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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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공시사 월평
보론. 이야기의 힘, 이야기의 입구
● 박동억
2024년 8월 5일, “전쟁 속 여러 전쟁들”이라는 주제로 제7회 연세한국학포럼이 주최되었다.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강연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참여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 무렵 일본 와세다대학 문화학술원의 교수 오카 마리(岡 真理, 1960 ~ )가 발표를 시작했고, 실시간으로 그의 목소리가 통역되었다. 발표 제목은 「가자의 홀로코스트와 역사 망각」이었다. 메시지는 간명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대등한 ‘분쟁’이나 ‘갈등’이 아니라 일방적인 ‘홀로코스트’ 이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특권화하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전유함으로써, 오카 마리는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또한 오카 마리는 한국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려는 듯,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일제와 식민지 조선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 팔레스타인들이 벌이는 싸움이 조선의 독립운동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전쟁 속 여러 전쟁들’이라는 학회의 주제는 바로 ‘서사’를 둘러싼 전쟁을 뜻한다. 현실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있다. 일단 오카 마리는 약자의 편에서 싸우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약자란 역사적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인간, 그러나 국가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역사적 이야기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전쟁터에 끌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 폭격에 휘말려 죽어가는 사람들, 터전을 잃고 전통이 파괴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터의 군인,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여성과 아이, 그리고 나라를 잃은 난민들. 오카 마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해명할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가-미디어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죽는다. ‘분쟁’ 속에서 그들은 국가를 위한 위대한 헌신자이고, 잔인한 적에 의한 피해자이며, 인간애로 보듬어야 할 이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로써 증언되기를 그들 자신은 바랐을까.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할 수 없는 인간, 타인에 의해 이용되는, 죽음 이후에도 이용되는 이 서사의 강력한 작용이야말로 죽음정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죽음까지도 체제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그 이름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카 마리는 일본 미디어가 ‘하마스의 잔인한 테러’를 보도하지만, 그 희생자의 상당수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공식조사 결과는 보도하지 않는 현실을 아프게 지적한다. 당신이 죽으면, 국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명칭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그 이름을 빌려 당신의 아들과 딸을 전쟁터로 이끌 이유를 만들어낸다. 당신의 자식이 두 손으로 타인을 살해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든다.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죽기를 바란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두뇌의 원초적인 작동 방식이다. 번스는 인간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탐구하기 위해서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두뇌를 MRI로 촬영해왔다. 그리고 그의 대중서 『‘나’라는 착각』에는 인간의 뇌를 변화시키는 아주 강력한 매개가 이야기라는 연구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실제로 실험한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청소년들에게 소설 작품을 읽히고 두뇌 반응의 변화가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는데, 그 결과는 두뇌 신호의 변화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의식적 변화로도 나타났다. 두뇌 신호가 변화했다는 것은 이야기가 세상을 느끼고 사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소년과 소녀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평가하고자 했다. 이는 서사 장르가 지닌 강력한 힘을 증명한다.
한편 서정 장르인 시는 두뇌에 어떠한 미칠까. 직접적인 실험 결과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감정에 대한 뇌과학 연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연구들에 따르면 감정은 기억하는 능력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은 감정이 채색된 추억은 쉽게 떠올리지만, 감정 없이 바라본 풍경이나 무미건조한 만남은 잊어버린다. 마치 감정은 경험의 중요도를 판별하는 기준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기억 자체는 흐릿해지더라도 감정은 선명하게 남는다. 현재 놓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떠한 사람과 어울리고 어떤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지 판단할 때, 우리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감정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과 마주했을 때 이유는 몰라도 ‘저 사람을 피해야 겠어’라는 판단과 불쾌감이 치밀 수 있다. 그것은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난 적 있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의 나쁜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인 셈이다.
서사가 삶을 이끄는 힘이라면, 서정은 이야기의 입구이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는 쉽게 공감하지만 어떤 이야기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예컨대 한국인은 수많은 나라의 침탈에도 민족적 자주성을 지킨 한민족이라는 서사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만보산사건과 제주4‧3사건과 베트남 전쟁 속에서는 다른 민족이나 자국민을 학살한 가해자라는 서사에는 동의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삶에서 경험하고 학습해온 바와 그가 견지해온 삶의 입장이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뿐더러 가족과 국가에 의해 그렇게 느끼도록 길러져온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당한 것도 아니다. 만약 우리가 삶을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나은 이야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반성해야만 한다. 자신이 불쾌하다고 느끼는 이야기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새로운 관계 맺음이나 세상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카 마리를 떠올려보자. 그가 팔레스타인을 과거의 조선과 같다고 비판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처럼 식민 지배를 행했던 자신의 조국 일본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자신이 가해자의 역사에 속한다는 반성은 가능한가. 그것은 그가 팔레스타인인이나 조선인 위안부 여성과 같은 약자의 삶에 공감하기를 바랐고, 수많은 인터뷰와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서사를 접해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좀 더 넓은 포옹이 가능한 이야기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은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정 장르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반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감동했던 지평에서 물러나 하찮은 것, 낯선 것, 심지어 불쾌한 것에 감동해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돌과 돌멩이의 차이를 느낀다
이와 이빨의 차이를 느끼듯
돌이라고 말할 때와
돌멩이라고 말할 때의 차이는
얼굴과 면상의 차이만큼이나 멀고 먼 나라의 저녁 공기
사람과 인간의 차이를 느낀다
미묘한 차이
피와 혈액의 차이
동물이라고 말할 때와
짐승이라고 말할 때의 차이는
어둠의 두께만큼이나 여명이 다르고
저녁 어스름은 다르게 물든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
어제와 같을 수는 없다
오늘 하루는 늘 유일무이한 하루이듯이
그가 쓴 시에서 온기를 느낀다
여기까지 말하는 것과
그가 쓴 시에서 온기를 느낀다
하지만 열기가 느껴지는 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죽음과 죽임만큼이나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너가 아닌 만큼이나
너가 내가 아닌 이유로 우리는 살아간다
차이가 세계를 만들고
차별이 죽음을 들이대고 있다
사람과 인간과 동물과 짐승이 얽혀 있다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듯
위선과 위악이 각축하듯
모든 날들이 엊그제 같다
그런다고 내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길들여지지 않은 오늘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혐오와 차별이 사라지지 않듯이
ㅡ박용하, 「차이」 전문( 《청색종이》, 2024년 여름호)
시인에게 마음을 고른다는 것은 곧 그가 사용할 어휘를 섬세히 선택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손 위의 물건을 만지고 무게를 가늠하듯 단어를 감각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단어는 사물처럼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언어의 감수성을 기르는 기본적인 방법은 단어와 단어의 ‘차이’를 감각하는 것이다. 박용하의 「차이」는 바로 “돌”과 “돌멩이”, “이”와 “이빨”과 같은 단어의 어감을 비교하며 시어를 고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 내포된, 혹은 시인이 직접적으로 행하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은, 왜 아름다운 단어를 고르는 노력이 필요하냐는 것일 테다. 왜 시인은 일상에서는 대수롭지 않을, “피와 혈액의 차이” “저녁 어스름”이 지닌 어두움의 차이를 구분하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나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감각적인 만족이나 자기표현을 위한 결과물이 아니라고 답하기 위해서 이 작품은 쓰인 듯하다. 일상에서는 무심코 지나치는 단어의 어감은 단순히 의미를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그러한 인식이 없다면 “차이가 세계를 만들고 / 차별이 죽음을 들이대고 있다”라는 시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이를 저 사람이라고 부르고, 저 인간이라고 호명하며, 저 짐승이라고 격하할 때의 차이처럼, 단어를 고를 때 단어는 세계를 사랑할 것인지, 세계에 냉담해질 것인지 결단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시는 박용하 시인이 실천해야 할 하나의 윤리적 입장을 선언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에게 시 쓰기는 윤리적 실천이다. 단어를 고른다는 것은 세상을 격하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고 대하기 위해 시인이 지켜야 할 하나의 원칙이다. 언어의 감수력은 윤리적 지평의 가능성이기도 한 셈이다. 따라서 박용하 시인의 「차이」는 섬세한 언어의 감수력을 표현하는 작품이 아니라 윤리적 원칙을 세우기 위한 선언에 가까운 작품이다. 하나의 단어조차 간절히 발음해보는 일,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하나의 조사, 하나의 지시어조차 지극하게 사용해야 하는 시인의 의무로 가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긴 이야기가 몇 개의 단상으로만 남았다
네가 내 손바닥에 쓴 마지막 단어를 읽을 수 없어 쥐고만 있었지 펼쳐 보면 온통 울음일 것 같아서 솟구칠 것 같아서
전하지 못한 말들이 말줄임표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너를 향한 것이 나를 향해 있다 잠들면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아직 깨어 있다 창밖을 내려다보며 비를 겪는 밤을 겪는다 일어난 일을 겪는다는 것 겪으며 살아진다는 것은 아직도 닥쳐올 날이 남아 있다는 거겠지
아프다는 말 속에서 고통이 자라난다 잘라 내도 자꾸만 자란다 고통은 몸으로 파고드는 말이어서 몸이 되는 말이라서 증상을 말할수록 약만 늘어난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온몸의 일이어서 더는 손쓸 수 없어서
주먹이 된 얼굴을 뭉개고 있다 어떤 감정이든 즙으로 만들 수 있어서 엉망이 되어 버려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서 껍질만 남은 게 아무렇지 않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짠 몸이 바닥이 된 채 말라붙어 간다
슬픔이 빈 컵으로 놓여 있다
ㅡ김다연, 「스퀴즈」 전문(시집 『나의 숲은 계속된다』, 2024년 7월 20일 간행)
최근에 간행된 김다연 시인의 첫 시집 『나의 숲은 계속된다』(타이피스트, 2024)의 주된 정조는 슬픔이다. 기본적으로 슬픔의 상실의 감정이고, 이 시집은 반려견이나 ‘너’의 상실이라는 사건을 배경에 두고 있기에 ‘가까운 이의 상실’을 주제로 삼은 시집으로 해석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니겠다. 「스퀴즈」에서도 ‘너’를 상실하는 사건이 회상된다. ‘나’는 밤마다 그 상실의 순간을 떠올리며 우울에 빠지고 온몸으로 눈물 흘리는 듯하다. 고통은 몸을 죄어서 ‘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짠 몸이 바닥이 된 채 말라붙어 간다”. 생활을 파괴하는 정도의 깊은 상실을 표현하는 셈이다.
같은 경험 속에서도 누군가는 상실을 쉽게 극복하지만, 누군가는 상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할까. 그 이유를 시어의 ‘차이’를 통해 식별될 수는 없을까.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비유는 슬픔의 고통을 ‘언어’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점이다. “고통은 몸으로 파고드는 말”이자 “몸이 되는 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이전에 “네가 내 손바닥에 쓴 마지막 단어를 읽을 수 없어 쥐고만 있었”던 순간이 있었고, “전하지 못한 말들이” 있었다. 시인이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선명하다. 아직 마음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로 전해야만 했던 것이 있었기에, 그는 슬픔과 고통으로 자신이 벌 받기를 바란다. 주어진 고통이 차라리 당신이 건네는 말이기를 바란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슬픔은 부재와의 대화이다. 부재를 앓고 부재에 존재를 내어주는 방식이다. 모든 것이 저편으로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는 간명한 진실 속에서, 사람에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이란 무엇일까. 끝내 슬픔을 극복할 힘을 얻고 더욱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간명히 답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 존재를 비우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순간 또한 슬픔의 이유가 아닐까. 그렇기에 이 작품의 말미에 “슬픔이 빈 컵으로 놓여 있다”라는 문장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은 말라붙은 영혼이 투명하게 제련되는 순간, 이제 무언가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장소로써(혹은 갈증으로써) 재탄생한 ‘나’를 예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꿈에서 돈 많은 할머니가 나를 지켜주었다
우리 아빠가 할머니의 은인이라서
처음으로 아빠한테 고마웠다
내가 어느 잘생긴 예술가와 잘되고 싶어 할 때 할머니는 내게 비싼 옷을 선물해 주었고 그것은 잘생긴 예술가보다 아름다웠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
내 앞에 돈 많은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비싼 옷과 보석, 반짝이는 구두, 아끼는 만년필, 이국의 음악, 아빠가 줄 수 없는 많은 것을 주었고
나는 이제 돈 많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졌다
할머니의 캐시미어 머플러가 스코틀랜드산인지 이탈리아산인지 속속들이 알고 싶었지
세계지도에 없는 나라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그곳이 나의 고향이 되고 휴양지가 되고 죽을 자리가 되고
그렇게 내가 돈 많은 할머니가 된다면
가난하고 영특한 소녀를 돕기 위해
빚이라도 지고 싶은 마음
아빠는 돈 많은 할머니를 어떻게 만나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아빠, 묻고 싶지만 돈 많은 할머니에게는 아빠가 없었어
어떤 결핍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까? 나는 이제 할머니의 결손까지도 탐이 나는데 도무지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데
초대한 적 없는 내가 왜 내 꿈속에서 불행해져 가는지
손목의 시계를 풀어 그 소녀에게 쥐어 주며
제발 꺼지라고 빌었다
ㅡ고선경, 「세계가 도둑맞은 기분을 훔치려 들 때」 전문( 《현대시》, 2024년 8월호)
강조했듯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실감은 단편적인 이미지나 경험보다 이야기에 의해 견인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의 서사 속에서 실현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가게 되리라고’ 예감할 수 있다. 고선경 시인의 시인은 바로 이야기에 대한 예감을 주제로 삼되, 그것을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풀어내고 있다.
위 작품에서 제시되는 이야기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꿈의 서사’가 있다. 이 꿈의 서사에는 먼저 아빠가 등장하고, 또한 아빠에게 도움을 받은 ‘돈 많은 할머니’가 나타나며, 그 할머니에게 도움을 받는 ‘나’가 있다. 표면적으로 ‘나’는 할머니의 물질적 호혜에 기쁨을 느끼지만, ‘나’의 욕심은 더 커지기만 한다. ‘나’는 할머니의 위치, 즉 할머니처럼 호혜를 베푸는 입장에 서고 싶다. 단지 남을 연민하고 돕는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 “가난하고 영특한 소녀를 돕기 위해 / 빚이라도 지고 싶은 마음”까지 갖고 싶다.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의 서사’로 제시된다. 한편 작품의 말미에 제시되는 ‘현실의 서사’가 있다. “초대한 적 없는 내가 왜 내 꿈속에서 불행해져 가는지” 모르겠다는 서술처럼, 현실에서 ‘나’는 단지 불행한 소녀일 뿐이다. 구체적인 서술은 없지만, 유추해본다면 아마도 소녀는 가난하고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주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야기 사이에서, 진지한 것인지 농담인지 모호한 태도로 ‘나’는 서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라는 소재와 욕설 등이 다소 유쾌한 느낌을 자아내면서도, 소재 자체의 진지성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이끈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은가. 이와 비슷하게 “어떤 결핍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까?”라고 시인은 질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완전하게’라는 형용사이다. 타인으로 인해 흔들리거나 타인에게 침범되지 않을 ‘완전한’ 주체란 앞서 논의했던 박용하‧김다연 시인의 작품과는 정반대에 놓이는 부르주아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항상 베푸는 입장에 놓인다는 것은 타인을 구매하고 평가하는 입장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시인은 이를 진정 욕망하는 것일까, 풍자하는 것일까. 어쩌면 반쯤은 진정 바라고 있었고, 반쯤은 경멸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의 유머인지 아닌지 모를 모호한 어조야말로 정확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평론집 『침묵과 쟁론』,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 시의 아이러니 수사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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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