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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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지 위의 시어들 10
— 허남기 시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교사는 아직 초라하고
교실은 단 하나뿐이고
책상은 너희들이 마음 놓고 기대노라면
삑 하고 금시라도 찌그러질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문창엔 유리 한 장 넣지를 못해서
긴 겨울엔 사방에서
살을 베는 찬바람이
그 틈으로 새어들어
너희들의 앵두 같은 두 뺨을 푸르게 하고
그리고 비 오는 날엔 비가
눈 내리는 날엔 눈이
또 1948년 춘삼월엔
때아닌 모진 바람이 이 창을 들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공부까지 못하게 하려 들고
그리고 두루 살펴보면
백이 백 가지 무엇 하나
눈물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는 우리 학교로구나
허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니혼노 각고오요리 이이데스(일본학교보다 좋아요)하고
서투른 조선말로
ㅡ 우리도 앞으로
일본 학교보다 몇 배나 더 큰 집 지을 수 있잖느냐고
되려
이 눈물 많은 선생을 달래고
그리고
또 오늘도 가방 메고 씩씩하게 이 학교를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비록 교사는 빈약하고 작고
큼직한 미끄럼타기 그네 하나
달지 못해서
너희들 놀 곳도 없는
구차한 학교지마는
아이들아
이것이 단 하나
조국 떠나 수만 리 이역에서
나서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 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안부를 묻는다. 그리운 형제들에게. 그날 그 한시에 울고 웃으며 손을 부여잡고 끌어안다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던 오사카의 밤. 조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울렁거리고 통일이란 말에는 금세 눈시울이 붉히던 그리운 벗들의 안부를 묻는다. 금강산 가극단의 장구재비 영수. 작곡가 명수형과 연출가 지석 형. 그리고 부랑자의 자유로운 몸짓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하다가 곧 조선사람의 긍지를 외치며 꼿꼿해지기도 했을 오사카의 밤거리를 함께 거닐었던 예술가 동지들에게 조국의 안부를 전한다. 2000년 12월의 성탄절이었다. 오사카후생복지회관에서 “김민기·안치환의 음악 세계와 20세기”라는 공연이 열렸고 공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공연 연출을 맡은 지석 형에게 연락이 왔다. 장문의 시와 함께. 재일조선인 1세이자 민족교육의 1세대 교원으로 그들의 또 다른 조국 북쪽에서는 계관시인으로 불리는 허남기 교장 선생님의 이 시를 남쪽 조국의 동지들이 작곡해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다. 공연의 초대 손님으로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던 내가 작곡을 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대 위의 조명은 먼 곳에서 오직 한줄기로 나와 안치환 씨 만을 비추고 있었다. 하모니카도 쓰지 않았다. 기타 두 대로만 연주하는 전주가 시작되었고 객석은 적막했다. 객석의 정적은 더없이 깊어갔고 그 넓은 공간에 움직이는 것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초라하지만 단 하나뿐인.” 노래가 정점으로 치달을 즈음 객석으로 서서히 조명이 스며들었다. 아! 적막이 아니었다. 그것은 울분을 토해내기 전의 속울음이었다. 맨 앞줄부터 뒤로 두 줄, 세 줄, 객석의 끄트머리와 통로까지 가득 메운 동포들은 저마다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니혼노 각고우 요리 이이데스(일본의 학교보다 더 좋다)”였다. 지진이 난 듯 울려 퍼진 함성은 환호가 아니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갖 차별을 견디며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해온 동포들의 절규였다. 곳곳에서 “악! 악! ”소리가 들렸다. 짧은 간주가 연주되는 동안은 지난 50여 년 그들이 흘렸던 눈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큼직한 미끄럼 타기 작은 그네 하나 없어 너희들 놀 곳도 없는 학교지만” 2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동포들의 울음소리가 반주였다. 노래를 마치고 대기실로 가는 무대 뒤편엔 다음 순서를 준비하던 금강산 가극단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석 형이 내 손을 잡았다.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만 흔들었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고 다시 손을 잡았다. 어떤 이는 화장을 다시 고쳐야 한다고 대기실로 뛰어들어가기도 했다. 이 노래를 포함한 공연 실황은 악보와 함께 시디로 제작되어 동포사회에 배포되었다. 일본의 민족교육 구성원 중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스승은 훌륭한 제자들이 만들고 좋은 작가는 훌륭한 독자들이 만든다. 그날, 잊힐 수 없는 훌륭한 관객들 덕분에 나는 좋은 노래를 만든 작곡가가 되었다. 2007년 일본 극우의 상징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에다가와(枝川)에 있는 도쿄 제2 초급학교의 부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한국에서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소송을 돕기 위해 지원모금을 만들었다. 나는 그 단체의 집행위원장을 맡았었다. 다시 안부를 묻는다. 그해 여름 에다가와 조선학교 운동장에 비친 보름달을 향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아리랑을 외쳐 불렀던 살가운 이름들, 김성태 지역위원장님. 송현진 교장 선생님. 윤명실 선생님, 김순남 선생님……. 그리고 재정을 책임지던 원길 형님의 안부는 하늘에 대고 물어야 한다. 몇 년 전 뜻하지 않은 부고를 받았으나 먼 길 떠나는 형을 배웅하지 못했다. 2011년에 일본 동북 지역에 대지진이 있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던 우리의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당연필(이사장 권해효)”을 만들었다. 몽당연필은 “조선학교 차별 반대 거리 행동”을 수년째 지속하며 동포들과 그들을 외면하는 조국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도 오카야마에서 교토에서 나고야, 센다이 도치기에서 조선학교의 각종 기념행사가 열릴 때마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리운 나의 하느님들이 이 노래를 불러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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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XUeHlzeLB1M?si=8UUdWkyWp6p8tF-u


이지상 l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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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호(VOL.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