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용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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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싫은 날
대부분의 날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기야 하겠어요
그래서 더욱 살맛이 납니다
인간이 싫은 날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맘에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살게 됩니다
악착같이는 아니어도 번개같이
변심을 일깨우는 그 저녁의 겨울비같이
스산함을 꼭 껴안게 됩니다
인간이 싫은 날은 내가 싫은 날입니다
싫은 걸 어쩌겠습니까
자연도 어쩌지 못하는 이 인간 감정의 무한 회전 속에서
인간이 싫은 날에 인간이 보입니다
내가 내 맘에 안 들어서 살듯이
인간이 싫은 날이 인간을 살게 합니다
사람이 저만큼 오고 있는데
빛이 오고 있구나 경악한 적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온기와 열기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갈수록 더합니다
사물이 지나가도 이보다는 낫겠습니다
싫어하는 인간 가까이에
한 명의 돌
세 명의 나무
열 명의 진눈깨비가 살고 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맘에 안 드는 나 가까이에
한 명의 강아지
세 명의 길고양이
열 명의 돼지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싫은 날입니다
이웃이라는 이름의 가면이 싫은 날이고
입에 발린 소리 칠한 패거리들이 더욱 싫은 날입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처럼
내 형제들이 싫은 날입니다
내가 사랑할 때처럼
내 친구가 싫은 날입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키우고
변명이 변명을 새끼 치고
인맥이 없으니 사는 맛이 배가 됩니다
내가 싫은 날입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싫은 날입니다
그건 내가 그만큼 굶주리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만큼 당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겁나는 날입니다
인간이 겁먹은 날입니다
인접한 인간이 싫은 날입니다
인간이 싫은 날이 인간을 더욱 살게 하는 날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남의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박용하 ■
1989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 번째 길』 『영혼의 북쪽』 『견자』 『한 남자』가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