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권혁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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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약갱신청구권? 그런 거 다 휴짓조각이라고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고
이사 나가는 날, 마스크 쓰고 들어와 휘 둘러보더니
화장대 위에 못 박은 자리 하나를 짚었다
“사람이 말이야, 남의 집 살면서……”
그예 벽지 긁힌 값 20만원을 받아갔다
엄마야 누나야
난 지금도 날마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집주인이 정말로 자기 집에 들어와 사는지 보려고
엄마도 누나도 나도 집은 성북구
내 직장은 성동구
말하자면 우리 일가는 카프카처럼
성(城)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셈인데
K는 바둑의 축머리 같은 것일까
아무리 몰아붙여도 나는 여기 있다고
풍선인간처럼 버둥거리는 이 손을 보라고
팔이 저린 쪽을 보면
간밤에 어느 쪽으로 누워서 잤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레고르의 부모와 여동생은 그 벌레가
자기 아들이거나 오빠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엄마, 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다지류(多肢類)는
집주인 같았을까
엄마야 누나야
새로 이사한 집에서 등우량선(等雨量線)을 그으면
장롱 뒤 벽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간다
도둑 같다, 목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 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마치 동상의 인물이 먼 곳을 내다보면서도 그 동상의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시 쓰는 동안에만 목 위가 살아있는
이 거북목의
실존처럼
지문에는 물과 약간의 염화나트륨과
아미노산, 요소, 암모니아, 피지가 섞여 있다
2년 안에 집주인은 자기 집 게이트맨에
아미노산과 피지를 묻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임하리라
요는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풍 갈 날을 기다리듯
엄마야 누나야 그런데 우리,
강변 못 산다
강 조망권 있는 집은 너무 비싸다
* 카프카의 일기, 1912년 5월 9일
4차 산업혁명 위원회
예수가 미래의 직업을 예견했다는 걸 아십니까?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태복음」 4장 19절)
[Web 발신] 엄마 나 폰 액정 나가서 매장에 수리 맡기러 왔어 이 번호는 잠시 사용하는 거라 문자만 가능해 나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분유도 못 뗀 애가 언제 한글을 뗐니
폰은 언제 산 거니, 자동이체 걸어둔 통장은 아빠 거니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장 29절)
공자가 열평형 상태에 이른 사회를 목표로 제시했다는 것은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 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 「학이편」)
뒷목 잡고 내리는 앞차의 운전자여 그리고 동승자여
나란한 유붕(有朋)이여, 먼 데에서 와서 먼 데로 가는 여행자여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을 버리는 짓이다 (『논어』 「양화편」)
장자는 사물인터넷의 원리를 제시했지요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도 없다 (『장자』 「제물론」)
우리 집 쿠쿠가 백미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밥을 저어주세요
말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은 존대였지만 은근 명령조였다는 거,
어느 날,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있었다 훨훨 나는 것이 틀림없는 나비였다 이를 물화(物化)라고 부른다 (『장자』 「제물론」)
꿈에서 깨니 나비넥타이를 맨 김흥국이었다
부처는 사이보그의 탄생을 시연했어요
하얀 코끼리가 허공에서 내려와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 부인은 산통 없이 아기를 낳았어요
아기는 엄마의 오른쪽 옆구리를 열고 나와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말했죠 하늘 위 하늘 아래
나만 오직 존귀하도다 (『석가여래 행적송』)
엄마가 코끼리만큼 아팠어도 눈치 없는 우리 아기,
산통을 깬 건 확실해요
엠페도클레스는 빅데이터를 창안했지요
"지금 이전에 나는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으며, 바다에서 튀어 오르는 말 못 하는 물고기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으려고 보니
이 손도 내 손, 저 손도 내 손
이 바글바글한 거울단계를 어떻게 넘지?
회의를 끝내기 전에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이 시에 몇 명의 화자가 있는지 찾아보세요
(복화술은 따로 세야 합니다)
우리는 다중우주와 유비쿼터스를 지향하거든요
최후의 심판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심판의 날에 그를 불러오려면
그를 짝사랑하는 이를 먼저 데려와야 한다
아일 비 백.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에서 기계인간은 말했다
성탄절마다 나 홀로 집에를 재방으로 보고
(누구와 봤냐고 묻는 사람은 없겠지)
세기말에는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봤지
아놀드 슈왈체네거는 약속대로 계속 돌아왔네, 깨벗은 채
오늘은 모르는 사람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카카오톡으로 아메리카노를 보내왔다
신한생명 담당 CF였다
그가 나의 이생과 후생을 책임질 거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던데
몇 년 전에는 광주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특강 요청이 와서 KTX 타고 갔는데 세상에,
참석자가 아무도 없었다
심판의 날이 이미 도래한 거 같았다
문화센터 직원과 나는 미안과 무안을 주고받았다
아니, 이 동네에선 아무도 부활하지 못한 건가
아니, 그대가 아직 무덤 속에 있는 거예요
프로이트는 최후의 심판을 그린 화가 이름 시뇨렐리를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
그거, 미켈란젤로 그림 아니었어요?
사실은 최후의 심판이 여럿이거든요
말세를 뒤집어보겠다고 날이면 날마다 어르신은
해병대 군복 입고 태극기를 들었더랬죠
벌써 다 옛날 얘기예요
코로나랑 온실효과 때문에 진짜 말세가 왔거든요
순 진짜 참기름 같은 거예요
이 음악 기억나죠?
두둥 둥 두둥. 두둥 둥 두둥.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에서.
자선시
전설의 고향
송림원에서 구미호와 오향장육 먹는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식탁 앞에서
오래돼서 삐걱대는 윤회전생 앞에서
회향, 계피, 산초, 정향, 진피
인생의 아니 호생(狐生)의 독한 맛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우리는 고량주를 홀짝이고
내가 이렇게 된 건 행운의 편지 때문이야
아홉 명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편지지가 한 장 부족했어
창밖에는 죽은 자의 골분(骨粉)이 흩날리고 있었다
구미호는 춥다고
아홉 개의 꼬리를 방석 대신 깔고 앉아서
나나 너나 뭐가 달라,
너도 생간 좋아하잖아?
구미호의 눈은
접시 바닥에 깔린 오이처럼 금세 축축해지고
이 집에선 해삼주스도 파네?
무서워서 못 먹겠다
나는 플레이팅한 오향장육이 이계의 문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혀가 꼬부라져 원산지를 닮아가는 동안
이 접시에서 튀어나올 신물들을 생각한다
계단식 논이 흉내 내는 주름을
마파두부처럼 닮아버린 연골을
세숫대야보다 반질대는 정수리를
난자완스처럼 튀겨진 조그만 삶을
변신도 변심도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고
그는 힉스입자처럼 놀라서 점점 무거워진다
구미호는 지금 아홉수에 걸린 것이다
재작년에 세례를 받아서
이미 거듭날 찬스는 써버린 것이다
왕좌의 게임
― 세븐 킹덤
이야기는 가상의 땅 이스테로스(Easteros)에서 벌어지는 일곱 왕국(Seven Kingdom)의 전쟁과 휴전, 동맹과 배신의 이야기다 일곱 왕국은 다음과 같다
동쪽 바다를 지배하는 트럼프 가문의 문장(紋章)은 파를 든 거대한 오리이며, 가언(家言)은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이다 수도에는 트럼프 타워라 불리는, 자본으로 쌓아올린 높은 탑이 있어 이 이름으로 수도 이름을 지었다 왕은 매드 킹(The Mad King)이라 불리는데 의외로 제정신이란 이야기도 있다
서쪽 대륙의 지배자는 시(Xi) 가문이다 표의문자를 쓰는 나라답게 단음절로 말하길 좋아하며, 문장은 쿵푸를 하는 팬더다 유목민족들에게 오래 지배를 받았으나 이를 머릿수로 극복해 마침내 그들 전부를 백성으로 삼았다 장사에 능하여 허리띠만 졸라매면 어디든 판로를 개척할 수 있다 하여 가언이 ‘허리띠 하나에 길 하나(One belt, one road)’다
북쪽의 지배자는 ‘벽 너머의 왕’이라 불린다 쇄국을 오래 해서 스스로 쌓은 벽 안에 숨은 지 수 세기가 흘렀다 말과 제도가 조금씩 달라져서 이 나라 백성을 아더(Other)라 부른다 최근 왕위에 오른 화이트마운틴 3세는 ‘멀다고 말하면 안 된다(Don't say it's far away)’는 성명을 내어 대외개방을 천명하였다 가언은 ‘겨울이 가고 있다(Winter is Going)’이다
남쪽의 지배자는 지루박 1세에서 지루박 2세로 이어지는 동안 여섯 왕을 더 거쳤는데, 그들은 지루박 1세의 부하(그는 ‘솔직한 학살자’(Bald Slayer)라 불린다), 그 부하의 친구(그의 별명은 ‘물귀신’이다), 그 친구에게 항복한 경쟁자(그는 숫자로 자기 이름을 불렀다), 그 경쟁자의 경쟁자(그의 영혼은 위로 받으시라), 그 경쟁자의 후계자(그의 영혼은 위로 받으시라), 근본을 알 수 없는 장사꾼(그는 사기와 협잡으로 왕위에 올랐다)이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큰소리쳤던 선왕이 실정을 거듭해 강철은행에서 고리대금을 써야 하는 처지에 몰리자, 두 명의 선군이 잇달아 일어나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장사꾼 왕이 국고를 비워 사고를 채웠다 다스 1세(장사꾼 왕의 이름이다)와 지루박 2세의 치세에 나라에 변고와 우환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백성이 들고 일어나 폭군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동안 가문이 바뀜에 따라 문장도 가언도 여러 차례 변했다 지금의 문장은 종이컵에 담긴 촛불이며 왕은 촛불왕(The Candle King)이라 불린다 가언은 ‘나라를 나라답게(Country as a Country)’이다
협해 건너의 땅은 해가 뜨는 곳이라 하여 선 스피어라 불리지만 실은 드래곤의 서식지이다 지룡, 화룡, 수룡, 폭룡이 출몰하여 지진, 산불, 해일, 방사능 유출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니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지배자 가문은 스스로를 천왕이라 부른다 드래곤들을 길들여 한때는 이스테로스 전체를 정복하기도 했지만 동쪽 바다의 왕에게 패하여 열도로 돌아갔다 문장은 머리 넷 달린 드래곤이며 가언은 ‘동쪽은 우리 것’ (Ours is the Easteros)이다
더 먼 북쪽에는 끝없는 동토(凍土)가 펼쳐져 있으며 흰 곰과 맘모스, 거인들이 어슬렁거린다 한때 가장 큰 나라였으나 너무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없어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대국이었을 때의 문장은 낫과 망치, 가언은 ‘일해라, 절해라, 나머지는 하지 마라(Work, Bow, Don’t do the Rest)’였다
더 먼 서쪽은 유목민족의 땅이다 이들의 왕은 칸이라 불린다 가언도 문장도 없다 이들에게는 부동산도 동산이라, 말과 양과 천막 있는 곳이 이들의 강역이다 키 낮은 풀과 모래가 밤낮이 반대인 먼 땅까지 이어져 있다
이것이 일곱 왕국의 대략이다 왕들은 일곱 신들을 섬기지만, 이 신들이 자본이라 불리는 신의 일곱 현신(Avatar)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 책력은 이스테로스에 동란(動亂)이 벌어진 해를 기원으로 삼은 휴전력을 쓰는데, 계절과 시간의 오차가 커서 새로이 종전력으로 바꾸자는 제안도 있다 백성을 섬기는 가문은 흥하고 전쟁광들은 망하는 것은 고금의 이치라, 일곱 왕국의 흥망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기로 하자
후기>
이태 후의 세계(世系)라,
온 땅에 역병이 창궐하였다
역신의 들숨과 날숨이 지나간 곳마다 백성들이 볏짚단처럼 쓰러졌다
역병은 서진하여 웨스테로스를 휩쓸더니
대양을 건너 트럼프 타워를 무너뜨리고
다시 대양을 건너 열도에 상륙했다
오호 애재라, 드래곤들로 피폐해지고 쇄국으로 곤궁해진
아베 3세는 역신에 맞서 겨우 작은 면갑을 하나 준비했을 뿐이다
입을 가리면 코가 드러나고 코를 가리면 입이 벌어졌다
미친 왕은 백귀(white walker)들을 일으켜
왕도와 평의회를 점령하였으나
정작 제 자신이 역귀가 되었을 뿐이다
북쪽은 역병을 막고자 다시 문을 닫아걸었으며
남쪽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이 출몰하여 칼춤을 추었다
이를 자장(玆裝)의 검란(劍亂)이라 부른다……
왕의 손(Hand)은 여기까지 쓰다
권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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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

상징계에서 살아남는 법
― 권혁웅 작품론
권혁웅은 언어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판타지를 믿지 않는다. 언어가 현실의 거울이라는 미신을 거부하므로 그는 거울상 단계의 먼 요람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마치 언어의 감옥에서 일거에 뛰쳐나온 “마징가 Z”처럼 경쾌하다. 그는 상징계의 제왕에게 실재계로 건너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방법으로 애면글면 해결하려고 징징거리는 것이야말로 권혁웅 시인에게는 수치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먼 섬나라의 낭만주의자들처럼 현실을 버리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엄연히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에 시뮬라크르의 딱지를 붙이며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을 현실대로, 기호의 세계를 기호의 세계대로 인정한다. 현실은 거부할 수 없는 실물이므로 그는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기호 지배의 상징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기호의 속성과 상징계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 감옥에 갇혀서도 유쾌하게 잘 살려면, 우선 감옥의 규칙을 잘 알아야 한다. 간수와 죄수들에게 허락된 동선, 창살의 구조, 햇빛이 들어오는 길, 감시의 스펙트럼, 죄수라는 기호들 사이에 의미가 발생 되는 방식 등을 잘 알아야 감옥을 “자기만의 방”으로 만들 수 있다. 그는 현실에서 야만과 굴욕을 읽고, 왜곡과 감시의 기호들을 거꾸로 이용해 현실을 (재현이 아니라) 재생산한다.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약갱신청구권? 그런 거 다 휴짓조각이라고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고
이사 나가는 날, 마스크 쓰고 들어와 휘 둘러보더니
화장대 위에 못 박은 자리 하나를 짚었다
“사람이 말이야, 남의 집 살면서……”
그예 벽지 긁힌 값 20만원을 받아갔다
엄마야 누나야
난 지금도 날마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집주인이 정말로 자기 집에 들어와 사는지 보려고
엄마도 누나도 나도 집은 성북구
내 직장은 성동구
말하자면 우리 일가는 카프카처럼
성(城)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셈인데
K는 바둑의 축머리 같은 것일까
(중략)
그런데 그레고르의 부모와 여동생은 그 벌레가
자기 아들이거나 오빠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엄마, 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다지류(多肢類)는
집주인 같았을까
엄마야 누나야
새로 이사한 집에서 등우량선(等雨量線)을 그으면
장롱 뒤 벽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간다
도둑 같다, 목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 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마치 동상의 인물이 먼 곳을 내다보면서도 그 동상의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시 쓰는 동안에만 목 위가 살아있는
이 거북목의
실존처럼
지문에는 물과 약간의 염화나트륨과
아미노산, 요소, 암모니아, 피지가 섞여 있다
2년 안에 집주인은 자기 집 게이트맨에
아미노산과 피지를 묻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임하리라
요는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풍 갈 날을 기다리듯
엄마야 누나야 그런데 우리,
강변 못 산다
강 조망권 있는 집은 너무 비싸다
* 카프카의 일기, 1912년 5월 9일
―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부분
이 시의 앞부분은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에 벌어지는 야만과 굴욕의 서사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현실의 정동(affect)에 말려들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센티멘털리즘은 패배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짐승 같은 현실을 슬쩍 떠나 카프카의 텍스트들을 끌어들인다. 그는 화자의 가족과 소설 『성(城)』의 K와 『변신』의 그레고리 가족을 환유적으로 중첩 시킨다. 이 인접성에 토대한 상호텍스트성의 전략 덕택에, 현실은 텍스트로, 텍스트는 현실로 환치된다. 현실을 텍스트화함으로써 그는 굴욕의 정념(혹은 감상)에서 벗어나고, 텍스트를 현실화함으로써 그는 텍스트에 실물성을 부여한다. 마지막 세 행 역시 ‘엄나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동요를 상호텍스트화함으로써, 동요의 나이브한 서정성(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을 거부하고, 현실에 유머의 창틀을 끼워 신파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예수가 미래의 직업을 예견했다는 걸 아십니까?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태복음」 4장 19절)
[Web 발신] 엄마 나 폰 액정 나가서 매장에 수리 맡기러 왔어 이 번호는 잠시 사용하는 거라 문자만 가능해 나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분유도 못 뗀 애가 언제 한글을 뗐니
폰은 언제 산 거니, 자동이체 걸어둔 통장은 아빠 거니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장 29절)
공자가 열평형 상태에 이른 사회를 목표로 제시했다는 것은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 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 「학이편」)
뒷목 잡고 내리는 앞차의 운전자여 그리고 동승자여
나란한 유붕(有朋)이여, 먼 데에서 와서 먼 데로 가는 여행자여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을 버리는 짓이다 (『논어』 「양화편」)
장자는 사물인터넷의 원리를 제시했지요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도 없다 (『장자』 「제물론」)
― 「4차 산업혁명 위원회」 부분
이 작품이야말로 기호의 속성을 잘 아는 시인이 상징계의 규칙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누구보다도 기표/기의 관계의 자의성(arbitrariness)을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재현(representation)의 논리는 먼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그는 상징계의 법칙을 역으로 이용하여, 기표가 얼마나 많은 기의의 리좀(rhyzome)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무한대의 기의를 올챙이알처럼 까놓는 기표의 증식력에 기죽지 않는다. 그는 그런 기호의 속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현실을 건드린다. 이런 작업을 통해 현실은 기호로, 기호는 현실로 스며든다. 상징계가 사물의 세계와 ‘무관하게’ 기호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에 의해 의미를 생산한다는 언어학의 신화를 그는 깡그리 무시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는, 기호도 사물이고, 세계이며, 현실이다. 그러므로 권혁웅 시인에게 있어서 현실과 기호는 ‘따로’가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이다. 위 시에서도 그의 무기인 유머 전략은 여지없이 등장한다. 그는 질질 짜면서 현실과 기호의 제왕에게 굴복하는 것을 혐오한다.
이야기는 가상의 땅 이스테로스(Easteros)에서 벌어지는 일곱 왕국(Seven Kingdom)의 전쟁과 휴전, 동맹과 배신의 이야기다 일곱 왕국은 다음과 같다
동쪽 바다를 지배하는 트럼프 가문의 문장(紋章)은 파를 든 거대한 오리이며, 가언(家言)은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이다 수도에는 트럼프 타워라 불리는, 자본으로 쌓아올린 높은 탑이 있어 이 이름으로 수도 이름을 지었다 왕은 매드 킹(The Mad King)이라 불리는데 의외로 제정신이란 이야기도 있다
서쪽 대륙의 지배자는 시(Xi) 가문이다 표의문자를 쓰는 나라답게 단음절로 말하길 좋아하며, 문장은 쿵푸를 하는 팬더다 유목민족들에게 오래 지배를 받았으나 이를 머릿수로 극복해 마침내 그들 전부를 백성으로 삼았다 장사에 능하여 허리띠만 졸라매면 어디든 판로를 개척할 수 있다 하여 가언이 ‘허리띠 하나에 길 하나(One belt, one road)’다
북쪽의 지배자는 ‘벽 너머의 왕’이라 불린다 쇄국을 오래 해서 스스로 쌓은 벽 안에 숨은 지 수 세기가 흘렀다 말과 제도가 조금씩 달라져서 이 나라 백성을 아더(Other)라 부른다 최근 왕위에 오른 화이트마운틴 3세는 ‘멀다고 말하면 안 된다(Don't say it's far away)’는 성명을 내어 대외개방을 천명하였다 가언은 ‘겨울이 가고 있다(Winter is Going)’이다
남쪽의 지배자는 지루박 1세에서 지루박 2세로 이어지는 동안 여섯 왕을 더 거쳤는데, 그들은 지루박 1세의 부하(그는 ‘솔직한 학살자’(Bald Slayer)라 불린다), 그 부하의 친구(그의 별명은 ‘물귀신’이다), 그 친구에게 항복한 경쟁자(그는 숫자로 자기 이름을 불렀다), 그 경쟁자의 경쟁자(그의 영혼은 위로 받으시라), 그 경쟁자의 후계자(그의 영혼은 위로 받으시라), 근본을 알 수 없는 장사꾼(그는 사기와 협잡으로 왕위에 올랐다)이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큰소리쳤던 선왕이 실정을 거듭해 강철은행에서 고리대금을 써야 하는 처지에 몰리자, 두 명의 선군이 잇달아 일어나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장사꾼 왕이 국고를 비워 사고를 채웠다 다스 1세(장사꾼 왕의 이름이다)와 지루박 2세의 치세에 나라에 변고와 우환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백성이 들고 일어나 폭군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동안 가문이 바뀜에 따라 문장도 가언도 여러 차례 변했다 지금의 문장은 종이컵에 담긴 촛불이며 왕은 촛불왕(The Candle King)이라 불린다 가언은 ‘나라를 나라답게(Country as a Country)’이다
― 「왕좌의 게임 ㅡ 세븐 킹덤」 부분
이 작품도 실물의 역사를 기호로 ‘재생산’하는 시인의 기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상징계의 법칙에 구속당하지 않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현실을 끌어들인다. 그는 현실과 기호를 용접하는 기술자이다. 문학이 재현인 시대는 끝났다. 재현은 투명한 매체로서의 언어에 대한 환상을 가진 자에게만 실재한다. 권혁웅은 언어가 평면거울이 아니라 찌그러진 거울 혹은 깨진 거울(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왜곡의 프리즘(기호) 안으로 현실을 끌어들여 언어의 제국에서 쫓겨난 현실을 다시 살려낸(재구성한)다. 말하자면, 그는 상징계의 법칙을 준수하면서 상징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궁구하고, 언어의 감옥에서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시인이다. 그는 그것을 울면서 하지 않고 유쾌하게 한다. 이것이 재현이 아니라 생산하는 자의 자긍심이다.
오민석 ■ 시인, 문학평론가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 시,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가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 연구서 『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 연구서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 『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음. <단국문학상〉〈부석평론상〉〈시와경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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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