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 저자 | 한지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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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문장
비가 오는데 창문을 열었다
공기를 마시는 나무들
수업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빗발 속에서 분명 비명 소리가 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은박 뚜껑을 따고 요구르트로 알약을 넘긴 뒤
은박 조각을 버렸다
감은 눈을 떴을 때 다리에 놓인 무거운 침목들을 올려다본다
피를 너무 쏟아내 멈춘 심장
눈 감은 내 얼굴이 낯설게 보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생각을 모았지만 낯선 힘은 더 강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는 생각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찢은 국화들이 널려 있었어
유리에 비쳐보이던 몇 명의 얼굴 뒤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그걸 당긴 손가락의 따뜻함을 생각해
아직도 먹먹한 가슴이 불덩이가 된 거
내 머리에 흐르던 피를 비로 지워버린 걸
은박지를 찢으며 아직도 숲 어딘가로 향하고 있어
숨은 날개의 빛깔은 어두워
내 몸은 어둔 침목을 밟으며 복도로 나갔지
집에 가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어
탄환이 박히기 전까지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허공을 올려다본다
가는 눈을 더 크게 떴을 때 하늘로 이어지는 물소리가 들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한지혜 |
1980년 월간 《신세계》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마음에 내리는 꽃비』 『차와 달의 사랑 노래』 『두 번째 벙커』 『모든 입체들의 고독』이 있음. 2016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