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이승은
신작시: 비스바덴 일기 / 가자, 세탁소 / 진도에 들다
자선시: 옛집 / 정보전염병
[시인론] 유종인 "여행과 일상을 갈마드는 서정적 편력의 시편들"
신작시
비스바덴 일기
ㅡ 저 꽃처럼
시들해진 감자 서너 개 새들이나 먹으라고 지난해 뒷담 밑에 아무렇게 던졌는데 무성한 잎사귀 달고 피어 있네, 연보라 꽃
순간 흐려지며 눈 끝에 매달리는, 일렁이는 환절기여 못 견딜 낯빛이여 그대가 날 잊으려 할 때 저리 한번 피었으면
ㅡ 푄 현상
언덕을 넘다 보면 네가 좀 멀어질까 빗방울 등에 지고 내달리는 낯선 풍경 울고 난 뒤끝을 보인다 조금씩 목이 탄다
라인강 물줄기로 하강한 은빛 햇살 건조해진 기억들을 한 움큼씩 버리느라 이따금 엎치락뒤치락, 잔기침에 여념 없다
ㅡ 자정 무렵
안과 밖의 경계를 왼종일 지켰다고 담장을 쓸어주는 나뭇잎 그림자들, 달빛도 제 몸을 풀어 골고루 덮어준다
희붐한 달무리 아래 방백 같은 나무의 말, 조붓한 창틈으로 내가 듣고 말았어 수백 년 살아냈지만 같은 날은 없었다고
ㅡ 잔디를 깎다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앞마당을 깨우는 풀, 심심해서 그런가 새 우는 소릴 낸다 흠 하나 없는 얼굴로 밤새 훌쩍 자랐네
전원을 켜는 순간 소스라쳐 눕는 풀, 칼바람 맞서가며 파르륵 뒤채다가 결국은 목숨을 놓는 초록 가슴 서너 평
ㅡ 아지트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뭉게구름 밀려와서 키 큰 나무 우듬지에 자리 펴고 앉은 한낮 일어나 기지개 켜면 단숨에 만져질 듯
손아귀 꼭 쥐고서 그럼 한번 넣어볼까 대수롭지 않았어도 여태껏 놓지 못한 소소한 비밀 쪽지를 저 속에 숨겨볼까
ㅡ 나도 가만 앉아보니
가파른 성곽 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린 이를테면 그도 역시 한갓 사내였다 빛바랜 편지 쪽만 한 그늘이 내린 지금
돌의자에 떨어지는 서너 장 꽃잎의 말 사랑하고 그리하여 사랑받아 행복했다* 세상에 군더더기 없는, 싱겁게 달달한 말
ㅡ 마당놀이
지역 페스티벌 미인대회 출신으로 평생을 반려견과 어찌어찌 살고 있다는 ‘굿 당케’ 독일 할머니 춤추며 윙크한다
덩달아 강아지도 앞발 들고 끄덕이니 진풍경이 벌어졌다 ‘제어 에어프로이트’ 그때다 맥주잔 거품에 봉긋하게 앉은 낮달
*하인델베르크성, 괴테 기념비.
가자, 세탁소
찌든 얼룩 누가 볼까 얼기설기 여미는 날
거룩한 이곳 찾아 눈치껏 세제를 푼다
마음은 꿍치고 앉아 겉옷이나 빨고 온다
진도에 들다
바다 쪽을 안고 누운 강계마을 봄의 살결
맵싸하게 올라오는 갈맷빛 쪽파 숨결
홍주 빛 일몰이 번져 취기가 도는 물결
아직도 너는 있니, 눈길이 가는 쪽문
자꾸만 달아나는 썰물에 떼는 말문
섬 자락 놓쳐버릴까 매달리다 번진 파문
자선시
옛집
상주가 보는 앞에 이름 등이 들어오고 소각에서 냉각까지 오십 분이 지나갔다 눈시울 무너뜨리는 짙은 안개…… 흉중생진(胸中生塵)
금방 있던 사람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걷어 낸 그림자의 적막이 완강했다
작별은 범접치 못할 형용사를 거느렸다
비 오고 바람 불다 한생이 저물었다
무겁게 걸어왔던 헌 신발이 가벼웠다
다시는 질척임 없을 질척임만 떠다녔다
정보전염병*
입술을 잘근잘근 물고 있는 자판이다
화장이 너무 짙어
본 모습은 간데없고
마우스
따라다니며
혓바닥만 놀려대지
끊임없이 날아드는 추파에 눈이 팔려
생살은 도려내고
비계를 이식하지
이리 와
내 품에 쉬어
패드 바닥 그만 쏠고
* infodemic
이승은 l
1979년 제1회 만해백일장시조대상, 문공부·KBS주최 전국민족시대회 장원 등단. 시집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어머니, 尹庭蘭』 『얼음동백』 『넬라 판타지아』 『환한 적막』 『꽃밥』 『시간의 안부를 묻다』 『길은 사막속이다』 『시 간의 물그늘』 『내가 그린풍경』, 시선집 『술패랭이꽃』 이 있음.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시인론 / 유종인
여행과 일상을 갈마드는 서정적 편력의 시편들
우리는 지루한 몇 년에 걸쳐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그악하고 고통스런 감염증의 창궐로 인해 전지구적인 고통을 당면했고 그걸 여러 형태로 견뎌왔다. 당연하게도 전지구적인 교류와 여행의 빈도는 급속도로 위축되고 제한되었다. 여기에 따른 시조의 시공간 범위가 위축되는 경향을 띤 것도 연계되듯 당연한 것이었다. 지구에 닥친 이 희대의 전염병은 일찍이 백려(百沴)에 대한 백방(百方)의 무력함과 그 극복의 종요로움과 인간문명의 재검토를 분주히 독려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조는 그 문화의 한 권역의 한 여줄가리로써 초극이 아닌 자기함몰의 자폐적인 현황을 절실히 맛보았다. 그럼에도 시적 결기가 있는 시인이라면 그 심리적 포용과 시적 극복을 도모하는 간힘을 도모했던가. 쉽게 예단하거나 단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작금에 그런 시조적 기상이랄까 의지는 시조의 본의(本意)인 시절가조의 의미와 맥락을 새삼 헤아리게 한다.
‘서정적 서사의 가능성’을 한껏 뽐내는 듯한 이번 시편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비스바덴」 연시조다. 그의 이런 연시조는 여느 시인에게서나 그리고 이승은 시인 자신에게서도 형식적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 연시조의 출현 빈도나 소재의 취재에 있어서 그의 시력에 항존(恒存)해 왔던 시조 형식의 주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가 과문한 탓이 아니라면 이승은의 요즘 연시조의 일부 뉘앙스는 새로운 정서적 맹아(萌芽)를 활발히 틔우고 있는 낌새가 완연하다. 그것은 그만큼 분방하게 풀어낼 시적 여지가 풍부해지고 그 시적 정감과 생각이 새뜻하게 확장되는 시조의 너름새를 진작하고 있음이다.
시단에 이미 여행시, 혹은 여행시조의 유행과 그 패턴이 흔전만전한 터에 특별히 「비스바덴 일기」를 여행시조의 아류로 넣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보다 중요한 지점은 여행의 일상화가 빚은 새로움의 교류, 아니 일상의 새로움을 좀 더 새뜻하게 조명하려는 심리적 기제(機制)에 있지 않나 싶다. <여기>의 일상이 여행이 아닌 터라 그야말로 즐거운 긴장(tension)이 있는 <저기>의 여행이 일상이 아닌 새로운 비전인 듯 새뜻하기만 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새로움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여행이든 여행이 아닌 관성적인 일상의 저간(這間)이든 새롭게 누리려는 눈길은 시인에게 있어 종요로운 대목으로 자꾸 확장되는 기미가 완연하다.
이 시조 시편의 새로운 점은 흔히 일기(journal)라는 내밀한 형식의 구성 요소가 갖는 내면성(內面性)의 확장 내지는 공공연한 내비침이다. 여행 시편들이 갖는 이채로운 풍경적 취재의 대상이 외재적인 발흥의 요소로 등장한다. 여기에 비해 이승은의 시조가 갖는 특이점은 외재적인 풍물과 풍경적 인상들을 내재적인 정서의 확장과 그 서정성을 북돋우는 심리적 기제(機制, mechanism)로 활용하는 데 더 능숙하다는 데 있다.
여행지의 일상적 풍물과 풍경은 여행객에게는 경우에 따라 매우 신기하고 새롭게 눈여겨 볼 만하다. 평생을 한곳에 산 사람의 감상이나 느낌이 범박할지언정 잠깐 머물다 가는 여행객이나 시인에게 있어 한 풍물은 뜻깊은 정서적 외물(外物)로 도도록할 수 있다. 이승은에게 이런 일상적 외물이나 풍물이 시적 뉘앙스로 매력적으로 다가드는 모양새는 늘상 있어온 시적 전개이지만 이즈음에 있어 그 인상적 기운은 새삼 전향적이고 인생론적 상관물로 촉발하기에 더 왕성한 기운을 품는다. 그리기에 이 오지랖 넓은 일기는 분방하면서도 저류하듯 그 시운(詩韻)을 2수(首)를 품은 일곱 장(章)의, 즉 열네 수의 도도한 시조의 일기를 늘여 진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풍경과 풍물의 외재적 대상을 서정적 대사(臺辭)로 줄곧 시로 의역하는 데 능란한 시인의 감수성의 개가가 아닐 수 없다.
「비스바덴 일기」가 지니는 서정적 요령(要領)은 일상적 풍물을 여행이라는 매개적 시각에서 보면 새뜻한 정서적 분위기와 함께 시적 비유(metaphor)로 돋워진다는 점이다. 아마 시인이 사는 국내의 모처가 독일 비스바덴보다 풍물적으로 격(格)이 낮거나 열악한 것만은 아니다. 굳이 어느 것이 품격이 높고 낮다 비교우위를 논할 계제가 아닐 경우에 있어 우리는 하나의 시적 응시(gaze)의 준거(準據)랄까 시적 발흥(sudden rise)의 겨를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시조는 쓰여짐의 대상과의 교응의 차원을 어떻게 보편적으로 확대하며 새로움을 일상 속에서 추수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시조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그만큼 비스바덴의 시적 풍물은 예술의 남다른 취재와 시흥(詩興)의 접근법에 대한 하나의 시적 자의식(self-awareness)을 궁구하는 측면도 거느린다.
「비스바덴 일기」의 주된 형식적 진행은 소제목들을 거느린 별장(別章) 형식을 취한다. 각 별장마다 행갈이가 없는 두 수(首)의 연시조를 일곱 장까지 이어가는 연쇄적인 구조다. 그러므로 산술(算述) 하자면 총 14수(首)로 이뤄져 있다. 분별된 일곱 마디의 첫째는 "저 꽃처럼"은 "뒷담 밑에 아무렇게나 던졌던" 감자의 "연보라 꽃"을 다루고 둘째 마디 "푄 현상"은 "라인강 물줄기로 하강한 은빛 햇살 건조해진 기억들"을 체감하며 셋째 마디 "자정 무렵"은 "희붐한 달무리 아래 방백 같은 나무의 말"에 주목하며 넷째 마디 "잔디를 깎다"는 "전원을 켜는 순간 소스라쳐 눕는 풀"에 체험의 눈길이 가며 다섯째 마디 "아지트"는 "뭉게구름 밀려와서 키 큰 나무 우듬지에 자리 펴고 앉은 한낮"의 적요한 평화로움이 유심하게 목도되며, 여섯째 마디 "나도 가만 앉아보니"엔 괴테 기념비의 "싱겁게 달달한 말"이 성곽길의 발길을 잡으며, 마지막 일곱째 마디인 "마당놀이"엔 "평생을 반려견과 어찌어찌 살고 있다는 ‘굿 당케’ 독일 할머니 춤"이 서려 있다. 이 모두가 여행이나 관광지의 화려한 외경(外景)이나 절경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범박한 얘기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특정한 절경이나 절승(絶勝)이 따로 구획된 것만도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화자가 2수(首)마다 마음의 화폭에 담은 풍경이나 인상적인 풍물들은 그대로 우리네 국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비근하게 목도(目睹)할 가능성이 있는 비주얼한 대상이며 팩트일 것이다. 이 말은 여행이라는 비일상적 행위의 과정에서 유달리 솎아내는 풍광이나 풍물만이 따로이 새롭고 절대적일 수 없다는 보편적 새로움에 대한 일종의 현실적인 관념과 연계된다. 그렇다면 달리 무엇을 시적으로 취재할 것인가.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바로 시인의 심안(心眼)이 달리 품어 보는 인상과 그 대상을 통해 관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시심(詩心)의 절박함 내지는 절절함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흔히 소재주의에 함몰된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을 넘어 좋은 시편이 구성되는 측면은 풍경이든 사물이든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국내외이든 우주 밖 어느 무한한 지점의 항성의 일부이든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연장선상에 보자면 우리는 모두 인식(perception)의 산물이고 관심으로 종요로운 관계 대상이며 갈등과 부정성을 넘어 사랑으로 끌밋한 실존(實存)의 계기를 갈구하는 숨탄것들인 것이다.
하나의 소제목 아래 듀얼 코어처럼 두 개의 단수가 연횡(連橫)하는 이 시조형식의 특징은 사실 여행 시조의 특징적 국면을 나름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여행지의 여수(旅愁)나 인상기(印象記)를 분방하게 담는 데 있어 시조 형식이 갖는 정형률로서의 한계를 어떻게 조리차할 것인가에 대해 아마 시인의 이런 분장(分章) 형태의 고려와 시행은 나름 시사점이 있지 싶다. 일찍이 가람 이병기 선생이 당대에 연시조 형식의 필요성을 복잡다단한 현실의 수용체로서의 연수(連首) 형식의 시조, 즉 연시조를 주장했듯이 그 시조 형식의 그릇은 이즈음 크고 작은 변형과 갱신을 보여왔다.
시인 이승은의 독일 여행 체험담인 「비스바덴 일기」는 그런 측면에서 분방하고 열정적으로 세계 내적 이방인의 내면 일기를 시조로 경작하는 여행자의 성실한 분투와 눈썰미를 담고 있다.
「가자, 세탁소」는 시적 나르키소스(Νάρκισσος, Narcissus)가 일상적 현황 속에 배어 있고 도드라지는가를 보여주는 마음의 유난한 속절만 같다. 나르시스 또는 나르시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캐릭터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에 나온다. 나르키소소라는 낱말은 ‘잠(sleep) 혹은 무감각(numbness)’을 함의하는 나르케(ναρκη, narke)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쏠쏠한 방편을 건네받을 수도 없는 겨를을 ‘눈치껏’ 조리차하는 마음의 여지가 배어 있다. 여기서 세탁소라는 장소적 특징이 모든 "찌든 얼룩"이나 오염 요소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례로 보는 속에서도 화자는 그런 오염소(汚染素)들을 마음의 현황과 윤리 의식에 슬쩍 결부시키고 있다. 세탁이라는 당연한 과정의 원인 제공인 더러움을 외부적인 시선을 의식하는 내부적인 시선으로 소소한 윤리 의식을 견인한다. 이렇듯 윤리적인 자아를 엿보는 화자의 섬세한 눈길은 미적(美的) 자아를 사물과 현상 속에 비춰보려는 일종의 일상적 나르시시즘의 시각이라 불러보면 어떨까. 그러기에 "거룩한/이곳"이라는 세탁소에 대한 시인의 비유는 그런 세척(洗滌)의 과정과 그 청결해진 결과에의 윤리적 기대나 담보와 성취가 연계돼 표현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속(聖俗)이나 청탁호오(淸濁好惡)의 분별에 지나치게 기댈 때 우리는 또 마음의 갈등과 평화는 여러 분란의 거스러미를 돋아낼 기제가 되기도 한다.
바다 쪽을 안고 누운 강계마을 봄의 살결
맵싸하게 올라오는 갈맷빛 쪽파 숨결
홍주 빛 일몰이 번져 취기가 도는 물결
아직도 너는 있니, 눈길이 가는 쪽문
자꾸만 달아나는 썰물에 떼는 말문
섬 자락 놓쳐버릴까 매달리다 번진 파문
- 「진도에 들다」
풍광에 대한 서정적 탐문과도 같은 시인의 눈길은 ‘진도’라는 관광지 섬을 배경으로 그 풍경의 정취를 심정적 겨를로 능란하게 이완하고 끌밋하게 견인하는 시적 눈썰미를 드러낸다. 첫째 수의 매 장(章)마다 그 결구에 "~결"이라는 어휘를 명사로 매듭하고 둘째 수는 각 장의 결구를 "~문"으로 매만지는 구문의 유용은 보통의 용언(用言)을 통한 결구를 넘어서는 색다른 미감을 돋아낸다. 주로 시각적 인상을 끌어오면서 그 후각과 촉각을 은연중에 곁들이는 듯한 진도의 풍물은 "홍주 빛 일몰이 번져 취기가 도는 물결" 같은 가구(佳句)와 더불어 "자꾸만 달아나는 썰물에 떼는 말문" 같은 심리적 겨를을 잘 얼러내며 "섬자락 놓쳐버릴까 매달리다 번진 파문" 같은 풍경과 자아의 심경을 하나로 결속하는 끌밋한 절창에 파문지기도 한다. 이러니 이런 절경에 다다르는 시인의 심정적 발흥(發興)을 위해서라도 이승은에게 여행은 적실한 외유(外遊)일 수밖에 없으리라. 탁 트인 외계가 내면을 추동하는 그 크고 작은 여행의 격랑은 시인을 넘어 장삼이사 누구라도 종요로운 삶의 외도이자 일사(逸事)가 아닐 수 없다.
이승은이 다루는 시적 편력은 여행이라는 매개를 통해 분방하고 섬세하게 다기화(多岐化)된 측면이 완연해졌다. 시인의 이런 분방하고 다단(多端)한 시적 관심과 매력은 존재의 주변을 폭넓게 섭렵하고 내면화하여 시조로 수렴하려는 열정의 소산이지 싶다. 그러나 때로 화자 자신도 알다시피 이런 시인의 열정적 편력이 때로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회의하듯 성찰하는 경우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반성적 덕목이지 싶다. 정보의 여행, 흔히 웹서핑이라는 관성화된 일상의 매너리즘을 깨치자고 했을 때 "마우스 / 따라다니며 / 혓바닥만 놀려댔"던 무료한 즐거움의 일상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여행의 여러 경우를 이제 단순히 해외여행이라는 단순하고 범박한 공간이동의 이채로움에 한정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다. 특히나 시인에게 있어 여행은 일반인들의 관광이나 호사가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탐색과 궁구, 존재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관심의 고조 등으로 시적 전환과 전향이 일어나는 소우주의 개척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원론적이지만 심원한 여행의 매력은 같은 시편에서 결국 "끊임없이 날아드는 추파에 눈이 팔려 / 생살은 도려내고 / 비계를 이식하"는 이악스럽고 강퍅한 세속적 모습을 적발하는 모습이 도도록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런 모진 현실의 단면을 나름 그윽한 실존적 너름새로 품는 전향적인 인식을 놓치지 않는다. 그예 "이리 와 / 내 품에 쉬어 / 패드 바닥 그만 쓸고"라는 늡늡한 화자의 속종에 눈길이 따스히 머물 수밖에 없다. 심리적 간극의 한켠을 직시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긍정적 ‘품’으로 수용하는 진척을 보이기에 이른다. 이를 마음의 확장이나 번짐, 심리적 여행의 변곡점(變曲點)을 스스로 마련하는 시인의 끌밋한 자기애(自己愛)라고 부르면 안 될까.
한편 국내외를 막론하고 총체적인 관점과 경험의 확장은 더불어 우리 삶의 숙명인 죽음마저도 무상(無常)의 여행이라는 관점으로 수렴하는 데 무리가 없다.
금방 있던 사람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걷어 낸 그림자의 적막이 완강했다
작별은 범접치 못할 형용사를 거느렸다
비 오고 바람 불다 한생이 저물었다
무겁게 걸어왔던 헌 신발이 가벼웠다
다시는 질척임 없을 질척임만 떠다녔다
- 「옛집」 전문
사람이 자처해서 어딘가로 마음의 정처를 향해 이동한다는 일반론적인 여행의 개념이 이 「옛집」에 이르면 어딘가 숙연하고 "적막이 완강"해지는 소슬함에 얼마간 속내가 습습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아니 확연하게 화자는 생(生)이 생(生)으로써 마지막을 고하는 화장장에 와 있고 거기서 "금방 있던 사람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그 "한생이 저물"어버리는 덧없음에 "무겁게 걸어왔던 헌 신발이 가벼" 워지는 급격한 여행의 전환과 그 전율에 휩싸였을 것이다. 죽음을 마주하기까지 길고 짧을 시간일 따름인데, 모든 숨탄것들이 아니 그럴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런 여행자들을 여행하는 언어의 목도자(目睹者)다.
여행이라는 냅뜰성 있는 행보와 그 의미적 확장으로 놓고 볼 때 죽음과 그 장례는 극명한 여행의 도식을 여러 시적 층위(層位)로 번져놓는다. "저물"음과 "가벼"워짐과 "떠다"님은 어쩌면 모든 여행의 숙명 같은 체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은의 여행의 편력이 갈마든 시조집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에 필자가 넣은 평설을 인용하고 그치려 한다.
인상적인 사물의 기억들을 섬세하게 세공하고 미려한 심미적 눈썰미로 인생 도처의 여정을 실존적 깨달음으로 온축(蘊蓄)해온 과정이 이승은의 시편마다 아직도 쏠쏠한 촉(燭)을 세우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항차 끝나지 않는 그리고 끝날 수 없는 듯 인생을 여행하는 자, 그 소요(逍遙)의 마음이 세상 모든 시인의 궁극적인 속종이라는 것을 재우치는 일만 같다. 더불어 살아온 날들과 다시 스스로를 똥기듯 살아갈 날들의 신비는 별세계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것이므로 그걸 살뜰히 웅숭깊게 조감(鳥瞰)하는 일의 종요로움은 방기될 수 없는 천분(天分)이다. 그러니 시인은 여전히 활달한 너름새로 새 인생의 주소를 낳는 중이다. 버려짐 없는 무등(無等)의 눈길로 후반기 여정을 걷는 자의 시적 율격(律格), 주니가 들지 않는 시조의 찬란으로 고스란하다.
-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 평설 부분
어쩌지 못할 계기의 추수(追隨)가 아니라 시간의 인연으로 분방해진 시공간의 풍속과 풍물을 마음의 축도(縮圖)로 삼으려는 이승은의 시조적 취향은 그대로 서정의 윤곽과 구체이면서 삶의 여행기이다. 그것은 누구나 비근하게 겪는 일상의 것이어도 이내 여행의 체취와 결을 보일 때가 있다. 왜냐면, 우리의 삶 자체가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영원의 한순간 여행이라는 그 절체절명을 은연중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유종인 l
1996년 《문예중앙》시, 2002년 《농민신문》 ·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 미술평론 당선. 시조집 『답청』 등, 시집 『숲 선생』 등, 미술책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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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