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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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종천 

  괴델의 「제2 불완전성의 정리」

 

 

  약간 복잡한 괴델의 불완정성의 정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이 모순이 없는 한 수학은 나의 무모순성을 나 자신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이를 보편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사람은 자신이 건강한 이상, 건강하다는 것을 건강 자체로는 알 수가 없다.

  다시 이를 일반화하여 풀어보면,

  내가 건강하다는 것을 알고 느낄 때는 나의 건강이 손상되어 건강하지 않을 때이다.

  건강 즉, 무모순의 상태에 모순이 발생하고 나서야 무모순의 상태가 입증된다는 것이다.

 

  이를 하나의 보편적인 상황을 들어 가며 풀어보자면,

  아내들이 남편에 대하여 착하고 성실하면 할수록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을 확률이 크다.

  이유인즉, 착하고 성실하기만 한 아내는 그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착하고 성실한 것은 즉 무모순의 상태인 것이다.

  아내의 무모순성이 입증되지 않기 때문에,

  가시 없는 장미는 아름답지가 않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물과 공기를 공짜로 무한하게 마실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기와 물의

  소중함을 모르고도 살 수가 있다.

  최근에 우리는 물을 돈으로 사서 마시고 있다. 그러한 지금도 물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리하여

  드디어 물의 가격이 자신의 월 급여만큼이나 올라간다면 그때야 우리는 세삼 물의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그 때야 우리는 물을 아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대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요컨대 괴델의 「제2 불확정성의 원리」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괴델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발견했다고 하나

  나의 생각에 인간 이성의 한계 자체가 세계의 구조라는 것이다.

  이 세계는 논리 공간이다.

  논리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다.

  이 세계는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사실 나는 몇 년 전 저런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없이 선하고 착하기만 한 여성을, 그녀는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것이었다.

  남편은 젊고 변화무쌍하고 싱싱한 애인과 같이 살고 있고,

  나는 무모순 상태의 그녀에게 모순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했다.

  그녀의 마음에 제곱작용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것이다.

  못난 놈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두 번 울었다.

  "내 마음속에 지금 아무도 없어요"

  나는 왜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던가?

  괴델의 불완정성의 정리에 의하여 그녀에게 모순이 발생한다면 그녀의 남자는

  그녀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까?

  말하자면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공전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공전만 하고 자전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지구의 자전은 공전에 대한 자기 지시/자기 언급인 것이다.

 

  두 개의 축을 감아 도는 벨트는 늘어나게 되어 있다. 괴델은 불완전성의 정리에서

  자기 지시적 명제를 이용했는데 이는 일종의 대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와 남편 사이에 내가 간섭하게 되면 축은 3개가 되어 벨트는

  대각선이 생기고 벨트는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벨트로 3개의 축은 더욱 확실하게 회전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기를 자각하여 지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속된 표현으로 말하기를

  삼각관계라고 하나 그 표현에는 이런 심오한 진리가 깃들어 있다.

  이제 대각선이 나타난다. 대각은 경과 위가 만나는 곳이다.

  그녀의 남편과 그녀 사이에 나는 대각선이다. 제곱이 자기언급인 것처럼

  대각선은 자기 언급/자기 지시하는 선이다. 이는 피타고라스 정리가 증명하는 것이다.

  임의의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길이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을 합한 것과 같다!   

 

  미국 산부인과 의사협회보에 따르면 2010년 당시 사생아는 22%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랑하는 동안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를 가진 것이다.

  진화는 이렇게 생물의 다양성을 통하여 가능하다.

  우주는 최대다양성의 원리에 따라 구성된 것이다.

  저 산과 강처럼 하늘처럼 땅처럼 인간도 주인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야 개별적인,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이 가능하게 된다.

  가족이란 사적 소유의 산물이다.

  결혼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나에게 주인이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오만, 그러니까 휴부리스라고 생각할 근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적인 사랑에 대해서만은 예외를 적용할 수가 있는데,

  인간은 자연 진화의 연쇄상에서 최후로 등장한 먹이사슬의 마지막 포식자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어떻게 소비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때문에 번식력이 제일 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성을 제한당하고 억압받는 대가로

  허구를 통하여 즐기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허구적 활동은 그러니까, 자신의 생물적인 번식력을 비생물적인 번식력으로 대체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구환경파괴  오염과 지구 온난화의 근원이다. 모든 활동이 배설하는 것이 되어버린

  숙명의 비참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두고보라!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아름다운 대자연이 우리 인간의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배설물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섹스에서 전쟁까지 모든 것이 배설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들 자신도 우리의 배설물이 되어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에로스를 먼저 구원해야 한다.

 

  나는 인간의 성욕을 단 한마디로 옹호하고자 한다.

  인간은 지구 생태계 마지막 포식자로서 제일 약한 번식력을 성욕으로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는 이렇게 논리적이다! 결정적으로 말하여 인간의 생체에너지는 오로지

  에로티즘과 노동을 통해서만 낭비되어야 한다.

  인간이 성을 이세의 생산에 종속시키는 것과는 다르게

  성욕은 우리 안의 성이 자기 언급/자기 지시 하는 것이리라!

 

  멸하기에 앞서 무엇 때문에 여호와는 착하지도 않은 롯과 그 가족을 구원하고자 했는가? 그건 순전히 종족의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여호와의 목적은

  역설적이게도 롯과 그의 두 딸의 에로티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녀들은 성녀인가?

  창녀인가? 性女는 즉, 聖女다.

  사실에서 진리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서 진리가 생성되는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 그것은 논리의 한계이고 이 세계의 구조가 그렇다는 것이다.

  모순이 인간을 일깨운다. 모순이 발생하는 곳이 진리의 자궁이다.

 

  아무튼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이 정도로 해제 가능할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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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천 ㅣ

1986년 《세계의 문학》, 198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고양이의 마술』, 산문집 『노동과 예술』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오장환문학상〉 〈2012년 최우수 도서상〉 수상. 제1회 문화예술위원회 문학 창작지원금 수혜.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