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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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모두를 인간처럼
● 김효숙
독서 경험에서 처음 만난 동물 중 개는 정의롭고 영성을 지닌 존재였다. 성장 구간에 함께한 개의 은유들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자아도 성장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은유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만큼 개와 다르게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자기 신뢰가 우리에게는 있다. 인간에 비하여 결핍인 개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주면서 동물 타자를 사유하는 연한이 오래된 만큼이나 동물 억압의 역사도 길다.
최근 시의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는 ‘함께 살기’의 기대가 담겨 있다. 야생을 길들이며 살아오는 동안 피억압자였던 동물 타자를 반려의 관계로 재사유한다. 동물 타자에 대한 우리의 지배 감정이 여전하고, 개의 삶도 같은 비중으로 실재할 때 인간과 개는 서로 응시의 주체가 된다. 인간을 바라보는 개의 눈에 영성이 깃든 이야기인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쓴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 1922~2010)도, “나한테 고양이 마이는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내가 마음 깊이 애착을 가진 인간, 우리 눈 아래 고통받는 모든 존재가 인간이다”라고 쓴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도 인간의 고통 어린 모습과 영성을 가진 개의 고통이 공평하다고 쓴다.1) 최근의 시에서도 동물이 느끼는 감정이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인간과 동물 타자의 정동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은 이 점을 절감했을 터다. 인간의 의식에서 타자성에 대한 지배 욕구가 좀처럼 소멸하지 않음을, 인간의 권력이 생명을 제한하는 대상에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님을. 자연에 대한 인간 권력의 방종을 일깨우는 한스 요나스의 이 문장을 보아 두기로 한다. “만약 그렇다면, 윤리의 토대에 있어서 적지 않은 사고의 전환이 요청된다.”2)에서 윤리를 묻게 하는 대상은 비인간 존재자다. ‘윤리의 나침반’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미리 사유된 위험 자체’(한스 요나스, 6쪽)를 뜻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는 그간에 방종했던 인간이 부디 어떤 공포를 앞당겨 사유하기를 바란다. 자연을 해체하여 문명을 세우며 과학 기술의 진보를 누려 오는 동안 미래까지도 앞당겨 소비해 버린 무책임한 인간에게 말이 없는 비인간 존재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 중심 주의는 칸트 이후 인간의 직관·사유·이해의 방식 등을 타당하게 여기고 중시하는 인식론이다. 인간 외 종과의 분류 법칙에 따라 인간종의 우세를 믿게 하는 인간 중심의 환원론이다. 생명 중심의 생태적 사유는 이와 다르다. 우리의 앎에 선행하는 것이 비인간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라는 점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질문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행성을 중시한다. 상반되어 보이지만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생태 전반으로 확장했다가 다시 인간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 양방향의 사유는 극복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되어 준다. 비인간은 언제나 인간을 위하여 있어 줘야 하는 존재였지, 비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생각해 왔다. 사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전통적인 인간 중심 사유에서 가동하는 윤리는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전지구적으로 사유하거나 미래 인류의 생존 조건을 앞질러 전망하지는 못했다. 후세대가 누려야 할 가치마저 성급히 사유화한 탓에 자연마저 총량이 급속히 소진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생명 중심 사유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이 대등하게 생명 윤리의 상호 교환 대상이다. 비인간 주체를 우리의 편의에 따라 마음껏 이용하거나 조작하는 대상으로 보았으나 심대한 착각이었다. 시인도 언제나 유정물과 무정물 모두를 생명 윤리의 주체로 대한다. 윤리의 나침반을 인간 쪽으로 고정해 놓고 책임의 대상을 망각하지는 않는다.
1. 함께 살기의 윤리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거리 풍경이 상당히 달라졌다. 산책로에서 만나는 비둘기들은 사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고 제 할 일에 골몰한다.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가 인간과의 사이에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조류로 지목한 이 새3)가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온 때는, 기록물을 기준으로 보면 창세기의 홍수가 그친 뒤부터다. 목덜미에 줄이 감긴 채 주인을 앞서가는 개도 행인에게 달려들거나 짖어대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의 상호 길들임 과정에 놓인 대표 종이 비둘기와 개가 아닐까. 최근의 거리 풍경을 보면 그 누구도 이 동물 타자들에게 돌멩이를 던져 자리를 박탈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인간의 음식을 던져주면서 저들의 야생을 침해하지 않으므로 위협적이거나 공격성을 띨 명분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최근 인간의 마을은 양자 간 트러블이 없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가 된 듯 보인다. 시는 어떤가. 개의 생명에 관여하는 인간,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개에 관하여 쓴 시들은 한층 진전된 사유를 보인다.
너의 웃음을 사용할 때마다
추가비용을 지불할게
기다렸다는 듯이 걷는다
헐렁한 바지에 페인트 붓을 손에 쥔 톰
지나가는 자리마다 새까매진다
뒤돌아보는 혓바닥 번쩍 들린 손바닥
데굴거리는 눈동자도
증발한다
북극해를 건너려 심장을 버리고
불 속에 가부좌를 튼다
개가 먼저 식사하기 전엔 수저를 들지 말며
산책 중일 때엔 앞지르지 말고
몸가짐을 낮추어야 한다
톰의 이빨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온다
기다렸다는 듯이 걷는다
고장난 브레이크로
이렇게라도 반항한다
행방불명된 톰에게 가는 길
교대할 시간이야
노동의 고단함을 놀이로 기만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걷는다
디저트의 디저트
블랙선데 아이스크림의 토핑
종이 스푼 두 개
톰톰톰 톰톰톰
이건 먹고 가야지 맨 밑바닥까지 제대로 먹어야지
블랙 화이트 사이 층층 브라운 앤 핑크
우리의 지옥을 다시 한입
― 김바다, 「실종」, 『백조』, 2025년 상반기
타자의 웃음을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가. 물론 있다. 감정 노동의 주체에게 지불하는 재화에는 상대방의 웃음 값이 서비스 명목으로 포함된다. 위의 시에서 “너의 웃음을 사용할 때마다”라고 쓴 부분이 그 증거다. 화자도 상대의 웃음에 걸맞은 가치를 지불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거품이 잔뜩 낀 교환가치로 그 웃음을 거래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둘의 관계를 매우 건강하고 견실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 시는 왠지 석연찮은 기분을 몰아온다. 그 타자가 동물인데다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전부터 줄곧 그 개에게 웃어주는 것을 업으로 알아 왔다.
이 이야기에서 개-인간의 관계는 인간-인간의 그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만이 지각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점에 맹점이 있다. “아이스크림”과 “종이 스푼 두 개”라는 기표에서 번연히 보이는 것은 인간을 위한 간식, 인간을 위한 휴식, 그리고 그 틈새에 개를 위한 호사인 것처럼 끼워 넣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어른거린다. 개에게 자신을 낮추어 예의를 다 갖췄고, “개가 먼저 식사하기 전엔 수저를 들지 말며 / 산책 중일 때엔 앞지르지”도 않는다며 인간의 준칙을 말하지만 개는 번번이 화자와의 행보에 엇박자를 놓는다. 하여 개와 함께 걷는 일에 발생하는 노동의 강도와 비용이 만만찮아 보인다. 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걷는” 일이 화자의 태도에 따라 결정되는데, 심지어 개와 함께하는 일을 “노동”이 아닌 “놀이”로 바꾸어 즐겨야만 개가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이는 번번이 “추가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 마음과 행위의 “기만”이 필요한 노동, 급기야 지옥처럼 여겨지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같이 걷는 일을 도모하는 이상한 거래 방식이다.
시현실에서 억압 체제는 이렇게 작동한다. 우선은 마음에 앞서 비용부터 치르면서 개를 대한다. ‘톰’이라는 이름의 어린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지만 정작 마음보다 앞서는 것이 비용 치르기이다. 급기야 톰이 사라져 버린 광경에서 읽히는 것은, 화자가 개에게 거는 인간성에 대한 집착이다. 인간의 음식인 아이스크림이 담긴 용기를 밑바닥까지 핥아먹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거부한 개가 실종―이 행위를 인간에 빗대면 ‘가출’이다―되어 버린다. 동물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돌발 상황 때문에 양자 간 관계가 무너지고 만다. 통제 불능의 타자적 속성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다.
이 시는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에 경계가 있다면 섭생의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경계여서 결코 허구일 수가 없다. 화자가 지불하는 비용과 노동의 강도가 개의 동물성을 위한 것이었을 때 개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화자의 동반자로서 산책을 이어간다. 그러나 인간의 음식을 남기지 말고 핥아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급기야 실종을 택한 톰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엄연히 경계를 두어 동물성으로 환원한다. 톰에게 결핍인 것은 인간성이 아니며, 화자에게 부족한 것도 동물성은 아니다. 상대의 결핍을 채워줄 수 없는 인간과 동물은 상호 타자로서의 지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화자는 현실이 “우리의 지옥”이라 할지라도 함께 살아가는 일에 관하여 말을 하고, 상대를 비루하고 비천하고 가난한 동물로 격하하지는 않는다. 인간에 준하여 결핍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고, 낮아지기의 윤리를 실천하는 반려로서의 의미가 그에게는 더 소중하다.
‘동물’이라는 표기의 폭력적 방식을 비판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사유에 기대어 이 같은 혼란을 직시해 보자. 그는 독특한 개별성을 지닌 비인간 존재를 하나의 단위로 뭉뚱그려 ‘동물’로 지칭하는 폭력적 방식에 반감을 드러낸다. 이를 대체하는 용어로 ‘동물성’을 제안한다. 하나의 특성으로 통합되어 개별성을 인정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동물을 ‘동물타자’로 바꿔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 언어로 아니모(animot)라는 신조어도 제시한다. 이는 동물(animal)과 단어(mot)를 결합한 말이다. ‘동물’로 통합되어 개체의 특성이 상실되지는 않도록 ‘동물이라는 말’4)에는…이라고 전제할 수 있게 배려한다. 이토록 세심한 동물 타자에 관한 말하기에서 비인간의 존재적 지위는 인간 이하의 것이 아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톰의 실종을 계기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윤리를 톰의 개별적 동물성을 바탕으로 재사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시 「올바른 생활」에도 개를 잃은 사람이 등장한다. 개와 함께 있는 풍경을 “가족의 형상”이라 여기며 화폭에 담고 있던 참에 그에게 꼬리를 밟힌 개가 집을 나가 버리고, 가족 범주는 와해한다. 이 시는 화자-개-친척의 관계에서 트러블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동물과 인간 간 경계를 만드는 정동을 제한할 수 있을지를 생각게 한다. “친척”과 화자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면, 개를 가족으로 여기는 화자는 이상하게도 개를 찾는 일에 소극적이고, 친척이 더 적극적이다. 심지어 화자는 개가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났길” 바란다. 왜 그런가.
“저 호수를 봐. 흐미가 빠져 죽기 딱 좋아 보여.”
친척과 잃어버린 개를 찾고 있을 때였다. 동네를 열 바퀴쯤 돌았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흐미는 쓰다듬으면 옅어지는 콧잔등을 가지고 있는 개. 앞발을 기울여 발등을 짓누르는 개. 조금씩 사물을 닮아 갔던. 우리는 매일매일 원반던지기를 함께했다. 흐미가 사라질까 봐 제대로 칭찬해 준 적은 없다. 대신에 증오를 알려 주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 너는 알아들을 수 있을 거야. 꼭 이해해야만 하는 거야. 어설프게 설명해 주었지. 미움과 그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 이유를 가르쳐 주는 이유에 대해서도. 찬장을 열어 흐미를 위한 과자를 꺼내 주며
“인간과 산다고 해서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면 안 돼.”
충고하다가 과자가 담긴 병을 깨뜨리고 말았다. 금세 개미 떼가 몰려 부스러기를 옮겨 갔다.
영리한 흐미는 테라스에 꼬리를 말고 앉아 있다가 문득 이곳을 뛰쳐나갔다.
겪어 보았던 가족의 형상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캔버스에 유채. 기계로 된 심장을 그리다 붓을 떨어트렸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흐미의 꼬리를 밟아 버렸나? 실은 반복되는 충고가 지겨워졌을지 모르지만, 친척은 그게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개와는 빌어먹을 낱말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고. 전부 나의 잘못이라고. 낡아빠진 외투를 집어 들면서
잡으러 가자. 아직 멀리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
흐미는 아마 미움이 무엇인지 깨달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흐미가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났길 빌었다.
지구 반대편의 어느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제각기 쪼개지는 빛 아래 누워 있기를 바랐다. 불가사의 하더라도 틀리지 않는 예감이 있다. 있기를 바란다. 개는 오직 개의 마음만을 가질 것. 어느새 나의 친척은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모두 대낮의 일이었다.
― 이영은, 「올바른 생활」, 『시산맥』, 2025년 여름
앞당겨진 미래를 보는 듯한 시다. “기계로 된 심장”을 장착한 동물-기계와 한가족이 된 경험을 이야기 한다. 정체성의 무게를 기계 쪽으로 두면 “사물을 닮아” 가면서도 아주 영리한 존재, 동물 쪽으로 두면 “오직 개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존재가 그 대상이다. 시현실에는 개를 훈육할 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앞은, 미움과 증오가 어떤 감정인지를 알려주는 것. 뒤는 칭찬이다. 개를 개답게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며, 칭찬은 오직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믿음 때문일까. 개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다음 문장 “인간과 산다고 해서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면 안 돼.”에 압축되어 있다. 화자는 개에게 미움을 가르쳐 야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충고와 훈육을 이어간다. 그럴수록 개는 “조금씩 사물을 닮아” 가면서도 점점 영리해진다. 하지만 화자가 칭찬을 물리고 미움을 가르쳤더니 이 영리한 개가 “미움이 무엇인지 깨달은 게 분명하다”고 토로한다.
이는 결국 칭찬이 결핍된 개가 집을 뛰쳐나가 버린 이야기다. 미움은 개와 인간 사이에서 의당 일어날 수 있는 속일 수 없는 감정이다. 개가 미움을 갖게 된 이유에 인간 타자가 있는 것만큼의 비중으로 화자에게는 동물과 달라야 한다는 자아가 있다. 가족 간에 트러블 없이 지내고자 하는 포부는 가족 구도가 인간-인간일 때도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화자가 ‘친척’이라 부르는 사람이 더 적극적으로 개의 행방을 좇는다. 그는 개를 길들이거나 각별히 책임감을 지닌 ‘가족’ 범주에 있지 않다. 양가감정을 품고 개가 돌아오기를(/돌아오지 말기를) 바라는 가족과 달리, 친척은 개를 생명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하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개를 찾아 나선다.
도나 해러웨이가 비인간 타자와 친척(kin)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이것은 “온갖 사람이 최선을 다해 길들이려고 하는 야생의 범주”에서의 발화다. 여기에 더하여 기이한 친척(oddkin) 만들기는 혈통이나 생물학과도, 인간이 실제로 책임지는 일과도 무관(해러웨이, 9~10쪽)하다. 그가 트러블의 어원으로 불러일으킴·방해·애매함 등을 들면서 현대의 혼란을 말할 때도 비인간 타자와의 친척되기는 혼란의 와중에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윤리의 일환임을 뜻한다.
시현실에서 동물-기계를 길들이려는 인간의 시도가 반복될수록 개는 학습에 의해 점점 영리해진다. 인간이 인간 타자에게 품는 감정처럼 이 동물-기계도 인간에게 같은 감정을 품는다. 개의 감정도 기계장치에서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자신의 생명을 두르고 나타난다. 인간의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는 계율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쳐 놓은 구분일 뿐이다. 동물-기계도 인간 같은 마음과 감정을 자신의 생명에 들이고 살아간다. 우리도 가끔 자신이 실종되는 꿈을 꾸지 않던가. 시현실에서의 개처럼 말이다.
2. 동그란 것을 보면 굽고 싶어진다
‘동물’이라는 기표에는 인간 이성의 탁월성에 따른 분류 기준이 내재한다. 앞서도 썼지만 이에 반하는 ‘동물이라는 말’은, 동물을 인간 이하의 결핍된 존재로 보고 비하하는 현상에 대한 반작용의 고안물이다. 동물을 동물이라 직설하지 않고 그 본질을 규정하는 말의 쓸모를 문제삼은 또 다른 말이다.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의 분류법은 인간 중심으로 기울어 있다. 이에 따라 인간으로 확정된 존재는 반드시 동물이 아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식물은 동물과 달리 움직일 수 없는 생명체를 이른다. 인간 중심 사유에서는 유독 인간에게만 자아가 있다고 보고, 동물과 식물의 본성을 원초적 번식력의 범주에 둔다. 그래서 번성하는 동·식물의 세계를 끝도 없이 포식할 수 있는 인간은 식욕을 제어할 필요를 알지 못한다.
아래 시에는 동그라미들이 만든 동심원이 여럿 겹쳐 있다. 동그란 것만 보면 고기를 굽고 싶은 사람, 음식을 데워먹고 싶은 사람, 자동차를 생각하는 사람, 식탁에 둘러앉아 환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프라이팬과 전자레인지가 동심원을 만들면서 이 인공물 바깥의 세계인 자연을 밀어올린다. 자동차까지도 사람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도록 동그란 바퀴를 쉴새 없이 굴린다. 이 세계에 “자연”과 “생명”을 상기시키지 않는 동그라미가 없어 보일 정도다.
동그라미는 자동차가 된다 검은 프라이펜 위에서 깨지는 계란처럼
멈춰서, 주차장이 된다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지는 흰 밥처럼
모여서, 집이 되는 귀가의 끝에서
우리는 만나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그것이 자연이라는 걸 잊고서
불을 밝힌다 그것이 이파리라는 것을 잊고서, 어둠은 기둥처럼 서서 나무가 되어간다
숲이 되어간다 천천히
우리는 울창해져서
입술은 어느새 동그라미에 도착한다 둥근접시가 싣고 온 허기에
몸은 제자리에서 자신에게 도착한다 식탁이라는 들판에
환하게, 어둠 속에 파놓은 빛의 동굴에
먹고 있는 생명에
도착해, 고백한다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몸에 대해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마음에 대해
한시도 죽지 않았던 우리는,
바닥에서 익어가는 검은 프라이팬의 밤에
돌면서 데워지는 전자레인지의 밤에
집을 허물고 주차장을 지우고 아득한 해와 달의 회전 속으로, 자동차를 보내고
닭 이전의 저녁과 수풀 이전의 식탁에
도착한다, 사라진 조상의 몸에
―신용목, 「울창한 밤」, 『시산맥』, 2025년 여름
몇 개의 동심원이 겹치고 번지면서 파장을 만드는 듯한 장면이다. 죽은 생명체의 상위 포식자인 인간을 초점화하여, 자연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을수록 문명인인 자신의 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한시도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에서 죽은 신체와 관련한 묘사는 생략된다. 식탁에 올리려고 절단된 닭고기의 살 같은 그것을 재현하는 일이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죽음의 재현은 끝내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숨기면 고통도 많은 부분이 문맥 속으로 숨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눈속임의 기술(skill)이 만든 경감된 고통일 뿐이다. 시인이 마음으로 기술(description)한 고통은 이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입으로 누리는 미감과 생명체로서의 활력은 비인간 주체의 생명에 근거를 둔다. 이 시에서처럼 동그라미 형상들이 끝없이 파장을 만들면서 포식자인 우리의 입맛을 자극한다. 인간이 만든 동그란 도구들에서 동·식물의 고통이 번지는 얼룩부터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닭 이전의 저녁과 수풀 이전의 식탁에”, 나아가 “사라진 조상의 몸에” 잘 도착할 수 있을까. 집도, 주차장도, 자동차도, 닭도, 수풀도 기원의 시간으로 돌려보낼 수나 있는 것일까. 그러고 나면 휑하니 빈 저녁의 식탁 앞에 모이는 우리의 허기진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기원으로의 복구가 이뤄진다면 우리의 식탁은 “울창한 밤”을 맞지 못하고 황량하기만 할 테니 말이다. 동그란 식탁 위에 펼쳐지는 풍요로움은 늘 비인간 생명체의 죽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 시의 화자는 비애를 감춰 두고 담담하게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 간 트러블이 없다 해서 후자의 고통이 소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제작물인 동그라미 형상과 관계를 맺은 생명체들은 인간과 어떤 트러블도 없이 일방적 관계 안에서 미움도 사랑도 없이 죽어 간다. 반면에 번성하는 자연에는 비인간 존재들이 북적거린다. 인간과의 사이에 끊임없이 트러블이 일어나야만 자연은 건강을 유지한다. 식물도 예외 없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생명의 파장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아래 시에서 “작물”은 인간의 영역에서 관리되고 있다. 이 식물은 정작 있어야 할 야생의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3. 초록을 보면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
그 사람은 떠나면서
농사를 지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깻잎일까
감자도 아니고 깻잎이라니
그렇게 가벼워도 되는 것일까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잎들깨를 심고
줄기가 자라서 잎이 나면 쉬는 날도 없이
자라나는 잎을 따고 하염없이 따고
한 장 한 장 차곡차곡 모아
화폐처럼 끈을 두르면서
이곳은 들깨밭이 아니고
잎의 밭이다
선언을 하며
어느 날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당신이 다가와
깻잎을 잔뜩 안겨준 채 사라져 버리고
갑자기 그 많은 잎을 받아 든 사람은
떨어질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여러분 제발 깻잎 좀 가져가세요
날아갈까 봐 작은 목소리로
당신은 다시 들판으로 가
잎을 키우고 보살피고
내다 팔고
택배로 보내고
아무나 붙잡고 깻잎을 안겨줘 버리고
사람들이 깻잎에 양념을 바르다 지쳐
잠을 자러 가면
한밤중의 식탁에서
둥근 초록의 잎사귀들이 잔뜩
솜털을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작물로 다다른 곳에서
당신은 자기 말을 듣고 있냐고
정말로 떠난다고
― 남현지, 「당신의 다음 작물」, 『시사사』, 2025년 봄
어떤 이가 부지런히 식물에게 야생을 일깨우고 있다. ‘작물’이라는 기표에는 “깻잎”이 인간의 보살핌을 받는 객체라는 관점이 담겨 있다. 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식물의 관계에서 상대를 길들이려면 주체의 주권이 절대적이어야 한다. “당신”과 “잎들깨”의 관계가 그러하다. 화자는 당신이 심어서 가꾼 것을 ‘작물’이라 부른다. 심겨지고, 길러지고, 팔려나가다 남은 것은 “아무나 붙잡고 깻잎을 안겨줘 버리”는 당신의 처분대로 이 식물의 존재 이유가 결정된다. 인간 주체에게 객체인 식물이 인간의 생명에 기여하는 구조 안에서 깻잎은 작물로 호명되고, 이 모든 일들이 주권자인 인간의 설계와 절차를 따른다.
화자의 다음 질문, “감자도 아니고 깻잎이라니 / 그렇게 가벼워도 되는 것일까”에서 ‘가벼움’의 현상은 자본과 엮인다. 게다가 당신은 상식선에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능의 인물이다. 한 장 한 장 손이 많이 가는 것에 비하면 환금작물로서 가치가 형편없는 깻잎을 재배하는 행위자인 것이다. 적어도 세속인으로서 욕망을 구현하는 차원에서의 식물 재배는 아닌 듯하다. 향긋한 깻잎 반찬을 올려놓은 둥근 식탁이 있고, 그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일조하는 것이 이토록 가벼운 식물의 잎이다. 식물 존재의 야성을 깨우는 이 시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행간은 바로 이곳에 있다. 인식론을 넘어 존재론 차원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깻잎의 존재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인간종에게 작물로 호명되는 와중에도 야생을 잃지 않는 깻잎의 번성, 그리고 자신이 기른 깻잎을 행인에게 안겨주는 저 광경은 깻잎의 의미를 ‘마음’으로까지 확장한다.
그가 다음 작물을 찾아 이 마을을 떠난다는 점에서 그의 녹색 정치는 예사롭지 않은 반향을 지닌다. 그는 인간의 식탁을 식물성으로 바꿔 놓으려는 꿈의 실행자, 깻잎은 그의 손길이 무색하게 야생의 본성을 발산하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푸르고 싱싱하고 향긋한 깻잎으로 평정된 세계에 육식성 얼룩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다음 장소에서도 그는 생명의 다른 이름들을 키워내지 않을까. 인간의 침탈로 야성을 잃어버린 식물에게 있을 자리를 마련해 주고, 야생의 복원이 가능한 “밭”을 일구고자 하는 포부를 지닌 사람. 그는 “정말로 떠난다”는 말로 녹색 유포자의 정체성을 표명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언제나 비인간 타자에 의한 존재자였다. 타생명을 침탈하여 먹을거리로 삼고, 이 생명체들에게서 얻은 에너지로 생체 시계를 작동시키며 시간을 벌어들인다. 최근의 시를 보면, 동식물의 세계가 온전히 인간 주도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동물과 인간 간 이심전심이 가능하다면 여하한 감정이 인간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식탁이 풍성해지는 시간에 더욱 깊어지는 인간의 정담도 비인간 생명체의 시간을 가로채어 얻은 것이다. 인간을 주체로 확정하고 비인간 생명체를 타자로 배제하는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는 시인들의 내심을 더듬어 보았다. 너나없이 평평한 지위를 지닌 생명체의 현재적 삶이 다양한 풍경으로 시인의 마음에 펼쳐져 있다. 모두가 인간처럼 아프고, 애착하고, 미워하고,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지닌 생명체들. 그 이름은 ‘생명 공동체’다.
1) 로맹가리, 백선희 역, 『흰 개』, 마음산책, 2012, 264쪽.
2) 한스 요나스, 이진우 역,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서광사, 1994, 36쪽.
3)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역,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마농지, 2021, 32쪽.
4) 임은제, 『데리다의 동물 타자』, ㈜그린비출판사, 2014(초판 2쇄), 22쪽.

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그 외 공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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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호(VOL.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