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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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용헌 

낙필(落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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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슬픔과 번뇌와 절망과 니힐리즘을 쓰는데 연필이 툭 부러졌다.

혁명과 투쟁과 사랑과 통일과 이데아를 쓰는데 연필이 툭 부러졌다.

연필을 다시 깎아 눈물이라는 꽃과 분노라는 바람과 욕망이라는 불꽃을 쓴다.

손마디에 힘을 빼면 의지라는 관념어는 의자라는 사물어가 되어 몸을 받쳐주고

아귀에 힘을 주면 흑심이 등에 박혀 울던 까까머리 친구가 꿈속에서 달려든다.

까맣게 흘러가 버린 잉크의 추억과 함께 이제 연필을 깎는 사람은 없다.

 

가슴에서 삼색 볼펜을 꺼내어 빙빙 돌려본다.

눈물과 분노와 욕망은 검은색으로 갈겨쓰고

꽃과 바람과 불꽃은 빨간색으로 흘려 쓴다.

파란색은 하늘을 논할 때 쓰려고 상징으로 남겨 둔다.

 

또박또박 결심을 눌러쓴 글씨는 언약인 듯 멀리 사라지고

불현듯 잔머리를 굴려 가며 날림체로 쓴 글씨만 실금처럼 남았다.

날마다 쓰고 또 써도 지워지는 맹세가 있고

맹세코 지우고 또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날이 있다.

 

부러진 연필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는다.

불화와 오해와 갈등과 연민과 상처는 노을 붉은 유리창에 쓰고

평화와 화해와 공정과 상식과 정치 따위는 쓰지 않고 휴지통에 버린다.

하얗게 흘러넘치던 독백과 여백 사이에 이제 낙필을 하는 사람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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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헌​ ​​​​ ​​​​​​​​​​■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 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