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준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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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의 힘
피아노의 빈혈이 맑은 울림
언제나 노랑에 가까운 레슨을 들었다, 도, 레, 미, 파, 솔에서
레를 누르는 떨림이 레를 떠나는 떨림으로
손가락 끝에서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힘을 주자
빈 곳이 생겼으나 곧 붉어지겠지
도넛 스무 개를 먹고 울었다 도넛 스무 개의 공허로 가득한
오후의 뱃살처럼
울었다, 그것이뱃속에가득한느낌이띄어쓰기가없는어느인생같아서
울었다 울렸다
암막으로 가린 나의 방에서
울었던 것과 울렸던 것들을 나눌 수 없다
가위에 눌린 팔다리는 남의 것
내가 아는 남의 것
내가 안은 남의 것
그렇게 정의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젓가락 행진곡으로
손가락들이 같은 간격으로 옮긴이의 말과 같았다
핀란드어를 번역해볼까, 아이누어를 번역해볼까, 그들의 언어가 얼음과 추위에
조금 더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자꾸만 되뇌었다 얼음 이내의 혈액형이 있는 듯
나는 A형도 O형도 아닌 어느 육각형, 모가 난 모습
오른손과 왼손이 함께 일그러지며
뼈와 근육이 함께하는
적의를 드러내는 것
피아니스트들은 손버릇이 나빠야 해!
좋은 말은 진하게 써야지
사람들이 알아보겠지
띄어 쓰는 게 많다고 띄어 읽지 않는 것처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네 발로 기어 다닐 수 있다면
아름다운 신앙이다

김준현 ㅣ
경북 포항 출생. 2013년 《서울신문》 시, 2015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등단.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나는 법』이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10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