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지정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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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서정시학 시인선 187 | 속삭이는 바나나 | 지정애 시집

펴낸곳 도서출판 서정시학 | 출간일 2021년 12월 24일
서정시학 시인선 187.
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한 지정애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지정애 시인은 이번 첫 시집에서 실존적 존재로서 맞닥뜨릴 수 있는 절망과 나름대로 정립한 극복의 태도 및 방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맹목적이지 않으며 무한히 낙관적이지도 않다. 기저는 깊은 슬픔에 닿아 있으며 목소리는 소박하고 담담하다. 이 첫 시집은 그 자신이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한 그 결과물이다.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비극은 희망과 절망의 인과에 의해 배태되었다. 세계는 여전히 죽음으로 가득하고 희망이라는 일상은 여전히 파괴되어 있으며 절망은 경계없이 흘러다니지만, 화자는 세계로 나아가 자신의 손과 눈으로 박탈되었던 '일상'의 가치를 스스로 탐색하고 있다. 시인이 발견하고 보여준 이 세계의 작은 기쁨들을 따라 떠나보기를 권한다. '나'의 불안과 상처들 중 그 어느 것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은 없지만 그 너머에는 당신이 그동안 잊고 있던 슈가 바나나가 아직 반짝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기뻐할 것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절망의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이겨내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역설적 태도가 독자에게 설득력을 지니느냐 지니지 못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 오히려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확연히 마주하는 실체는 희망의 결과물이 아닌 나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절망과 실패다. 희망은 마음가짐이고 절망은 세계가 오직 나만을 위해 던져놓은 잉여인 것이다.
이 반복되는 차이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감정의 수만큼 제한적이고 무기력하기에, 절망을 마주하고 다시금 희망을 노래하겠다는 의지들이 담긴 시들은 늘 낯설고 귀하다.
― 정우진(시인)
시인 지정애가 빚은 낮은 음역의 시들은 그의 시의 출발에서 현재까지의 거리를 다시금 생각케 한다. 그는 때로 비밀을 갖고 꿈틀거리는 완강한 가방을 향해, 때로는 불가시의 수평선을 찾는 방법으로 시를 쓰면서도 그것을 '질문하는 힘'으로 치환해놓는다.
요컨대, 지정애는 광장의 활엽수보다 키 낮은 은화(隱花)를 좋아하고 웅혼보다 적요를 좋아한다. 지정애가 천 개의 밤을 건너 '마흔 여섯 채의 슬픔'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았다고 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겐 허여되지 않는 지정애만의 지상의 방 한 칸이며 그 방에 스며들어온 실낱같은 햇살 하날 음미하는 익애의 시간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쪼록 지정애 시인이 '삭은 어깨에서 제비꽃을 피워'내는 자생력으로 '겨울을 찢고 나온 들플처럼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햇살마중을 나가는 날이 많기를 바란다.
― 이기철(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얇고 투명한 막처럼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있을 때, 그럴 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미래라는 얼룩"을 끊임없이 닦아내는 존재, "세상의 모든 것을 돌, / 손가락이 다 닳을 때까지 돌을 닦"을 수밖에 없는 존재, 이런 손길이 계속해서 써내는 세계는 무엇일까. 지정애 시인은 삶의 질문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가 던지는 "질문하는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시란 그렇다. 질문하는 힘. 그것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세계가 아닐까. 미래는 얼룩이고, 부재하는 당신은 몽돌 해변에 놓인 따스한 돌이지만 시인은 돌을 끌어안는다. "캄캄한 것들을 자주 들여다보며 물을 주"는, "숙성된 비밀을 더욱 깊게 만드는 시인의 은밀한 시선이 빛난다.
― 이영주(시인)
"방황하는 생을
시가 스윽 잡아당겼다”
ㅡ 「시인의 말」 中
몽돌의 뒷모습
모래톱에서 통증은 따스해진다
갈매기를 보면 질문이 생각난다
나는 질문하는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다시 모래를 밟으면
내 안과 밖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다
나는 차츰 나를 잊어가고 내게서 멀어져 간다
파도 소리에 둥글어져 간다
저마다 모서리를 없애는 방식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눈시울 문지른 당신
당신은 먼 바다의 돌로
금방 낳은 알처럼 따스한 돌로 내게 온다
지난겨울 당신은
돌을 붙들고 돌을 닮자고 했다
그러나 봄이 오고 당신은 떠났다
이제 당신은 내 손에 돌로 남았다
반질반질해진 돌로
옆에 있는 듯 알록달록 기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면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둥글어진다
구름사원체류기
늘 구름 냄새에 절여 들어온, 우리의 물컹한 뿌리, 구름 중독자
아버진 구름을 사랑했고, 구름 또한 당신의 근친
당신이 창밖에 어른거리면 우린 얼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조금씩 구름의 제물이 되어가고
부재의 식탁마저 삼키느라 당신의 입은 날로 커져가고
우리를 날마다 조금씩 오려내, 구름성 올라가는 계단을 쌓아갔다
싹둑싹둑 가위질,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구겨진 미래를 껴안고 잠 설칠 때까지, 늑골 파먹는 붉은 소린 구불구불
비린내 마당에 흥건했다
책 속에 박힌 붉은 눈알로 밤새도록 비명의 강을 건너가
변산바람꽃 한 송이 되고 싶었는데
마음속에서 자라난 못이 시퍼런 눈 뜬 채 푸드득거렸다
뿌리에 재를 뿌리며 연근처럼 구멍 숭숭 난 날들이여 안녕!
근사한 고공비행을 꿈꾸며 박찬 허공
몇 바퀴를 돌다가 그만, 내가 나를 놓쳐 버리고
싹뚝싹둑, 하늘 끝까지
가방, 혹은 방
가방, 봄의 가방은 조금 들떠 있다
비밀을 갖고 꿈틀거린다 완강하다
나는 가방의 안을 들여다본다 늪이기도 별이기도 한 가방은 캄캄해졌다
그를 생각한다 조금 우울해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열망이 있는가
스스로에게도 묻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조금 우울해서 봄날의 이 몽롱한 시를 쓰고 있다
가방 안에는 어떤 것들이 꿈틀거린다 가방을 들고 무언가 생각한다
가방은 쓸쓸한 것이다 묘지처럼 가방은 어둡다 방황의 손때가 묻었다
가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금 어리둥절하다 가방이 나를 안아준다
가방은 사방연속무늬가 있는 둥근 방에 담겨 있다
가방의 침묵으로 둥근 방이 팽팽해졌다
매일 가방을 하나씩 들고 가방의 침묵을 쓰다듬어준다
커피를 마셔도 쓸쓸해지는데 그 이유는 너무 낡았다
나는 가끔 사방연속무늬가 있는 둥근 방에 잠겨든다
늪이기도 별이기도 한 방
백지의 시간
아침부터 설렌다 흰 손은 4시간쯤 그곳에 머무른다
가능성이 단련되는 시간이다
누군가 금방 온 눈 한 트럭을 부어다 놓았다
첫 발자국에서 온기를 느끼듯
백지의 줄을 따라가면 먼 곳의 숨으로 피가 돈다
그동안 사용한 흰색이 산더미인데,
언제 제대로 태어날 것인가
어떤 이는 심장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기록한 뒤 사라지기도 했다
나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밧줄이 되는 백지,
펼쳐논 일기장에 아버지의 눈길이 차갑게 머문 이후
내게서 서식하기 시작했다
빈 방,
아이가 이불을 덮어쓰면서도 기어이 흘깃거리는 무서운 장면 같은 것
매일이 나를 끌어당긴다

저자 소개 ㅣ 지정애
2009년 《서정시학》 등단.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계명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대구 상서고등학교 교사 역임.
■ E-mail : jema3@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