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최문자
신작시: 뚜껑을 닫는 사람들 / 자[針尺] / 나는 항아리를 잊어
자선시: 호모 노마드 /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시인론] 최진석 “묵정밭에서 사라지다”
신작시
뚜껑을 닫는 사람들
방금 불행이 내 앞을 휙 지나갔는데
정신 차리기 싫었다
하루종일 내가 열어놓은 뚜껑들
귀가해 보면 모조리 뚜껑이 닫혀 있다
누구 짓이야?
뚜껑은 너무 큰 이야기들을 덮어서 통째로 무덤처럼 보였다
너의 말이 깨지는 이유를 알겠다
종일 살려고 뽀글거렸겠지 틈새에다 대고 중얼거렸겠지 아, 나만큼 너만큼 막힌 부분에서
누가 이 돌 같은 뚜껑을 저리로 굴려주나
사람들은 이야기하면서 무심코 뚜껑을 닫았다
사람들이 뚜껑을 닫고 또 무엇인가 이야기했다
흰 구름장 아래
거기 밀들이 서성이고 있었는데
뚜껑이 열린 채로 대궁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막무가내로 밀 냄새가 나를 치고 올라왔다
갑자기 정신 차리고 싶었다
자[針尺]
자에 몰두하시던 어머니
나도
맘속에 자[針尺]만 남았어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빠르게 느리게
지푸라기 둥근 해골 색색의 구슬 익명의 말소리까지 재려 한다
자꾸 재기만 하니까
옳은 쪽으로만 걷게된다
오해지만 검고 넓은 길 같은 옳은 쪽 길
메시야는 좁은 문으로 들어선다는데
눈 깜빡 하는 사이
옳은 쪽은 벌써 왼쪽이 되어 있는데
세상에
우리의 이별
스치는 바람
요지부동
틀릴 확률만 가지고
왼쪽에서 떨고 있는데
어머니의 죽은 자[針尺]로 뭘 잰다는 것
얼마나 수상한가?
나는 항아리를 잊어
새벽 3시
채소밭처럼 고요했다
시를 쓰다 항아리의 어떤 한 점을 바라본다
말기 암으로 죽은 친구는 이 이상한 항아리의 반짝임을 사랑했지
말랑말랑한 것 말고 굳혀진 것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이 항아리를 어떻게 할까
함빡 웃는 얼굴뼈 같은 이 느낌을
나는 항아리를 잊어
5분마다 가슴을 찢겠다는 친구의 말 나는 잊어
발버둥 칠 발이 없어진다는 그 발도 잊어
여전히 살아남은 친구의 무릎 두 개도 잊어
밑으로 땅으로
소리 안 나게
깊이 잊어
구근류가 된 둥근 두개골을 잊어
무엇 하나 지킨 적 없이 어슬렁거리던
매번 배부른
거의 나쁜
어떤 항아리를 잊어
자선시
호모 노마드
ㅡ지도
아브라함은 지도가 없었다
구름은 지도 없는 모든 곳에 있었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바꾸며
그날
하루 종일 지도를 들고
묵정밭에 서 있었다
결심들이 흔들렸다
내가 만들어낸 지도와
수레국화 없는 이 커다란 겨울이
한없이 공유되는 저녁
사람들은
자기 지도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꿈속에서
나는 죽도록 사라지고 있었지
어디 갔을까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이 묵정밭에서 사라진 나를 찾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산다는 건
격렬한 것
몇 계단 내려와 두리번거렸다
자꾸 내려가면
나의 무엇이 남나?
잘 보이던
나뭇가지 하나 덜 보인다
하나님은 아직 저 아래 있다
마지막 나뭇가지처럼 무너지듯 잠들어 있다
사람들은 무더기무더기 계단을 오르고
나뭇가지 몇 개 더 보고 있다
나는 몇 계단 더 내려간다
계단 위에 발들은 구름처럼 있다가 지워진다
이 계단의 혀는 너무 길어
한 사람이 지워지면 다른 한 사람
너무나 개인적인 나뭇가지들
사정없이 흔들리고
날 수 없으니까
발을 내려놓고
몇 계단 더 내려간다
묻혀야 한다면
땅에 닿아야 한다
나뭇가지들이 누워 있는
최문자 l
198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음.
시인론 / 최진석
묵정밭에서 사라지다
1. 막막함의 사막에 설 것
기독교 전통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충실한 신심으로 인간사의 여명기를 살던 그는 나이 백 살에 아들을 얻어 이삭이라 이름 붙였다. 귀하게 키우던 이삭이 성장하자, 늘 아브라함을 축복하던 신은 돌연 낯선 명령을 내린다. 아들을 바치라고. 말없이 이삭과 산행을 나선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칼을 들어 자식을 잡으려 한다. 성서에는 자세한 묘사가 나오지 않으나 끝내 실행하려 했던가 보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제지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마저 아낌없이 바치려는 그의 두려움을 신이 알았으니 이제 되었노라고.
창세기의 일절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지만, 신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놓는 아브라함의 행동에 후세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앙, 그 열렬한 믿음에 자식조차 제물로 올리겠다는 마음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약간의 기이함도 느껴진다. 아브라함은 정말 순전한 믿음 그 자체만으로 칼을 들었을까? 천사는 그에게 무어라 했던가? 너의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을 알았노라 말하지 않았는가? 이삭을 번제물로 올리려던 아브라함의 마음에 깃든 두려움.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 가는 길이 옳은지 알 수 없을 때, 두려움은 결단을 끌어내는 방향타가 된다. 믿음이든 두려움이든, 무엇인가가 있을 때 우리는 그에 준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없이 막막함만이 남겨진 상황에 던져진다면 어떨까?
최문자 시인의 최근 시집에는 ‘호모 노마드’ 연작이 실려 있다. 그 마지막 일 편은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지도가 없었다
구름은 지도 없는 모든 곳에 있었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바꾸며
그날
하루 종일 지도를 들고
묵정밭에 서 있었다
(……)
꿈속에서
나는 죽도록 사라지고 있었지
- 「호모 노마드 ― 지도」 부분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민음사 2022)
시편 속에 재현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신이 계시다는 하늘을 올려다 볼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도 없”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바꾸”면서 “모든 곳에 있”는 “구름” 뿐이었다. 형상 없는 이동의 즉물성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것. 더 없이 부족할까, 혹은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할까? 화자는 “하루 종일 지도를 들고 / 묵정밭에 서 있었다.” 개간되지 않은 황량한 벌판, 여기 남아 밭을 갈아야 할지, 또는 떠나서 새로운 거소를 마련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 어떤 “결심”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 자기 지도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각자의 지도란 이미 지도라 할 수도 없을 터. 사막같은 막막함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어쩌면 길은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죽도록 사라”짐으로써 발명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 속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길과 만나는 것일 게다.
어디 갔을까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이 묵정밭에서 사라진 나를 찾고 있었다
2. 죽은 자[針尺]를 던질 것
인간사의 질곡을 우화적으로 제시하는 시시포스 신화는 무익한 노동의 무한한 연속을 처절하게 전시한다. 애써 산정까지 끌어올린 바윗돌은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떨어지고,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라 안심할 수만은 없다. 기실 우리의 현대적 일상 역시 그 같은 무익한 노동의 무한함에 푹 잠겨있는 탓이다. 삶에서 늘 되풀이되는 “불행”이란, 어쩌다 찾아오는 나쁜 운수와의 대면이 아니라 그 같은 무익함이 사그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 자체일지 모른다.
방금 불행이 내 앞을 휙 지나갔는데
정신 차리기 싫었다
하루 종일 내가 열어놓은 뚜껑들
귀가해 보면 모조리 뚜껑이 닫혀 있다
누구 짓이야?
뚜껑은 너무 큰 이야기들을 덮어서 통째로 무덤처럼 보였다
- 「뚜껑을 닫는 사람들」 부분
“뚜껑”을 열어둔다는 것은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다른 삶, 더 나은 삶, 행복할 여지가 엿보이는 삶이 그것. 하지만 종일토록 “열어놓은 뚜껑들”은 하루가 저물 무렵 “모조리” “닫혀 있다.” 도대체 “누구 짓”인지 절규가 터질 법하다. 문제는 그런 부조리가 누구에 의해, 왜 일어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하면서 무심코 뚜껑을 닫”기도 하고, “뚜껑을 닫고 또 무엇인가 이야기”한다. 그게 다일 뿐. 그들이 끊임없이 나누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내용도 알 수 없고, 이유도 알 수 없이 계속되는 그들의 말은 커다란 이야기 뭉치를 이루고 그것들을 덮은 뚜껑이 오히려 작아 “통째로 무덤처럼 보”일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뚜껑을 닫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요점은 여기 있다. 가능성은 항상 불가능성으로 역전되고, 우리는 무익함의 허무주의에 매몰된다. 하지만 덮으면 덮을수록 가능성의 구멍이 뱉어내는 “이야기”는 점점 더 커져서 “무덤” 같은 뚜껑들로도 가리지 못할 지경이 된다. 그러니 “흰 구름장 아래” “밀들”처럼 말들은 자라고, “막무가내로” “나를 치고 올라”오지 않는가. 그렇게 무성한 밀 냄새에 “나”는 어찌 다시 뚜껑을 여는 노동을 마다할 수 있으랴? “갑자기 정신 차리고 싶었다.” 이처럼 도저한 맹목 속에서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몫을 다해야지 않을까?
자에 몰두하시던 어머니
나도
맘속에 자[針尺]만 남았어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빠르게 느리게
지푸라기 둥근 해골 색색의 구슬 익명의 말소리까지 재려 한다
자꾸 재기만 하니까
옳은 쪽으로만 걷게 된다
오해지만 검고 넓은 길 같은 옳은 쪽 길
메시아는 좁은 문으로 들어선다는데
눈 깜빡하는 사이
옳은 쪽은 벌써 왼쪽이 되어 있는데
- 「자[針尺]」 부분
사물의 길이를 측정하는 “자”는 척도를 표상한다. 옳건 그르건 자 위에 표시된 눈금들은 사물이 어느 정도의 몸피를 갖는지 재고, 그에 맞춰 잘라야 할지 붙여야 할지를 결정한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 특정한 사회 속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마음속에 이 같은 자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때로 “어머니”의 시선과 말씀 속에 새겨져 삶의 방향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재기”라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만들고 “옳은 쪽”만을 고집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모두가 뒤따르는 “넓은 길 같은 옳은 쪽 길”에 우리를 붙들어 매는 것. 그러나 “메시아는 좁은 문으로 들어선다는데,” 정말 우리는 옳은가? ‘오른쪽’을 함축하는 “옳은 쪽은 벌써 왼쪽이 되어” 있는데? 세상 사람들 모두가 뚜껑을 닫아야 한다고 할 때, 오히려 여는 것이 더 바랄 만 하다면 어떡해야 할까? “틀릴 확률만 가지고 / 왼쪽에서 떨고 있”을 때, 결연히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어머니의 죽은 자로 뭘 잰다는 것 / 얼마나 수상한가?”
3. 내려갈 것, 더 낮은 곳으로
흰 벽에 검은 점 두 개가 찍혀 있을 때 ‘얼굴’을 본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벽과 점, 흰 것과 검은 것이 애초에 사람의 얼굴일 리 없지만 말이다. 척도란 그렇게, 무엇인가로 미혹시켜 특정 상황 속에 가두는 맹목의 울타리를 가리킨다. “새벽 3시” “채소밭처럼 고요”한 어딘가에서 “항아리”를 보고 “함빡 웃는 얼굴뼈”의 느낌을 받았다면, 그 같은 척도의 작용을 의심해봐야지 않을까? 정신적 혼돈이나 미망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 중 누구든, 아니 언제나 우리는 그러한 미혹의 굴레에 맹목해 있다. 동그라미 아래 다섯 개의 선분을 긋고 ‘사람’을 연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인간이라는 척도에 깊이 사로잡힌 게 아닌가? 그러니 척도를 벗어나는 일은, ‘잊음’에서 시작되어야 할 터.
나는 항아리를 잊어
5분마다 가슴을 찢겠다는 친구의 말 나는 잊어
발버둥 칠 발이 없어진다는 그 발도 잊어
여전히 살아남은 친구의 무릎 두 개도 잊어
밑으로 땅으로
소리 안 나게
깊이 잊어
구근류가 된 둥근 두개골을 잊어
- 「나는 항아리를 잊어」 부분
통절함을 호소하는 친구의 외침이나 절박한 위기에 몰린 누군가의 몸짓, 모두 진실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항아리의 매끈한 표면에서 얼굴을 보고 착시에 빠져버린 누군가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감정과 몸짓의 격렬함으로부터 물러서야 한다. 잊는다는 것은 상황이 던지는 맹목을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의 결단 없는 연루를 기각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막막함의 사막에 다시 던지는 것, 길 없는 길에 다시 서는 것이 그것. 따라서 “매번 배부른 / 거의 나쁜 // 어떤 항아리를 잊어”라는 시구는 어딘지 비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결연함을 전달한다.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될 결단은 어떤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시인은 지금 선 자리로부터 더 내려올 것을, 한 계단 내렸으면 두 계단을 더 내려오고, 땅에 닿을 만큼 걸음도 몸도 내릴 것을 주문한다.
산다는 건
격렬한 것
몇 계단 내려와 두리번거렸다
자꾸 내려가면
나의 무엇이 남나?
잘 보이던
나뭇가지 하나 덜 보인다
하나님은 아직 저 아래 있다
마지막 나뭇가지처럼 무너지듯 잠들어 있다
-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부분
“저 아래”는 막막함의 심연을 말한다. 뚜렷이 보이던 것들이 점점 불투명하게 시야를 벗어나는 밑바닥,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이 원점에서 출발해야 하는 현존재의 사막이 그곳이다. 신은 그곳에 거하시는 분이니, 막막함의 심연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최후의 의지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느 신앙의 신이어도 상관없고, 사상의 극한이어도 괜찮으며, 실존의 맨몸 자체여도 좋을 게다. 아무튼 우리는 더욱 더 아래로, 몇 계단 더 내려가야 한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그 흐릿한 막막함의 장소로. “계단 위의 발들은 구름처럼 있다가 지워진다.”
날 수 없으니까
발을 내려놓고
몇 계단 더 내려간다
묻혀야 한다면
땅에 닿아야 한다
나뭇가지들이 누워 있는
“날 수 없으니까.” 이 뜻밖의 한 문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모든 것들을 압축해서 전시하고 있다. 우리는 날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지금껏 날고자 몸부림치고, 흡사 나는 듯한 환영 속을 살아왔다는 것. 날개 없는 허공의 유영은 그저 불가능한 욕망의 최면이자 결코 닿을 수 없는 안식의 허망함이라는 것. 이제 비로소 막막함의 이중적 정체가 드러난다. 그 하나는 발 디딜 데 없이 날갯짓을 하던 미망의 심정이며, 다른 하나는 비상에 대한 꿈을 접고 지상으로 내려올 때 느끼는 안도와 허전함이다. 어느 쪽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잡아 끄는가? 아니, 우리는 어느 쪽에 더욱 간절한가?
아마도 시인은 후자를 염두에 두는 듯하다. 그에게 비상의 환희와 즐거움은 더 이상 착지와 안식의 평안에 미치지 못한다. 묵정밭에서 사라짐은 그가 내린 마음의 지향 아닐까? 비상과 착지, 그 모두가 막막함의 바다를 헤매는 운명이라 해도, 삶의 어떤 지점에 이르면 필연코 결단해야 할 때가 온다. 시력 40여 년, 우리는 시인의 언어가 도달한 종착지를 숙연히 뒤쫓을 수밖에.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발걸음 역시 결정해야 할 시간이 온다.

최진석 l
2015년 《문학동네》 평론 등단. 저서 『사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 등, 역서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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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