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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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지상 

 

 

 

오선지 위의 시어들 8

— 채광석 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

"저리도 멀고 끝없는 곳으로 떠나서 슬픔만 돌려보내고."

 

 

 

기차는 예서 떠났다 

어리석었던 황제의 뒤늦은 밀서 한 장 든 

이준과 이상설을 태우고 

 

기차는 예서 떠났다 

얀치혜 가을 깊은 들에 무명지 잘라 던진 

독한 황해도 사람 안중근을 태우고 

 

기차는 또 예서 떠났다 

총을 빼앗긴 노병 홍범도 

백군들과 싸웠던 파르티잔 김경천의 처자를 태우고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캄챠카 

볍씨 같은 고려인들 

샅샅이 찾아내 모두 태우고 

 

비구름처럼 눈보라처럼 모래바람처럼 

붉은 해 속으로 푸른 달 속으로 

사나운 시절 한 칸이 달려갔다 

 

덜컹덜컹 꽤액 꽥 

헤이그로 갔다 하얼빈으로 갔다 

우즈벡 카자흐스탄으로 갔다 

 

저리 멀고 저리 끝없는 곳으로 떠나가 

슬픔만 되돌려 보내고 

정작 그들은 한 사람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은하수가 폭포수처럼 내리는 밤이었다. 과장은 있으나 완전한 과장은 아니다. 천산의 만년설이 뿜어대는 계곡의 장대함을 걷고 또 걸었던 한낮이었으니 그 밤의 기억은 더욱 생생하다. 은하수는 천산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를 걸터앉아 선명하게 넘실대고 있었다. 카시오페이아에서 시작된 별의 무리들은 베가(직녀성)와 알타이르(견우성) 사이를 갈라놓고 매정하게 지나치며 이윽고 궁수와 전갈 자리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장난기 가득한 손으로 바늘 하나 들어 그 물줄기의 어디쯤을 살짝 상처 내고 싶은 것이다. 금방이라도 저 아름다운 별이 일몰의 빛 내림처럼 물줄기를 뻗쳐내 와 고도 3000미터 위의 호수를 가득 채울 듯했다. 북두칠성만 보고 살았다. 옛 조상들은 북두칠성이 죽음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일부러 찾지 않았는데도 그 반대편에서는 남두육성이 빛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별자리였다. 남두육성은 생(生)을 관장한다고 했으니 그 호수 위의 밤에 나는 살아 펄펄 뛰는 생물이었다. 지난밤 호수 위엔 비가 내렸었다. 유르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새벽 선잠을 깬 적이 있었고 잠시 문을 열고 나가 비를 맞았었다. 금세 몰려드는 오한에 진저리치며 들어와 보드카를 한잔 마셨고 다시 잠들었었다. 객고에 지친 여행자의 아침은 황홀 그 자체였다. 설산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새벽녘의 빗줄기가 눈이 되어 내렸고 만년설 아래 작은 봉우리조차 감싸 안은 놀라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8월의 눈”이었다. 인간의 시야가 한정되어 있음에 감사한 밤이었다. 밤새 흐르고 있는 은하수를 한눈에 다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부분 부분을 자세히 살피며 별자리를 음미했다. 그 호수 위의 초원에 누웠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를 반복했다. 내가 가진 우주에 관한 상식이라고는 고작 빛의 속도가 30만km/sec라는 것 정도였으니 그 황홀했던 밤 광활한 자연의 신비를 되뇌는 일은 무의미했다. 눈앞에 있는 은하수와 빛깔을 가를 수 없이 빛나는 별들을 받아들이는 일뿐 그 모든 것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었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연 앞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기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는 생각만 명확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던진 이 묵직한 질문이 불현듯 떠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자고 저 별들은 이 먼 곳 지구까지 날아와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고 가난하고 그래서 더 알퍅해진 한낱 여행자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있는가. 짧게는 천 광년 그리고 수천 광년 아니 수억 광년, 지독한 과거로부터 비행해 비로소 현재의 내 눈앞에선 그 밤의 별들 앞에서 나는 고작 1/80억인 작고 낮고 불안하고 아파해야 하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실직고해야 했다. 그 밤 초원에 누워 유일하게 기도했던 내용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생의 구비를 넘어 넘어 나와 함께 살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우슈토베였던가. 1937년 9월 혹한의 시베리아를 예견하듯 미처 가을을 탐할 틈도 없이 몰아닥친 강제 이주의 날. 연해주의 고려인들 17만 2천 명을 싣고 떠난 기차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 알마티를 출발한 버스가 6시간을 걸려 도착한 그곳은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 그리고 한 많은 세월을 버티며 살아왔던 고려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재임 기간 중 무려 2000만 명이나 죽였다는 스탈린의 폭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곳은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이다”. 서툰 조선어로 써 내려간 투박한 비문 앞에 서서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 묻힌 고려인들의 비석을 매만지며 그들 생의 한을 새겼었다. 니꼴라이, 올렉산뜨르, 빅또르, 예까테리나, 나딸리아. 생소한 러시아 이름 뒤에는 익숙한 조선의 성씨가 함께 붙어 있었다. 초이, 리 킴, 조, 강……. 원동으로부터 6500km나 떨어진 그 먼 곳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현재를 살고 있는 자로서는 감히 상상해내지 못할 삶의 무게가 과거가 되어 거대한 돌처럼 얹혀 있었다.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다시 한강의 또 다른 질문을 생각한다. 나의 대답은 “그렇다. 언제든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이다. 다만 내 대답의 전제는 간단하다. 내가 과거나 죽은 자를 기억할 수 있을 때만.

 

   저 나무는 슬픈 전설의 여인 김 알렉산드라 저 나무는 민족사학자 계봉우

   저 나무는 게릴라 전술의 일인자 한창걸 저 나무는 사할린 부대 박일리아

   저 나무는 해삼위 어린 영혼의 선생님 이인순 저 나무는 솔빈강가의 유혼 이상설

   저 나무는 침례교 목사 백추 김규면 저 나무는 레닌을 만난 박진순 한형권

   대학 도서관 한구석에 박혀 남쪽의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들

   시베리아 동토에 새겨진 이름들 오래전 가지가 꺾인 저 나무들

 

   저 나무는 멸문지화 가문의 아버지 최재형 저 나무는 고려공산당의 거두 오하묵

   저 나무는 애국 외교관 이범진 이위종 이기종 저 나무는 고려 의용군 사령관 이용

   눈발 날리는 자작나무 숲에 서서 오래전 가지 꺾인 나무의 이름을 묻고

   눈물로 술 한잔 올리고 싶었네 시베리아 동토에 서 있는 저 나무들 이름들

– 〈저 나무 ― 시베리아 동토에 새겨진 이름들〉, 《나의 늙은 애인아》(이지상 6집) 중

 

  고려인들 50만이 살고있는 중앙아시아는 독립 항쟁의 유산이 빛나는 땅. 그들의 선조들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제 군국주의자들과 싸웠던 항일 영웅의 빛나는 이름이었거나 그들과 함께 조국 독립의 길을 걸었던 이름 모를 이들이었다.

  “저리도 멀고 끝없는 곳으로 떠나서 슬픔만 돌려보내고”. 채광석의 시를 노래하며 기행했다. 고도 3000미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있는 호수의 은하수 아래서, 천산의 눈 녹은 물이 차디찬 알틴 아라샨을 오르며, 그리고 그 전에 우슈토베의 고려인 최초 정착지에서도 시 구절은 가슴에 늘 머물렀었다.

  수목한계선 고도 1000미터를 훨씬 넘는 고원 위에 차를 세웠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햇살을 받은 높다란 구릉 맞은편으론 벌써 저물어 가는 저녁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해 질 녘 명암의 조화를 감상하는 잠깐 사이에 멀리 홀로 피어 있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는 그 꽃을 “고려엉겅퀴”라 부른다고 했다. 천산의 변화무쌍한 날씨가 그 꽃을 피워냈다. 고려인들의 끈질긴 생명 강제 이주 90여 년의 세월이 그 꽃을 피워낸다. 다시 시의 한 구절을 속으로만 읊조린다. 간밤에 은하수 아래서 읊조렸던 것처럼.

  “정작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그리운 고향 땅을 밟은 이 없다.”

   

 

*

    

 

 ■ https://youtu.be/YHTDV6DNJpI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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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  l

가수. 작곡가. 작가. 1991년 〈통일은 됐어〉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로 작품 활동 시작. 음반 《사람이 사는 마을》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위로하다 위로받다》 《기억과 상상》 《기억과 상상》 《그리움과 연애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등, 산문집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대한민국 도슨트—포천』이 있음. 시노래 운동 모임 〈나팔꽃〉 동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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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호(VOL.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