시리도록 희구요

슬픔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에요

 

(중략)

 

구름에겐 마냥 부푸는 속치마의 주름을,

버려진 나뭇가지에겐 나아갈 방위를,

탈영병에게는 복귀할 초록숲 부대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긴 줄인

저 낡은 트렁크들에겐 받아들일 국가를 주세요 부디,

 

창가에 놓인 물컵처럼

하루종일 섭섭한 나에겐

ㅡ 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이런 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해요

이 불가항력의 4월엔 

- 「기적」, 부분

  

  시인은 봄으로써 봄을 본다. 시인이 오래 봄을 들여다본 이유는 아마도 “슬픔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력이 움트는 그 봄은 시선을 잡아끌지만 봄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가렵고 두려운 순간일 것이다. “ㅡ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시인은 “끝이 없”고 “불가항력의 4월”을 아주 오래 관찰할 것이다.

  시인의 관찰은 결국 상태를 드러내고 만다. 어떤 이는 봄에서 고양이를 읽을 것이고 그 고양이가 봄볕 속에 잠들어 있는지 혹은 오랜 안식에 든 것인지 판단하지 않거나 결국 다가가서 만지고 말 것이다. 시인은 관찰한 상태를 확정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비로소 활자로 옮겨진다. 여린 잎들의 연둣빛도 오래 바라보면 눈이 시릴 것이다. 저 생명들의 자신만만한 이유 없음이 가진 생명력에 찬탄하면서도 시인은 오래 앓았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만다. 시인은 유리된 자이다. 투명하게 유리가 된 자이다. 그래야만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있다. 지독한 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시인의 힘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봄은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 혹자가 서정에서 폭력을 발견하였듯이, 독자의 시선은 폭력에서 자유로운 것일까. 내가 아닌 것들의 들끓음을 제멋대로 오해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또 봄을 맞을 것이다. 새로우면서도 새롭지 않은 봄이 여상스럽게 견자(見者)의 눈을 헤집을 것이다. 반복되는 것은 언제나 지루한 것일까? 새로운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나에게서 가장 오래된 질문을 한다.

 

옛날의 노래는 모래였다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하게 파고들었다네

 

누군가 와서 상한 깃털 같은 마음을

모래 속에 파묻고 가면

파도가 데려가 씻기고 씻기고

 

햇볕은 말리고

바다는 절여주고

갈매기는 품어주었다네 흰 알처럼

 

(중략)

 

어떤 노래는

아주 사적이라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퍼갈 수 없었다네 

-  「모래, 노래」, 부분

 

  옛날이란 정확히 언제일까. 아주 먼 옛날의 노래와 시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혹은 이전과 많이 달라지고 나날이 변하고 있는 시편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시인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시인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한 옛 노래들과 변해버린 지금의 노래들의 차이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찰자의 존재는 그저 내밀하고 섬세한 고백일 뿐이었던 노래를 이 시대의 문학에 대한 비판적 요소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의 마지막 연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어떤 노래는 / 아주 사적이라서 / 죽을 때까지 아무도 퍼갈 수 없었다네”. 최근 발표되는 일부 시편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사유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특정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의미를 가지고 미적 가치와 사유를 생산해 낸다. 문학 작품이 온전히 스스로 기능하고 고정된 의미와 사유를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방향성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오독(誤讀)만으로도 좋은 시편과 공명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시편 자체의 완성도에서 나오는 열린 해석의 가능성과는 반대로 목적성을 가지고 시편 자체를 재단하는 일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시인과 시편, 그리고 독자의 관계에 대해서 오래 생각을 했다. 빛에 관한 이중슬릿 실험을 떠올리게 된다. 빛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띄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측자가 존재할 때는 반드시 입자로만 관찰된다고 한다. 시인의 감각은 어쩌면 파동처럼 흐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시편을 통해 시인의 감각을 추론하고 관측할 수밖에 없으므로 입자로서의 논리적 사유를 통과해야 한다. 시의 해석에는 최소한 시편 안에서의 논리적, 감각적 유기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그 감광지를 통해서 다시 시인의 마음을 좇는 일이 너무도 손쉽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과연 좋은 일인가를 다시 스스로 묻게 된다.

  마지막 연의 “아주 사적이라서”는 여러 의미로 읽힌다. 사적(私的)이거나, 사적(沙的)이거나, 혹은 사적(事跡) 또한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의미가 이 시의 내용과 무척 잘 어울린다. “옛날의 노래는 모래였”기 때문이다. 모래에 대한 기억은 매우 사적인 기억일 것이며, 모래 그 자체일 것이며, 하나의 업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래성은 곧 무너지지만 바닷가 앞에 앉아 있으면 모두들 모래성을 쌓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것을 완성한다. 그 시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며 금세 무너질 것을 알아도 다들 그렇게 한다. 시인이 발견한 대로, 모래와 노래는 그래서 닮은 활자일지도 모른다.

 

(전략)

 

이 겨울 이 정권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더욱 견고해져만 가고

여자는 하필이면 내가 지나다니는 골목을 막고 서서 월요일마다 잔돈을 준비하게 하는가

왜 나의 장바구니를 매번 콩나물과 두부로 채우게 하는가

 

나는 불편하다 이 겨울이,

어느 날부턴가

내 안에 발이 얼고 허리가 얼고 목소리가 얼고 귓볼이 어는

미확인 물체 하나 버티고 있다는 것이,

집에 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때도

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여자가 하나 있다는 것이,

 

그만 벗어나고 싶다

지나가기만 하면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점액질의 눈동자에게서

누군가의 찰진 손가락에 의해 직조된 이 겨울에게서,

 

와글와글한 햇멸치 떼로 와서

봄이여,

얼음판에 눌어붙은 저 둥근 엉덩이를 어서 좀 떼어 가다오 

- 「눈사람」, 부분

 

  시인의 시선이 자주 봄을 향하는 이유는 「눈사람」에게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저 바깥에 “해가 뉘엿하도록 그 여자가 아직도 두부며 콩나물을 팔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이 겨울이 조금 불편하다”는 시인은 그가 나를 “호구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못내 부아가 치밀면서도,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 속에 영원히 녹지 않는 여자가 하나 있다는 것이” 불편하다. 영원히 녹지 않는 여자는 시인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며 나를 불편하게만 하는 존재이다. 시인 자신이기 때문에 보고 느끼고 간직하는 한 여자가 못내 마음이 쓰이는 일은 귀한 일이다. 동정보다는 연민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어울릴 것 같다. 짐짓 그저 불편하기 때문에 “와글와글한 햇멸치 떼로 와서 / 봄이여, / 얼음판에 눌어붙은 저 둥근 엉덩이를 어서 좀 떼어 가다오”라고 말한다. 시인이 봄에서 오래 시선을 떼지 못하는 마음을 조금쯤 짐작할만 하다. 타자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매우 폭력적인 사건일 것이다. 타자의 마음을 어찌 모두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언어 역시 얼마나 폭력적인가. 사물과 현상에 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허공을 찢고 공기를 들이마셔 발음하는 일 역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말하고 기록한다. 우리가 아는 거시적 세계의 법칙이, 중력이, 양자의 움직임 같은 것들이 미시 세계에서는 어그러진다는 것을 양자 역학에 대한 글에서 읽었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시인의 마음에서 우러난 불편이 한 독자에게 긍휼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감광(感光)과 닮았으리라 싶어지는 것이다.

시인은 시선과 감각적 지각으로 최초의 폭력을 세상에 구사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들어 있는 사고 실험의 상자를 열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상의 일이기 때문에 죽어 있는 고양이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가상의 사고실험 내의 존재일 뿐이다. 그것을 통해 죽어 있는 고양이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를 독자의 감각에 인화(印畫)한다. 그 행위를 감당하며 세계를 따듯하게 바라보는 좋은 시인 앞에서, 독자인 관찰자 또한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믿는다. 관찰자의 몫은 생각보다 크다. 문성해 시인이 앞으로도 더 깊고 오래 뜨거운 시편들을 써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흙이 흙을 받쳐 들고”(「흙 필요한 분」 부분) 가듯, 관측자가 원인이 되기도 하는 세계가 미시적 세계 안에 있으므로.

 

 

 

 

 

 

 

 

 

시인론_김건영.png

김건영  l 

2016년 《현대시》 등단. 시집 『파이』가 있음.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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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