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임현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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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3분 카레
마을 하나가 폭발하고
노란 짚더미 위
너의 심장이 남겨지는 것
아니 어쩜 그건 억울한 양의 염통
토끼가 씹던 당근 조각이거나
수화기를 통해 지령을 전달받던 잠수함
누수 된 눈물이 전화선을 녹일 때
감전된 소년병이 유황빛 계곡에 처박힌다
간이침대엔 양배추 이파리 같은 애인의 편지
노란 고름이 쏟아지던 옥상
겨자소스를 바른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소년
깁스는 언제 풀어?
곧
늪을 건너왔지
일회용 숟가락 같은 악어들이 배를 뒤집은 채 죽어있는 곳
우리가 밟은 게 젖은 나무토막이었나, 질기고 질긴 누군가의 팔다리였나,
성당 종소리가 멈췄다
밀봉하듯 밤이 오고 있어
물가 오두막으로 뛰어들까
배꼽 같은 거기서 서로의 목이라도 조를까
주홍빛 어깨를 드러낸 그 애가 웃는다
금세 난파될 소파 위에서?
어느 나라엔 화학조미료로 만든 소파가 있대
그럼, 카레 맛 소파는? 동시에 시작되는 키스 맛 소파는?
우리는 영원히 멈춰 있는 건지도 몰라, 검은 터널을 통과하는 은빛 총알 속에서
벙커가 공개되고
마지막 3분이 쏟아졌다
그를 노랗게 휘젓던 향정신성 알약들과 그녀가 뜨다 만 치자색 스웨터
쓸데없이 고귀한 3분의 절망이
이윽고 접시를 물들였다
물가 집
콩이 전부인 맛없는 밥도 괜찮아
바구니 알들을 따뜻하게 부화시켜주는 엄마
본래 꿈은 암수 구분이 있다죠
새끼를 까지 못하는 수수한 꿈들은 헐값에 팔린대요
동그란 언덕마다 피가 묻어 있어요
형제들이 덜 마른 부리를 기댄 흔적
물가로 내려가는 내리막에서
물결 몇 장을 책장처럼 넘기던 그 애가 말끔히 사라져요
엄마 품에서 피비린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이곳에선 어떤 징조도 시시해요
우리는 피 묻은 깃털이 잔잔히 흩어지는 물가 집에 사니까요
울음소리만으로 엄마는 우릴 구분한대요
사라진 그 애는 조금 낮은 뒤척임
동시에 바구니에 던져진 우리는 울음소리가 닮았어요
그 애만
내 비명을 구분했었는데
그 애가 사라진 그날처럼
엄마가 몇 줌의 사랑을 훠이훠이 던져줬어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내 심장이 엄마의 욕심에 꼭 맞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고마웠어요
이렇게 예쁘게 길들여주셔서
근데 그거 알아요?
죽음은 엄마를 꼭 닮았대요
마음이 푹 놓이도록
뭘 해도 놀라지 않도록
아주 꼭 닮았대요
K의 방주
우리가 살아남은 건 어떤 계시가 아니라
우리가 요트 족들이기 때문이야
오늘은 남쪽 바다에 닻을 내렸어
은박봉지에 담긴 시리얼들이 해파리처럼 떠오르는 곳
과일통조림 같은 위안들은
더 깊은 곳에 처박혀 있겠지만
식품창고에서 생수병을 목에 걸고 잠든 사내를 봤어
장기 투숙객이 된 사내는 너무나 평화로웠지
과자봉지처럼 가벼운 사내의 근심들이 사방을 떠다녔어
앞서가던 다이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줬어
영주권 나온 거
축하해!
운 좋으면 침몰된 군함도 만날 수 있어
우리는 하얀 제복을 입은 담배꽁초들을 꺼내놓고
방금 죽은 미래를 쑤셔 넣는다
영원히 침몰하는 행운, 네게 줄게
잘 마른 돛처럼 바삭한 스낵을 먹으며 감사해
아직 남은 우리들의 유통기간을
만기된 보험증서 같은 나날들을
가랑이에서 뚝뚝 피를 흘리며 소녀들은 사탕껍질처럼 웃고
오늘은 비린 회를 먹기에 아주 좋은 날
양은이
반질대던 상판대기도
반짝 솟구친 귀때기도
당신을 위한 게 아니야
불어터진 라면발이나
시금털털한 찌개 따위가
우리의 심장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을 위해
나는 뜨거운 객기로 넘치다가
자글대는 애간장으로 눌어붙다가
송두리째 태워먹었네
객혈하듯 탄가루를 쏟아내고 자빠지던 그 수돗가
컹 짖었던가, 당신
온갖 냄새가 묻은 나를
온갖 손때가 묻은 나를
연분홍빛 혀로 핥던 당신
흙탕물이 튀기는 개집 아래
비로소 애타는 밑바닥이 되었네
싹싹 핥아도 돌아오지 않는
죽은 고 년이 되었네
티라노의 앞발
먹잇감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뒷발과
맹목적으로 물어뜯는 이빨을 위해
기꺼이 태어났지
늪에 잠긴 어린 것을 건져 올리기도 전에
앓다 죽은 애인을 부둥켜안기도 전에
죽은 발톱처럼 피어났지
뭐였더라? 그 이름
훔쳐 먹은 알처럼 목구멍을 틀어막던 그 감정
슬그머니 넘어가던 노른자위보다 못한, 아무튼
심심한 이빨에게 죽은 가족 따위
질긴 가죽만도 못함
싱싱한 지갑만도 못-하암
썩은 고깃덩이를 베어 물며
크앙크앙 방귀를 뀌어대는 허풍쟁이 똥구멍에 어울리는
참으로 소소한 앞발
곧 무능한 악수로 진화할
곧 캄캄한 저의로 발화할
찜찜한 앞잡이
그래봤자,
겁쟁이 백기가 될 거라며
새파랗게 질릴 욕설이 될 거라며
거추장스럽게 들러붙는
내 앙증맞은 거시기가 될 거라며

임현정ㅣ 2001년 《현대시》 등단.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이 있음.

모를 만한 세계
나는 임현정 시인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잘 알고 싶어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많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대부분 생각나는 만남이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현대시》에서 대담을 진행한 일이었다. 그녀의 첫 시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식상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많은 준비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많은 대답을 대차게 내놓았던 그녀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많은 말들 중 내가 오랫동안 곱씹었던 그녀의 대답이 있다. 시 쓰기에 영향받은 일을 이야기하는 질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아무도 저에게 개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리고 그 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시에 맹렬해질 수 있었던 이야기로 이어나갈 수 있었다.
맨 처음, 왜 그 누구도 임현정 시인에게 개입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문단에서의 생존방식을 떠올리면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오거나, 뜻대로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조명받는 일도, 타이밍이 중요하고 어떤 지면에서 어떤 작품을 발표하는지 역시 누군가의 ‘개입’에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얼마나 고리타분한가. 여기저기 지면을 통해 호명되는 시인들의 고귀함만 아는 평론가의 게으름을 탓해볼까. 숨어 있는 광물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잘 전시된 보석에 눈길을 두는 독자의 탓을 해볼까. 아니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인 것일까.
내가 아는 바로도 임현정 시인은 특별하게 조명된 일이 없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묵묵하게 시를 써냈고, 아주 오랜 시간 끝에 첫 시집을 낸 사람이었다. 그 이후에는 다양한 소설을 쓰면서 독자들을 만나왔다. ‘이야기 폭탄’을 지닌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시에 대해 맹렬했던 자신이 자신의 과녁 정중앙에 꽂힐 때, 그녀는 굉장히 기뻐했다. 나는 그녀와의 첫 시집 대담을 준비하면서,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차갑고 엉성한 유머가 슬픔의 옆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꽤 귀한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일상과 꿈을 드나드는 문턱이 낮고, 현실과 비현실의 울타리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작은 파수꾼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첫 시집을 내고 난 후, 시간이 지난 그녀의 작품을 오랜만에 읽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도 전에 이 글의 제목을 ‘유머의 결로 현상’으로 정해뒀었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5편의 시를 곱씹어 읽으면서, 달콤한데 어쩐지 이가 시린 기분이 들었다. 참 이상한 기분인 것이다. 이 경쾌하고 유쾌한 서사 속에서 왜 슬픔을 끼얹는 것인지, 그리고 그 슬픔은 절대 슬픔이라 말하지 않고 시의 내벽에 맺혀 얼어있는지. 그런 시간이 궁금했고, 그것은 임현정 시인의 시를 읽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요즘의 개성은 어떤 문장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문단, 특히 시인들이 꾸려내는 개성은 언젠가 출현한 적 없는 새로운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란 없고,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솜씨만이 새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점화가 가능한 폭발물 같은 개성만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을 새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우리는 그런 요소들로 시를 읽어갈 수 있다. 임현정 시인의 시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 이것은 새롭지 않을 수 있으며 개성이 뚜렷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주조해 엮어낸 솜씨일까. 그 솜씨는 어디에서 올까. 나는 그 지점에서 피어나는 후문이 이 시인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슬플 수 있는 유머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희망의 작용들을 예로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3분 카레」가 향해가는 ‘3분의 절망’이나 ‘영원히 침몰하는 행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깝고도 먼 요트 족의 이야기를 담은 「K의 방주」는 기본적으로 ‘소년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혹은 비완성의 정체성이 정확하지 않게 발음하는 감정이나 상태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시에서 자주 쓰는 방식 중 하나인데, 여기서는 방법보다는 의도에 물음을 던지고 싶다. 그녀가 아직 ‘소녀 감성’을 지니고 있어서? 아니면, ‘어른’이 되었다는 지루함 때문에?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완성할 수 없게 만들어 놓는가. 그 여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시는 조금씩 흥미로워진다.
그녀가 ‘심장’에 대해 말하는 시 속 발화법을 나눠 봐도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금털털한 찌개 따위가/우리의 심장이 될 수 있을까’(「양은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내 심장이 엄마의 욕심에 꼭 맞았으면 좋겠어요’(「물가 집」), ‘마을 하나가 폭발하고/노란 짚더미 위/너의 심장이 남겨지는 것’(「3분 카레」) 세 편의 시에 각각 등장하는 ‘심장’은 너무나도 다른 의미로 쓰인다. 삶을 다 알아차린 시시한 어른처럼 말하다가도, 엄마를 향하는 소녀의 어린 음성으로 들리다가도, 내버려 두는 희망으로 읽힌다. 이렇듯 나는 ‘심경이 복잡한’ 시인으로부터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하나의 테마나 콘셉트로 진행되지 않고, 시의 장소나 화자에 따라 변모하는 시인의 역할극이 우리를 상상으로 입힌 실재에 초대하고, 현실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게 허상으로 지은 세계로 다시 유인하는 속임수, 그녀의 시에 내재된 규칙은 이런 것이다.
이런 교란 작전 때문에 끝끝내 임현정 시인을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게 나쁜 일인가. 잘 알면 그건 또 시시한 일인가. 헷갈리는 와중에 시인이 시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 늪에 빠지는 일처럼, 그리고 늪에서 겨우 빠져나와 다시 늪에 호기심을 두는 일로부터 시인의 시들은 통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책상 위에 쌓인 시집들을 읽다 보면 무심코, 시인들은 아픔을 자기 방식으로 다루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불과하지만, 그 방식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전이될 수 있는 상처의 진단과 치유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시를 별거 아닌 존재로 만들다가도, 시만큼 귀한 것이 없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시집 자체가 아주 오랫동안 앓아온 병이자 제조한 약이며 그것은 마음의 회복이나 감정을 진단하는 일에 쓰인다. 임현정 시인의 시는 직접적으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를 성찰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는다. 먼 곳에 이야기를 중개자로 둔다. 그리고 시가 끝난 뒤 방 하나에 갇혀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는 일을 한다.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시인 스스로가 자신의 아픔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특이하고 새롭다.
특이하고 새롭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그 누구도 ‘개입’하지 않아 홀로 병을 아름답게 자라나게 만들었던 시인의 방 안에 나는 홀로 있다. 내벽에 흘러내리는 시인의 차가운 유머에 웃지도 않고, 그것을 녹일 만큼 따뜻한 입김도 내뱉을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을 때 온전히 보이는 거울로 가득한 방 안이다. 거울이 많다고 해서 나 자신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시인의 시를 잘 알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시인의 시를 정확히 모른다고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외롭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라는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외롭지 않았다면 혹시나 지금의 방을 가질 수 없었을 시인의 쓸쓸함에 손을 포개어본다. 누구든 그렇지 않았을까. 설사 ‘개입’이 빈번한 시인이라고 한들, 외롭지 않고 행복할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계속 나아가다 보면 정답이거나 확신이라고 착각하는 시들을 쓰게 되고, 그 시들은 당시의 민낯을 반사하고 굴절되며 결국 왜곡된 형태로 남겨지게 된다. 그때의 지금은, 지금의 지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임현정 시인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지금으로부터 다시, 첫 시집은 어떤 형태의 ‘지금’이었었는지. 그리고 왜 유머는 차가워졌고 이 차가움을 지켜내는 시인은 어떻게 지내는지. 이 또한 ‘모름’의 상태로 둔다고 한들, 이제는 그녀의 시에서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는 힌트를 얻은 게 아닐까 싶다가도, 힌트를 얻었다 싶을 때 ‘객혈하듯 탄가루를 쏟아내고 자빠지던 그 수돗가’(「양은이」)로 안내하는 시인의 상냥하고 불친절한 방식은 끝내 모르겠다는 대답을 뾰족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의심과 환영 속에서 시인이 넘나드는 상상과 현실 가운데에는, 여전히 시인이 과녁처럼 매달리고 있는지. 그 누구의 개입도 달갑지 않은 차가운 방 속에서 나는 흘러내리는 유머를 맛보았다. 그건 아주 쌉싸름한 맛이었고, 이 맛은 배고픔을 유발하는 것이 맞다.
글 · 서윤후 | 시인, 2009년 《현대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이 있음.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5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