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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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시인이 할 수 있는 것
● 김효숙
1. 절박한 은유
이 혹한의 시대에 시인은 과연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 이런 정황에 시민들이 방송 인터뷰에 응하면서 시적 서정을 구사하는 장면이 여럿 송출되었다. 시위 현장에는 낭만인 양 눈이 내려 쌓이고, 은박 담요를 둘러쓴 시민들은 제자리를 결연히 지키는 “우주 전사”의 모습으로 동심을 자극한다. 동심을 자극하다니! 엄혹한 시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지극히 박약한 수사임이 분명하다. 극한의 추위도 막아낸다는 은박 “우주 담요(space blanket)1)”를 머리끝까지 두른 시민들. 이 몸-주체들은 ‘K-팝 팬덤’ · ‘키세스 시위대’ · ‘돌부처 시위대’ 등의 은유로 시민의 공감을 끌어냈다. 어느 시민은 이들에게서 ‘키세스 위에 슈가 파우더가 뿌려지는 그런 광경’을 보았다는 시적인 수사로 비폭력 시위에도 불구하고 견디는 자의 고통이 필연인 광경을 타전한다.
광장에서는 무수한 ‘나’들이 연결점을 만들면서 집한 단위인 ‘우리’로 이동했다. 초반의 시위에서는 K-팝 팬덤의 정체성을 지닌 젊은 층 시민의 연대가 돋보였다.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즐거움, 혹한을 녹여 줄 것 같은 달콤한 초콜릿의 미감, 정제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이미지들이 시적인 서정을 발산했으나 그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에게 고통과 안타까움·분노·슬픔 등의 복합 감정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몸으로 시를 쓰는 1020·2030 연대가 마음의 염원으로 끝나지 않을 문화적 항거를 주도하는 신인류처럼 보였다. 이들은 꺼지지 않는 LED 응원봉을 흔들며, 시민을 양극단으로 갈라 세우는 지난 시대 독재의 잔상과 이념의 ‘콘크리트’를 깨고자 했다.
고통을 희망과 기대로 승화하는 자에게 즐거움이란 결코 얄팍한 감정일 수가 없지 않겠는가. 고통의 정점에서 비로소 기쁨의 본질을 알게 되는 자만이 쉬이 종결되지 않을 문화적 항거를 이어간다. 구호 외치기와 자리 지키기에 머물지 않고 강강술래 군무를 추고, 큰북의 쿵쿵따 삼박자에 맞춰 K-팝 팬덤의 정체성으로 응원봉을 흔든다. 혹한을 견디는 시위대 사이를 작은 북을 두드리며 뛰어다니고, 거리를 오가다 만난 현악 연주단의 애국가에 맞추어 한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노래와 춤의 활동을 공유하는 팬덤의 문화 감각으로 평화 시위에 참여한 젊은 층에게 기성세대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응원을 보냈다.
음악으로 연대하고 친밀해지는 인간의 정동을 탐구한 영국의 음악사회학자 데이비드 헤즈먼드핼시(David Hesmondhalgh)는 이렇게 묻는다. 서먹한 타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종종 피상적인 공감이거나, 감상적·자기 편향적 감정의 치우침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음악은 우리의 사회성을 이끌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연대·공동체·공통성과 관련될 수 있을까?2) 이 질문으로부터 지극히 일반적인 답부터 구해 보면, 음악이 개인 정서에 깊숙이 관여하여 행위까지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음악이 무수한 다양체들 간 연결점이 되어 주면서 이 시대의 저항하는 시민은 음악 향유 집단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연대로 나아간다.
그러나 음악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명제는 평범한 만큼 한계도 지닌다. 문제가 발생할 때만 개인이 이동하여 음악으로 연합하는 방식이 매우 우발적이고 한시적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음악은 개인이 공동체의 내부가 되면서 어김없이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하고, 공통의 관심과 기대를 결집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마법을 지녔다. 매체인 음악은, 몸-주체인 개개인에게 감정적·신체적 경험을 공유하게 하면서 “사회성과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향상시킨다.” 헤즈먼드핼시는 이런 점을 요약하여 공동체에 참여한 개인을 움직이는 “음악의 잠재적 힘”(113쪽)을 강조한다.
세속인의 감수성으로는 값비싼 예술은 사회적 저항 능력을 지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적 연대가 시위로 이어지는 일은 대개 값비싼 예술의 향유 층과 별개의 문화계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클래식을 옹호하면서 재즈 같은 대중음악을 주변부 음악으로 격하한 독일의 사회학자 테오도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 향유층을 계급으로 구분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처럼 고급과 저급의 경계를 분명히 그은 경우를 논외로 쳐야만 음악과 사회적 연대 간 관련성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흩어져 있는 개인을 결집시키는 축제의 힘, 그리고 이때의 미적 경험이 저항하는 시민의 연대로 이어지는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곳에 시민이 있고 대중음악도 있다.
2. 써야 할 시, 쓰고 싶은 시
“써야 할”3) 시는 쓰지 않겠노라 했던 시인이 그 시를 썼다면 어떤 당위성이 있었을 테다. 목적을 위한 도구적 언어를 그가 ‘써야 할’ 시로 알고 있다면 ‘쓰고 싶은’ 시는 써야 할 이유나 명분을 앞세우지 않는 시일 것이다. 그런데도 써야 할 시가 생겼다면 지금 이 시대가 시인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꽃 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 그림쟁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시인의 마음에서 투쟁할 때 두 번째 경우가 시를 쓰게 만든다는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언술처럼, 김희정 시인도 자연 서정보다는 인간의 투쟁적 언행에 더 마음이 간다. 감동보다 경악 쪽으로 더 기울어진 브레히트를 보건대 그는 자연과의 동일시를 깨고 나와 세계와 대결하는 사람을 만날 때 시를 쓰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진다. 이때 ‘써야 할’ 시가 아닌 ‘쓰고 싶은 시’가 태어나는 것이리라.
브레히트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쓴 시기는 1939년이다. 그 후 10년 뒤(1949)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며 브레히트의 사유를 일정 부분 이어받았다. 브레히트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가 불가능해진 시대의 시를 말했고, 아도르노는 시 쓰기가 불가능한 요인 중에 아우슈비츠가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의미의 말을 했다.4) 시로는 쓸 수 없는 것이 많아진 시대의 도래를 알린 이가 아도르노다. 브레히트로부터 아도르노에게로 전수된 시대정신이 동일시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 건 여기에 연유한다.
10대, 20대, 30대가 그들이다
촛불 대신 콘서트 응원 도구가 등장했다
K-팝 K-문화를 직접 들고 나와
위기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놓았다
상식이 없는 사람들을
말로 꾸짖지 않았다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목소리로
꾸며나갔다
40대 50대 60대에게는 낯선 노래들이
―김희정, 「내란 24」 부분
시위 현장은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한다
해외 언론은 K-시위라고 감동했다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가벼움을 무거움으로
이동시키는 힘이
젊은 주권자들 마음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다
―김희정, 「내란 34」 부분
이토록 첨예한 사회 인식의 소유자인 김희정 시인은 마땅히 ‘써야 할’ 시를 ‘쓰고 싶어서’ 쓴 격이 되었다. 말과 시가 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릴 법도 하지만 이 리얼리스트는 시를 써야 한다는 당위성을 굳건히 붙들고 있다. 급작스레 도래한 언어도단의 현실에 자아를 이입할 수 없었을 시인이 그 세계와 동일시를 거부하며 하루하루 진행하는 시민의 항거를 받아썼다. 『K-시민』은 비상계엄 선포일 부터 2차 탄핵 표결까지 열이틀간을 묘파한 기록 시집으로서 초를 다투어 다급하게 펴냈다. 어리석은 시대로부터 동일화를 깨고 나온 시민-시인이 “내란” 연작 34편을 포함한 35편의 시, 여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써낸 산문 1편을 첨부했다. 긴급 타전 방식으로 이 시대의 K-시민에게 전하는 시인의 언어는 결코 일어나선 안 될 폭거에 의해 훼손된 시민의 주권을 환기하는 차원에 있다. 대화적 관계가 생략된 채 발생한 주권 침탈 문제를 조목조목 소급하면서 잃어버린 주권을 찾으려는 시민의 평화 투쟁을 기록한다.
사실을 기록한 현상 중에서 특히 시민의 문화적 저항에 관심이 기운다. 사실을 바탕으로 진술하면서도 시인은 달라진 시대의 문화적 저항을 간과하지 않는다. 김희정 시인은 역사의 흐름에 문화 행위를 얹어 우리가 그간에 잃어버린 것을 일깨운다. 자연에 대항하며 진보하는 문명을 일궈 오는 동안 물질에 포박되어 약화한 시대 정신, 그리고 역사적 삶의 퇴보를 자각하지 못했던 그간의 사정들이 그것이다. 이 폭거가 일상을 강타하기 전에는 그간 우리가 꿈꿔 온 것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물질주의에 기대는 문화 감응력으로 취약하기 짝이 없는 정신을 견지해 오는 동안 역사 정신을 ‘이념’과 같은 궤에 몰아넣어 극단적인 진영 논리를 펴 온 것이다. 문화적 연대가 비폭력 시위로 이어지는 현장을 사실적으로 전하면서도 이 시는 익숙한 방식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K-시민에 의한 K-문화에서 발생한 K-시위가 이 시대의 ‘나’들을 ‘우리’로 이동하게 하는 현장이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한다. “콘서트 응원 도구가 등장”하는 이 시대의 문화적 연대에서 살아나는 정동이 정치 권력을 문제삼는 데로 이어진다.
3.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
개성 넘치는 깃발들이 K-시위에 등장하여 현실의 무게를 덜어낼 것처럼 나부꼈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단독자들이 거리로 나선 이 광경은 이전에 가져 보지 못한 연대감을 자극한다. 이들의 나타남을 타자와의 동맹에 앞서 ‘나’의 고유성을 사회로 확장하는 존재 사건이라 해야 한다. 타자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고 제각기 다른 지형을 만들면서 숱한 다양체들로 이뤄진 최근 사회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으면서도 동맹의 표식이며, 지금의 K-시위를 문화적으로 가능케 하는 작은 단위의 ‘배치’들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행위 언어로 발언하는 일의 능동성을 깃발에 쓴 문구들로 알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이 가동하는 시민사회도 우리는 여전히 목도하고 있다. 진영 논리에 따라 갈라 세워 타자적 존재로 대치하면서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구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은 더욱 극렬해진다. 동조자 의식이 강할수록 타자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유아의 행동심리를 보이면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이 가동한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순혈주의가 반유대 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화 정책은 오로지 동일화만을 목표로 한다. 김상희 시에서 “친구”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계열의 타자다. 그는 ‘나’에게 타자를 향한 “성실”을 부단히 권유한다. 다음 시는 ‘나’의 행위를 주도하는 타자의 영향권에 관하여 말하면서, 현실에 무지한 자가 수동적으로 시위에 참여할 때 잠시 판단을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우리는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혼자 걷는 광화문은 낯선 나라 같다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
그사이 선두에서 걸어가는 친구가 보인다
서둘러도 따라잡히지 않는 친구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붉은 벽돌집이 늘어서 있는 뻔한 장면이 펼쳐진다
성실하게 친구를 찾았다
똑같이 생긴 문을 여러 번 열고 닫고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 긴장은 공포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는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고 있고
무언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너 도대체 어디냐고 같이 걷고 있긴 한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멘 친구가
계단을 내려가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데
그러면 난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어 있다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광화문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어색하게 포함된 채로 걸으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친다
따라 하듯 중얼거리다 걸음을 멈춰도 아무것도 정지되지 않는다
나는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데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고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된다
―김상희, 「잡을 수 없는 것」 전문(《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나’는 늘 친구의 삶에 끼어드는 형식으로 그와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함께 있음의 상태는 불완전하기만 하다. 친구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오지만 둘이 교차하는 공간은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만 마련된다. 그가 선발대라면 ‘나’는 후발대이고, 그는 주체적인 반면 나는 의존적이다. 나는 그의 부름에 따라 그 주변에 존재한다. 거리 행진 시위 대열에서도 뒤처진 채 오직 그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추종자처럼 따라 걷고 있다. 그가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하여 그를 따랐으나 저만치 “선두에서 걸어가는” 그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한다. 모든 일에서 번번이 다 그렇다. 언제나 잡을 수 없는 그를 추종하는 듯한 나에게 그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며, 간신히 소재지를 알아내면 그 즉시 짐을 싸서 떠나기 때문에 곁에 둘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를 친구로 여기는 것일까. “너 도대체 어디냐고” 묻고, “같이 걷고 있긴 한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만으로도 그를 친구로 여기는 것으로 보아 그는 ‘나’에게 일반 범주의 인물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조차 않고, 언제나 내가 먼저 그를 찾아내기 때문에 자신을 “흔하디흔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친구 관계는 돈독하다.
그 내막을 보면 나는 언제나 중간에 끼어들어 친구의 영역에 편입되면서 그의 주변인으로 존재한다. 나에게 없는 소중한 것을 찾으려고 나섰으나 타자는 언제나 나로부터 미끄러지기만 한다. 같은 이치로, 사회로 확장하는 ‘나’가 “행진하는 사람들” 틈에 “어색하게 포함된 채” 걸으면서도 사람들이 외치는 “알 수 없는 구호”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친구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친구라 부르며 그의 부름에 응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타자에 포함된 나의 자리도 언제나 위태롭다.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봐 주는 전화 목소리 덕분에 시위 대열에 휩쓸리지 않고 “걸음을 멈춰도” 보지만 이때에도 ‘나’ 바깥의 세계는 정지하지 않는다. 행진은 행진대로, 구호는 구호대로 타자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진행한다.
타자의 권유로 참여한 시위 현장에서 화자를 강타한 건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겠는 집합행위에 왜 자신이 참여하게 되었는가라는 의심이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았으나 바깥세상은 도도히 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자신은 거기에서 제외된 것처럼 여기는 건 친구와 자신이 연결될 때까지 이 세계가 “영원히 정지된다”고 믿고 있어서다. 교감이 불가능한 친구에게 일방향의 기대를 걸어볼 때처럼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화자가 처음부터 참여하여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그 실재(reality)를 다 알 수는 없다. 따라잡을 수 없는 타자와 “어색하게 포함된 채” 연합하는 시위 행렬의 발생 지점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나’가 친구의 영역에 포함된 경위도 다 알지는 못한다. 타자의 부름으로 가능했을 연합과 연대의 물결 속에서 단지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친구 관계는 성립한다.
행진 대열은 이어지고 있으나 화자는 때때로 “걸음을 멈”춘다. 무관심한 행위로 보일 수 있지만 이 동작은 잠시 판단을 보류하는 의식의 문제인 에포케(epoche)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방법적 의심을 거쳐야만 그간 친구의 행위를 비판 없이 수용해 온 근거 없는 믿음을 점검할 수 있다. 찬반양론을 치열하게 제출하는 시민운동의 장에서 자신의 판단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긴요해진다. 친구에 대한 믿음을 다시 다지기 위하여 자신부터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일은, 친구도 자신도 포기하지 않는 가장 신뢰할 만한 방안일 수 있다. 시대의 소용돌이에 세차게 휩쓸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일, 자기 무지를 벗어나야만 동시대인과 연대할 수 있다는 판단, 이 사태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의 기대와 타자의 의도가 상충하는 지점을 재점검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모두 중요하다. 타자와 나, 그리고 앞으로만 진행하는 이 세계를 제대로 알기 위하여 자기 결의가 필요한 것이다.
4. “불손”을 맞잡고
어리석은 사람의 판단 실수나 잘못을 때때로 자유로 오해하기도 한다. 때문에 오성을 지닌 자를 도리어 격하하는 일도 가끔 일어난다. 오성 속에도 어리석은 요소는 있기 마련이지만, 어떤 사안을 놓고 판단하는 지성의 힘으로 오성은 어리석음과 섞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의 쿠데타는 오성의 범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오성을 도덕의 범주로 본다면 쿠데타는 반지성에 더 가까운 것이다. 실패한 사랑의 쿠데타는 불가능한 사랑의 쿠데타다. 사랑의 쿠데타는 오직 성공함으로써만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유수연의 시는 사랑의 쿠데타는 지성의 범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쓴다. 모자라고 어리석은 것이 더 아름다운 이유를 두 사람이 맞잡은 “불손”에서 일어나 번지는 혁명적 사랑 이야기로 들려준다.
걔랑 산다
온전히 받는 삶과 온전히 주는 삶이 있다기에
걔랑 주고받기로 했다
불 붙으면 다 하고 싶으니까
그중 불손이
내게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될 거로 생각해?
어찌 된다면 어찌 살지 뭐
그렇지, 그렇지
답을 반복한다고 옳은 질문이 되는 건 아니지만
사는 게 아름다운 순간은
엉터리 답을 뱉고 모자란 질문을 찾아 헤매는 것 아니겠니
한 개 정도 풀어줘야 매무새가 괜찮다고
큰 걔를 올려다보면
단추 같은 눈이 잠기지 않았다
얼음에 베인 혀를
자랑은 왜 해
얼음은 사라졌는데
걔는 입으로 옮긴다
소리도 없고 차갑지도 않은 숨결을
사람이 많아도
눈사람도 사람이라고
그걸 패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 아닌 게 많아도
살 수 없을 때까지
걔랑 산다
죽음보다 강한 못은
이미 박아둔 못
걸어두는 것밖에 하지 못해
살아내는 것밖에 하지 못해
뽑아 볼 테면 해보던가
―유수연, 「쿠데타」 전문(《현대시》, 2025년 1월호)
이 쿠데타는 “걔랑 산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살 수 없을 때까지” 살아간다는 과정에 있다. 사랑의 쿠데타가 줄곧 진행 중이라는 얘기다. 살고 죽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삶의 사건인 것, 살아 있을 동안 ‘우리’에게 ‘불’이 옮겨붙은 사건이 사랑의 쿠데타다. 온전히 삶의 문제인 이것은 죽음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보다 강하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모든 쿠데타는 성공하는 쿠데타이고 살기 위한 쿠데타인 반면, 실패한 쿠데타는 죽음의 쿠데타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일으킨 쿠데타는 오직 삶 속에서 삶만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 간 상호작용이 삶을 주고받는 것으로 이뤄진다면서 “불 붙으면 다 하고 싶”은 것이 쿠데타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쿠데타의 중심에 있는 두 사람은 어리석은 자들임이 분명하다. “사는 게 아름다운 순간은 / 엉터리 답을 뱉고 모자란 질문을 찾아 헤매는 것 아니겠”느냐며 어리석음을 자임하는 자만이 사랑의 쿠데타를 일으킨 주동 인물일 수 있다. 예측 불가의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불행이 닥치더라도 그에 맞서 살아갈 방도를 궁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이다. 두 사람에게는 “살아내는” 일만이 지금-여기의 절박한 현실이다. “살 수 없을 때까지”,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도록 걔랑 산다는 명제만이 죽음조차 관통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심어 준다. 하여 그는 사랑에 의해 관통당한 죽음을 “죽음보다 강한 못”의 비유로 말하면서 이 못이 뽑히지 않기를 고대한다. 사랑을 심어 놓아 흔들리지 않는 쿠데타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이 행위는 필경 사랑의 쿠데타가 실패하지 않기를 꾀하는 자에게서 나온다. “뽑아 볼 테면 해보던가”라는 결기 어린 반항은 왠지 지금-여기 쿠데타 주동 인물을 패러디한 것처럼 들린다.
유수연 시인이 쓴 시작 노트에서 “살 수 없을 때까지 살고자 한 일은 나의 혁명이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시로 써서 발표할 시간을 얻지 못할 만큼 급박히 진행되었던 현실 내용을 시작 노트에 기록해 두었을 시인의 떨림이 전해 온다. 계엄군이 국회에 들어오기 전 주에 국회에서 써둔 시라고 밝힌 이 노트가 전하는 ‘혁명’의 이면을 위의 시에서 간파할 수 있다. 혹한에 “불손”이 되어 준 핫팩과 같은 ‘걔’와 손을 맞잡고 혁명 같은 삶의 구간을 건너가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두 사람의 삶의 이유가 사랑의 혁명을 지속하는 일로 이어지기를, 그 힘으로 이 혹한을 잘 견디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불안감과 분노와 불만이 일상을 지그시 누르는 와중에도 젊은 층의 활기에서 ‘즐거운 희망’을 보았다. 도처에서 모여든 시위자들이 거대한 집합 단위를 이루는 현장에서도, 가장 작은 단위의 배치가 가능한 단독자들의 소신 발언에서도 마찬가지로 희망을 읽었다. 하지만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앓았던 내란성 질병은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해서 완치된 것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트라우마가 현시대의 시민을 결집하게 하는 동인인 점을 절감하면서 올 한 해 이어갈 글의 첫 회를 썼다. 문학 바깥의 언어가 문학 안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방식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후에도 작은 부분이나마 할 수 있을 것이다.
1)〈한국의 ‘키세스’ 글로벌 밈 유행, 김상욱 교수 ‘우주 전사’〉 https://www.youtube.com/watch?v=Ckp1V7sct1M. 2025.1.15.
2) 데이비드 헤즈먼드핼시, 최유준 역, 『음악은 왜 중요할까』, 도서출판 오월의봄, 2024, 175쪽.
3) 김희정, 『K-시민』, 어린작가, 2024.12.31. 시인의 산문에서 인용. 시인이 K-시민이라 명명한 대상과 그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시대적 현안에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로 나누어 시민을 한정 짓는 것은 일부 시민의 주권을 누락하거나 배제하는 일일 수 있다. 이 글은 최근의 비상계엄 사태에 반응하는 이 시대 시민-시인의 시를 놓고 이야기한다. 현안에 대한 찬반 문제보다는 최근 시에 반영된 시위가 비폭력 평화 시위, 그리고 이런 점이 문화적 집합행위로 이뤄진 점에 주목한다.
4) 베르톨트 브레히트, 박찬일 역,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민음사, 2018, 121쪽. 역자의 미주에서 인용.

김효숙 I
2017년 《서울신문》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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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호(VOL.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