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23
Extra Form Output
저자 권현형 

 

 

 

 

토끼는 달에도 살고 흰 눈 속에도 산다

 

 

 

 

  겨울 저녁의 모자는 정신을 담기보다 현실을 담는다. 토끼는 개종한 덕분에 기다란 두 귀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겨울나무의 미세하고 가느다란 촉수, 예민한 감촉 덕분에 하늘의 피부가 더 두꺼워졌다. 하늘의 현실이 더 깊어졌다. 모자를 쓰고 겨울을 여행하는 자는 계절과 개종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토끼처럼 긴 안테나를 갖게 된다. 눈사람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 사람에게서 “눈빛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토끼를 닮은 겨울 여행자의 두 귀의 쓸모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새벽에 청력 상실과 이명 진단을 받은 뮤지션의 음악을 들었다. 코펜하겐 출신의 싱어송 라이터 ‘In Memoirs’의 음악에도 희망과 두려움과 난청의 현실이 담겨 있다. 한파가 몰아닥친 새벽의 난청을 해석해서 수첩과 손바닥에 옮겨 놓았다. 옮겨 놓은 새벽이 흐려지거나 지워질까 봐 아라베스크 무늬를 가진 모자의 안쪽에 라벨처럼 새벽을 조금 찢어서 붙여놓았다. 토끼를 닮은 겨울의 기나긴 귀를 방한 모자로 다 덮어씌울 수 있을까?

  대추를 달이다가 주전자를 태워 먹은 것도 현실, 음악에 몰입하다가 물을 태운 것도 현실, 오늘부터 운전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언 땅 위에서 고철 덩어리를 한번 몰아봐야겠다. 늘 한쪽은 공중에 떠 있는 발바닥이 대지에 밀착되어야 한다. 브레이크와 액셀 사이, 멈춤과 나아감 사이에서 유연하게 움직여 봐야겠다. 마흔인데도 눈이 오니까 술을 한잔하고 싶다는 문자를 받았다. 오십이 되어도 육십이 되어도 누구나 눈이 오면 술 한잔하고 싶지 않을까. 망자들도 눈 오는 날에는 술을 한잔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눈이 오는 날이면 술 한잔하고 싶은 것도 현실, 사라진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도 현실이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아 

내 귀에도 라벨을 붙여보기로 한다

  

  언젠가 골이 시려 모자 대신 머릿수건을 쓰고 잔 허름한 겨울 저녁도 있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될까 봐 방문을 빼꼼 열어놓고 자다가 머리가 너무 시려 수건을 쓰고 잤던 기억을 불러 세운다. 편도나무를 불러 세운다. 팽나무를 불러 세운다. 올리브나무를 불러 세운다. 돌아다니는 벽을 천장을 불러 세운다. 언어보다 뿌리가 깊은 삶을 불러 세운다. ‘고요’라는 남의 닉네임을 부러운 마음으로 불러 세운다. 이상한 나날들이 계속 흘러간다. 돌아오는 나무마다 귀퉁이가 조금 잘려나간 낡은 라벨을 붙여 놓아야겠다. 어떤 선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 후, 어떤 무늬가 지워지는 경험을 한 후 내가 간절해졌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아 내 귀에도 라벨을 붙여보기로 한다.

  클로드 모네는 공기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 또한 공기와 기분을 언어로 그리고 싶다. 시인 또한 불가능한 것을 추적하는 사람이다. 집요한 언어의 추적자가 되어 눈이 분홍색인 토끼 한 마리를 기르고 싶다. 흰 무와 꽃과 트라이앵글을 좋아하는 낱말로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토끼 한 마리를 어디서 데려오지? 토끼는 달에도 살고 흰 눈 속에서도 산다. 신통한 토끼여, 나는 너의 안테나같이 높은 두 귀, 경청하는 두 귀를 좋아하는 낱말로 삼겠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미션(mission)으로 삼자꾸나. 누구의 노예가 아닌 누구의 주인도 아닌 상태를 수행하자. 제수이트 사제의 귀를 닮았을 너. 예루살렘이 고향인 토끼를 한 마리 기를 생각이다.

 

  토끼에 관해서라면 그밖에도 할 말이 많다. 어릴 때는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당겨야 잠이 잘 오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왜 꼭 입이 포근해야 잠이 잘 왔을까. 나를 길러 주신 외할머니께 토끼잠을 잔다고 잘 때마다 놀림을 받았다. 자리물, 자리끼라고 하던가, 머리맡에 둔 물그릇의 물이 아침에 일어나면 살얼음으로 변해 있을 정도로 방 안 공기는 차가웠으나 방바닥은 뜨끈했던 유년의 단칸방에서는 내가 토끼로 변신해야 했다. 잘 때도 코가 시렸기 때문이다.

  유년의 내 주변에는 토끼로 변신한 아이들이 많았다. 외할머니께 자주 보내오던 큰외삼촌의 우편물 주소지는 부산진구였다. 부산진구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강릉으로 도로 귀향한 그는 강릉 시립도서관 아랫동네에서 생업으로 토끼를 기르기 시작했다. 봉지 쌀을 자주 사다 먹던 무렵, 외할머니가 귀한 쌀 대신 쑨 밀가루 풀죽을 군말 없이 들이켠 후 새벽마다 새파란 연장을 들고 노가다 일을 나가던 큰 외삼촌의 역경은 결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전설의 시간 속 고등학교 시험 기간, 경쟁이 치열한 시립도서관에 자리를 맡기 위해 큰 외삼촌 집에 전날 밤 찾아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미처 장판을 깔지 못한 그들의 방은 구들장을 민낯으로 내밀고 있었다. 구들장 위에서 외숙모가 차려준 저녁을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30촉짜리 희미한 백열전구 아래 뭉툭한 손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외삼촌의 가족들이 고흐의 그림 속에 사는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

  세간의 소란 속에서 잠시 떠돌던 눈이 후유증처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콘크리트 바닥 귀퉁이에 일 인분의 이불 크기만큼 남아 있다. 잠시 흰 토끼 생각을 했다. 가만히 있을 때도 토끼의 두 귀는 티베트 사람들의 오색 깃발인 타르초처럼 펄럭인다. 오색 빛을 경전이라고 믿는 만년설 아래 사람들의 손도 뭉툭할 것이다. 긴 겨울이 지나면 여행자들 사이에 입소문 난 레(Leh)라는 곳을 가보고 싶다. 지프(zeep)차를 타고 로컬 버스를 타고 그러고도 걸어서 해발고도 5000미터를 두 번은 넘어야 하는 여정을 감행할 것이다. 잠깐 찾아온 여름이면 만년설에도 꽃이 필 것이고 길이 생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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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l 

1995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2013년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문학도서), 편저 『김영태 시선 초판본』, 공저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ㅡ김수영 50주기 기념시 해설집』 등이 있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간지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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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