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홍순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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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대신 해태*
묵은 낱말들의 무게가 종이를 찢듯
눈의 무게가 나무를 찢어놓았다
갈라진 나무 가슴 속으로 눈들이 꽃잎처럼 날아드는데
너는 그 옆에서 뜬금없이
눈사람 대신 해태, 우리 해태를 만드는 건 어때?
해태는 상상의 동물
상상은 눈처럼 가벼운 생각들의 구름
뭉게뭉게, 눈들을 뭉쳐 해태를 만드는 거야
대리석처럼 무거운
눈이 사람이 되는 순간, 눈사람은 달아나지 못한다
해태는 달아날 수 있나?
해태에겐 날개가 있잖아, 중얼거리는 사이
눈은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쏟아졌구요
해태는 겨우내 응달에서 무럭무럭 자라났구요
그때까지도 해태의 날개를 달아줄 생각은 못 했는데요
남녘에서 느닷없이 불씨가 튀어 사방으로 번졌어요
우리는 눈에 갇혔다가 빠져나오자마자 불에 갇혀 어쩔 줄 모르고
불을 꺼줄 해태는 어디에 있나
날개를 달지 못한 해태는 우리 옆에 침묵처럼 앉아만 있었구요
남녘의 재(災)들이 먼 길 날아올라 해태 위에 앉았어요
재와 눈이 서로의 몸을 핥아주며 흘러내려요
눈은 사실 슬픔의 재로 만들어진 깃털들
이 깃털로 누군가의 무릎을 덮어줄 천을 짤 수 있을까요
해 뜨는 위치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어요
당신의 동쪽에선 지금 해의 이마가 보이나요?
* 화재를 막는 물의 신수(神獸), 재앙을 막는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차용.

홍순영 l
2011년 《시인동네》 등단.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가 있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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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VOL.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