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저자 | 최예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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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광장에서 만나요 작은 손에 쥔 꽃다발 묶음이 시들어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한둘쯤은 있어도 문제없죠
꿈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던 기차는 나를 향해 덮쳐오고
기차에서 도시락을 나누어 먹던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쳤죠
꿈에서 깨어나면 오래된 벽지에 왼쪽 뺨을 붙인 채였고
갈라진 벽 틈 사이로 이웃집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쳤어요
분홍 코끼리를 믿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있어요
우리는 제각기 다른 부위를 보았죠
오래된 정원을 청소하다가 잔디를 뭉개놓은 분홍 발을 보았고
오래된 애인과 헤어지던 밤 손수건을 건네는 분홍색 긴 코를 보았고
아직 구두를 신지 않았는데
맨발인 채로 코끼리의 귀에 매달려 하늘을 날아다녔죠
오래된 벽지는 사람의 영혼을 품고 있어요
당신이 꾸었던 꿈의 크기만큼 빛바랜 무늬가 선명해지고
어젯밤 사납게 말다툼을 하던 부부는 우산을 건네줄 거예요
잠에서 깨어나지 말아요 이제 곧 예고편뿐인 영화가 시작될 테니
광장에서 만나요 작은 손에 쥔 꽃다발 묶음이 시들어도 괜찮아요
알고 있어요 예정된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홍 코끼리에 대한 막연한 믿음뿐이죠

최예슬 | 2011년 『문학동네』로 등단.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