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 저자 | 주민현 | ||
|---|---|---|---|
묘비명 없음
죽음은, 사랑은
불가능하고 미끄덩해
오늘도 누군가는
술 마신 운전자에 의해
단순한 오해나 악의 때문에
아니 그냥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살해당할 수도 있어
그러나 살아남은 게 우연만은 아니야
소득과 계층의 불평등에 따른
질병과 죽음의 목록을 봐;
안전함과 두려움 사이로
내리는 눈은 따뜻한 죽음
녹슨 하늘을 잘라 입에 물면
녹지 않는 흰 조각 케이크 맛
나는 눈사람으로서 사람의 문법을 배우네
눈사람에게도 리얼돌이나
인공지능에게도 마음이란 없을지 몰라
그래도 그들을 사람에 가깝게 만드는 사람과
사람을 대하듯 만지는 사람이 있어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죽을 수 없는,
죽은 줄 모르기 때문에 묘비가 없는;
우리는 뭉치면서 비로소
꾹 눌러 만든 반죽으로
마트료시카처럼 겹겹이 서로를 낳는다
오래된 언덕을 오르면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새
가족이 보이기도 하고
썰매 옆에서 미끄러지는 개와
아이들이 올망졸망 매달린 나무 아래
노키즈존 카페에서
두 발자국이 서성이다 가기도 하고
눈은 이 모든 걸 기록하고 다시 내려 지운다
눈사람으로서 나에게는 성별이 없고
목차도 끝도 없고
희다는 게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니어서
내리는 눈은
재와 폭죽을 담은 부드러운 통조림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란 뭘까,
반대로 인간이 아니라면 해도 되는 말이란
당신은 호주머니 속에서 날카로운 것을 만지작거렸다

주민현 ■
2015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가 있음. 창작동인 <켬>으로 활동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