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 저자 | 정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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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여름을 버리는 일
무덤이 없는 상자 속
무덤이 없어서 구름이 잘 자라는 상자 속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상자보다 작아야 한다
나는 상자를 채우지 못하는데
나는 남아돌아 뚜껑을 닫을 수 없다
보현봉이 보이는 어디쯤에서
칫솔질을 하는 오후 3시를 보며
부서진 마사토 알갱이들이 먼 산 보며 웃는다
마주 서서 꽃 진 유월도 칫솔질을 한다
오후 3시의 유월은 키스를 준비하는 걸까
치아에 충성을 감정에 배반을
네모난 상자에 들어가려면 잘게 부서져야 한다
부숴야 한다는 걸 아는 것과
부수는 것 사이에 치솟은 봉우리
산산이 깨져야 상자를 가득 채울 수 있고
나는 온전히 나를 집어넣을 수 있다
과연 뚜껑이 닫힐 수 있을까
뚜껑을 닫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여름이 여름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상자가 상자를 버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자가 상자를 버리고 한 필 옷감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감싸는
피복의 형식을 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각의 상자 속으로 들어가려면
나는 나를 잘게 부숴야 한다
나를 망가뜨리지 않고 나는 부서질 수 없다
치아에게 배반을
감정에게 충성을

정재분ㅣ
2005년 《시안》 등단. 시집 『그대를 듣는다』, 산문집 『침묵을 엿듣다』가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