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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전철희 

 공시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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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향방

 

 

 ● 전철희(문학평론가)

 

 

 

 

 

  오봉옥 시인은 1985년 등단하여 첫 시집 『지리산 갈대꽃』(1988)과 두 번째 시집 『붉은산 검은피』(1989)를 통해 유명세를 떨쳤다. 전자가 지리산 빨치산을 주로 다룬 서사적 서정 시집이라면, 후자는 1946년 ‘화순항쟁’(화순 탄광 노동자)을 소재로 삼은 2권짜리 ‘혁명장시’라고 할 수 있다. 『붉은산 검은피』는 출간 직후 금서로 지정됐다.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됐고 책을 출간해 준 실천문학사도 고초를 겪었다. 그 덕에 이 책은 (비록 양지에서 널리 읽히진 못했지만) 많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게 됐다.

  이 일화는 얼마간 ‘1980년대적’이다. 1980년대는 광주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6월 항쟁으로 절정을 맞이한 후 소련의 해체로 막을 내렸다. 당시의 민중/민족 운동은 문학판에도 여진을 남겼다. 오봉옥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시 「한라산」을 썼던 이산하, 혹은 ‘노동자 시인’으로서의 체험과 요구를 시에 녹여낸 박노해/백무산 시인 등등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이 시인들은 전부 1990년대 이후 얼마간 다른 작풍을 갖게 된다. 오봉옥 시인의 경우에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화, 비평, 웹툰시(집) 등등으로 창작 영역을 확대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시인이 사회에 적응하면서 변심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가 여전히 ‘진보적’인 문학의 파토스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올 만하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오늘날 1980년대의 ‘진보적’인 시집들을 보면 급진적 내용과 과격한 표현이 낯설게 느껴진다. 가령 『붉은산 검은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 책은 미군의 학살을 고발하고 “다시 한번 경고해두련다 / 기억하라 양키들아 / 우리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투쟁적 도발로 끝맺는다. 21세기의 독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이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책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 내포된 역사 인식은 1980년대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유하던 것이었다.

  특정한 시대정신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전부 동일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급진적 이념에 동의하던 이들 중에서는, 사회의 엘리트가 되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그냥 정치적 상황에 좌절해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 화염병을 들고 최루탄을 뚫고 나가면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 수많은 선택지를 속에서 문학을 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문학으로 무엇을 표현하려 했을까?

  섣불리 추측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나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추모와 위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참사가 있었다.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세월호에서, 혹은 이태원에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했다. 여전히 망자의 유가족과 절친들은 망자의 부재를 아파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저 사건들에 대해 분노하고 충격을 받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점점 무감해질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기억은 휘발성이 강한 법이다. 그나마 우리는 저 사건들을 미디어로 간접체험이라도 해서 강렬한 인상을 가졌는데도 이러니, 1940년대 전라도 화순에서 쟁의를 하다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웬만한 사람은 비극적 역사를 접해도 잠깐 안타까움을 느끼다가 이내 감정을 회복한다. 그런데 쓰러지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애도를 깊이 가슴에 새기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전달하려는 이들도 조금은 있다. 나는 당시의 ‘진보적’인 문인들이 대체로 그런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창작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

 

  사라진 누군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오봉옥 시인의 초심이라는 가설이 맞다면, 이번 시집 『나비 도둑』에서도 그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은 셈이다. 이 책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시집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형상화되는 존재는 가족이다. 하나의 사례만 들자면, 「사투리 비빔밥」은 전라도 출신 할머니와 경상도 출신 할아버지의 사투리를 섞어서 말하는 손자를 보고 가족들이 웃는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고즈넉한 가족 이야기라는 점에서 백석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백석의 시대와는 달리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사투리는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체득한 문화의 요체이다. 아이의 천진한 마음은 이질적 언어를 ‘비빔밥’처럼 조합시킬 수 있다. 아마도 시인은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어우러지는 인간관계를 동경했던 듯하다.

  그런데 모든 관계는 시한부이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든 화목한 가정이든 영원할 순 없는 법이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반목하거나 헤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필멸의 존재인 인간들의 관계는 언젠가 끝이 오기 마련이다. 죽음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인연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했던 사람은 주기적으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움은 허망한 감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리워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안타까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이를 감정적인 손해라고만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리움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

  『나비 도둑』의 표지에는 “고시레! 고시레!”라는 말이 적혀 있다. 과거 한국에서는 야외에서 음식을 먹을 때 농경신 자청비에게 음식을 공양하면서(던지면서) “고시레”라고 읊는 문화가 있었다. 물론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국은 그런 ‘미신’들을 척결하면서 근대화를 이뤄왔다. 근대인은 이성과 과학을 신봉한다. 반면 전근대시대에는 자연을 신비롭게 여기고 인간은 하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때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강우를 조율하는 용신님께 기우제를 올렸고, 능력이 있는 사람도 천출이면 등용될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하늘의 뜻”이라고 용인됐다. 이런 생각은 너무나 비합리적이라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허나 생각해보면, 현대인의 삶이 마냥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과학에 의해서 해명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의지라든가 사랑 같은 마음은 그런 식으로 단언할 수 없다. 세상을 신비한 눈으로 바라보던 과거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썼겠지만, 우리는 그런 부분에 무관심한 채 수치로 계량되는 문제들에만 매몰되고 있다. 오봉옥 시인이 ‘고시레’라는 말을 줄곧 반복하는 것은 그런 현대적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일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고시레라는 말」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울아비”가 막걸리를 먹기 전에 술잔을 허공에 뿌리면서, 혹은 “울엄니”가 마당에 물을 뿌리면서 “고시레”라는 말을 하는 장면들을 묘사한 후, “그건 성철 스님 다비식 때 / 제자들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기 전 / 스님 불 들어갑니다, 하고 외치는 / 그 마음과도 같은 것”이라 설명한다. 앞의 문장에서 따옴표를 한 말들은 전부 청자가 업다. “울아비”와 “울엄니”의 “고시레”를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고인이 되어버린 사람 또한 “불 들어갑니다”라는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런 말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나보다 먼저 누군가를 생각하고 / 이 세상 모든 것을 모시는 마음으로 / 정성껏 받들겠다”는 화자의 다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짐이 없다면 애당초 온전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완전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조차도 가끔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언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이 어떻든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위인을 추모한다. 그런데 가령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등등을 동상으로 만들어서 존경심을 표현한들, 저 위인들은 그 존경으로부터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적어도 사후세계라든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렇다. 허나 저런 사람들을 기리는 마음을 갖는 것에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누군가를 사랑(존경)하는 감정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고시레!”를 외치는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앞서 언급했듯 오봉옥 시인은 억압적인 군부 정권 하에서 거친 언어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사람으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이제 그는 과거와 전혀 다른 작풍을 갖게 됐다. 혹자는 이 시인이 과거에는 급진적인 의식을 표현한 반면 지금은 주변사람들에 대한 온정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평가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리움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했던 것이 사라졌을 때면 의지와 의식을 벗어나서 그리운 마음이 솟구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각박한 세상에서 인간에게 그런 마음이 남아있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에 가깝다. 과거와 비교하면 사람 귀한 줄 모르고 돈만을 숭상하는 속물적 문화가 더욱 강화됐다는 낭설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하려는 문학인도 있다. 이것은 도전적인 문제의식이다. 『나비 도둑』의 수록 작품 중 하나를 인용해본다.

 

   세상을 모래시계처럼

   뒤집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땅에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아름다운 별밭이 펼쳐지겠지. (중략)

   하늘엔 채송화가 피고

   거북이가 엉금엉금 하늘운동장을 기어다니겠지.

 

   그렇게 되면

   구름 속 별밭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들 참 많을 거야.

-「세상을 뒤집어 보면」 부분

 

  세상이 뒤집어지면 어쩔까 하는 상상력이 깜찍한 시편이다. 그런데 세상이 거꾸로 되면 “구름 속 별밭으로 사람들이 뛰어”들 것이라는 마지막 대목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 이 구절은 세상의 순리에 따르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한국에서는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늘나라도 갔다”고 표현하는 문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죽음이라는 사건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언젠가 죽음이 닥쳐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울해질 뿐이고 딱히 죽음을 극복할 방법도 없으니 그런 수세적 반응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봉옥 시인은 이번 책에서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심지어 죽음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인식을 내비친다. 「세상을 뒤집어 보면」의 마지막 구절은, 인간이 죽음을 포함한 ‘운명’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질서로부터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다를 수 있는 마음의 경지이지 않을까. 오봉옥의 이번 시집이 하게끔 만드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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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l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저서 『배드 엔딩이 어때서?』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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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호(VOL.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