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규리 | ||
|---|---|---|---|

신작시
돌아온 나무
누워서 나무는 아득히 더 깊어졌다
할 말은 350년 동안 다 했다는 듯
누운 채 허공을 더 솟아오르게 하고는
그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한때,
내게도 너라는 것이 있었을 때
부르면 올 것이라는 너라는 것이 있었을 때
위를 향한 위태로운 일이었는데
나무가 누운 일은
허공을 허공에게 돌려주는 예식이었을 것이다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젠 꿈나라를 보여주겠니
한 사람,
언젠가 이곳에 있었던 사람도 빌린 허공이었단 말
진심도 오래 거머쥐고 있으면 낡아져서
묻어야 할 때가 온다
울음 같은 시간이 울음만 준 건 아니었으나
품는 게 다 품이 되어 주었으니
누군들 돌려주어야 할 게 있지 않겠나
잊고 있었던 일, 누워서 비로소 더듬어 안 일
모든 서러운 때에도
우리에겐
옆이라는 게 있었다는 걸
요일
꽤 단호한 몸짓으로 나는
나를 서랍 속에 넣고 닫아버렸다
캄캄 잠잠했다
가두면 저절로 입을 닫게 되는 걸
조금씩 밝아왔고 숨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바깥이 보였다
사막스러운 저쪽
그런데 이 일이 처음 아닌 것 같아 슬며시 안심이 되었다
어제 본 책에선
사막 한가운데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가젤과 청년의 뒷모습이 하염없었고
서랍에 사막을 가둘 순 없을까
모래바람과 영원을 가둘 순 없을까
눈 감으면 사막이었으니
오늘은 눈을 감자
거기에도 사랑이 있구나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있구나
다시 갇히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해도
그때가 사랑이었다는 걸
서랍은 얼마나 깊은가 적막한가
이건 은폐가 아니라 사라짐, 혹은 잊힘에 가까운 발음이니
사막은 버려진 곳이 아니라 속하지 않은 곳이라는,
내 생이 표절이어도
아름다운 꽃말 입에 물고
이제 정말 나를 가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일행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내겐 바다가 없었어요
뜻하지 않은 일에 뜻하지 않게 빠지게 되는 걸 우연이라고 합시다
그게 바다였어요
사랑이 불가하다는 것
강한 햇빛을 피하도록 그늘을 빌려 사용했는데
그늘이 조금씩 옮겨 다닐 때마다
이놈의 질투는 언제 끝나는지요
일행 중 한 사람은 외롭군요
풍경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자꾸 그 탓을 하는지
이 치사함을 바다에 다 들키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견딜 수 없어
전망이 좋다는 해변 언덕에서
발끝만 툭툭 차다가
아무도 모르게 수평선을 걸어갔다가 오다가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않네요
흰 이빨과 물거품
이토록 외로운 한 사람만이 자유였어요
다 젖어 그게 쓸쓸한 일이란 걸 알 때는 늦겠지만
추워서 떠는 대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말릴 사이도 없이
슬픈 일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바뀌겠는지요
사방 어두워 오기 전에 부재처럼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있었습니까
자선시
정말 부드럽다는 건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흰감정
ㅡ 우유니사막
그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갔어요
그때 흰색을 가지고 갔어요
한번 흰색을 본 사람은 다시 눈뜨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아득하다 아득하다 우물거리며
말문이 막히며
그렇게 처음이 되고 있었어요
우기의 소금사막은 투명한 빙판이어서
그 위로 긴 잠을 쏟으며 여러 차례 돌아누우며
돌아가지 않아…… 중얼거리기도 했어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아는 사람이던가
흰
말씀들 자욱이 깔리어
이건 꽃잎
이건 무한
모든 의미는 의미 없음으로 눈이 부시어 눈이 멀어
제 안의 비극이 아름답기도 하였지요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마음이 들면
흰색을 기억해요
햇볕은 짜디짜고
우린 참, 시시했어요
이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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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뒷모습』 『앤디 워홀의 생각』, 산문집 『시의 인기척』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가 있음. 〈대구시인협회상〉 〈질마재문학상〉 수상. |

알레고리는 그녀를 먹는다
프롤로그 ㅡ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
그녀에게 사물은 몸이다. 어떤 성찰을 관통한 언어다. ‘변(變)과 통(通)’의 시학이다. 몸은 사물의 통로이자, 현실의 직지(直指)다. 알레고리는 그녀를 먹는다. 그녀는 “마지막 입술 모양은 시란 말로 보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토로한 바가 있다. 그녀는 사물의 귀엣말을 어떻게 알아챘을까.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그녀의 시는, 매력적인 빗물의 숲이다. 바람의 기미를 알아챈 술렁이는 언어다. 행간의 자작나무 사이로 번지는 모호한 안개다. 그녀에게 몸은 주체와 객체가 공존하는 장소다. 그녀의 시는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깝다. 시결은 흐르는 뭉게구름의 해체이다. 아니, 그 흰 것에 칠해진 붉은 노을이다. 현대시의 어떤 현란함에도 사뭇 비껴 있다. 사유의 형과 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내재율은 속수무책이다. 종결형의 어미는, 그녀의 귀를 잡고 조곤조곤하다. 무심한 말투와 응축된 묘사는 음표적이다. 언어의 점과 면, 선과 입체의 다양성을 연주한다. 그녀의 사막은 디스토피아적이다. 불안을 꽉 물고 있는 언어의 어금니는, 강하다. 사물의 비극적 페이소스는, 현실의 음화(陰畫)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서, 그녀의 은유는, 잠깐 사라진다.
시는 ‘억압적 기제와 정제된 언어’의 페르소나이다. 하여, 이규리의 시는 묘오(妙悟)하다. 1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은 ‘타자와의 동일성’이란 시적 주제를 탐구했다면, 2시집 『뒷모습』은 아버지로 은유된 억압 기제에서 벗어나 사물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는 타자와의 관계를 ‘미학의 관점’으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시들은 일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데려간다. 깨달음은 ‘절제와 균형 감각’에서 오는 현실의 방향등이다. 이규리의 시는, 풍경의 틈에서 비집고 나온 일상의 뾰족한 어떤 것에 ‘낯설기’ 하기다. 그녀는 잡지 대담에서 자신의 초기 문학적 습관은 “일종의 금기, 욕망, 갈등, 억압의 상징인 아버지, 혹은 권력으로 통칭 된다”고 실토한 바 있다. 근작 4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는, 이전 시집과는 확연히 궤를 달리한다. ‘불가능의 가능’, ‘부재와 현존’, ‘접(接)과 빔’의 시학을 동시에 추구한다. 영감(靈感)은 언어를 물고 나오고, 언어는 존재의 관계망과 물성을 깊이 감각화하였다. 그녀의 독특한 언어 화법은, 원숙한 스킬(skill)을 지나 아트(art)의 세계로 진화 중이다.
비극, 혹은 아이러니
비극은 은유를 만나면 의미가 증폭된다. 첫 행은 시의 공간을 고독하게 한다. 사물의 바깥과 안을 연결하는 접점이 은유다. 어떤 시는 첫 줄이 마지막 문장이 되기도 한다. 행간의 이미지와 기호의 공허를 장악할 때, 시는 숨 쉰다. 언어는 사물의 욕망을 디자인한다. 지독한 물질성으로 반드시 얼룩을 남긴다. 행과 연 사이, 말과 말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부딪히면서 휘어진다. 이런 은유의 삼투는 모든 공간의 울림을 확장시킨다. 언어의 살을 파고 들어가 거짓말처럼 타자화된다. 이규리의 은유는 희한한 방식으로 불쑥 치고 들어간다.
누워서 나무는 아득히 더 깊어졌다
할 말은 350년 동안 다 했다는 듯
누운 채 허공을 더 솟아오르게 하고는
그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한때,
내게도 너라는 것이 있었을 때
부르면 올 것이라는 너라는 것이 있었을 때
위를 향한 위태로운 일이었는데
나무가 누운 일은
허공을 허공에게 돌려주는 예식이었을 것이다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젠 꿈나라를 보여주겠니
한 사람,
언젠가 이곳에 있었던 사람도 빌린 허공이었단 말
진심도 오래 거머쥐고 있으면 낡아져서
묻어야 할 때가 온다
울음 같은 시간이 울음만 준 건 아니었으나
품는 게 다 품이 되어 주었으니
누군들 돌려주어야 할 게 있지 않겠나
잊고 있었던 일, 누워서 비로소 더듬어 안 일
모든 서러운 때에도
우리에겐
옆이라는 게 있었다는 걸
― 이규리, 「돌아온 나무」 전문
“누워서 나무는 아득히 더 깊어졌다”. 시 「돌아온 나무」는 첫 행에서 ‘생사’의 느낌을 확 끼쳤다. 리얼리티는 몸의 비극을 ‘나무’에 접함으로써 광활한 상상력을 얻었다. 놀라운 언어의 비약은 깊은 철학의 고랑을 판다. 박찬부의 말처럼 “사물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사물은 ‘사라지고’, 그것의 은유적 대변체인 기호의 그물망 속에 인간은 위치하게 된다. 이것이 상징계로의 진입이 가져오는 사물의 타살과 기호적 중재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부터 인간은 사물과 직접적인 교류를 중단하고 기호와 기호, 혹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앙이 엮어가는 의미의 연쇄고리 속에서 삶을 영위해간다. 라캉의 또다른 유명한 명제,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서 주체를 재현한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주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행복한 결합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으로 은유적 대치를 이루는 시니피앙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메타포 공식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식화 과정의 결과로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의미 생성의 문제는 그대로 주체의 탄생과 직결된다.”(「기호, 주체, 욕망」, 창비, 2007, 87∼88쪽) 즉, 은유는 언어와 사물의 관계망이다. “누운 채 허공을 더 솟아오르게” 하는 이 생사의 아이러니는, 고목의 방식이자 인간의 방식이다. 나무는 허공을 만지며 끝없이 “위”로 뻗어보지만 끝내 ‘허공’에 눕고 만다. 이런 반어적 이별은 ‘나무’에서 ‘너’로 옮겨가는 비극에 의해 더욱 울컥해진다. 결국 죽음과 이별은 혼자 감당하는 방식이다. “위를 향한 위태로운 일”이자, “허공을 허공에게 돌려주는 예식”이다. 그렇다. “진심도 오래 거머쥐고 있으면 낡아져서 / 묻어야 할 때가 온다”. 이규리의 언어의 뼈는, 나무의 사이클을 통해 잠시 “빌린 허공”에 대해 인간에게 누설한 셈이다. “모든 서러운 때에도 / 우리에겐 // 옆이라는 게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하여 「돌아온 나무」는 죽음, 혹은 이별과 교직(交織)되며, 그나마 ‘옆’의 은유로 위로받게 된다.
아름다운 유폐
그녀에게 몸은 ‘불가능의 가능’의 공간이다. 욕망의 무늬이자 미완성의 보자기다. 응축과 놀라운 비약으로 다가온다. 연두가 초록의 서랍이라는 걸, 단풍이 흰 눈의 서랍이라는 걸, 불현듯 깨닫게 한다. 천지 만물은 몸의 서랍이자 ‘빔’의 서랍이다. 음양이 서로의 서랍이라면, 몸은 물의 서랍이며, 불은 정신의 서랍이다. 주체의 서랍이자 타자의 서랍이다. 격물(格物)의 서랍이자 치지(致知)의 서랍이다. 진경의 서랍이자 그늘의 서랍이다. 그녀의 언어는 풋풋하다. 매 순간 언어를 갈아입고 진부한 서랍을 닫아 버린다. 자기검열의 서랍은 혹독한 과정을 거친다. 결국 부정의 오체투지만이, 그녀의 서랍을 연다. 하여 그녀는 ‘나’의 서랍 속에 영원히 ‘사막의 저쪽’을 유폐시킨 셈이다.
꽤 단호한 몸짓으로 나는
나를 서랍 속에 넣고 닫아버렸다
캄캄 잠잠했다
가두면 저절로 입을 닫게 되는 걸
조금씩 밝아왔고 숨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바깥이 보였다
사막스러운 저쪽
그런데 이 일이 처음 아닌 것 같아 슬며시 안심이 되었다
어제 본 책에선
사막 한가운데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가젤과 청년의 뒷모습이 하염없었고
서랍에 사막을 가둘 순 없을까
모래바람과 영원을 가둘 순 없을까
눈 감으면 사막이었으니
오늘은 눈을 감자
거기에도 사랑이 있구나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있구나
다시 갇히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해도
그때가 사랑이었다는 걸
서랍은 얼마나 깊은가 적막한가
이건 은폐가 아니라 사라짐, 혹은 잊힘에 가까운 발음이니
사막은 버려진 곳이 아니라 속하지 않은 곳이라는,
내 생이 표절이어도
아름다운 꽃말 입에 물고
이제 정말 나를 가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규리, 「요일」 전문
왜, 화자는 “단호한 몸짓으로” “나를 서랍 속에 넣고 닫아”버릴까. 사랑의 화면을 꺼버리자 “캄캄 잠잠했다”. 이규리의 「요일」은 “은폐”, 혹은 “잊힘”의 경계라도 되는 걸까. “조금씩 밝아왔고 숨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 또다시 사랑은 “바깥”에 접속된다. 현대시의 중요한 테제인 ‘서랍’은 다겹의 아우라를 가진다. 낯선 언어의 관절을 이식한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서, 서랍은 여닫힌다. 어쩌면 “모래바람과 영원”을 가둘 수 있을 때까지, 인간은 “눈을” 감아야 한다. “거기에 사랑이” 움터오기 때문이다. 「요일」의 계단 아래 더 깊이 내려가면, 서랍은 ‘근대’의 암유이자, 현대의 모니터이다. “다시 갇히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해도”, 사랑의 추억으로 견딜 수 있는, 나만의 그리움의 표지다. 하여, 사막의 적막은 「요일」을 건너주는, 시의 나룻배가 된다. 표면으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면엔 시류에 벗어나 독행(獨行)의 길을 가겠다는 옹골찬 다짐이다. 그래서 이규리의 독백은 노을빛이다. “내 생이 표절이어도 / 아름다운 꽃말 입에 물고” , 영원히 시의 사랑에 유폐되리라 일갈한다.
질문
시는 안과 밖을 연접시키는 과정이다. 시의 사건은 풍경이다. 밤낮 내면의 공간을 홀로 지나가는 작업이다. 본질적으로 고독한 사유다. 사물과 말의 끊임없는 중력은 이규리만의 독창적 세계를 열었다. 하여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녀의 「일행」은 질문이었다. 이전의 바다가 그녀에게 사랑의 악기라면, 이후의 바다는 흔들리는 이별의 선율이다. 언제나 “질투”는 무지막지한 첫 행으로 온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불안은 현란한 심리적 색채의 거리이다. 하여, 바다는 그녀의 옷을 입자마자 “우연”의 비극이 된다. “동행”을 잃어버린 순간 「일행」은 시적 메타포로 바뀐다. 그녀는 왜, 잃어버린 사랑을 간절히 갈구했을까. 그녀의 밀물은 바다의 속울음이자 결국 감춰진 것들의“들킴”의 성소(聖所)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내겐 바다가 없었어요
뜻하지 않은 일에 뜻하지 않게 빠지게 되는 걸 우연이라고 합시다
그게 바다였어요
사랑이 불가하다는 것
강한 햇빛을 피하도록 그늘을 빌려 사용했는데
그늘이 조금씩 옮겨 다닐 때마다
이놈의 질투는 언제 끝나는지요
일행 중 한 사람은 외롭군요
풍경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자꾸 그 탓을 하는지
이 치사함을 바다에 다 들키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견딜 수 없어
전망이 좋다는 해변 언덕에서
발끝만 툭툭 차다가
아무도 모르게 수평선을 걸어갔다가 오다가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않네요
흰 이빨과 물거품
이토록 외로운 한 사람만이 자유였어요
다 젖어 그게 쓸쓸한 일이란 걸 알 때는 늦겠지만
추워서 떠는 대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말릴 사이도 없이
슬픈 일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바뀌겠는지요
사방 어두워 오기 전에 부재처럼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있었습니까
― 이규리, 「일행」 전문
이규리의 「일행」은 그냥, 아프다. 수평선 아래 잠긴 그 “외로운”몸이 아프다. 하여 그녀의 바다는 열림이다. 아니, 닫힘이다. “그늘”을 피하며 간절히 부르다 뛰어든 곳이 바다이다. 아무도 듣지 못한 ‘절규’의 메타성은, 이 시대인들의 귀 먼 풍자이다. 결국 “질투”에 몸부림치다 잠긴 그의 바다. 바다는 사건에 의해 더욱 시적 장소가 된다. 마침내 사랑에 미친 연인을 삼킨다. 따뜻함과 차가움, 밀물과 썰물, 아득함과 그리움, 놓침과 흐느낌을 삼킨다. 섬뜩한 시적 투시는 내공의 밀도가 높다. 이규리의 「일행」은 물의 상징을 비틀어 이미지의 리듬을 만든다. “동행”보다는 이별을,“풍경”보다는 너머의 사랑을 되묻는다. 이런 모순은 “다 젖어 그게 쓸쓸한 일이란 걸 알 때는 늦겠지만”, 결국 죽음은 우리를 먹는다. 젖는 것들은 다 슬프다. 하여, 몸과 몸은 아이러니이자, 역설이며, 비극의 공간이다. 그렇겠다. 실존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는 현존의 “부재”이겠다. 무지막지한 ‘사랑’의 바다에 뛰어들 때만 진정한 사랑은 부활한다.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비극이야말로 이규리의 ‘바다’에 이르러서, 비로소 오롯이 ‘한 몸’이 된다.
토마토를 시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그녀가 불렀던 방식으로, 정말“토마토”를 시라고 부르면 안 될까. 구운 토마토를, 아니 “구울수록 더 부드러”운 토마토를 “눈물”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이런 섬세한 화법은 꿈인 듯 현실인 듯, 뒤섞이게 한다. 이규리의 시 「정말 부드럽다는 건」은, 언어와 사물이 어떻게 서로 호명하는지, 시의 본질을 예리하게 찔렀다. 마치 어떠한 물음도 다 쓸모없다는 듯, 그녀는 ‘모든 것의 아우라’를 무너뜨린다. 시는 사물의 실존을 ‘이름’으로 사유화는 작업이다. 서정시는 언어의 감정이다. 무형의 형상을, 언어의 몸을 빌려 마술처럼 드러낸다. 복잡한 식물의 기분을 언어의 방식으로 가둔다. 어쩌면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다는 놀라운 시적 순수성은, 아이들의 그 천진무구가 아닐까.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이규리, 「정말 부드럽다는 건」 전문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 시행을 읽자마자, 왜 ‘구운 별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가 겹쳤을까. 쓰는 글을 잠시 제쳐두고, 창을 열고 밤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뭇별들이 “무른” 토마토마냥 빛나고 있었다.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처럼 하늘 위에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현대인은 너무 빨라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한다. 저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다닌다. 너무 많은 탐욕에 가려서 너무 많은 황금을 두 손에 들고,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저녁노을만 보아도 “눈가가 붉어져”오던 그런 풍경에 살았다. 이규리는 ‘정말 부드럽다는 건’, 느림의 시간임을 일깨운다. “단단함”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질 때, 빠름의 “독소”가 빠진다고 일러준다. “당신을 당신 바깥”에 가만히 옮겨 놓을 때, 순수의 세계가 보인다고 말한다. 시인의 눈은 맑다. 좋은 서정시는 언어 이전의 그 순박한 태고를 비춘다. 아마 그때 사람들은 “아침”에 “토마토를 구워”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맛있게 먹었을는지도 모른다. 이규리의 언어는 언어를 버리다 시를 줍고, 시를 버리다 저 무의미의 본질에 가닿는다.
흰 것들
흰색은 무채색이다. 모든 색 중에서 가장 완벽한 색이다. 이규리의 「흰감정 ㅡ 우유니사막」은, 남미 볼리비아 3,563m 산정에서 본 광활한 우유니 소금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름다운 이 흰색의 소금 화폭은 푸른 하늘과 구름,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이 맞닿아 거울처럼 환상을 자아낸다. 흰색의 손가락들이 펼치는 마술의 세계처럼 천지의 경계가 사라진다. 잉카인들은 흰 소금 집을 짓고, 흰 소금 방에서 「흰감정」으로 살다 갔을 것이다. “그때 흰색을 가지고”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한번 흰색을 본 사람은 다시 눈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챘을 것이다. 이런 이규리의 말하기 방식은 우의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예민한 촉수의 묘사는 그녀만의 일관된 시법이다.
그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갔어요
그때 흰색을 가지고 갔어요
한번 흰색을 본 사람은 다시 눈뜨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아득하다 아득하다 우물거리며
말문이 막히며
그렇게 처음이 되고 있었어요
우기의 소금사막은 투명한 빙판이어서
그 위로 긴 잠을 쏟으며 여러 차례 돌아누우며
돌아가지 않아…… 중얼거리기도 했어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아는 사람이던가
흰
말씀들 자욱이 깔리어
이건 꽃잎
이건 무한
모든 의미는 의미 없음으로 눈이 부시어 눈이 멀어
제 안의 비극이 아름답기도 하였지요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마음이 들면
흰색을 기억해요
햇볕은 짜디짜고
우린 참, 시시했어요
― 이규리, 「흰감정 ㅡ 우유니사막」 전문
결국 시란 내면 풍경의 결핍, 혹은 황홀에서 삐죽 올라온다. 찰나에 일어나는 이런 시적 현상은 언어를 불러내는 비논리적 현상이다. 황홀한 소금호수에서 두 팔을 벌리고 “아득하다 아득하다 우물거리며 / 말문이 막히며 / 그렇게 처음”으로 그녀는 흰감정이 되었으리라. 흰 것들의 세계는 신의 색이자 현혹의 색이다. 하여, 그녀는 사물을 구부려 언어에 자유를 부여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돌아가지 않아…… 중얼”거린다. 자신이 체감한 우주적 영감을 사유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흰감정 ㅡ 우유니사막」을 휘게 한다. “이건 꽃잎 / 이건 무한” 마치, 바람이 곁에서 술렁거리는 것처럼 지시한다. 마침내 그녀는 눈이 부시어 “모든 의미”가 무용(無用)함을 직관한다. “흰색”이야말로 “비극”임을 간파한다. 태곳적 시간과 흰 것들이 공중에 서로 엉켜들어 소금호수가 되었음을 누설한다. 마법처럼 이규리는 시의 경계에서 풀려나와 “우린 참, 시시”했다고 웃음을 던져버린다.
에필로그 ― 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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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은 시쓰기와 직접적 관련은 없다. 시로 향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시쓰기와 평행하게 달리는 일로 여겨진다. 시를 향해 낼수 있는 길은 없는 것 같다. 시에서 나오는 길도 없기에 따라갈 수도 없다. (…) 시쓰기가 곤란한 것은 아마 시쓰기가 기어이 표면에 닿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의 시학’이라는 말은 언뜻 선언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함의하지 않는다. 상징적인 탐구의 대상도 아니다. 말 그대로 시는 표면의 자리에 있고, 시론은 표면에 있는 시를 보는 것이라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은 내면이 아니고 이면도 아니다. 보이는 부분이다. 따라서 시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에는 들어 있다. 시는 보이는 것을 잘 보게 하는 것이다. ‘표면의 시학’은 이러한 생각에 부합한다. 그것은 단지 표면을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기에 보지 못하는 표면을 보게 해준다. 표면을 떠돌며 표면을 가로지르며, 그러면서 한편으로 표면을 겨냥하는, 모순적으로도 보이는 시학이다. ― 이수명 시론집 『표면의 시학』 책머리 중에서(난다, 2018) |
앞에서 살펴본 이규리의 작품은 ‘표면의 시학’에 부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기에 보지 못하는 표면을 보게 해준다.” 보이지 않는 방식을 통해, 보는 방식으로 치고 나온다. 사물의 몸을 열어 지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만진다. 종결형 어미의 동화적 색채는 몽환적이다. 이런 놀라운 언어의 예민함은 많은 독자를 매료시켰다. 물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지성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으면 언어의 물성은, 신기하게도 물결처럼 유연해진다. 사물의 구상을 접어 비구상의 미학으로 펼쳐내는 일련의 작업은, 이규리 시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체이다. 소재를 새롭게 발견하여 재해석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묘사적 이미지는 탁월하다. 한 편의 작품 속에서 전체를 유기적으로 감각하는 환유의 통찰은, 오랜 내공의 깊이를 엿보게 한다. 다양한 여행의 체험과 디테일한 언어 감각은, 그녀의 시가 갖는 주제와 방법론을 유추케 한다. 행간의 여백을 그려내는 언어 부림은 압축과 비약의 시법을 관통한 예리(銳利)가 보인다. 언어는 시인의 성격을 규정한다. 초기 이규리는 타자를 향하여 자기를 열어가는 방식으로 사물을 내재화하였다면, 중기를 관통하면서 아득히 먼 곳을 향한 사랑과 꿈의 세계를 펼친다. 이런 안과 밖의 시선은 최근에 와서 ‘스밈’ 혹은 ‘번짐’의 언어 미학으로 승화된다. 그녀의 행간은 묘한 품격이 있다. 읊조리면 읊조릴수 록 자꾸 설득된다. ‘반성과 성찰’, ‘절제와 균형’의 담백한 시풍은 이규리만의 강점이다. 어쩌면 이수명의 말처럼 시론은 무용한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시평은 오독일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이규리의 수작 「많은 물」은 나에게 오독의 즐거움을 주었다.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이규리, 「많은 물」 전문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2014, 문학동네)에 수록된 「많은 물」은, 형상 미학의 측면에서 보면 독자적 언어 사용 기술이 돌올하다.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는 행간의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가 이 시를 깊게 한다. 「많은 물」의 시적 상황은, 누군가를 좋아했는데, 그 사람은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극은 최고조가 된다. 하여, 그것은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이 되고 “젖고, 아프게” 한다. 이규리는 어느 대담에서 시가 태어난 자리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비가 굉장히 많이 쏟아졌어요. 윈도브러시가 바삐 움직여야 할 만큼 비는 퍼붓고, 그 사람이 불현듯 보고 싶고, 비는 줄창 내리고, 온갖 상념이 너무 많아 갓길에 급주차를 했어요. 해놓고 보니, 내가 차 안에 있지만, 밖에 퍼붓는 저 비에 흠뻑 젖어 있다는 느낌이 든 거죠. ‘한때는 생각만 해도 나에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인데, 결국 오늘 나를 젖게 한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아픔이 밀려왔죠.” 그는 「많은 물」에서 그 사람과 비를 동일시한다. 사랑과 이별, 따뜻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둠, 이런 사물의 양면들을 비극과 일치시킨다. 현실로 은유된 ‘윈도브러시’는 소재 선택의 압권이다. 결국 화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질량을 반복해 밀어내어야만 하는 그것은 아픔이자 애절한 몸짓이다. 서정시의 극치는 사랑과 이별 사이에 놓인 비극에 있다. 사랑의 갈등은 몸의 통증을 통과해 결국, 아이러니와 역설의 공간을 지나 궁극엔 카타르시스를 낳는다. 모든 비극적 사랑의 결말이 다 그렇진 않지만, 이규리의 「많은 물」의 시적 테제인 ‘윈도브러시’와 ‘빗물’, ‘막무가내가 된 나’와 ‘건너오지 못한 한 사람’은,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시적 거리 속에 존재한다. 하여, 이규리 시의 전편을 관통하는 지점은, 사랑과 이별로 은유된 ‘곡비(哭婢)의 미학’으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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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 시인, 문학평론가 1994년 《문학세계》 시,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2020년 《문장21》 평론 당선.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등, 시선집 『고흐의 시』, 시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등, 시평론 대담집 『저녁의 詩』가 있음. 〈대구예술상〉,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 〈대구문학상〉, 〈영남문학상〉 수상 |
이달의시인 2021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