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염창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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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시조에서 개인적 서정과 실존의 추구
지난 호에서, 중인 계층의 가객인 안민영의 작품을 통해 익명적 주체에서 개인적 주체로 전환되는 지점을 살펴본 바 있다. 현대의 사설시조 창작은 작가 의식의 소산이며, 개인적 자아의 실현에 값하는 내용과 형식을 획득한 것이어야 한다.
사설시조의 전통 계승과 재형성 지점
사설시조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세계는, 자유시와 소설 등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이에 비해 현대의 사설시조에서 적극적인 페미니즘의 형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예시적으로, 다음 두 편의 자유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①
박혀 있는 게 / 못의 힘인 줄 아는 / 바보 / 먹통 // 못 느끼겠니……? // 못의 / 엉덩이를 두드려가며 깊이 / 깊이 못과 / 교접하는 / 상처의/ 질 // 의 / 탄력?
— 김언희, 「못에게」 전문(『트렁크』, 1995)
②
어젯밤 / 꿈속에서 /그대와 그것을 했다 // 그 모습 그리며 / 실실 웃다 / 오늘 아침 밥상머리 / 돌을 씹었다 // 그대에게 가는 마음 한끝 / 꽉! / 깨물며 태어난 / 눈물 한 방울.
— 최영미, 「꿈속의 꿈」 전문(『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4)
①, ②의 작품 모두 자기 발화를 기본으로 삼는다. 대상화된 주체(타자)가 아닌 시인 자신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①에서 시적 발화의 주체는 못이 박혀 있는 벽이다. 달리 표현하면, ‘벽’이나 ‘구멍’일 텐데, 이를 “질”로 의미화한다. 더 나아가 “상처의 / 질”이 상징하는 것은 여성 화자의 ‘몸’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못”은 남성적 상징이다. 앞의 사설시조에 대입하여 본다면, “찬찬 휘감아 잘까 하노라.”의 어떤 상태일 텐데, “못”의 ‘공격성’과 “상처”가 전면화되면서 의미가 역전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교접” 행위는 “상처”를 내고 “상처”를 “탄력”적으로 받아들이는 가학과 피학 간의 주고받음이다. 두 번의 물음표는 “못”이 갖는 불감성과 단순성, 혹은 무책임성에 대한 조롱으로 읽을 수 있다.
②에서도 시적 자기 진술을 기본으로 한다. “어젯밤 / 꿈속에서 / 그대와 그것을 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대는 없는 그대이며, 나는 식탁에서 혼자 아침밥을 먹는다. 그런데 결여된 그대의 자리를 대신하여 “돌”이 씹힌다. “그대에게 가는 마음 한끝 / 꽉! / 깨물며 태어난 / 눈물 한 방울.”은 그대와 나 사이의 거리이자, 단단하게 고착되어 통증으로 다가오는 아픈 관계를 은유한다. “어제밤도 혼자 / 곱송그려 새우잠 자”는 현실은 구체화를 과정을 통해, “꿈속의 꿈”에서와 같이 배반의 서사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금기의 위반으로서 성적 표현의 자유분방함은 현대의 자유시나 산문체의 글로 표현의 장이 옮겨갔다고 볼 수 있다. 언표가 제약된 과거에는 최소한의 탈출구로서 시조나 잡가, 가사 등을 비롯한 노랫말이 중심 역할을 차지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비판, 금기의 위반, 욕망의 표출 등의 면에서 ‘정형 규범을 강조’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조는 한계를 갖게 된다. 즉 통제된 형식의 테두리 내에서 내용으로써만 위반의 시학을 추구하기는 어렵다. 정형 규범을 비틀거나 타 장르와 혼종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만 전복적 상상력에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현대의 사설시조가 이러한 한계조차도 극복하는 미학적 에로티시즘을 성취하려면, 위의 두 편 자유시에서와 같이 구체적인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은유와 상징적 장치를 동원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설(辭說)’이 뜻하는 산문체의 특성을 살려 구체적인 현실 감각을 복구해 내야 한다.
김남규(2021)는 “차이와 반복”의 개념을 토대로, ‘현대사설시조포럼’ 앤솔러지 11년분의 주제를 분류 하였는데, 총 1042편 중에서 일반 서정 46.4%, 에로티시즘 0.9%, 현실 비판 25.89%, 언어유희 1.89%, 서사성(이야기) 25.1%로 정리한다.
이에 따르면 대략 30% 이내에서 옛 사설시조의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으며, 나머지가 현대적 재형성의 지점이다. 특히 일반 서정의 비율이 46.4%라는 점은 의외의 결과로, 이로써 사설시조의 주류는 ‘일반 서정’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들의 형태적 특징은 대체로 평시조의 확장 형식에 가깝다. 평시조로는 허용하기 어려운 길이의 내용이나 느낌을 자유시에 가까울 정도로 허용치가 큰 사설시조의 형식에 의탁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사설시조 형식의 재개념화를 비롯하여 창작의 방향성 점검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사설시조 창작의 흐름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는 발표 작품의 경향성을 판별할 뿐 아니라, 창작을 위한 방향 제시와 같은 지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전통의 계승 면에서는 ‘확장된 사설: 함께 읽기로서의 독자’이다. 그리고 일반 서정으로의 재형성의 면에서는 ‘개인적 서정과 실존의 추구’ 이다.
확장된 사설 : 함께 읽기로서의 독자
근대성의 개념 속에서, 자아의 발현으로서의 성 문제는 주요 관건 중의 하나였다. 가부장제 및 일부다처제에 대한 저항과 해체, 성적 금기로부터의 해방, 적나라한 성 묘사, 퀴어 의식 등을 레퍼토리로 하여 성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문학, 예술상의 주요 소재 혹은 주제로 등장하였다. 고시조에 나타나는 근대적 경험은 기녀의 시조나 사설시조 등에서 발견되었고, 이에 대한 연구도 상당한 분량으로 쌓여왔다. 이에 비해 현대시조에서 자유분방한 성적인 표현은 오히려 보수적으로 퇴행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는 창작 과정의 다음 두 가지 질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현대시조의 형식 자체로 보면, 근현대적 주체로서 자기표현에 노력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법’이라 할 수 있는 정형 규범에 익숙해지는 데 열중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사대부 계층의 논평적 시각이 따라붙어 대상화된 주체(타자)에 대한 논평, 비판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둘째 다른 갈래와의 차별성 면에서 보면, 형식적으로 사설시조의 경계마저 뛰어넘는 자유시, 소설 및 산문 등에서 자유와 비판 정신이 더 활기 있게 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즉 갈래 개념의 재형성 과정이 암묵적으로 진행되면서 현대시조 및 사설시조의 세계관이 고착되었고, 급진적인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은 아예 타 장르로 이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송희(2018)는 “에로티시즘의 이미지는 고대의 시가에서는 적나라하게 묘사되었지만 실상 현대 시조에서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 작품은 많지 않다.”고 하며, 잘 형상화한 작품으로 윤금초 시인의 「성담론 시편」 연작과 「스무 살의 지뢰밭」, 「뜬금없는 소리 8」 정도를 꼽는다.
③
그 작은 옥문(玉門) 구멍 세상천지 다 열고 나온다.
머리털 세는 줄 모르는 늦바람에 들깨방정 참깨방정 오두발광 떠는 저 씀바귀야, 게으른 여인 일 제쳐두고 그것 터럭이나 세는 고즈넉한 이 늦봄, 요분질 희학질소리 거시기 길 나자 홀로 된다더니만
옷가슴 풀어헤치고 속울음 우는 백목련.
— 윤금초, 「들깨방정 참깨방정」 전문(『거시기 & 머시기』, 2022)
이 시조는 자기 서사가 아니다. 화자의 시선은 시적 주체를 대상화한다. 이 시는 사설시조의 율격과 전통적 해학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고시가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경우이다. 이때의 시적 대상은 “씀바귀”와 “백목련”의 대립으로 표상되는 바, 시선의 중심은 단명한 “백목련”의 처지에 놓여 있다. 주제는 함축되어 있는데, “요분질 희학질소리 거시기 길 나자 홀로 된다더니만”과 같은 운명론적인 무상감이다. 이 시에서 “늦바람”에 “씀바귀”는 “들깨방정 참깨방정 오두발광”을 떨지만, 정작 아름다운 여인은 “옷가슴 풀어헤치고 속울음 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③의 대비적인 시선은 결국, “씀바귀”에 대한 비판, 풍자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는 자전적인 서사가 아니므로 독자를 불러 함께 논평하고 대상을 희화화하는 확장형 사설의 형태로 볼 수 있으며, ‘함께 읽기로서의 독자’를 향한 서사의 형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시적 주체에 대한 대상화의 관점은 현대시조의 창작론에 해당한다고 평가할 정도로 일반화된 유형이다. 즉 비판, 해학적 유형으로 분류된 대다수 작품은 시적 주체를 대상화하는 관점에 서 있다.
④
그대가 떠난 이후 구백아홉 번째 봄입니다
가령, 내 가슴 진공장치에 통증 분자를 추출하여 미래학적 빈사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는 과학적 가설은 참일까, 거짓일까? 묻는다면 이별은 그 등위의 개념이 차지하는 정신적 질량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므로 발해보다 더 풀기 어렵다 말할래요. 세월이 명약이라 믿고 산 건 아니지만 정답도 오답도 없는 난공불락 그리움이 물오른 목련 가지마다 울먹울먹 맺히는 계절
저것은 누구의 뿔입니까? 하늘이라도 치받을
— 박해성, 「뿔」 전문(『게 누구냐?』, 2017)
이 시조는 자기 서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상 관찰이나 비판이 아니라, 자기 조응적 시선이다. 서정 갈래의 기본이 ‘세계의 자아화’에 있다고 한다면, 기본에 충실한 시이다. 시적 의장은 평시조의 형식에 중장의 4음보 형식을 몇 배수로 배가(倍加)하여 분량이 늘어난 것이다. 이때, 중장을 밑줄 그은 “물오른 목련 가지마다 울먹울먹 맺히는 계절”만 남기고 나머지를 삭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제의 형상화 면에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오히려 평시조형을 기본형으로 하는 작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앞부분에 덧붙인 배행들과 관련하여, 이들이 ‘시적 의미의 자질을 확대, 심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비평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살펴보면, 앞의 배행들은 설명적 진술에 머무르지 않고 내적 긴장의 간곡한 과정을 이미지화한다. 다시 말하면, 시적 주체의 현존을 극화시킨다. 이 지점에서 사설시조가 갖는 배행의 확대가 필요한 것이다.
④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단순히 길어진 수준에서 사설시조를 논의할 수는 없다. 즉, 4음보 형식의 흐트러짐이 없는 배가(倍加)가 사설시조를 성립시키는 요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도 삶의 내용이나 과정으로서의 굴절, 심화 양상이 시에서 형식적 배가 양상과 맞물려야 하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인용한 바, 박철희는 사설시조의 미덕으로 윤색되지 않은 솔직함을 들었다. 다음 인용은 사설시조 창작론에서, 비판적 사설의 경우에는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문제는 詩가 당대 현실적 狀況에 너무 민감할 때 당대에는 일면적인 의의가 있으나 그 시대의 한정적인 의의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開化期 詩歌가 지나친 현실 반영으로 나타났을 때 그 시의 생명은 그 현실과 더불어 끝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포 독자는 글 속에 포함되어 있는 독자의 개념으로, 글을 통해서 암묵적으로 독자가 어떤 일을 수행해 줄 것을 요청받는 상태로서의 독자이다. 이는 독자 반응 이론이나 수용미학 등에서 가상적으로 설정한 독자로서, 실제 독자에 대한 역할 부여에 해당한다. 실제로 텍스트 내에서 내포 독자가 발견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개인적 서정과 실존의 추구
실존적 고독은 신이나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파편화된 주체의 문제이다. 공동체의 규범으로도, 신의 은총에 의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현대인의 분리된 고독이다. 이때 사설시조는 ‘어떻게 이들을 극화하며(절제된 정형률), 또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倍行에 의한 강조법)’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아래의 네 편의 사설시조는 형식의 규범 내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율격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형태적 구조는 내용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서만 그 시적 성취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⑤
언제나 짓눌리는 슬픔으로 네가 산다
바닥까지 다 닳아지며 그 무게를 홀로 견딘다
코 막고 쓸리는 살갗 피가 도는 아픔이라도
누군가 앓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어머니였다
— 이지엽, 「신발-닳아지는 것들」전문(『헉!』, 2021)
⑤에서는 형태적으로 4행의 평면적 구성을 보인다. 외형적으로는 4행시인지 사설시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다만, 사설시조 동인지에 수록되었으므로 발신자의 측면에서 그 형태적 소통의 양식을 확인하게 된다. 이 시를 사설시조로 확인하는 순간, 삼장이 가진 의미 결속 양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분할된 중장의 “바닥까지 다 닳아지며 그 무게를 홀로 견딘다 / 코 막고 쓸리는 살갗 피가 도는 아픔이라도”의 도치 구문을 헤아리지 않고는,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이 시에 나타나는 환유물인 “신발”은 어머니의 신체 상징이다. 종장에서 “누군가 앓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어머니였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머니가 보이는 고통은 공여의 생을 살아오면서 ‘닳아진’ 신체적인 증상이며, 이러한 손상된 몸의 현상은 “신발”이라는 빼어난 환유적 장치를 통과하면서 심화된 의미를 실현하게 된다.
다음 작품은 원형적이며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다. 삶과 죽음의 길은 종교적으로 체득할 수 있다. 이때 민속적 원형은 샤머니즘의 세계를 떠돌게 된다.
⑥
물속 길을 떠돌던 퉁퉁 부은 꿈이었다,
몸이 아픈 여자가 물 밑에서 떠올랐다, 그 희미한 얼굴에 스민 통증의 문을 열고, 마른 기억 들쑤시는 야적된 무덤 곁에서, 손가락이 긴 여자가
안으로 숙어든 혀로
아아 더는, 살리지 마….
— 염창권, 「감추어 놓은 전생 같은 날」 전문(『게 누구냐?』, 2017)
⑥에서 “물속 길”로 상징되는 시공간은 원초적인 의미에서 무의식의 영역이자, 음역을 떠도는 망자들의 저승이다. 한편으로 물질적 상상력에 의하면, 분해된 신체적․정신적 요소들이 우주적 시공간을 떠돌면서 대화를 나누는 상호 소통의 시공간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여자는 거듭 태어나는 존재자이자 자아이다. “손가락이 긴 여자가” 새로 태어나면서 사랑은 연속되지만, 이 연속된 과정에서 ‘떠도는 무기적 물질들’은 재차 합성되어 생명체가 가진 생로병사라는 인과적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이 인과율 속에서 생명체는 스스로 고통을 받고, 구속받는 존재자가 된다. 샤머니즘이라는 원시적 상상력이 현대의 양자론적 상상력과 만나는 지점이다.
⑥에서 중장은 4음보격 3배수의 길이에 1구[1角]가 추가되었으나, 2음보의 중첩을 통하여 율독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아래의 ⑦에서는 음보 단위에 쉼표(,)를 찍어 자연스런 율독에 정지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스톱(stop) 신호는 내용 제시 면에서, 다짐을 받듯 실존의 어떤 상황을 이정표처럼 내세우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⑦
1.
새똥은, 땅에 떨어져 말라붙은 똥이지만,
새의 똥은, 새를 떠나 아직 땅에 닿지 않은, 그러니까 떨어지는 도중의,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그러니까 똥 이전의, 똥이다
새의 몸, 땅의 긴장이 서로 밀고 당기는,
2.
하늘 길을 가던 새가 내갈긴 새의 똥이,
하고많은 세상, 하고 많은 시간 중에 하필이면 내가 가는 길, 내가 모는 차창에 타악 떨어지는 아아, 이 기겁할 인연이라니
순간에 벙그는 매화포, 놀라워라, 새똥 꽃!
— 박기섭, 「새똥 꽃」 전문(『구름 아래를 걷다』, 2020)
⑦은 두 편의 사설시조 연작이 번호를 붙여 연속된다. ‘1’에서는 “똥”이 하늘과 땅 사이의 찰나적 ‘공중’에 못 박힌 채로 의미화된다. 그러니까 현재적 상태는 “새의 몸, 땅의 긴장이 서로 밀고 당기는,” 똥 이전의 생명체적 속성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그것을 “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에 비해, ‘2’는 순간의 점묘에 해당한다. 그 찰나적 공중에서 현존으로 이행하는 점묘는 “순간에 벙그는 매화포, 놀라워라, 새똥 꽃!”으로 비유된다. 물론 그 은유적 자질은 외적 형상을 통해 착안한 것이겠지만, 그 “인연”을 통해 내 몸 또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찰나적 존재임을 함축하면서 중층적인 의미의 겹을 생성한다. 이때, “새똥 꽃”은 결국 시적 주체가 피우고 있는 ‘생의 꽃’을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생의 유한성에 대한 탐사 끝에 만나게 되는 구경(究竟)에는, 소진되는 죽음의 형식이 있다. 실존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열려 있다. 죽음은 갑자기 다가오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실존이 점차 꺼져 들면서, 조금씩 소진되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실존을 향해 켜 둔 촛불과도 같은 상태에 있다.
⑧
꼿꼿이 서서 죽는 꽃 한 송이 피어 있다
어둠을 향해 던질 돌 대신 꽃을 들고 어둠을 한 발짝씩 지우고 선 꽃을 들고 어둠을 뿌리 삼고 단애 삼고 하늘로 삼은 꽃을 들고
단 일 획 생사를 긋는 저 치명의 눈부심
— 박권숙, 「촛불」 전문(『개뿔』, 2018)
⑧에서 선언적으로, “꼿꼿이 서서 죽는 꽃 한 송이 피어 있다”고 했을 때, 이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며, 죽음의 발화 형식이다. 한편으로는 유한성에 대한 도전이자 응시이다. 이 시의 중장에서 한 음보[半角]의 반복이 세 차례 반복된다. 반복률의 실현이다. 사설시조가 최소 단위를 지향할 때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물론 이 시는 반각으로 구성된 세 차례의 반복이 모두 4음보의 배행에 통합되어 있다.
이 시에서 꽃이 피어 있는 시공간적인 배경은 “어둠”이다. 이 어둠을 배경으로 하여 생명체인 꽃이 피어 있다. 그 생명체인 ‘꽃의 빛’이 실존의 시간이다. “단 일 획 생사를 긋는” 순간적인 생명이다. 그 꽃이 켜 든 빛은 “눈부심”이지만, 그 자체로서 죽음을 켜 들었으니 “치명”적이다.
이상으로 네 편의 시를 통해서, 사설시조의 현대적 접점을 모색하여 보았다. 박철희의 언급대로, 시사적인 논평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실존의 절제된 심화 장치로서 사설시조의 반(半)정형적, 내적 긴장 장치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현대의 사설시조 창작 양상은 다음 두 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설시조가 갖는 확장된 사설은 ‘함께 읽기로서의 독자’를 불러들이는 방식이다. 시적 주체에 대한 대상화의 관점은 현대시조 일반의 창작론에 해당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윤금초의 「들깨방정 참깨방정」을 대표적으로 거론하였다.
둘째, ‘개인적 서정과 실존의 추구’를 사설시조의 현대적 가능태로 규정하였다. 이때 사설시조는 ‘어떻게 이들을 극화하며(절제된 정형률), 또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倍行에 의한 강조법)’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사설시조의 형식이 갖는 현대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현대인의 정신과 정서적 질감을 반(半)정형적 율격의 수준에서 응축, 심화시킬 수 있다.
2) 형식적인 견딤을 통해 보다 심화된 수준의 서정적 상태 진입할 수 있다.
3) 평시조에 비해 길이가 늘어난 만큼, 은유나 환유, 상징 등을 거치면서 대상 인식에 있어 심화, 구체화, 속성의 나열 등이 가능해진다.
* 사설시조의 형식 개념을 비롯하여 배행과 관련된 음악적 양상은, 필자의 다음 글 각주 부분에 정리된 내용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 염창권, 「갈래의 양식은 어떻게 재형성되는가」, 『시조학논총』 59집.

염창권 |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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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VOL.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