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시인
 
이달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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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서안나
  신작시: 계산서옥도 / 나쁜 기적 / 흘러넘쳤다, 물고기 주제에

  자선시: 애월, 앙련(仰蓮) / 나비의 밀도

 
  [시인론] 김관용 "이제 당신을 보내려 한다, 물고기 주제에"

 

 

 

 


 신작시 


 

 

 

 계산서옥도*  

   

  
 

 

      

  한발 오르면 떠나는 자의 세계요

  내려서면 눈 감은 자의 세계라

 

  방문 열고

  물가를 바라보는

  사람

 

  황포 돛대 올려 떠나는

  정인이

  포구에 두고 간

  물속의 먼 마음을

  먼지 낀

  흐린 눈빛으로 읽고 있네

 

  능수는 휘어져

  뱃전을 붙잡고

  바람은 불타올라 봄날을 부수는데

 

  당신 알고 있었나

  내 눈 속에 걸어 들어와

  남겨놓은 불탄 자리

 

  우리는 사랑할 때

  이미 이별의 호사를 누리는 것이니

 

  방문을 닫으면

  정인을 먼 거리에 앉히는

  옛사람의

  젖은 환대를 알 것도 같네

 

 

                                

* 겸재 정선 「계산서옥도」, 비단에 수묵담채, 59.5×37㎝, 18세기

 

 

 

 

 

 

 

 

 

 

 



 

 

 나쁜 기적

     

   

  

    

 

  누가

  꽃 속에

  비련을 풀어두었나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처럼

 

  벌레가 잎사귀를 다 먹어

  아버지의 폐 시티처럼

  핏줄 같은 그물맥만 남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아침이 되면

  나팔꽃처럼 벌떡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벌레가 잎사귀를 먹는 동안

  꽃은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는 어떤 눈길로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당신의 몸을 바라보았을까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보랏빛 핏줄 선

  손등으로 두드리는

  나팔꽃

 

  아프다는 건 절벽 같은 것

  없는 손이 그린 함정 같은 것

 

  나팔꽃 지는 저녁은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것

 

 

 

 

 

 

 

 

 

   

 



 

 

 흘러넘쳤다, 물고기 주제에

  ㅡ 물메기탕      

   

    

 

     

  흘러넘쳤다, 물고기 주제에

  흘러넘치는 마음을 수저로도 뜰 수 없었다

 

  흘러넘친다는 건

  이 갯것이 가시를 다 놓아두고

  바다를 이해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당신,

  당신이 당신의 감옥인 것을

  이백 여섯 개의 뼈로

  3천 년을 정복자로 걸어온 것을

 

  갯벌은 혀처럼 부드러워 사람을 껴안을 수 있지

  우크라이나에서 포탄이 터졌을 때

  어린것의 몸에서 흘러나와 거리를 적시던 피와 눈물

  성모 마리아상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도

  갯벌 같은 마음이

  당신의 참혹을 이해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죽은 자들과 함께 서서

  썩은 바다를 훔치는 맛

  물메기탕 맛이 그러하지

 

  내가 다리 푹푹 빠지며

  뼈를 버려

  당신에게 걸어가는

  갯것의 마음


  

 

 

 

 

 

 

 

 


 자선시 


 

 

 

 애월, 앙련(仰蓮)

  ㅡ 두일뤠 열나흘 굿

           

 

      

 

  당신,

  사랑에서 달아나거라, 눈먼 물뱀처럼,

  스스로 제 영혼을 찌른 애기 심방처럼

  당신과 나는 태양을 죽여 돌 속에 파묻었다

  월계수 잎과 단단한 밤의 가시를 삼키고

 

  당신과 나는 눈이 먼 자,

  인연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닌 자

  그리하여 바위를 지고 강림처사를 따라

  두일뤠 열나흘 동안 밤낮 돌 속을 걸었지

 

  돌 징을 치는 당신은 눈을 반쯤 뜬 사람

  진흙 경전처럼 돌 속에서 부서지고

  종이꽃처럼 물결에 흩어져

  발뒤꿈치를 자르고 흰 피가 돼라

 

  당신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은

  왜 요령소리처럼 아름답고 진중한가

  수련은, 마음은, 물결은, 태양은, 약속은, 흰 피는,

  죽은 물고기들은,

  정성스럽고 캄캄하다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아닐 터

  앉았다 일어서면 이번 생(生)은 참을 만하다

  당신과 나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다

 

  손과 손을 잡았다면 필시

  두 마음은 

  춤이 될 것이다

 

 

                                               

     * 앙련(仰蓮):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에 새겨진 연꽃 모양 무늬

     * 두일뤠 열나흘 굿(두이레 열나흘 굿): 밤낮으로 7일간 하는 큰 굿

 

 

 

 

 

 

 

 

 

 

 


 

 

 

  나비의 밀도

        

   

    

  

 

  나비를 접으면 헛꿈이다

  꽃의 고요를 훔친 자

  귀인(貴人)은 그렇게 온다

 

  돌사자와 별을 어깨에 이고 이마에 두 눈을 그려

  가시밭길을 뒹굴고 여린 것을 이끌고 병들고 쇠잔한 늙은이를 부축하고

 

  회심곡을 부르면 쟁쟁 바라 소리가 나며 아픈 곳에 물병을 부어주며

 

  돌 속에 두 다리를 묻은 용두관음

  두 눈을 부처처럼 내리깔고 꽃에서 꽃으로 불의 필체로 허공을 채우는

 

  나비는 모서리가 없다

  나비는 한 번 죽은 마음

  밤이 뾰족해진다

 

 

 

 

 

 

 

 

 

서안나  l

1990년 《문학과비평》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발달사』,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선집』 1ㆍ2, 『전숙희 수필선집』,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이 있음.

 

 

 

 

 

 

 


 시인론 / 김관용 


 

 

 

 

 

이제 당신을 보내려 한다, 물고기 주제에

— 서안나의 신작시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자. 당신은 몇 년 전 어떤 지면에서 “시는 곧 시인 자신의 내면을 방랑하고 방랑 후에 발끝에 남는 검은 멍 자국이나 주름과도 같다.”고 썼다. “삶이란 고통의 언덕을 넘어서는 고단한 사건들을 대면하고 흘려보내며 내면이 깊어지고 사유의 계곡 역시 깊어지기 때문이다.” “비루한 몸의 기억들”이란 희미한 통증을 수반하는 이 글은 어쩐지 바디우를 소환하게 한다. 시의 난해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유하기 위해서 시 안으로 뛰어들 것”을 요구했다. “시는 하나의 작용인 까닭에 하나의 사건”이라는 점이 요지다.

  나는 당시 당신의 시론을 균열이라고 이해했고, 바디우는 그것을 사건의 일어남, 혹은 작용이라고 부연해준다.

    

  그래서 비루한 몸

  당신의 작업을 개괄할 안목이 내겐 부족하지만, 몇몇 경로를 통해 정리해본 바로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어떤 인식들을 생산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을 사랑, 이별, 고요라는 키워드로 제시해보면 어떨까. 이것은 당신이 욕망하는 여러 이념들 중 가장 상위 단계에 위치한 계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동안 성취해온 시편들은 그것들이 현전하는 하나의 몸이며, 몸의 운동성에 의해 작용하는 하나의 사건이지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의 난해성을 몸의 난해성이나 욕망의 난해성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당신이 사랑에 관해 사유할 때, 그것은 환대할 수 없는 몸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필연적으로 주체로부터 분열된 대상을 재현한다.

 

   누가

   꽃 속에

   비련을 풀어두었나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처럼

 

   벌레가 잎사귀를 다 먹어

   아버지의 폐 시티처럼

   핏줄 같은 그물맥만 남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아침이 되면

   나팔꽃처럼 벌떡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벌레가 잎사귀를 먹는 동안

   꽃은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는 어떤 눈길로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당신의 몸을 바라보았을까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보랏빛 핏줄 선

   손등으로 두드리는

   나팔꽃

 

   아프다는 건 절벽 같은 것

   없는 손이 그린 함정 같은 것

 

   나팔꽃 지는 저녁은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것

ㅡ 「나쁜 기적」 전문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몸을 힘겹게 바라보는 아버지를 당신은 바라본다. 어떤 의미에서건 이것은 분명 사랑의 행위이다. 이때 우리는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예감하고 뒤늦게 자신이 “떠나가는 사람 뒤에” 서 있다는 자각을 얻는다. 여기서 “아프다”는 감각은 자각이 현실로 육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신도 아플 것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욕망의 기획물인 사랑은 자신의 결여를 복구하려는 욕망의 가장 적극적인 사태로, 사랑으로 인해 실존하지만 실존을 소멸시키는 것 또한 사랑이다. 위로의 말을 건네자면, 당신이 느끼는 통증은 이러한 사실을 절감한 후 몰려오는 소용돌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과 나는 몸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몸의 현전은 사랑하고 있는 몸이며 애초의 욕망과 다르게 “나쁜 기적”을 작동하고 있는 몸이다. 몸이 가진 가장 나쁜 속성 중 하나는 바로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이 질료의 형태로 세계의 한 부분을 점유함으로써 존재를 획득하기에 자칫 기적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소멸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욕망 이전을 돌아볼 때 훨씬 더 열등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기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모순과 결핍이라는 역설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 종잡을 수 없는 틈새를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와서 깊은 통찰 하나를 남겨두고 떠난다.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행위를 사전적 의미인 ‘파악(把握)’이라고 할 때, 거기엔 대상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이성보다 대상을 움켜쥐려는 격렬한 감정이 숨어 있다. 하지만 몸이란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며, 섹슈얼리티가 작동하는 힘이란 또 얼마나 무력한가. 인생 8고(苦)에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라는 것이 있다는데, 격렬하게 움켜쥘수록 대상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뿐 비극적인 장면만 연출한다. 당신의 표현대로 비루한 몸이란 결국 이별의 징후로서의 육체이고, 어처구니없게도 거기에서 비롯된 사랑은 “없는 손이 그린 함정 같은 것”이리라.

    

  물고기  

  당신의 균열에는 물고기들이 산다. 비루한 몸의 사랑이란 대상과 나를 분리된 존재로 구획한 후 대상을 욕망하는 사건이므로 거기엔 균열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은 물고기라고 썼지만 우리에게 눈물이라고 읽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연스레 물의 이미지를 끌어오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그들의 사랑이 우리와는 다른 측면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별을 통해서 사랑을 실현하는 존재라고 해도 될까.

  세상의 모든 물고기는 “사랑할 때 이미 이별의 호사를 누리는”(「계산서옥도」) 존재들이다. 이른바 체외수정을 하는 그들은 사랑할 때조차 하나가 된 육체로 완성되는 전희를 상상할 수 없다. 그들에게 세계는 영원한 타자일 뿐 리비도를 발산하는 절정의 순간에도 사랑을 나누고 있는 대상을 결코 자신과 동일시할 수 없는 숙명을 지녔다. 실제로 어떤 종족은 사랑이 끝나자마자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과 이별이 한 몸인 셈이다.

 

   흘러넘쳤다, 물고기 주제에

   흘러넘치는 마음을 수저로도 뜰 수 없었다

 

   흘러넘친다는 건

   이 갯것이 가시를 다 놓아두고

   바다를 이해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당신,

   당신이 당신의 감옥인 것을

   이백 여섯 개의 뼈로

   3천 년을 정복자로 걸어온 것을

 

   갯벌은 혀처럼 부드러워 사람을 껴안을 수 있지

   우크라이나에서 포탄이 터졌을 때

   어린것의 몸에서 흘러나와 거리를 적시던 피와 눈물

   성모 마리아상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도

   갯벌 같은 마음이

   당신의 참혹을 이해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죽은 자들과 함께 서서

   썩은 바다를 훔치는 맛

   물메기탕 맛이 그러하지

 

   내가 다리 푹푹 빠지며

   뼈를 버려

   당신에게 걸어가는

   갯것의 마음

ㅡ 「흘러넘쳤다, 물고기 주제에-물메기탕」 전문

 

  식탁 위에는 일용할 양식이 올라와 있고, 버너가 가열되며 식기를 데운다. 그러다 “참혹을 이해”하는 순간이 도래하는데, 당신은 “수저로도 뜰 수 없”는 “흘러넘치는 마음”을 몸의 가장 아픈 감각으로 지각한다. 물론 “우크라이나에서 포탄이 터졌을 때”의 세계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실존적인 생활과 너무 먼 거리에 있으므로 상황 자체만으로는 동일성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지만 “어린것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눈물”을 목격함으로써 순식간에 당신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외계의 사건이 시의 재현으로 전이되는 바로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의 감정(emotion)과 만나게 된다.

  감정이란 이런 것이다. 일정한 수온과 수압으로 규격화된 몸의 내밀한 해류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그들의 계절은 환희와 좌절이라는 급격한 질곡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더구나 감정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그것이 현재 자신의 어디쯤을 유영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정해진 시기에 산란을 하고 정해진 지역을 이동하는 것이 그들의 내력이며, 소멸 이후에도 눈을 감지 않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다. 심해의 물고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심리적 균열이 발생하는 지점에 이르면 그들은 감정의 형태를 갖추어 우리를 격발한다.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는 동안은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하다가도, 심연에서 달구어진 감정은 어떻게든 육체의 한계선을 넘어서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눈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흘러넘쳤던 것이다.

  나는 이 시를 몸의 끓어오름이라고 읽었고 당신이 그것의 추동을 정신의 타나토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주의 환상’이라고 하는 이 공간의 멀지 않은 곳에는 에로스도 있을 것이다.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결합된 우주의 환상을 이별이라고 ‘파악(把握)’하자 당신은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죽은 물고기들은, / 정성스럽고 캄캄하다”(「애월, 앙련(仰蓮)」)라는 발성법에서 특히 그렇다. 심지어 “당신에게서 내게 건너오는 말은 / 젖은 물고기 두 마리의 떨림”(「저녁의 음계」)이라거나, “내가 놓아 보낸 물결 천천히 밀려드는 이별의 질서 나는 당신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한다 강물에 손을 담그면 당신의 흰 무릎뼈가 만져진다”(「이별의 질서」)고 힘없이 말할 때, 당신의 표정은 심하게 일렁인다. 그것은 이별이 현전하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나비

  밀도란 부피를 가진 어떤 물체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속한 공간을 얼마나 빽빽하게 자기화하고 있느냐에 관한 물리량이다. 같은 부피의 밀도가 커지면 질량 또한 커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당신이 당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전략으로 균열을 선택했다면, 그 균열의 세 번째 층위에는 밀도가 존재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가 몸이고, 몸(혹은 마음)의 균열을 봉합하려는 시도는 사랑이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이후를 구축하고 있는 단계는 ‘이별의 질서’일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대책 없는 당신은 어느 날 밤 인적 없는 공원에서 “이별은 얼마나 차가운 물질인가 / 감정은 기우뚱거린다”(「한밤의 시소」)라며 자신을 응시한다. 감정은 사적인 것이어서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더러는 넘치기도 하는데, 우리는 사랑이라는 중심으로부터 항상 같은 거리를 배회하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중심으로부터 비루한 거리를 유지하며 희미한 윤곽을 가지고 있는 육체도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다.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눈물을 흘리는 건 그 때문이고, 당신이 밀도를 소유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당신이 내면화하고 있는 밀도는 단위 부피당의 균일한 질량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으로서의 밀도라는 점이다. 당신은 그것을 “헛꿈”이라고 했다. 밀도의 차원에서 죽음은 욕망이라든지, 사랑, 이별 등의 개념들을 하나씩 지워가다가 일순 존재 없음을 실현해버리지만 당신의 죽음은 밀도의 사라짐으로 질량과 부피까지 무화시켜버리는 것을 표상한다.

 

   나비를 접으면 헛꿈이다

   꽃의 고요를 훔친 자

   귀인(貴人)은 그렇게 온다

 

   돌사자와 별을 어깨에 이고 이마에 두 눈을 그려

   가시밭길을 뒹굴고 여린 것을 이끌고 병들고 쇠잔한 늙은이를 부축하고

 

   회심곡을 부르면 쟁쟁 바라 소리가 나며 아픈 곳에 물병을 부어주며

 

   돌 속에 두 다리를 묻은 용두관음

   두 눈을 부처처럼 내리깔고 꽃에서 꽃으로 불의 필체로 허공을 채우는

 

   나비는 모서리가 없다

   나비는 한 번 죽은 마음

   밤이 뾰족해진다

ㅡ 「나비의 밀도」 전문

 

   진정한 본질에 도달하려는 당신이 나비의 알레고리를 사유하는 건 불가피하다. 이는 우리의 욕망을 재구축하는 일이고, 어쩌면 당신은 이런 방식으로 욕망으로부터 탈주를 시도하는 중이다. 당신의 시에 날아든 몇 마리 나비가 이를 증명한다. “느티나무가 끌고 오는 이 저녁의 차가운 고요 죽은 왕의 몸을 날아오르는 나비 한 쌍 나는 좀 더 나의 영혼 가까이 걸어간다”(「머나먼 왕릉」)며 죽은 몸의 감각을 불러오는가 하면, “하룻밤 인연 끝에 / 날아가려는 사내의 몸에 / 여자가 핀을 찔러 넣었다”(「외눈이지옥나비」)며 욕망 치명적인 속성을 날카롭고 차갑게 분출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끌어온다는 점에서 나비는 밀도의 대리인이다.

  당신에게 나비는 클리나멘(clinamen, 偏位)인지도 모르겠다. 고대 에피쿠로스들이 언급했던, 어딘가에 부딪쳤다가 미끄러지는 원자이자 세계를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원리 말이다. 다른 점이라면 당신의 클리나멘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힘”이라는 아우라의 재현에 있다. 누군가의 손이 허공에 나비를 흩뿌렸고, 나비는 죽음 안에서 작동하다가 고요에 도달한다. “봄꽃에 눈먼 나비”(「모란에 들다」)처럼 좀 더 밝은 톤의 목소리에서도 당신의 나비는 무중력의 공간이나 진공의 세계를 벗어날 것 같지 않다.

 

  당신의 시를 읽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일부 장면과 캐릭터를 재구성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 있다. 갑작스럽게 포획된 미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고립된 자아의 출구 모색이 이런 유형의 영화가 내세우는 가장 큰 장치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의 시에서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기억이 시베리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새의 팔만대장경」)면 사랑, 이별, 고요일 것이다. 당신을 그것을 비루한 몸, 흘러넘치는 감정, 밀도의 알레고리 등으로 표현한다. 이들 중 나는 당신의 고요를 적멸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능가산의 서쪽은 적멸이다”(「새점을 치다」)라며, 지시하는 방향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에 “상상력과 감각은 시의 미학성을 구현하는 결정적 요소”이며 “시에서 상상력의 구현은 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라고 썼고, 나는 지금 우리가 복원해야 할 감각은 “감각기관 자체에 깃들어”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떠올린다. 어떤 아이가 있었는데, “눈물이 나지 않는 아이들은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 눈물은 가장 솔직한 문장이었다”(「신성한 교실」)고 고백할 때의 감각 말이다. 그리고 “시 앞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독자는 시의 작용들 앞에 자신을 열어놓기만 하면, 그 앞에 문자적으로[문자 그대로] 자신을 열어놓기만 하면 충분하다.”(「비미학」)는 바디우의 말을 믿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근작에 보이는 당신의 경향 중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기별할 수밖에 없겠다. 적멸을 동경하지만 아직 끓어오르는 감정을 고민 중이라고.

 

  

 

 

 

 

 

 

 

 

 

 

시인론_김관용.png

김관용  l 

201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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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