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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채상우 

신간소개 파란 시선 0082 | 필 | 채상우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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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출간일 2021년 8월 20일

 


 

파란 시선 0082.

 

2003년 《시작》으로 등단한 채상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상흔을 남긴 기억에 집착하며 과거를 반복해서 소환하는 것이 멜랑콜리적 주체라고 한다면 “필”의 시적 주체는, 여러 시에서 드러나는 애상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멜랑콜리적 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집의 중심 시제는 과거 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시제이기 때문이다. “필”에 가득한 것은 기억도 의지도 소망도 애도도 멜랑콜리도 아니다. 그것은 완결된 것과 개시되는 것 ‘사이’를 지키며 현재를 연장하는 이의 현실이다.

 

 

사이를 쓰다

 

 

  제3부에 실린 작품들을 제외한 이 시집의 모든 시의 제목은 “必”이다. 시인은 이를 “평생 심장에 꽂힌 칼을 본떠 만든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시인의 말」). 그렇게 보자면, 이 시집은 심안(心眼)에 꽂힌 풍크툼(punctum)들의 연대기이다. ‘punc’라는 어원 자체가 ‘찌르다’, ‘상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시집은 찔러 오는 것들을 응시하는 찰나의 기록이다. 그런데, 주지하듯, 몸에 충격이 닿는 순간과 그 충격이 주는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동시적이지 않다. 거기엔 ‘사이’가 있다. “必”이라는 동일한 제목을 단 모든 시들은 바로 그 ‘사이’에서, 다시 말해 몸에 닿은, 심안을 찔러 온 것들을, 미처 그 형태도 추스르기 전에 인지된 그 감각의 덩어리들을 이제 곧 형태화될 지각의 결과가 도달하기 전에 묘사하려는 의지로 수습하고 있는 시들이다.

 

― 조강석(문학평론가), 해설 부분

 

 

  ‘필(必)’은 ‘반드시’, ‘기필코’, ‘틀림없이’라는 뜻이고, “평생 심장에 꽂힌 칼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심장에 꽂힌 칼”이라니, 그것은 필시 ‘회한’의 한 형상일 듯하다. 물그릇을 들고 자빠진 사람처럼 후회란 두 가지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엎질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책망감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몇 번이고 다시 엎지르게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반복과 지속은 회한의 방법이자 목표다. ‘대화공원 앞 삼사 차선에 로드킬된 고양이’부터 ‘뱀눈박각시나방을 떠메고 가는 개미’까지, ‘떨어져 터진 살구 알’에서 ‘십육 년을 함께 살다 죽은 개’까지 죽음은 시집 도처에서 나타나고 반복된다. 죽음이 편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각각의 죽음이 회한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저녁의 어스름이나 끝도 없이 내리는 비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죽음과 저녁과 비의 영원회귀가 새겨 놓은 회한의 형상이 ‘필(必)’이다. 회한 속에서 완수하지 못한 혁명과 연애와 무수한 생사고락이 ‘자기’를 벗고 다시 태어난다. 여름이 여름을 벗고, 참나무가 참나무를, 그늘이 그늘을, 붉은괭이밥이 붉은괭이밥을 벗고, ‘자기’가 되려 한다. 이 회한은 단지 지난 시간의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생되는 기억이기에 “生前과 死前은 같은 말이다”. 그래서 구 년은 하루 같고, 십사 년 동안 강릉엔 비가 내리고, 사월의 비는 오월까지 내리며, 이십일 년 전 삼양교회 중등부는 크리스마스캐럴을 아직까지 부르고, 스물여덟 해 전의 그 사람은 여태 차비가 없다. 같은 이유로 그는 “깨지 않는 꿈”속에서 찢긴 깃발을 부여잡고 서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오늘 내리는 비가 오로지 비 오는 오늘을 완성’해 가듯이 ‘스스로 그러한’ 자재함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로 한 문장(세계)을 완성해 놓았다. 거기에는 살이 녹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도 붙들어야 할 이유가 있고, 그 세계는 마치 세상을 버린 사람의 노래처럼 가없이 슬프고 처연하게 가라앉는다. ‘틀림없이’ 아름답고 ‘마침내’ 아프다.

 

― 이현승(시인)

 

 

 

 

 


 

“그러나 한번 잘못 쓴 문장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ㅡ 「시인의 말」 中

 

 

 

 

 

 必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쓰고 있다 봄날에 대해 쓰고 있다 봄날 피어나고 있는 꽃에 대해 쓰고 있다 나비라고 쓰고 있다 아지랑이라고 쓰고 있다 처음이라고 쓰고 있다 이건 미친 짓이다 우주는 137억 년 동안 팽창하고 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꽃처럼 새처럼 바람처럼 오로지 쓰고 있다 지금 쓰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쓰고 있다 한번 죽은 자는 다시 죽지 않을 것이다 되살아나지도 않을 것이다 맹세는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그 봄밤에 맹세를 하였습니다 중력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읽을 수가 없다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슬픈데 슬프지가 않다 나는 다만 쓰고 있다 다 늦은 지금에야 그 봄밤에 대해 쓰고 있다 지난겨울을 견디고 꼿꼿이 선 채 죽은 편백을 본다

 

 

 

 


 

 微影

 

 

 

  오늘은 음력으로 戊戌年 辛酉月 壬子日이다

 

  시들고 있는 칸나 위로 앳된 부전나비 둘인 듯 하나인 듯 날아든다

 

  生前과 死前은 같은 말이다

 


 

 

 

 

 

 


 

回音

 

 

 

  아까는 오월 초순치곤 좀 더웠는데 지금은 약간 흐리다 길 건너 돼지국밥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어려 보이는 선생님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너선 아파트 단지 속으로 팔랑팔랑 뛰어간다 올해 나비를 보았던가 가물가물하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천천히 다가온다 유모차 속의 조그마한 개도 늙어 보인다 육 년 전까지 십육 년을 함께 살다 죽은 개가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도 몇몇 보고 싶었지만 다만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립다는 말도 하마 저물어 간다 케이크와 카네이션을 사 든 쌍둥이 여고생 둘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고개를 들면 그때마다 느릅나무가 수천 장씩 잎들을 나부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처음 본 남자가 맞은편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라일락은 시들고 있지만 구절초가 자라는 중이다 한동안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푸른 목백일홍을 앞에다 모셔 두고 술을 따른다 사람이 그립다

 

  지금은 다만 방금 피어오른 적란운을 최선을 다해 바라볼 뿐이다

 

  평생이 종일토록 저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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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ㅣ 채상우

 

2003년 《시작》 등단.

시집 『멜랑콜리』 『리튬』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