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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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를 지나다
검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땅
내 머릿속은 어둡고 서늘해 기댈 수 없는 가파른 비탈
온종일 비좁은 가지를 따라 봄비가 내린다
끝을 보지 못한 시작을 반복하면서
무언가에 붙잡혀
보랏빛 가지 끝에서 더 이상 가지를 않는 가지들
달리기를 그만두고 산책을 한다
시간은 검붉은 낯빛으로 수면 위를 맴돌고
계단과 잡풀 사이에 던져놓았던
산 책을 집어 든다
산 책을 펼치자
산책이 정전된 도시로 전환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시공을 넘나들며
좌우가 뒤집혔을까
옆집 뒷마당에서 자라던 탱자나무는
폐문을 열고
시도 때도 없이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나는 골목과 골목 혼자 떠드는
움푹 꺼진 땅
도미노처럼 쓰러진 그림자 밑에서
나는 버려진 행각과 생각의 넓이를 계산하고
봄비는 겹쳐진 영역으로 내려가
비열한 잔상을 만들고 우산을 만들고 장르를 만들고 파도를 만들고 기호를 만들고 천 미터 상공에 떠 있는 다리 사이 여러 개의 눈
비중이 낮은 내 역할은 뭉개진 나사못 같고
머리부터 발목까지 녹슨 물에 잠겨 있는 꽃잎 같고
아주 잠깐 햇빛이 들이쳐 잔물결을 만드는 동안
내가 확인한 건
예리한 철근이 드러난 나무의 실체
나는 조그만 셋방에서 하늘에 구멍을 뚫고
조용한 비명을 꽂는다
서둘러 조립된 볼트처럼
헛돌고 있는 구름의 문장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말없이 끊긴 액정 화면처럼
문장이 지워지고 하늘이 검게 도배된다

김현서 l
1996년 《현대시사상》 등단,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나는 커서』 『코르셋을 입은 거울』, 동시집 『수탉 몬다의 여행』, 청소년 시집 『탐정동아리 사건일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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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신작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