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동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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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공시사 월평
일곱 번째 걸음. 황홀한 넘침
● 박동억
— 우리의 성기는 근본적으로 변증법이다.
피부 마찰은 지적인 대화 그 이상의 필사적인 탐구이다.
그리하여 연인은 나체가 된다. 포옹은 단순히 침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만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나체는 정신 속에서 발견된다. 두 사람의 입술로부터 순진하고 노골적인 고백이 시작할 때 비로소 연인은 하나가 된다. 정신의 속살까지 상대에게 드러낼 때 존재는 넘치기 시작한다. 그 순간은 차마 입으로 고백하기 부끄러운 욕망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든 좋다. 모든 것은 방 안의 일이기 때문이다. 안방은 두 사람으로 세워지는 영토이다. 침대는 외설로 고발되지 않는 외설적 세계이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 ~ 1962)는 자신의 저서 『에로티즘』(1957)에서 이러한 침대 안에서 벌어지는 외설을 학문의 영역으로 이끌어오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가장 외설적인 욕망과 인간 사회의 가장 고상한 가치가 동일한 기원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침대 위에서 포개어진 육체는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두 손과 닮았다. 그 두 자세는 똑같이 ‘내가 나일 수밖에 없다’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 불연속적인 자아의 존재를 극복하여 무한한 신성에 닿는 것, 둘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꿈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바타유는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선언으로 그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죽음이란 홀로 존재하는 상태의 죽음을 뜻하며, 반대로 더불어 존재하는 삶으로의 이행을 뜻한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에로틱한 물질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 에로티즘이란 태양부터 꽃잎에 이르기까지 연인을 대하듯 애틋하게 마주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에는 잊힌 자세이다. 현대인에게 사물은 유용한 상품이거나 정돈된 도구이다. 하지만 과거 원시인은 에로틱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곤 했다. 예컨대 원시인에게는 돌조차 살아 있는 존재이고, 더 나아가 원시인은 그것과 함께 ‘더불어 살았다’. 반면 현대인에게 돌과 이끼의 감촉이 관능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인간과 유대하는 물질은 오직 타인의 육체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의 존재 방식, 즉 번식하며 살아간다는 존재 방식 자체에 내재된 깊은 욕망을 잊은 것이 아닌지 바타유는 되묻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귀하게 다루는 육체는 오직 인간의 형상뿐이다. 그리고 사람을 닮은 것, 어린아이를 닮은 것,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육체만이 문명의 품에 받아들여진다. 그 밖의 자연은 단지 풍경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에로틱한 시선을 보존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시인이라고 바타유는 말한다. 비록 원시인의 수준에 미치지는 않지만, 시인은 때로 현대인이 ‘비속하게’ 여기는 사물의 관능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시인은 인간의 형상을 한 원시인이자 동물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는 현대인이 저속하게 생각하는 관능을 응시한다.
관능이란 무엇인가. 관능을 탐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왜 성기가 존재하는지 되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는 왜 성기가 존재하는가. 생명이 다만 존재의 영속, 즉 삶을 추구한다면 구태여 저기 놓인 돌이나 바위나 행성처럼 담담히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 생명은 피부와 살과 체액의 탕진을 반복하는가. 왜 생명은 삶과 죽음이라는 이항대립에 사로잡힌 채 고뇌하는가. 성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하나의 비밀을 가르쳐준다고 바타유는 생각한다. 생명은 생명의 형상을 깨고, 더 크고 높은 형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매번 자기 존재를 살해한다. 그래서 관능은 죽음이고, 죽음은 신성을 향해가는 자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성기는 근본적으로 변증법이다. 피부 마찰은 지적인 대화 그 이상의 필사적인 탐구이다.
― 현대시에도 관능은 지속하는가
현대시에도 관능은 지속하는가. 바타유의 이러한 물음을 현재 우리 시대를 향해 던져보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과 물질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국가 주도의 개발담론은 인간의 삶을 부양하는 데 목적을 둔다. 반면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개발담론에 내포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바타유의 사유가 특별한 것은 인간의 독선을 벗어나게 하는 방식이 지적 성찰만이 아니라는 전제에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랑의 두 원천은 에로스와 필리아, 즉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것과 ‘육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는 당혹스러운 물음부터,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의 마음을 지극히 심려할 수 있냐는 물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현대시가 나아가고 있는 사랑의 가능성을 측량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공감의 능력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낯선 타자들에게도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성급한 것이기도 하다. 에로티즘이 현대 사회에서는 단순한 쾌락으로 격하되었다는 바타유의 지적은 오늘날에는 더욱더 숙고해야 할 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보듬는 데 지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많은 통계학적 자료를 보태지 않더라도 경험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젊은 세대는 사랑의 열정보다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가족을 위한 헌신보다 자신을 위한 공정한 삶을 요구한다. 결혼과 연애는 피로한 노동으로 비유되기까지 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서구에서 이미 40~50여 년 전부터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콘돔의 발명과 성에 관한 통계학적 정보들은 성애의 위험과 신비함을 벗겨내고 하나의 플라스틱 제품과 같은 ‘조형적 성’(plastic sexuality)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성애에 관한 우리의 물음은 더욱 공소해진다. 사랑의 능력을 방임해거나 다른 규약으로 대체해가는 현대사회의 흐름 속에서, 현대시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가.
나는 무대 위의 유령
이름 없는 배우로서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다.
주어진 대사를 뱉고
주어진 동선으로 걷는다.
만원 지하철 안
매일같이 지나는 강을 바라보며
어김없이 눈물을 글썽이고
담벼락에 비친 내 그림자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상대역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되풀이되는 혁명의 대열을
기꺼이 뒤따르며
연극이 불시에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안에 형형색색의 영양제를 털어 넣기도 한다.
: 훌륭한 배우는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연극은 날로 실감이 더해져
이젠 거의 진짜 같다.
이건 거의 나 같다…….
슬프게도,
이 연극에는 절정이 없다.
절정을 기다리는 배우가 있을 뿐.
- 김지민, 「계속」 부분( 《릿터》 2023년 10~11월호)
삶이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한 인식 이후에 사랑과 혁명이라는 단어는 공허하게 혀끝에서 발음된다. 2020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지민 시인의 시 「계속」에서 맴도는 정서는 슬픔이다. 그러한 슬픔은 ‘사랑’이나 ‘혁명’이 생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역이라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며 말한다. “이건 거의 나 같다”라고. 자신이 그저 “절정을 기다리는 배우”에 지나지 않다고 말이다.
사실 자신의 삶이 헛것에 지나지 않다는 성찰 자체는 징후가 아니다. 진정 이 시가 징후적인 이유는 시적 화자의 시선이다. 왜 그는 생생한 삶이 부재한 세계의 파국을 꿈꾸지 않을까. 왜 그는 ‘상대역’을 벗어나지 않는 타인들을 질책하지 않을까. 그저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자조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의 시선이 좀처럼 바깥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삶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유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As You Like it부터 오랜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학생, 군인, 법관과 같은 수많은 사회 군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은 연극 무대’라고 묘사하는 태도와 김지민 시인이 자신을 응시하며 “나는 무대 위의 유령”이라고 선언하는 태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오직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 이 자폐가 진정한 의미의 징후인 것이다.
모든 관능과 열정이 참담한 실패에 그치고 마는 이 시대를 냉소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현대시사에 수없이 반복되었던 것이지만, 유독 이 작품은 자기 응시에 몰입하는 자폐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자폐와 성찰은 다르다. 성찰은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며 길러낸 마음의 눈을 자기에게 돌리는 일이다. 반면 자폐는 타자와 세계를 향해 손을 뻗을 수조차 없는 무기력함을 뜻한다. 「계속」은 자아에 대한 성찰이 아닌 자아에 대한 자조적인 진술과 자기의식으로 향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웅크림이다. 이는 바타유적 의미에서는 관능의 상실, 에로틱한 자세와의 단절을 뜻한다. 이 작품에는 갈등할 수 있는 피부가 없다. 삶과 부딪치는 살갗이 아니라 삶에 맞닿지 않는 신체로서 ‘유령’이라는 시어는 웅크린 자아의 비유가 된다.
― 자기 고백이 시 형식의 전부라면, 수많은 스쳐가는 사람 중에서
한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관능은 존재의 열림이다. 당신을 향해 나를 열어둘 때 나는 비로소 당신에게 닿는다. 닿는다는 것만이 관능의 유일한 사건이자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문예지들을 살피며 나는 관능이 존재하지 않는 시, 관능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시를 주로 발견한다. 젊은 시인 상당수는 이 시대에 자신이 잡아먹힌 존재임을 고백하는 데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거기 짓눌린 인간의 초상이라는 테제가 자명한 실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저히 관능과 단절하는 방식 또한 존재한다. 요컨대 자조적이고 자폐적인 언어를 넘어서 아예 ‘홀로 죽어가는’ 자아를 그려내는 듯한 언어의 활용 방식이 있다. 이 경우 현대에는 관능적인 경향의 작품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철저하게 자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만나는 것 또한 예외적이다. 마치 자신이 발신하고 자신이 수신하기 위한 작품인 양, 혹은 마치 자기 신체의 주름을 어루만지듯 집요하게 자신 안으로 파고드는 언어는 귀하다.
너는 수전증(水顫症)을 앓는다. 나는 환자인 환자이자, 환자가 될 수 없는 환자요.
(쓰는 너와 씌어진 네가 거리감을 호소한다)
물은 너를 휘두르며 자기를 위로한다. 너는 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진 만큼 가까워진다.
너는 너를 잃어버리고, 너를 되찾기도 하지만, 그래야 할 목적을 이내 잊어버린다.
물은 떨림이고, 떨림은 물을 한다. 발작하고, 웃고, 달뜬 채로 너를 떠들면서 물은 쓴다. 나는 네게서 동시에 본다고; 두개 이상의 죽음과 한 개의 삶을.
물보라.
너는 늘 네게서 멀리 있다.
(물은 종일 누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어느 날 너는 네게 너를 묻는다.
언제까지 너는 발버둥질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질문은 물음하는 너를 곧바로 교정한다.
발버둥질은 언제까지 나를 계속할 수 있을까?
물보라는 혼자 태어나서 함께 죽는다.
물보라.
- 박지일, 「물보라」 전문(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너’와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근본적으로 박지일 시인의 시에서 독자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시어를 운용하는 시인의 의식뿐이다. 왜냐하면 ‘너’와 ‘나’가 어떤 대상인지, 두 대상의 관계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은 채 비약적인 진술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시인이 어떤 대상과 상황이 이 작품의 제재가 되었는지 유추하기 어렵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물음은 이러한 암호문이나 비밀일기 같은 예술 작품을 독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해야하느냐는 것이다.
한 가지 독법은 작품을 최대한 맥락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분열증의 표현일 수 있겠다. 혼란스러운 진술과 “발버둥질”, “물보라”라는 시어는 정신의 어지러움을 표현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나’와 ‘너’는 자아를 두 사람으로 나누어 지칭하는 분열증적인 방식일 수 있겠다. ‘네’가 발버둥치는 진술이 곧 발버둥질이 ‘나’를 계속한다는 진술로 이행하듯, 이 작품에서 ‘나’와 ‘너’는 닮아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추측을 강화한다. 또한 “두 개 이상의 죽음과 한 개의 삶”을 네게서 발견한다는 형용모순이(죽음은 두 개 이상일 수 없고, 죽음과 삶은 동시에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형용모순) 이 작품의 분열증을 표현한다. 또한 “발버둥질은 언제까지 나를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주술관계의 역전 또한 병증에 사로잡힌 ‘나’를 나타내는 듯하다.
분열증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조금 더 집요하게 구체화해보도록 하자. 시인이 수전증, 거리감, 떨림, 발작, 발버둥질, 죽음 등의 단어를 열거한다는 것은 시인이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병증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병증에 덧붙인 비유들이다. “쓰는 너와 씌어진 네가 거리감을 호소한다”라는 문장이나 “멀어진 만큼 가까워진다”라는 문장은 ‘거리감’이 증세임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거리감의 원인은 ‘목적 없음’이다. “너는 너를 잃어버리고, 너를 되찾기도 하지만, 그래야 할 목적을 이내 잊어버린다”라는 진술은 이 작품에서 징후의 실체를 표현한다. 자아라는 것이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조차 잃어버린 자아. 바로 이 시가 표현하는 진정한 병증은 이러한 자아 상실인 것이다.
박지일 시인이 표현한 것은 자아 상실이다. 자아를 소유해야 할 목적을 잃어버린 자의 목소리. 따라서 「물보라」의 형식은 분열증의 모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이후에 현대시를 향한 핵심적인 물음이 뒤따른다. 이렇게 시인이 지어낸 바가 시의 내용을 이루는 전부라면,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사람의 상상이나 고백이 시 형식의 중핵이라면, 수많은 스쳐가는 사람 중에서 한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란 무엇인가.
― 어쩌면 현대시는 독자의 연민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훌륭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끈질기게 시를 사랑해주는 독자인 것은 아닐까
너그럽게 대답할 수 있겠다. 모든 목소리는 가치 있다. 대한민국은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공동체이며,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지극하게 고백하는 자가 시인이라면, 당연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법을 따른다면 미적 가치는 시 작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지적으로, 윤리적으로, 심미적으로 이로움을 주지는 않을지라도 작품을 향해 귀 기울이는 독자의 자세가 탁월한 것이다. 현대시는 누군가의 독백에 귀 기울여주는 독자에 의해 훌륭한 것이 된다. 어떤 시가 지극히 독백적일수록 그것에 귀 기울여주는 독자의 자세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된다.
존경할 만한 시인은 필요하다. 반대로 말해 시인이 존경받고자 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을수록 드문 것이 된다. 자기 비참에 몰두하거나 그것을 고백하는 목소리, 평범한 직장인보다도 좁은 사회 관계가 두드러지는 듯하다. 앞서 시를 분석하며 무대의 비유, 관능의 소멸, 자아의 죽음과 같은 단어들로 표현했던 바는 이러한 문제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어쩌면 현대시는 독자의 연민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훌륭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끈질기게 시를 사랑해주는 독자인 것은 아닐까. 작가가 존경할만한 위상을 지니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시인의 목소리와 접하는 독자들이 무엇을 얻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적 카타르시스의 본질을 연민과 공포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본래 연민은 훌륭한 사람이 몰락해갈 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반면 관객은 자신보다 평범하거나 모자란 인간이 몰락할 때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그러한 조소가 희극의 주된 정조가 된다.
그렇다면 현대 시인이 존경할만한 삶의 태도, 놀라운 목소리를 지니지 않았음에도 독자는 왜 현대시를 읽어나갈 수 있을까. 한편으로 현대 사회의 연민이 우월성의 감정이 되어버렸다는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독자가 시인의 곤경에 빠진 목소리를 조소하는 대신 연민할 때 자기 존재의 우월함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현대시는 ‘나 또한 저러한 비참에 처해 있다’라는 비극적 연민의 정조가 아닌 ‘나는 저 불쌍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라는 희극적인 연민의 정조에 기대어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울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데서나 울음을 보여줄 수 없다. 아무 데서나 흐르는 눈물은 아무 데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울음은 장소를 필요로 한다. 울음이 터지기에 적당한 장소, 마치 폭탄을 터뜨리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듯이 울음은 울음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간다. 찾아가서 운다. 여기가 바로 그 장소라는 듯이 운다. 엉엉 울고 펑펑 울고 쏟아질 듯 울고 비워질 듯 울면서 생각하는 것. 고민하는 것. 눈치 보는 것. 그런 것도 없이 어떻게 울 수 있을까? 정말로 우는 자는 그런 것을 모른다. 정말로 울려고 하는 사람도 그런 것을 몰라야 한다. 안다면 못 운다. 안다면 울음을 그치고 화장부터 고칠 것이다. 말끔하게 고치고 분장실을 나오듯 화장실을 나올 것이 저 배우를 보라. 전문 배우도 아닌데 울음이 싹 가신 얼굴로 웃고 있다. 응대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사람을. 참고 있는 사람을.
- 김언, 「가장 자유로운 방식의 울음」 마지막 연( 《쓺》 2023년 하반기호)
김언 시인은 최근의 작품에서 고백의 문제를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얼굴’이라는 간단한 이미지로 바꾸어 표현한 바 있다. 고백이란 시선도 장소도 의식하지 않고, 그 무엇도 마주 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의 울음은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진술이다. 한편 이 작품이 마지막까지 비추는 이미지는 울음을 참는 얼굴이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웃는 얼굴과 울고자 하는 근육 사이의 긴장, 고백하고자 하는 마음과 타인을 의식하는 마음 사이의 긴장이다.
앞서 박지일의 「물보라」에서 형상화된 ‘발버둥질’이 자아 내부의 갈등을 상기하게 한다면, 김언의 「가장 자유로운 방식의 울음」에 형상화된 ‘울 것 같은 얼굴’은 자율과 타율 사이의 갈등을 상기하게 한다. 여기서 좀 더 관능적인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 것은 김언의 시다. 김언의 시에 표현된 것은 하나의 육체라기보다 긴장이고, 고통이라기보다 대결이다. 한편으로 김지민 시인의 「계속」에서 활용되었던 무대-배우의 비유가 김언 시인의 시에서도 반복한다. 두 작품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김지민 시인이 초점화하는 것이 자아의 고백이라면 김언 시인이 초점화하는 것은 얼굴이고 피부이다.
김언 시인은 앞서 소개한 두 작품과 유사한 주제 의식을 견지하면서도 관능적 의식을 경시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자유로운 방식의 울음」이 시적 수사의 정교함이라는 측면에서 앞선 작품들보다 탁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이 작품의 관능적 정신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독자는 마지막까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사람을. 참고 있는 사람을” 향하는 시선을 확인한다. 이 시선이 바라보는 것은 타인의 얼굴이다. 한편 ‘우는 자’에게는 타인이 시선을 향하는 장소도, 자신이 견뎌내야 하는 장소도 피부다. 그런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 또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또한 자신이 말 건넬 때 독자 또한 그 말을 들어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관능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김언의 시는 고백에 대한 놀라운 표현이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하나의 원칙만은 지속하고 있다. 그것은 끝까지 마주한다는 것이다.

박동억 ㅣ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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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