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강현덕 | ||
|---|---|---|---|


신작시
시간이 묻혀 있는 해변
모래성 쌓다가 시계 하나 주웠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쯤일까
깊이에 더듬거리는
더 높고 더 넓은 성
태엽만 붙어 있는 성주의 녹슨 광영
유리는 모래로 되돌아가 버렸고
바늘도 파도에 굴복해
일찌감치 떠났으리
긴 복도 비단 옷자락 날마다 펄럭이고
벽마다 반짝이는 것 밤낮 눈부셨을
그 성은 이젠 모래성
무너진 시간의 무덤
내 시계는 어디에도 쓰이지 못하고
- 윤봉길
|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이 끝난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목메인 목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ㅡ 『백범일지』 중 |
어두운 뒤꼍에서 매화 저 혼자 진다
붉어서 짧은 생애 재촉하는 밤의 별리
향기는 거두지 못해 남겨두고 가나 보다
절명사를 목에 건 매헌이란 사내도
암흑 속 불꽃으로 맹렬히 폈다 졌는데
한 시간 남은 시계로 천년 향 피웠는데
아직도 내 시계는 어디도 쓰이지 못하고
피 있고 뼈 있어도 뒷걸음치는 겁쟁이
비루한 몸을 숨기고 지는 꽃만 훔쳐보는
달무리
하늘에 우물 하나 은빛으로 파인 밤
제가 판 줄도 모르고 달이 첨벙 들어가
넘치는 젖빛 물속에서 부풀고 있는 밤
돌확에 고인 물이 괘종시계 소리에 놀라
덩달아 동심원으로 번져 오르는 밤
구름도 거기에 감겨 흘러가지 못하는 밤
자선시
미황사
단청을 다 털어낸 팔작집 대웅보전
달까지 끌어내려 절집 온통 새하얗다
어쩌나, 오늘밤 내내 눈이 부실 달마산
삐거덕 어간문 열며 세 부처님 나오시겠다
무릎은 좀 어떠신지요 서로 살펴도 보고
나란히 돌계단에 앉아 달빛 나눠 쬐시겠다
주춧돌 속 게와 거북 자하루 밑 소 그림자
다 닳은 발 움직여 그 옆에들 와 앉겠다
저 아래 파도도 달려와 야단법석 나겠다
기도실
울려고 갔다가
울지 못한 날 있었다
앞서 온 슬픔에
내 슬픔은 밀려나고
그 여자 들썩이던 어깨에
내 눈물까지 주고 온 날

1994년 〈중앙신인문학상〉,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 나왔다』 『첫눈 가루분 1호』 『먼저라는 말』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한국시조작품상〉〈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수상.

시간의 깊이
ㅡ 강현덕의 시 세계
SF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는 우리에게 시간과 기억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사랑 때문에 삶의 유한성을 깨달은 인조인간 리플리컨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창조주인 자본가를 찾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폭력과 자기 파괴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들에게 시간이란 그들의 조작된 기억 위에 새롭게 시작된 사랑의 기억을 위한 욕망의 도구이다. 시간이 없으면 욕망은 사라지고 그 시간 위에 구축된 기억도 사라진다. 이렇듯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그 기억은 시간 위에 존재한다. 그들이 시간을 그토록 갈구하는 것도 바로 이 기억을 위해서다. 조작된 기억을 지우고 새롭게 입력된 사랑의 기억을 위해서는 바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억은 시간의 두께이고 깊이이다.
강현덕의 최근 시들은 바로 이 시간에 관한 사색이다.
절명사를 목에 건 매헌이란 사내도
암흑 속 불꽃으로 맹렬히 폈다 졌는데
한 시간 남은 시계로 천년 향 피웠는데
아직도 내 시계는 어디도 쓰이지 못하고
피 있고 뼈 있어도 뒷걸음치는 겁쟁이
비루한 몸을 숨기고 지는 꽃만 훔쳐보는
ㅡ 「내 시계는 어디에도 쓰이지 못하고」 부분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로 시작하는 백범일지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이 시는 매헌 윤봉길이 거사 한 시간 전에 백범에게 전달했다는 시계가 말해주는 “한 시간”의 의미와 시인 자신이 가진 시간들의 의미를 대비시키고 있다. 시간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절대적인 수치의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시인은 자신에게 놓인 많은 시간을 삶의 치열함으로 바꾸지 못하고 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몸을 숨기고” 사는 자신을 질책하고 있다.
시인 자신을 질책하는 의미를 가진 시이긴 하지만 사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우리들을 수치화된 시간의 노예로 만든다. 모든 것들은 시간 위에 존재한다. 나의 생활도 나의 노동도 나아가 행복한 휴식마저도 시간을 정해 그 안에서 규정되고 결정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규격화되고 통제된 시간 안에서는 내가 가진 나의 주관적 시간은 의미를 상실한다. 나는 단지 시간에 이끌려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윤봉길과 같이 비상한 결단의 시간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나의 시간을 찾는 것 그것은 자신의 삶을 찾는 것이다.
이런 시간의 의미에 대해 다음 시는 좀 더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태엽만 붙어 있는 성주의 녹슨 광영
유리는 모래로 되돌아가 버렸고
바늘도 파도에 굴복해
일찌감치 떠났으리
긴 복도 비단 옷자락 날마다 펄럭이고
벽마다 반짝이는 것 밤낮 눈부셨을
그 성은 이젠 모래성
무너진 시간의 무덤
ㅡ 「시간에 묻혀 있는 해변」 부분
바닷가 모래밭에서 발견한 오래 된 녹슨 시계의 이미지를 참 아름답게 묘사한 시이다. 특히 시계의 유리가 “모래로 되돌아가 버렸”다는 시인의 말은 아름답기도 하고 또 깊은 울림을 준다. 이 한마디로 바닷가의 모든 모래들은 다 시간의 부서진 흔적이고 그 안에 모두 기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시계의 유리가 모두 모래가 된 것처럼 그 기억들은 오랜 시간의 흐름 앞에 다 사라지고 없다. “무너진 시간의 무덤”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말해준다.
기억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꾼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도 결국은 이 절대적인 크로노스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결국은 소멸하거나 지워지는 것일 뿐이다. 기억을 얻겠다는 인간의 욕망도 그 욕망의 찬란한 시간들도 절대적인 시간 흐름 앞에서는 모두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 허망함은 아직도 반짝이고 눈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온전한 기억이나 온전한 시간이 아니라 반대로 부서지고 해체된 시간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때 모래알처럼 남아있는 시간의 흔적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 거기에서 시인은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 아름다움은 이렇듯 크로노스의 지배와 그것을 벗어나 주체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카이로스 사이의 긴장 속에서 나온다.
다음 시는 이를 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돌확에 고인 물이 괘종시계 소리에 놀라
덩달아 동심원으로 번져 오르는 밤
구름도 거기에 감겨 흘러가지 못하는 밤
ㅡ 「달무리」 부분
이 시에서 “괘종시계 소리”는 시간에 대한 일깨움이다. 달무리가 진 희뿌연 풍경 안에서는 카오스의 세계처럼 모든 것이 불명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에서 불현듯 들려오는 “괘종시계 소리”는 시간의 질서에 대한 인식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동심원”이라는 질서를 부여하고 지금 여기의 풍경도 결국 시간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이 시는 우리에게 일깨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시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동심원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만들어 낸 질서가 움직임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동심원으로 맴돌 뿐 “흘러가지 못”한다. 한 순간 정적을 깨고 시간을 인식하지만 그마저도 불필요하게 만드는 어떤 완전한 정적과 소멸의 세계를 시인은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세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거나 시간을 초월한 세계가 아니라 시간을 축적한 시간의 깊이에 도달한 세계이다. 강요된 시간은 허망하고 우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것이지만 강렬한 경험의 순간은 우리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바로 이런 존재가 되는 시간을 경험한다. 괘종시계 소리라는 크로노스의 부름을 듣지만 그 시간마저 동심원으로 가두어 버리는 어떤 절대적인 세계 그것이 바로 시인이 찾고자 하는 미적 영원성의 세계이다.
이런 미학은 강현덕 시인 시들의 형식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강현덕 시인의 시들은 현대적 감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시조의 전통적 운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장 6구의 시행 및 연 구성과 3, 4조의 기본 음수율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과거 시조들이 가지고 있는 봉건적 가치관이나 중세적 미의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들은 현대적 감수성과 미의식이 시조 형식과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는 강현덕 시인이 시조의 형식적 특징을 너무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는 음수율을 기본으로 하는 정형시이다. 하지만 시조의 정형률은 많은 변격을 허용하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 시조의 기본형이라는 3, 4조의 음수율을 정확히 지키는 시조는 전체 시조의 17%밖에 안 된다는 연구가 있다. 매 작품 마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의 자수 변화가 있고 이 작은 변화를 통해 규칙과 자유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 내고 그 긴장이 시인에게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시조가 가진 특징이고 또 시조만의 미학이기도 하다.
강현덕 시인의 시조는 바로 이 시조의 형식적 특질을 자신의 시의 세계와 아주 잘 연결시키고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긴장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그의 시들이 형식과 변격 사이에서의 긴장을 보여주는 시조 형식으로 표현됨으로써 내용과 형식이 완벽하게 조화되는 미학을 완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강현덕 시인의 시들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고 또 한편 아직도 시조가 우리의 문학에서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글 · 황정산 | 시인, 평론가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에 시 발표로 작품 활동 시작.
저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등이 있음.
--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0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