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025
Extra Form Output
저자 김상미 

   

 

 

 

 가을, 가을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사이를 걷는다

  아름답다

 

  계절다운, 그 계절에 맞는 아름다움은

  무한의 아름다움 같아

  평화롭게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그냥 흘러가게 두면

 

  마치 시 한 편을 읽는 것처럼

  마치 그림 한 점을 보는 것처럼

  마치 자연이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대로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격렬한 인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면 헤집어놓고 싶고

  더 깊게 파고들고 싶고

  모든 것을 밤과 낮, 어둠과 빛으로 쪼개놓고 싶어 한다

 

  아무런 보상도 업적도 바라지 않는

  저 친절한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도!

 

  슬픈 일이다

  자연 앞에서도 정치를, 전쟁을, 중개인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들은

  매일매일 땅과 싸우고, 나무와 싸우고, 바닷물과 싸우고, 공기와 싸우고,

  보이지 않는 정보와 싸운다

 

  그러나 오늘만은, 제발 오늘만은

  어떤 인간도 아니고 싶은 나는

  불타는 단풍나무 사이를 홀로 걸으며

  그에게 묻는다

 

  그 모든 세월 동안 나는 누구였을까?

  시간이 강이라면 나는 꽁꽁 언 얼음으로 산 것은 아닐까?

  내 황량함을 살아내기 위해 인간이 아닌

  책 속으로 음악 속으로 그림 속으로 지구 속으로

  숨죽이며 헤집고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염없이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며

  미로가 되었다가 미궁이 되었다가

  낯선 이가 되었다가 진짜 내가 되었다가

  내게 딱 맞는 단어, 유일한 단어를 찾다가

 

  아직 내 인생의 상점을 닫을 시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귀와 눈, 온몸을 활짝 열고

  마음껏 가을로, 가을 색으로 일광욕을 한다

  아주 먼 길을 떠나 돌아온 이의 사유(思惟)처럼

  자연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를 테니까

 

 

 

 

 

 

 

 

 

 

 


 

신작시_김상미.jpg

김상미  l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가 있음. 〈박인환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 수상.

 

 

 

—

2025년 1월호(VOL.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