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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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효숙 

 

 

 

 

현기증 나는 말

     

● 김효숙

 

 

 

 

    1. 환(幻)과 공포

       

  계엄 사태 이후 거센 환(幻)의 공포와 현기증에 시달렸다. 현장의 위험한 실행들이 미디어와 실시간 결합하여 송출되었는데도 이 사태가 끝내 계몽이어야 했던 주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거듭 강변했다. 그는 사실을 조작하여 환의 기억을 주입하면서 실제를 매끈한 영상으로 변환하려 애썼다. 기표 뿐인 말들이 범람하면서 그간 통용되어 온 언어 사전의 보편적 의미마저 폐기해야 할 상황을 맞은 것 같았다. 가상화한 말들 속에서 숨을 쉬고, 불면에 시달리고, 일상이 된 불안 속에서도 문학은 다시 죽음 만큼 강렬하게 진실을 말해야 할 때를 맞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의 작품 중 「비장한 죽음」이라는 산문시가 있다. 이 시로부터 지금-여기의 가상 같은 현상이 대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고 싶다. 이 시는 캄캄한 심연과 황홀한 도취 상태를 구분할 수 없는 곳으로 나를 이끈다. 심연까지 가닿아 삶을 이야기하는 구원자로서의 이 예술 형식은 매우 어지럽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무언극 배우도, 그의 연기에 도취한 국왕도 현기증 나는 심연에 빠져 있다. 사정은 이렇다. 왕에 관하여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게 허용한다면 준엄한 역사가가 “괴물”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을 법한 국왕이 있다. 그는 감수성이 과도한 예술가이고 감식가이며 쾌락 주의자다. 무관심한 것이 있다면 인간과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도덕들이다. 그래서이겠지만 그가 기울인 기괴한 노력은 매사에 잔인성을 띤다. 그는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체포하여 사형을 기획한다. 그중에는 귀족들과 함께 역모에 가담한 그의 친구인 광대 팡시울도 있다. 웬일인지 왕이 은사를 베풀어 그를 무대에 올려 무언극을 하게 하지만 그는 도중에 죽는다.

  늙은 배우인 그는 죽음의 공포에 희극으로 맞섰으나,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건 눈에 보이는 위력이 아니다. 왕이 시동에게 건넨 귀엣말에 이어, 어느 관중의 휘파람 소리 때문에 집중력을 잃으면서 무대 위에 쓰러진다. 이 죽음은 상징적이다. 저 휘파람은 독이라고도, 칼이라고도, 화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관의 차이일 수도, 심지어 그것이 무엇이든 배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알레고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상적으로 읽으면, 삶과 예술을 등가로 아는 배우에게는 자신의 무언극에 균열을 가하는 지극히 사소한 움직임과 소리마저 큰 위협일 수 있다. 희극 무대에서 벌어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포위된 죽음 현상을 통하여 보들레르는 “예술의 도취는 다른 어느 도취보다도 더 심연의 공포를 가리기에 알맞다”고 쓴다.

  배우는 죽음 앞에서도 삶을 연기하며 신비한 예술적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러나 쾌락주의자인 왕은 살아 움직이는 배우의 전능해 보일 만큼의 관중 지배력을 질투한다. 불행하게도 국민에게 “선견지명이 없는 섭리”로 임한 왕, 이것이 “국가보다도 더 큰 재능”1)이라고 풍자하는 시에서 우리는 왕의 우매한 쾌락주의가 국가는 물론이고 모든 이의 생명 위에 군림하는 위험성을 본다. 삶이 곧 예술인 친구의 예술 행위에 도취와 공감을 거부하며 질투한 자. 심연의 공포에 맞선 예술 행위를 얇은 쾌락주의로 감상하며 예술가를 잔인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자. 문학은 그를 괴물이라 부른다.

      

   2. 자기반성 없는 계몽과 시대의 우울

             

  위의 왕 같은 우두머리의 전능은 계몽의 전권을 휘두르는 데서 표면화한다. 우두머리를 계몽하는 자는 그에게 곧장 파면되거나 체포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타자 계몽은 언제나 자기 계몽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우두머리의 계몽은 아랫사람에게 잘 먹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몽을 대체로 과소평가하게 된다.2) 정작 계몽의 객체여야 할 자가 계몽의 주체로 나서기 때문에 계몽에 완벽하게 도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계몽의 말은 표면에서 겉돌았으므로 지금-여기의 시민은 피상성과 감상성에 대항했다. 계몽 주체는 인식의 순수성인 양 계몽을 앞세울 뿐이었고 문제를 해결하는 보편적 실천성과 계몽을 분리했다. 하여 계몽은 계몽대로 현실과 유리된 채 부유하고, 사회는 사회대로 극심한 혼란 속에서 퇴행 일로에 놓였다. 자기반성에 무지한 계몽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 시기를 지나왔으나 그 잔상은 아직 말끔히 걷히지 않았다.

  계몽(the enlightenment)은 빛(light)의 파장을 함유한 어휘다. 계몽 철학자들은 이 세계가 신의 말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매개하는 신의 말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강조한 지성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탈마법을 위한 이성적 사유를 말할 때도 주체의 미성숙과 우매성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했다. 파시즘이 계몽을 퇴행시킨다고 보았던 이 비판 철학자들의 우울처럼 우리에게도 지난 계절은 우울한 시간이었다. 시대가 요구한 것은, 비판 없이 계몽에 이끌린다면 파시즘의 야만성에 합의하는 것이라는 반성의 자세였다. 이성에 대한 신뢰, 더불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말해야 할 계몽 주체가 도리어 선동하는 말로 인간의 고유성을 파탄 내는 일에 가담 중이었던 것이다. 자기 파괴로부터 타자 파괴까지로 이어지는 계몽 주체의 요청에서 계몽의 기본 요건인 자기반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근대의 계몽에서 얻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베르너 슈나이더스(Werner Schneiders, 1932~2021) 전언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계몽의 실패도 도리어 계몽의 성공일 수 있다면서 우리를 긴장시킨다. 인권과 관용에 대한 요구 같은 업적들이 위험에 처한 듯하면서도 자명한 것이 된 경우를 든다. 그 요청들 중 일부가 법률 개혁에 의해 국가 질서에 반영되었고, 당대인에게 이성적인 심성과 논증적 비판 능력을 키워 주었으며, 이런 점이 현대인의 일상적 요구사항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다.(161쪽) 그의 논지대로라면 우리는 한 뼘의 유연성을 더 보유해야 한다. 완벽하지 못한 법률의 빈틈을 메워 가는 계몽의 역능 제고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 철학자의 어법대로라면 계몽 비판조차 계몽에 대한 계몽인 점을 부정하지 못한다.

 

사람이 죽으면 백 년 뒤쯤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잘 보존된 건물과 새로 지어지는 건물 사이

사랑과 폭력이 놓여 있고

 

몇 년째 운행 시간이 그대로인 버스는

너를 태우고 한참을 달렸는데

 

아직도 강의실에서는

백 년 전의 자유를 가르친다

 

이미 누려본 적 있듯 낯설지 않았다

 

이를테면

참을성이 많은 자유

길러지는 자유

은밀히 베껴지는 자유

어둠을 오가는 자유

자주 넘어지는 자유

완두콩처럼 한집에 사는 자유

피아식별에 능숙한 자유

 

유구하게 부족했습니다

상투적으로 가졌습니다

 

아직도 강의실에서는

보기에는 좋은 것들을 가르친다

 

사랑이나 폭력

자유라고 해도 좋은 것들은

배우고 난 뒤에도 더 배울 수 있다

 

원한다면 나는 너에게

그것들을 가르쳐줄 수도 있고

조금 기울어진 채로 둘 수도 있다

 

새삼 이야기의 관점도 기울어진 것이라서

지긋지긋하게 돌아오는 것은

 

형식과 내용

사실과 거짓

질문과 대답

진심과 최선

……

 

사람

 

끝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손을 높이 들면

 

멀리서 잘 보이고

버스는 서고

발언권을 얻고

조금 주춤하고

 

아직도 강의실에서는

시를 가르친다

 

간지러웠습니다

지루하진 않았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시인은

훨씬 전에 죽었는데

 

일찍 태어나서 새로운 시 쓰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가 쓴 줄 모르고 몸부림치며 읽고 있을까

 

그리고 불현듯 알게 되겠지

 

백 년 전에는 사람의 자유가 시의 자유가 되었으나

백 년 후에는 자유로워진 시가 사람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백 년 뒤의 사람은 흉내내지 못하게 살고 싶다

 

원한다면 나는 너에게

그것들을 가르쳐줄 수도 있고

내가 너에게 배울 수도 있다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 실수라고 여기면서

― 김진선, 「유산」(《문학동네》, 2025.봄)

 

  백 년 만에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정하에 그가 누리는 ‘자유’를 ‘유산’이라는 명목으로 사유하는 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자유는 누리는 것이기보다 상투적으로 겪는 것이고, 연면히 이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가치에 묶여 있다. 이전의 가치에 침윤된 강의실의 가르침은 토대 자체가 애당초 기울어진 것이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과감하게 보폭을 맞추지 못한다. 간지럽고 오글거리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시가 교육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지금도 여전히 강의 시간에 호출된다. 백 년 전에는 사람의 자유와 시의 자유가 같은 범주의 실행이었으나, 지금은 탈억압과 탈압제를 꾀하는 시인의 언어만이 자유를 주관한다. 무엇이든 말해 보리라는 시도 속에서 자유로운 시가 태어나기 때문에 이후의 시는 이전의 자유를 흉내 내기 어렵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실수”라는 감각만이 시언어의 완전한 자유를 주문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 편의 시는 혁명과도 같다. 혁명은 그간에 상식이었던 언어를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말로 대체한다. 이후에 통용될 언어가 새로운 상식이 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지배적 언어가 이때 새로이 등장한다. 혁명 이전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는 자들은 이 말의 새로움과 거짓말을 일치시키지만, 혁명은 새로운 말의 진실을 부단히 주입하고 선포한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한 편의 시도 혁명일 수가 있다. 시는 이전의 말을 마지막으로 새롭고 낯선 말을 내뱉는 다.

  반면에 나치의 경우를 보면, 정치 언어란 것은 역사상 위대한 혁명 시기의 용어를 복제하여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계몽 전략이었다. 지금-여기의 계몽 주체도 이와 유사하게 민주주의·자유 등을 시뮬라크르한 용어를 유포하면서 이전 시대 말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전유했다. 용기 있는 시민의 투쟁과 쟁취의 결과인 자유에 대한 식별력을 흐리면서 맹목성을 주문했다. 그 언어에는 자신이 속한 구조 안에서 약속된 것을 수호하려는 법칙이 가동하고 있었다. 반면에 시는, 시적 진실을 환영으로 암시한다 할지라도 세간의 표준적인 말이나 계몽을 시뮬라크르하지 않는다. 시적 진실이 가상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는 내용이 있을 때라도 시인의 상상력에 자기기만은 없다.

  이 시대 계몽의 본질을 보면 메타 계몽이다. 자기반성이 선결되지 않는 계몽에 대한 계몽이다. 자기의 무지몽매부터 반성하라는 계몽의 요청은 어느 시대에나 요구된다. 계몽이 자기를 간과한 채 타자를 향할 때는 파시즘으로 에너지가 몰릴 위험이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 다시 계몽의 자기 고발 정신을 스스로 환기하면서 계몽의 시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계몽의 완성도 자신 자신으로의 회귀여야 한다고 성찰한다. 김진선 시인이 쓴 것처럼 한쪽의 지배력이 우세한 가르침이 아니라 “가르쳐줄 수도 있고 / 내가 너에게 배울 수도 있”는 그런 것, 이처럼 상호 교환이 가능한 가르침이야말로 시대의 우울을 내면화한 모든 ‘나’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여기에 예외를 만들며 폭주했던 건 이기적인 인권주의와 법의 사유화가 결합한 계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보편적이지 않은 인권의 특수화 작업에 가담한다면 악을 포식한 자의 기형적인 몸짓일 것임이 자명하다. 계몽은 급기야 이렇게 다시 발생하여 또 다른 계몽을 낳는다. 계몽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틀리지도 나쁘지도 않다.

       

   3. 아니러니스트의 언어

  

  이제 더 이상 시 쓰기를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인이 많아졌다. 변화의 급물살 속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하면서, 오직 자신에게만 해로운 단식을 하면서 투쟁을 이어 올 때 시인은 시 바깥에서 수행 언어의 주체여야 했다. 시 바깥이란, 한 시대의 소용돌이와 급류가 휩쓰는 장소로서, 현실 언어만이 생명력을 지니게 되어 시를 잠시 멀리 보내야 했던 곳이다. 그 와중에도 시인은 “유죄를 무죄로 만드는 기술, 실천적 이성을 속이고 양심을 침묵하게 하는 용서할 수 없는 수사적 이성의 술책”3)을 극단화하는 정치 언어와 달리 무해한 시언어를 절실히 원했다. 이성 정치의 언어를 신뢰하여 시를 허황한 말이라고 핍박한 플라톤의 후예라면, 막연히 아름답고 불투명하기만 한 시로는 이 세계의 진실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를 자명한 언어로 바꾸면 너무나 뻔한 말이 되고 만다. 진실의 이면에 있는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이나 그 형상을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최소한의 시언어로는 암시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쌀이 소금이라고 합니다

외국어는 이해할 수 없다고 중얼거린다 한국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니 다시 중얼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발음이 가득한 거리를 거닐 때

귓속에서 삼림(森林)이 자란다

그들이 혼자 혹은 서로 제 잎들을 비비며 바람을 휘젓는다

가사가 들리는 노래는 두려워요

누가 들으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여기는 시가 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는 긍정입니까

나무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돌바닥을 걸어 돌로 된 집으로 들어간다

못 알아듣는 말은 모두 가사 없는 음악이라고 중얼거린다

여기에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 빨갱이라고 소리 지르는 노인이 없고

맥주잔을 열매처럼 매달고 나무들이 있다

여기서는 Conde가 백작이라고 합니다

대성당과 오렌지 나무를 종소리가 쓸어준다

여기에는 선거가 조작이라고 외치는 백작들이 없다

없는 것이 없이 있어서

쓸어 담기듯 성당 입구로 빨려 들어가면

살리다가 보인다

정복자의 초상과 정복자의 신들이 거대하다

SALIDA는 출구

출구를 향해 나가면 다른 입구에 도착하고

열심히 살다 보면 또 여기에 올 수 있겠지

열심히 살면 죽음에 가까워지는데

출구와 입구 사이에 비둘기들이 늘어서 있다

그래, 비둘기

출구와 입구 사이에 링이 있다.

― 김건영, 「살리다」(《현대문학》, 2025.3)

 

  “살리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 빨갱이라고 소리 지르는 노인”의 본거지와는 다른 아토포스다. 쌀이 아닌 소금이 주식이며, 이 나라 말로 Conde라 발음하는 백작이 살고, 열매 대신 맥주잔을 매단 나무들이 서 있거나 걸어다닌다. 성당이 두 나라를 연결하고, SALIDA는 살리다의 출구다. 살리다는 성당 입구에서 보일 만큼 지척인데다, 가운데가 텅 빈 링이 양쪽의 경계 역할을 한다. 이 경계에서 비둘기는 어떤 상징으로 존재한다. 성당이 정복자를 정당화하면서 ‘신’의 위상을 거대하게 만든 성소인 점과 다르게, 살리다에는 방부제 같은 소금, 세속의 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 언어인 시, 꼰대라고 조롱당할 법한 자가 있으나 그는 “선거가 조작이라고 외치”지 않는 Conde 백작이다.

  유추해 보건대 살리다에서는 신의 말 이후 줄곧 언어의 신성을 긍정해 왔다. 부패하지 않은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어서 존재자 간 질문과 대답을 시적으로 할 수 있도록 용인한다. 정처 잃은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꾸해 주는 시의 나라. 시언어를 긍정하는 귀들이 어떤 경우에도 열려 있는 나라. 시인은 그곳을 ‘살리다’라 부른다. 하여 살리다는 죽어가는 언어를 살려낸다는 말로도, 의지의 표현인 ‘살리라’에 더 힘을 주어 자신에게 다져 넣는 말로도 들린다. 하지만 열심히 산 자만이 올 수 있는 곳인 것을 보면 이 나라는 역설로서만 설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열심히 사는 일은 곧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임을 그는 줄곧 몸소 증명해 왔다. 살리다에 다시 오려면 그는 필경 죽음 같은 삶을 다시 살아야 하고, 시로 대답해 주는 목소리라곤 부재하는 세상에서 부패한 언어만을 상대해야 한다. 밥을 위해 하루살이처럼 살면서 때때로 색깔론을 뒤집어쓴 채 밥도 먹어야 한다.

  어느 날 황급히 살리다로 휩쓸려 온 화자를 아이러니스트(ironist)라고 불러 보자. 리처드 로티가 정의한 대로라면 아이러니스트는 상식이 된 어휘를 거역하는 사람이다. 상식을 굳히는 언어가 그에게 마지막 언어로 채용되면 그것은 고스란히 상투성으로 굳어진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언어가 마지막 언어인 점을 부단히 의심한다.4) 듣고 읽은 어휘들에 의하여 각인되면서 그것을 사용해 온 그이기에 현재 사용 중인 언어가 마지막 언어로 굳어진다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일에 불구가 되고 만다. 위의 시에서 꼰대를 꼰대라고 쓰지 않은 건 일부분의 사회적 권유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자기 요구가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상투어가 된 꼰대가 그릇된 표현은 아닌지를 의심하고, 자신이 이 말을 사용한다면 그릇된 인간이 아닌지도 염려한다. 그러나 그는 그릇된 것의 규준을 제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래야 할 필요를 알지도 못한다. 사회에서 공유하는 언어 앞에서 눈과 귀가 멀어 버린 상식적인 사람들을 떠나 언제든 살리다로 가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 해도 그의 언어가 바른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꼰대와 낡은 사람을 일치시키는 언어생활을 물리고 Conde라고 쓰는 데서 남다른 기대가 읽힌다. 그는 언어에 변화를 주며 재서술의 가능성을 열어나가는 시인이다. 낡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꼰대가 의심의 여지 없이 꼰대라 할지라도 그를 Conde라 불러 주면서 그가 시시한 사람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그를 구출한다. 낡은 사람은 낡은 어휘로 하여 낡아지고, 새 사람은 새로운 어휘로 하여 새로워진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마도 시인은 어느 날 불시에 다시 살리다로 가게 될 것이다. 밥을 벌기 위한 삶이 언어를 부패시킬 때, 가로수에 매달린 열매가 그의 갈증 해소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 때, 더는 뻔한 말들을 그의 귀가 접수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가 그때다. 일용할 양식을 소금으로 대체하고, 가로수에서 맥주를 따서 마시며 거리를 걷고,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낯설고 어려운 말이 음악으로 변환되어 들리는 그곳으로 황급히 빨려 들어갈 것이다. 썩어 문드러져 버린 말을 간수하는 헛된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낡은 생활을 지속할 이유가 없어졌을 때 살리다에서 다시금 ‘살리다’라고 의지를 다질 것이다. 살리다는 “시가 네, 라고” 대답하는 ‘시’의 나라. 뻔하지 않은 표현으로 자기만의 말을 만들며 심미적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 마지막 말로 굳어진 뻔한 상식을 고집하지 않는 자를 언제든 환영하는 곳이다.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자. ‘시인은 가난하다’라는 관념이 상투어로 굳어진 탓일까. “부잣집 아이”라 불리는 쉰 넘은 시인이 있는데 우리의 인식 속에서 ‘부자’와 ‘시인’이라는 조합은 겉돌기만 한다. 물질을 기준으로 부자를 판명할 때는 그와 시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 시는 그 어떤 것 위에도 군림하지 않지만, 물질보다 더 높아지려면 물질의 탑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이겠지만 그가 쓰는 시도 물화한 욕망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를 읽어 내려갈수록 이러한 재단을 방해하는 일들이 속속 발생한다.

 

우리 집 서재는 빛이 좋아 어머니는 단감을 익히고 시래기를 말리고 책상 위엔 옥스퍼드 사전과 헤밍웨이가 놓여 있었지 나를 짝사랑했던 후배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말했지 오빠 실망이에요 시인이 이리도 화환이 많다니 그러게 말이다 부잣집 아이가 시는 무슨 시 남 이야기 아니고 오빠 이야기예요 그래 이제 시는 그만 밤에 잠도 안 자고 건강 해친다 쉰 넘은 아들을 힐난하는 여든 넘은 어머니는 올 성탄에도 포인세티아를 선물 받아 소녀처럼 행복했지 이 이파리는 어떻게 빨간색을 얻었을까요 빨가니까 빨갛지 이유가 어딨어 배시시 웃는 어머니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말했지 왜 그리 친구가 없니 꽃만 많고 사람이 없네 그러게 말이에요 부잣집 아이가 시를 쓰면 동창들은 멀어지고 시인들은 외면하네요 네 이야기가 아니라 네 애비 이야기다 우리 집 처마 볕이 좋아 제비가 둥지를 틀고 식모 이모는 마당에 떨어진 새똥을 닦으면서 잡것들아 내년엔 오지 마라 욕을 했지 다음 해 이모도 안 오고 제비도 안 오고 생각해보면 몰락은 그렇게 시작했지 나는 궁금하네 이 삶이 축복이라면 축복은 언제 빛을 거두는가 우리 집 안방은 빛이 좋아 어머니는 참깨 들깨 말리고 TV 보며 스웨덴 실로 뜨개질을 하지 강아지가 밟으면 안 된다 강아지 못 들어오게 해라 그러게 말이에요 이 말썽꾸러기 강아지 말 좀 들어라 사룟값이 얼만데 나는 궁금하네 나는 왜 시를 쓰나 왜 이토록 달콤한 인생에 불행의 알갱이를 흩뿌리나 이 삶이 저주라면 저주는 언제 그림자를 거두는가 강아지 또 돌아왔다 이놈의 강아지 말썽꾸러기 강아지 이리 오렴 내가 안아줄게 나랑 산책 가자

― 심보선, 「부잣집 아이」(《문학과사회》, 2025.봄)

 

  문제의 지점은 부잣집 아이가 시를 쓴다는 것이고, 시인과 그의 후배, 어머니의 대화도 줄곧 시적 사건과 연계된다. 주어가 빠진 어머니의 말에서 그 당사자를 자신으로 착각하고서 시인이 뱉어 버린 이 말, “그러게요, 부잣집 아이가 시를 쓰면 동창들은 멀어지고 시인들은 외면하네요”는 이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화만 보내 온 아버지의 지인들처럼 시인의 친구들도 그러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한때 식모를 두었고, 채광 좋은 집에서 산다는 정보 외에 별다른 것이 없는 집을 부잣집이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남과 현격히 다른 부자의 표징이 없는데도 ‘부잣집’과 ‘시인’은 얽혀 있다. 옥스퍼드 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던 헤밍웨이의 작품이 서재 위 책상에 놓여 있는 장면만 하더라도 그 주인이 시인일 수는 있어도 부자와 직접 관련은 없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하는 대신 꽃을 보내 온 지인들이 있으나 그에게 남은 것은 꽃이고, 커진 것은 외로움이다. 볕이 잘 들어 집안의 분위기가 밝은 덕분에 어머니는 단감·참깨·들깨를 잘 말릴 수 있다. 그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이라곤 서재의 책들과 꽃에 불과하며, 비물질이면서도 어머니에게는 물질만큼 소중한 빛과 볕이 전부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엔 “꽃만 많고 사람이 없”고, 집안에는 책만 많고 사람이 없으며, 볕만 많고 친구가 없다. 그런 시인이 부잣집 아이라는 아이러니에서 종내 걷히지 않는 것은 그의 외로움이다.

  시인은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보다 홀로 있음에 능숙한 자, 상식이 된 말을 버리고 자신의 말을 찾아 나선 자다. 삶을 요약하되 타자의 말이 아닌 것으로 채우려 하기 때문에 관계들 간에 오가는 상투어를 물리면서 시를 쓴다. 상식을 깨트리기 위한 가장 빠른 접근은 사람과의 대화이기보다 가까이 있는 책이라고 믿으며, 책을 물성을 지닌 것으로 숭앙하며 이것을 쌓아놓기만 하는 물질의 부자도 아니다. 사람보다 책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더 익숙한 그에게 서재는 줄곧 단절 없는 대화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가 부자라는 말은,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를 앞세우지 않는 책 부자, 빛의 부자, 그리고 자신의 내·외적 변화를 떠맡아 표현해 줄 최적의 언어를 찾아 나가는 부자라고 풀이해 볼 수 있다.

 

 

                                            

   1)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황현산 역, 『파리의 우울』, ㈜문학동네, 2015(1판 4쇄).

   2) 베르너 슈나이더스, 오창환 역, 『계몽은 계속된다』, 그린비출판사, 2024, 162쪽.

   3) 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이숲, 2019(1판 2쇄), 21쪽.

   4) 리처드 로티, 김동식·이유선 역,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민음사, 1996, 146~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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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그 외 공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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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호(VOL.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