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021
Extra Form Output
저자 박남희 

룩북

 

​

​

​

봄은 겨울을 벗고 여름을 입고

누에는 고치를 벗고 날개를 입는다

 

그러므로 벗자

 

시냇물이여, 강물에 이르면 얇은 옷을 벗고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면 속옷마저 모두 벗어버리자

 

그리하여 먼 수평선을 악보로 만드는 몸의 춤을 입자

춤은 멀어진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

 

낮에는 마음속 깊이 잔잔해지는 달의 옷을 입고

밤에는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해의 옷을 입자

 

벌써 나를 잊은 그대여

망각을 벗자 그리고 망각을 입자

뱀이 허물을 벗으면

어엿한 한 벌의 망각이 홀로 빛날 수 있다

 

몸은 몸을 위한 것, 그리고 옷은 옷을 위한 것

옷을 벗으면 몸이 빛나고

몸을 벗으면 옷이 남아서 오롯한 한 벌을 이루는 것

 

그러므로 벗자, 그리고 입자

뜨거운 여름을 벗고 선선한 가을을 입자

 

나를 잊은 그대가 아주 잊혀져

붉은 단풍이 제 몸의 흔적을 지우며 떨어져내려

구르고 구르다가

얇디얇은 바람의 옷을 입을 때까지

 

 

​

 

 

 

 

 

 

 

 

 

 

 

 

신작시-박남희.jpeg

박남희​​​​​ ​​​ ​​​​​​​​​​■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속의 쥐』 『고장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