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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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동억 

  2023년 4월 공시사 월평  


  

  

 

 

 

덧붙여. 고통의 소유

 

   ● 박동억

 

 

 

 

   

1. 일기 형식으로, 공감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이 글을 쓰며 밝히려 했던 사실은 본래 시와 공감이라는 주제가 동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공감은 공동체적인 주제이지만, 시는 본래 공동체를 위한 장르가 아니다. 시를 쓰는 자는 타인이 필요하지 않은 장소로 향한다. 오롯이 자신을 향해 추방된다. 이 때문에 시 쓰기는 의식의 타자성, 쉽게 말해 우리 마음속에 홀로 간직하고 있었던 당혹스럽고 불쾌하며 섬뜩한 진실을 다룬다. 다만 시 쓰기는 아름다움을 통해, 시 비평은 합리적 언어를 통해 불쾌감을 줄인 상태로 그것을 우리의 의식에 초대할 뿐이다. 예술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야 한다. 단숨에 드러나면 너무나도 아픈 삶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반대로 공감은 애초에 우리에게 만족스럽고 편안하며 익숙한 결론으로 초대하는 주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교류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공감에 관한 우리의 마음이 서로 닮았거나 서로 모방하거나 서로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관계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설령 자신의 침대맡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강의실에서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공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편 공감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 현상적으로 나의 의식에는 이제 써야만 하는 것을 쓰던 시기에서 쓰기와 타협하는 시기로 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었다. 마치 읽고 싶은 것을 읽기보다 사회적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읽어야 하고, 쓰고 싶은 문장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만들기 위해 쓰는 것만 같았다. 이 느낌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공감이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그러한 느낌을 변증한다.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나는 나의 의식과 글을 쓰는 행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동시에 사용하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우선 공감이라는 단어를 익숙한 의미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학자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자신을 배반하고 싶다. 이 괴로운 시적인 탐구를 끝맺고 그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세상과 타인에 무심해지고 싶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 또한 이러한 내적 모순을 경험하는 순간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살아낸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으로 뛰어든다는 일이라는 것도 사람들은 안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만약 ‘공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이 마음이 통한다는 순진한 의미가 아니었으면 한다. 오히려 마음이 통하지 않음을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혹은 살아감을 견디기 위해서 공감을 발음하는 자신의 혀를 자책한다는 것에 가까운 의미였으면 한다. 결국 공감은 타인의 타자성에 대한 공감을 시도한다는 의미이고, 시 비평이란 그러한 타자성의 모순을 응시하는 일이었으면 한다.

 

 

2. 고통의 소유

  

우리는 저 고통이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는다. 고통의 소유는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은 내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몸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나의 몸에서 떨쳐내기를 바라는 통증이다. 반면 타인의 고통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상처나 신음으로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지 내 몸에 속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은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소름 끼치게 하거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 나의 소유는 되지 않는다. 고통의 소유를 가르는 것은 몸이다.

따라서 타인에 관한 한 진실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고통을 목격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다만 고통에 대한 우리 내면의 목소리만을 확인할 뿐이다. 타인에 관한 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고통의 언저리 혹은 고통의 언어뿐이다. 그렇다면 고통에 관한 우리의 묘사와 증언과 소문은 누구의 소유인가. 자식이나 연인의 상처를 발견했을 때 가족이 느끼는 비통함을 떠올려 보자. 그것은 타인의 고통보다 큰가 작은가. 직장 동료나 행인의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느끼는 충격을 떠올려 보자.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가늠하기에 충분한가. 뉴스로 보도하는 끔찍한 참사와 먼 나라의 전쟁을 떠올려 보자. 그때 우리 머릿속을 맴도는 언어는 어느 정도로 우리를 사로잡는가.

 

폐허 더미서 숨진 딸 손을 움켜쥔 중년 남성의 사진

 

댕그랗게 남은 침대 귀퉁이에 나온 딸의 손

온기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 놓을 수 없는 아버지가 있다

 

딸의 아침 인사가

오지 않는 중장비를 기다리는 동안 굳어간다

 

붉은 보자기 침대 아래로 내려와

아버지 올려다보며 추위를 샀다 폈다 한다

 

강진이 튀르키예 남부 지역을 강타했을 때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을, 가족들 먹을 빵을 구웠다

 

카흐라만마라슈에 있는 딸의 안부

지진 속으로 무너져 폐허 사이 돌아다닌다

 

기도는 돌아갈 수 없는 어제를 세우지 못하듯

소용없는 바람으로 마주서고

 

콘크리트 더미에 짓눌린 딸

미동 없는 천사가 되었다 

- 도순태,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 전문(《내일을 여는 작가》, 2023년 봄호)

 

신문 기사처럼 말해보자. 2023년 2월 6일 새벽 4시 무렵 튀르키예 동남부 가지안테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삽시간에 수천 채의 건물이 무너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던 가지안테프 주(州)는 폐허가 되었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에게 고통을 수치로 인식하게 한다. 경험적으로 수백만의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가 붕괴하는 경험은 예외적인 것이고, 그러한 예외성이 사람들이 겪을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한편 도순태 시인의 시는 하나의 일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지안테프 북쪽에 위치한 카흐라만마라슈에도 지진의 여파는 미쳤고 무너진 건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메수트 한제르의 열다섯 살 딸도 그중 하나였다. 모든 사람들이 가족을 구조하기 위해 건물 잔해를 파헤치고 있을 때 한제르는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건물 잔해에서 빠져나온 딸의 차가운 손을 가만히 쥘 수밖에 없었다. 한제르는 사진기자를 향해 딸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쳤다. 그것이 우리가 그의 사연을 알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조심스럽게 그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가족의 비극을 묘사한다. 더는 딸의 아침인사를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식탁에서 나란히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라는 시의 제목은 한제르의 말을 빌린 것이다.1) 그것은 세상을 떠나간 딸의 고통을 아름답게 발음해 보려는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다.

시 쓰기는 신문 기사보다 사진에 가까운 방식으로 현실에 접근하는 장르이며 사진보다도 더 시인의 주관적인 투영을 덧붙이기 마련이다. 이에 비해 사진은 신문 기사에 대한 보완이다. 신문의 기사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사실적이고 통계학적인 조망을 제공한다. 한편 사진은 사건 현장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과 그 프레임 속의 일화를 전달한다. 사진은 종합적 사실에 대한 세부를 제시하는 셈이다. 한편 시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주관을 투영한다. 이를테면 “기도는 돌아갈 수 없는 어제를 세우지 못하듯 / 소용없는 바람으로 마주서고”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상실감이 곧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의 메타포로 옮아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비극을 경험한 한제르의 가족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결국 쓰일 수 없는 고통도 있다는 것이다. 딸의 고통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철저히 시인의 상상으로만 꾸며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경험은 오직 죽은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자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대해 묘사할 수는 있어도 대신 죽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한제르의 사진은 삶의 이편에 남겨진 자의 시선으로 촬영된 것이고, 도순태 시인의 시 또한 “미동 없는 천사”를 애도하는 자의 시선으로 쓰인 것이다. 딸의 시선으로 기록한 문장은 없다. 이처럼 삶에는 맹점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직시할 수 없는 고통의 심부는 바로 죽음 자체이다.

 

 

3.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것

 

사진과 시는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을 환기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신문 기사보다는 그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뉴스 보도가 지구 저편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관심을 두게’ 하지만, 그러한 관심이란 고통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고통의 기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 버린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신문 기사는 교통사고로 사고를 당한 사람의 고통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통계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비용을 보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진과 시는 한 사람의 시선으로 목격하거나 체험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증언해보려 한다. 이 점에서 시는 신문 기사보다 생생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전체에 대한 조망에서 한 사람의 일화로 시선을 옮기는 것만으로 충분히 윤리적인 지평을 마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죄의식이 아닐까. 저 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데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죄의식을 부추긴 뒤 적당히 슬퍼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결론에 머물게 하는데 사진과 시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고통이나 가족의 고통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반드시 해결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느끼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두 눈에 까만 흙이 가득 차 있다

 

‘아이’를 떠나며 아이는 꾹 참았던 물음을 꺼낸다

‘너는 왜 일찍이 나를 떠나, 거기서 그러고 있는가.

왜 굳이 드넓은 ‘아이’를 떠나, 비좁은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아이야 그게 말이야 어떻게 된……,

다시 불현듯 폭격

 

어제 아파트는 반파됐지만, 아이와 흑빵과 크림을 사서 집으로 간다

더이상 집에 불과 물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떨어진 미사일이 잽싸게 주변의 불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 화염을 만들어낼 때

다행히 작은 집 안에 살던 불과 물은 아이의 작은 몸속에 안전하게 다 숨어들었다

다만 썩은 치아처럼 싱크대 문짝은 다 빠져버렸다

 

다시 불현듯 폭음

동굴처럼 캄캄한 싱크대 속 어둠으로 숨어들며,

아이는 내게 묻는다

 

‘이곳에서 가장 핫한 촛불은 무얼까.

훅 불면 이곳의 모든 생일을 다 한 번에 다 꺼버리고 우주로 한꺼번에 다시 생일 초대하는

이제 나는 그 촛불을 타고, 지구 한 바퀴 정찰하고 왔지.

이제 무엇이 되어볼까 고민하여.’ 

- 김중일, 「아이의 물음」 부분(《포지션》, 2023년 봄호)

 

지금도 세상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미사일 폭격으로 거주지를 잃은 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와닿는가. 「아이의 물음」이라는 김중일 시의 제목은 우리의 양심을 향해 묻는 듯하다. 인용한 부분은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두 눈에 까만 흙이 가득 차 있다”라는 시구로 시작한다. 흙으로 가득 찬 두 눈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그 죽은 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본다’는 표현에서 명시하는 것은 가책이다. 어른인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그러나 아이는 원망하기보다 연민하듯 “왜 굳이 드넓은 ‘아이’를 떠나, 비좁은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라고 손을 쓰다듬으며 말 건네는 목소리로 그려진다. 여기서 상식적 위계는 역전된다. 아이보다 어른이 성숙하다는 믿음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사일이 떨어지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비좁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작품에 아이는 좀 더 넉넉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이 세상을 어떻게 새로 쓸 수 있을까. 이를테면 “훅 불면 이곳의 모든 생일을 다 한 번에 다 꺼버리고 우주로 한꺼번에 다시 생일 초대하는” 순간을 꿈꾼다는 시구가 곧 세상의 모든 생명이 꺼져버린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김중일 시인이 최선의 자세로 택한 것은 죄의식이다. 김중일 시인의 시 쓰기는 뒤로 물러나지 않는 자세를 우리에게 권한다. 그것은 아이에게 우리의 손을 뻗을 수 있다는 것,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는 더 엄격하게 가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죄의식을 느끼는 자신’이라는 위치에 도취하지 않고 사람은 진정 행동하는 위치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행동할 때도 타인의 고통은 맹점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어떻게 덜어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고통에 관한 한 섣부르게 타인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을 느끼는 나’를 철저히 하는 김중일 시인의 시는 어쩌면 최선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4. 희망에 대하여

  

통계적 조망보다 일인칭의 시선으로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는 것.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언어화할 때 택하는 구도이다. 시는 주관적 장르이며, 타인의 고통에 대해 단언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 쓰기는 자칫 타인의 고통을 시인의 소유로 바꾸어놓는 작업에 그칠 위험을 내포한다. 김중일 시인의 시에서도 이러한 전환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 「아이의 물음」에서 ‘아이’가 던지고 있는 물음은 실제로는 시인이 던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이의 목소리를 대리하는 것은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형식은 마치 저 ‘순수한’ 죽은 자의 목소리가 이편으로 건너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중일 시인의 시에서 이러한 목소리의 전유는 우리의 양심을 가책하기 위해서 요구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목소리에 작가의 신념이나 판단이나 제안이 포함되게 된다면, 그것은 정치적 호소문에 그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독자를 선동하거나 호소하려는 시가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의 윤리적 원칙은 고통의 소유를 명백히 밝히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김중일 시인은 그의 시 마지막에서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 아이의 목소리를 빌린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마음은 새로운 생일파티를 축하하기를 기다리는 사건으로 비유된다. 그 목소리는 아이의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축하는 노래는 세상과 타협해 버린 어른의 목소리로 불려서는 안 된다. 이렇듯 희망을 ‘아이처럼’ 간직하는 것은 시의 중요한 본질일 것이다. 시를 쓰는 자를 떠올려 보자. 그가 미래를 예시할 때 그는 무엇을 담보로 하는가. 시인의 담보물은 백지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 무책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투명한 백지처럼, 시가 담보물로 삼는 것은 우리 존재에 대한 순수한 투영이다.

 

어젯밤 너에게 보낸 메시지, 너는 아침에 확인하고 놀란다

새 출발 nuevo comienzo 단 한 단어 보냈을 뿐인데

연 내가 꿈을 꿨는데 네가 괜찮아 다 괜찮다고 했어 그리고 아침에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너한테 새 출발이라고 와 있는 거야 내가 말한 새 출발은 그게 아니야 remove 제거, 절제, 살해, 이사, 해임, 추방 어원; 제거하다, 없애다 5시 50분 호스텔 사장은 너무 일찍 가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기다려야 하거든 오토바이 트럭을 타고 짐짝처럼 선착장으로 간다 거기서 너의 나라 언어로 쓸 엽서를 한 장 고른다

 

백사장, 하얗게 변한 나무, 모래사장에 대기 중인 작은 보트들

나는 물가에 사는 반얀트리에게 손을 뻗는다

 

모래 위로 드러난 축축한 뿌리, 손가락이 햇빛에 타들어간다

 

싱크대에 서서 머핀을 먹지 마 금기, 사회주의, 관념, 유리한, 유려한, 집념 to confide in(someone) 신용한, 신뢰한, 비밀을 털어놓다…… 그 단어는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끝까지 다 배운 말 그곳이 어딘지 알려주고, 우리는 그 배 중 아무거나 몰고 언제든 나갈 수 있지 

- 주하림, 「remove」 전문(《웹진 비유》, 2023년 3월호)

 

 희망을 노래하는 시는 드물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에 사로잡힐 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몸을 살피는 데 주력할 뿐 몸을 새롭게 한다는 각오나 의지로 나아가기는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하림 시인이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주목을 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 왜 그가 “새 출발 nuevo comienzo”에 대해서 말해야 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배경은 드러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사실 그가 이후의 연에서 제시하는 어휘들 또한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시 쓰기에서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시인의 희망을 확인한다는 의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선착장으로 떠나는 저 몸과 새하얀 백사장과 어디로든 언제든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차례로 감상할 때, 우리는 희망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희망이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저곳’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제든 나갈 수 있지”라는 믿음을 지속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믿음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안다. 무엇보다 이미 지구촌이라는 물감으로 덧칠된 이 세상에서 주하림 시인의 항해가 그가 그려낸 것처럼 새하얀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지도 되묻게 된다. 그런데도 주하림의 시가 우리를 매혹한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우리의 존재가 바라고 있는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존재는 우리 존재를 새롭게 하는 장소에 닿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지우고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1)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07046635510192&mediaCodeNo=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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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 공저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 오규원의 현재성과 현대성』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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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