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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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길녀 

이상한 나라의 낭독회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여름 저녁

 

창덕궁 가는 길 근처

책 익는 냄새로 가득 찬 지하 창고

선남선녀 고급 독자와 소설가 그리고 시인들

민소매와 긴 옷소매의 동물 복장으로

헌책 뭉치 의자에 앉아 있다

 

가끔씩 꼬맹이선풍기 바람이 손님같이

다녀가고, 낭독자 목소리는 비밀회담 문서처럼

낮은 울림으로 무대 앞에서만 흔들린다

 

들리지 않는 문장들이 조용히 잠식한

곰팡이처럼 강한 냄새만으로 시야에 꽂힌다

 

진지함만이 높은 천장을 가득 메우고

길거나 짧은 문장 옷을 걸친 글자들

멀지 않은 시절의 유령같이 노랑 먼지 쌓인

책과 책 막간에서 제멋대로 춤을 춘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표지가 뜯겨진

심리학 저서만이 기울어진 책장 틈에서

처음부터 열심히 듣고 있다

 

짧거나 긴 낭독의 시간이 지나자 의자가

되었던 뭉치 책들이 해바라기꽃처럼 크게 웃는다

 

어떤 회사 100년사는 오랜만에 보는

세상 밖 아이들의 놀이에 두꺼운 표지가

터지도록 꽃보다 더 크게 웃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여름 저녁

 

 

 

 

 

 

 

 

 

 

 

 

신작시(김길녀).jpg

김길녀 ㅣ

강원 삼척 출생. 1990년 《시와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 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가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