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공시사
 
지난 계절의 공시사
Extra Form Output
저자 임채성 

 

 

 

 

쓸쓸한 폐허 위에도

난만히 풀꽃은 피네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4월은 겨울보다 더 춥다고도 했다. 이를 두고 문학 평론가들은 대체로 작가의 개인적 상실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이 겪은 상실감으로 확장된 것으로 이해한다. 433행이나 되는 장시 「황무지」는 종교적 신앙을 잃고, 생식의 기쁨을 잃고, 썩어서 사라지길 거부해 재생도 불가능한 서구 문명의 비극성을 노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봄은 생식과 부활의 계절이다. 하지만 진정한 생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서구인에게 그 불가능성을 환기시키기 때문에 잔인하다. 또 공허한 추억과 덧없는 욕망을 일깨워 치명적 상처만 덧나게 하기에 더 잔인하다.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고문을 가하기에 가장 잔인하다는 것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한가운데인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한 반어적 수사법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도 맞물려 하나의 클리셰가 되다시피 했다. 우리의 4월은 제주 4·3사건,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을 낳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령의 상실을 경험한 비극적 역사 인식이 유독 4월에 많다 보니 자연스레 그 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그로 인해 추억이나 욕망이 거세된 한겨울이 오히려 따뜻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시조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다. 태동기부터 시조는 ‘지금-여기’의 현실에 천착하며 역사성과 시대성을 절제된 형식의 그릇 속에 갈무리해 왔다. 시조가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는 작품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고려 중엽에 그 형식이 완성되어 고려 말기에는 여러 창작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향유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여말선초(麗末鮮初) 정치적 격동기의 시대상 또한 시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을 서구 사회에 처음 알리게 된 고려가 멸망하고 단군조선을 잇는 새로운 조선이 건국하던 시대의 서정적 감회는 문학 창작의 자양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과 환희였겠으나 누군가에게는 아픔과 회한일 수밖에 없었던 망국에 대한 설움과 상실, 무력감은 당대의 시조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더라

 

 

  『청구영언(진본)』에 전하는 원천석의 이 시조는 우리에게 「회고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요즘의 뜻으로 풀어보면 "나라의 흥망성쇠가 다 운수에 달려 있어 화려했던 궁궐터도 시든 가을 풀에 덮여 있구나. 오백 년 왕조의 업적이 한갓 목동의 피리소리에서나 들을 수 있으니, 해 질 무렵 지나가는 나그네가 눈물겨워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만월대는 화려했던 고려를 상징하는 곳이다. 태조 왕건이 집권 2년차에 자신이 태어난 자리에 짓기 시작해 완성한 고려의 법궁(法宮)이었는데, 공민왕 때에 이르러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에 탄 이후 복원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아있던 곳이다. 개성 송악산 자락에 위치한 만월대에는 전각이 많았다고 한다. 정전(正殿)으로 회경전과 건덕전, 왕이 거처하는 편전(便殿)으로는 선정전, 문덕전, 원덕전이 있었다. 왕의 침실과 서재, 왕비가 거처하던 내전(內殿)은 만령전, 중광전, 연영전, 명경전, 응건전, 장령전, 곤성전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왕자가 기거하는 동궁전들이 있었고, 제사를 모시는 사당 등 다양한 건물이 갖춰져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한편 이 시조에 쓰인 ‘만월대’는 고려 궁궐의 의미만이 아니라 달빛이 가득한 누대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그 달빛은 찬란했던 고려 인재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흥망성쇠의 무상함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조로 읊고 있는 고려 지사의 하릴없는 슬픈 감회가 잘 드러나 있다 하겠다. 이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에 나타난 길재의 마음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고려의 옛 궁궐터를 지나다가 지은 이 시조는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 삼봉 정도전의 「회고가」와 함께 절창으로 일컬어진다.

  원천석은 여말선초 시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른 길을 걸어갔던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1330년(충숙왕17) 개성에서 태어난 원천석은 ‘두문불출’의 현인답게 초야에 묻혀 지내다 갔기 때문에 죽은 연대를 알지 못한다.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라 했다. 원천석이 직접 지은 ‘운곡’이라는 호는 부귀공명을 버리고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다는 뜻이다. 운곡은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나 고려말의 사회적 혼란은 그를 은둔자로 만들었다. 선비는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가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는 유교 사상에 따라 22세에 원주로 낙향한 운곡은 치악산에서 생활하면서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그는 정몽주나 이색처럼 정치적으로 화려한 이력을 남긴 것도, 길재처럼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을 만큼 똑똑한 제자를 남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원천석이 치악산만큼이나 우뚝한 존재가 된 것은 그의 절의와 그의 시가 만들어낸 돌올함 때문일 것이다.

 

 

절도 탑도 없는 황룡사 빈터에 와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냉이꽃을 만났네

어쩌면 부처의 행방을 간파한 것이 아닐까

 

타다 만 슬픔들이 실비에 몸을 적시고

한 사람이 백 번을 와서 되묻고 간 참회 앞에

그 누가 촛불 하나를 목숨처럼 밝혀 두었나

 

절에 온 사람치고 죄 없는 자 어디 있으랴

버릴 줄 알면서도 훔쳐 왔던 헛된 날들

가만히 바람에 흩고 닦아 보는 젖은 손

 

탑은 이제 무너져서 비로소 우뚝 서고

내 차마 적멸 위를 소처럼은 걸을 수 없어

숨겨 온 마음 한 자락 옷깃 속에 감추네 

- 민병도, 「황룡사지에서」 전문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릴수록 현재의 폐허는 허무로 깊어지기 마련이다. 만월대가 고려의 흥업을 상징하였다면 황룡사는 신라 문화의 황금기를 상징한다. 4명의 왕이 93년에 걸쳐 건립했다는 사찰, 80m 높이의 거대한 9층 목탑이 우뚝 서 있던 사찰, 서라벌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국가사찰이 황룡사였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년) 2월에 장차 용궁(龍宮) 남쪽에 궁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나서 이를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라고 하였다.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담을 쌓고 17년 만에 완성했다.”라고 나온다. 궁궐을 지으려던 터에 절을 지었으니 황룡사는 신라 왕실의 상징으로서 신라 그 자체였다. 인도 아소카왕이 보낸 금과 철로 장육존상을 만들고, 금당(金堂)과 9층 목탑을 조성해 신라의 화려했던 문화를 상징하는 황룡사 옛터는 그 규모만 해도 8만여㎡(2만4천2백여평)에 달한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빈 공간에 주춧돌만 남아있다. 황룡사가 있던 자리라는 뜻에서 그 폐허의 공간을 ‘황룡사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천석이 만월대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회를 민병도 시인은 오늘의 황룡사지에 와서 느끼고 있다. 하지만 폐허를 바라보는 두 시선의 결은 사뭇 다르다. 시인은 “절도 탑도 없는” 폐허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냉이꽃” 한 송이를 만난다. 창해일속(滄海一粟)과도 같은 ‘냉이꽃’의 존재는 폐허가 뿜어내는 허무의 깊이를 더욱 크게 만든다. 하지만 시인의 마음은 허무가 아닌 ‘참회’로 돌아선다. 화려하기 짝이 없었던 황룡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버릴 줄 알면서도 훔쳐 왔던 헛된 날들”을 돌아보며 인간의 헛된 욕심을 반성하고 있다. 그리하여 “탑은 이제 무너져서 비로소 우뚝 서”듯 일상의 허욕을 버리자 마음의 충만을 얻게 된다. ‘냉이꽃’이 간파한 ‘부처의 행방’은 곧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지혜를 허무의 현장에서 깨우침으로써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폐허의 규모가 말해주듯 황룡사지는 아득한 상상력의 공간이다. 눈으로 더듬으면 한없이 텅 빈 공간이지만,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곳은 어느새 불심이 가득한 충만의 공간이 된다. 이른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원리다. 텅 빈 것 같으면서도 가득 차 있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완벽한 폐허’가 황룡사지라는 것을 완미한 정형미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위도 등이 가려워

투구를 벗는

사월

 

꽃들이 만장일치로

봄의 섭정을 찬미하지만

 

올해도 눈뜨고

지

네,

저 등신

제주

동백. 

-고정국, 「4월, 제주 동백」 전문

 

 

  찬란해야 할 봄이 더없이 참담하게 다가오는 것은, 잊히지 않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꽃이 피고 초록이 우거지는 그 아이러니에 있다. 변함없는 자연의 섭리가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봄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뾰족한 시대상을 형상화해온 고정국 시인의 시조를 다시 읽는다. 그는 한반도의 변방에 위치한 제주도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제주4·3사건에 대한 그의 인식은 끊임없는 창작의 자양분이다.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을 이렇게 정의한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알려진 희생자의 숫자만 해도 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한국전쟁(6·25)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현대사의 비극이다.

  4·3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태어나 4·3의 불길을 헤쳐 나온 유년의 기억은 그에게 트라우마이자 해원상생의 지상과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나의 시들은 짜디짜다”(「제줏것들」)고 고백하며, 때로는 직설 화법으로 때로는 간접 화법으로 역사적 아픔을 되새기고 추모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중심부에서 밀려난 외로운 영혼들을 자연물에 투사시켜 그 의미망과 존재감을 키우는 데 주력한다. 그가 추구하는 자연 대상은 과거 지향의 복고 주의나 풍류 정신과 어우러진 예찬물이 아니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외로운 영혼이거나 인위적 삶의 터전에서 정복당하고 사라져간 피해자이자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변방의 민초와 다름없다. 밝고 높은 존재들이 아닌 낮고 그늘진 땅에 천착하려는 시인의 ‘하류지향성’은 중심부에서 외면당한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증표이다. 이처럼 낮고 그늘진 곳을 향하는 시인의 시선은 4·3사건을 그냥 비켜가지 않는다.

  「4월, 제주 동백」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동백꽃은 제주4·3사건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아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만 거듭하며 화해와 상생의 해법을 찾지 않는 타락한 중심부에 대한 분노는 어찌할 수 없는 개인적 자각 앞에서 무력감만 더해진다. 600여년 전 원천석이 느꼈을 망국지사의 마음과도 통해 있다. 수많은 꽃들이 “봄의 섭정을 찬미하”는 무장된 시대를 바라보다 그 속에 섞일 수 없어 힘없이 지고 마는 “제주 / 동백”을 “저 등신”이라고 비난하는 시인의 어조는 사실 자조(自嘲)나 자학(自虐)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자포자기가 아니라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의 반영이다. 현상태에 대한 참회와 성찰을 통해 무기력한 자아를 거칠게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주입하려는 의도이다. 그날을 잊지 않은 동백꽃이 다시 피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주도민들이 가진 근원적인 피해의식과 무력감을 자연물에 투사해 그려냄으로써 당대 현실을 꿰뚫는 통찰을 통해 현대적 자아의 풍경을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폐허 위에 핀 들꽃이 더 아름답고 순수하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웅변하는 것 같다.

 

 

 

 

 

 

 

 

 

 

 


 

연재-임채성.png

임채성 ㅣ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ㅡ

202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