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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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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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시인] 김상혁
  신작시: 한 세계 / 자장가 / 잘못 살았다고 생각한다

  자선시: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 / 엄마의 독

 
  [시인론] 황사랑 “공백으로 완성되는 이야기” 

 

 

 

 


 신작시 


 

 

 

 한 세계    

  

 

      

  

 

붉고 푸르스름한 저물녘인 것

그런 저물녘에 아파트단지와 공원을 잇는 육교

위를 걷는 것 그 적당히 높은 곳에 마침 혼자인 것

힘 빠진 저녁 빛들이 이마에 잠깐 모였다 떨어지므로

나는 묘하게 칠이 벗겨진 채로 혼자인 것 얼룩처럼

조용한 모든 것 좀처럼 누리기 힘든 한순간에

 

육교 위 내가 찾고 있는 것

눈과 생각으로 따라잡은 것

 

넓고 빠른 팔차선 도로를 지나친 자동차 하나

퇴근 시각부터 다음날 출근 시각까지 자는 동안을 빼면 내 시간은 그럼 얼마가 남았나 차 안에서 혼자 조용한데 혼자 부산한 마음인 것 지금 언니 얼굴이 보고 싶은 것

 

좀 돌아가는 육교를 두고 서둘러 무단횡단하는 어린이 하나

집에 있으면 학원 가기 싫고 학원 가면 집에 오기 싫은

앞일 같은 거 잘 모르겠고 좋은 것 싫은 것 한데 모아두고 싶은 마음인 것 당장 배고프고 당장 신나는 것

 

괜히 육교 위에서 울 뻔했던 것

괜한 슬픔을 눈과 생각으로 막아선 것

 

강 건너 김포 하늘에서 다가오는 느린 비행기 하나

아주 새로운 곳 아주 낡은 곳도 아닌데 나름 기쁨을 찾는 마음인 것 흉물이고 쓸모없어 하나둘 철거되는 육교를 배경 삼아 아직도 편지 건네고 이별하고 눈물까지 흘리는 어떤 화면 속 인물에게 진심인 것 한편

나의 세계는 아니어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 조깅하는 이웃들 보고 미소 짓게 되는 애매한 현실인 것

 

 

 

 

 

 

 

 

 

 

 



 

 

 자장가     

     

 

 

  

 

네가 잠들면 너에 대하여 나는 하는 일 없네

나의 목소리가 열린 어깨처럼 환해지는데

나라는 밧줄을 너 없는 바닥까지 늘어뜨리네

 

(우리는 어제 싸우고 오늘 싸웠지

화가 안 풀린 날은 밥상 앞에서 밥알 세는데

끈기 없는 생활이 꿈의 바닥에 쏟아져 있다

부족한 사랑은 꼭 비유되더라,

더 늦은 밤으로 도망치더라)

 

네가 잠들면 너에 대하여 나는 하는 말 없네

나의 침묵이 열린 가슴처럼 들뜨는 중에

나라는 밧줄을 너 없는 바닥까지 늘어뜨리네

 

(뭐든 해주는 사람이란 얼마나 좋은지

오라면 오지 여기 먹으라면 먹지

혼자서 야근하고 들어와 식은 아침밥 긁어대는 사랑의 위장아 너는 이런 말도 하지

너 같은 거 죽어버려

처음 우리 만나던 그때처럼!)

 

네가 잠들면 비로소 널 구해주고 싶네

나라는 썩어버린 밧줄을

너 없는 바닥까지 늘어뜨리네

 

 

 

 

 

 

 

 

 

   

 



 

 

 잘못 살았다고 생각한다

       

   

    

      

 

최정례 선생님 죽었을 때

아주 잠깐인데 그냥 나도 죽을까 생각했어요

친한 적 없는데 언젠가 대학로 어느 술집에서

지금 아내랑 우연히 최정례 선생님한테 인사했거든요

저희 결혼합니다, 이쪽이 잔디예요, 아시죠?

했거든요, 그런데 다짜고짜 아내더러 너는 왜

이런 애랑 결혼을 하니, 하고 웃으시는데 아무래도

진심 같더라고요, 그렇다고 결혼 안 할 건 아니라서

그러고 크게 웃으시니까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고

속으로 맞는 말 하시네 싶더라고요, 사람 잘 보네?

싶어서 저도 같이 웃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분 시를요 나중에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읽다가

울겠더라고요 정말 나중에 꼭 이런 거 써야지 했거든요

얼마 전 읽은 황인찬 시에 이승훈 선생님이 나오길래

용기 났어요 저도 써봅니다 최정례 선생님 죽었을 때

집에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어쩐지 발 주무르면서

혼잣말로 아이구, 아이구 했거든요 그래서 죽은 사람

시집 만지는데 글자 하나 문장 한 줄이 아까운 거 있죠

표지도 귀하고 표지 그림도 귀해서 저린 발 만지듯

했거든요 동네서 술 마시는데 앞에 앉은 누나가

토지문화관에서 귀신 봤다 하더라고요 그래요?

내가 어린애처럼 정말 누나, 귀신이 세상에 있어요?

취하지도 않았는데 거듭 물었더니 있지, 왜 없니

하는데 좋더라고요 사람 죽으면 다 끝이고 먼지다

알고 살지만 보세요 선생님 저 잘 살고 있습니다

잔디도 선생님 시 좋아하고 갑자기 아이도 낳았거든요

친한 적 없는데 사람 잘 보는 선생님 덕에 제가

매일 조심하며 지내고 있다 말씀드리고 싶었거든요

 

 

  

 

 

 

 

 

 

 

 


 자선시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

 

 

 

 

 

 

오래전에 죽은 할머니가 어디 산책하고 돌아온 것처럼 현관문 열고 들어올 때 죽도록 소리를 지를지 그녀를 안아줄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

 

더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 위독하니 무슨 병원 찾아가 손 한번 잡아주라 그녀가 조심스레 부탁할 때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릴지

이 불길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지는 또 당신의 선택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쏟을 시간과 정성 다 모아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다 죽은 영혼 앞에 한 다발 꽃으로 엮어 가져갈 때

당신은 세계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지 아니면

이 세계가 선한 사람을 나약한 사람으로 하나둘 대체하고 있다고 느낄지

 

나쁜 아버지가 죽고 나쁜 어머니도 죽었는데 그들이 내 강아지 짖는 문밖에 저녁으로 돌아올 때, 현관문 열고 나가서 멀어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확인할지 블라인드 내리고 숨죽일지는 당신의 선택

 

자식도 없으면서 자식 잃은 부모 마음 운운하는 친구는 너무 시끄럽고

무름병 걸린 과실수에서 성한 열매 골라내는 이웃은 너무 평화롭다 느끼는 당신에게

오늘 하루 잘 견딘 선물로 술 한 병을 줄지 조용한 문장 하나를 줄지도 역시 스스로의 선택

 

그러다 화구 속에서나 뜨거워 잠에서 깰지 아니면 사는 동안 무슨 이야기라도 될지

하여튼 할머니 할아버지는 있던 데로 돌아갔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온 당신이 과연 어떤 영혼을 눈 비비게 만드는 먼지가 되느냐

 

―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3)

 

 

 

 

 

 

 

 

 

 

 


 

 

 

 엄마의 독

        

   

    

 

 

시가 될 만한 상황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젊은 작가는 큰일이다 하지만 동생이 곧 죽는다는 사실은 더없는 진실이다

더 큰일은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며 가족을 위로하는 동생 목소리에서 한 치의 의심도 느낄 수 없다는 것

병상에 누워 숨 헐떡이며 아주 나중에 보자고 그가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때 ‘어째서 형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지? 삼 남매를 낳느라 뼈가 삭아서 작은 화분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말라빠진 노인을!’ 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그렇지만 동생아, 날 적부터 내장이 온통 망가져 죽어가는 강아지 새끼와 다를 바 없던 네가,

세상 멍청한 우리 어머니가 주는 초콜릿, 주스, 과일을 거절할 줄만 알았더라면 형과 누나보다 세상을 먼저 뜨는 일은 없었을 텐데

동생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엄마의 독(毒)을 덥석덥석 받아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슨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조금 먹는다고 별일 있겠어? 아이가 행복해하잖아!’ 생각하며 자기 사랑에 빠져 있었다

(땀흘리며 열심히 먹는 동생의 살진 얼굴이 떠오른다

아끼는 사람을 하나의 커다란 얼굴로밖에 회상하지 못할 때 그는 내 감정으로부터 밀려나고 만다)

비참한 삶에 대해 동정심을 잃어가는 젊은 작가는 감동 없는 글만 쓰므로 큰일이다

더 큰일은

동생 시신을 태우고도 어머니가 최고로 불쌍히 여긴 사람이 실은 어머니 자신이라는 것, 하지만 그가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은 더없는 진실이다

  

―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3)

 

 

 

 

 

 

 

 

 

김상혁  l

2009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가 있음.

 

 

 

 

 

 

   


 시인론 / 황사랑  


  

 

 

 

 

공백으로 완성되는 이야기

 

 

        

 

 

  김상혁 시인은 섬세한 이야기꾼이다. 시인이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문학동네,2016)에서 보여준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은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현대문학, 2019)을 거쳐 마침내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3)에 도달했다.1)

  그의 최근 시집은 독자가 이야기를 통과하는 과정을 보다 매끄럽게 빚고 있다. 2시집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진 속에 있다고 치자”(「그렇다고 치자」), “지나치게 크게 태어난 한 여자를 상상해보자”(「상상」) 등 시인이 직접 독자의 손을 잡고 시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형태였다면, 그의 최근작들은 시인의 얼굴을 가리운 채 독자들에게 곁을 더 많이 내어주는 형태이다.

   

시가 될 만한 상황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젊은 작가는 큰일이다 하지만 동생이 곧 죽는다는 사실은 더없는 진실이다

더 큰일은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며 가족을 위로하는 동생 목소리에서 한 치의 의심도 느낄 수 없다는 것

병상에 누워 숨 헐떡이며 아주 나중에 보자고 그가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때 ‘어째서 형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지? 삼 남매를 낳느라 뼈가 삭아서 작은 화분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말라빠진 노인을!’ 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그렇지만 동생아, 날 적부터 내장이 온통 망가져 죽어가는 강아지 새끼와 다를 바 없던 네가,

세상 멍청한 우리 어머니가 주는 초콜릿, 주스, 과일을 거절할 줄만 알았더라면 형과 누나보다 세상을 먼저 뜨는 일은 없었을 텐데

동생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엄마의 독(毒)을 덥석덥석 받아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슨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조금 먹는다고 별일 있겠어? 아이가 행복해하잖아!’ 생각하며 자기 사랑에 빠져 있었다

(땀흘리며 열심히 먹는 동생의 살진 얼굴이 떠오른다

아끼는 사람을 하나의 커다란 얼굴로밖에 회상하지 못할 때 그는 내 감정으로부터 밀려나고 만다)

비참한 삶에 대해 동정심을 잃어가는 젊은 작가는 감동 없는 글만 쓰므로 큰일이다

더 큰일은

동생 시신을 태우고도 어머니가 최고로 불쌍히 여긴 사람이 실은 어머니 자신이라는 것, 하지만 그가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은 더없는 진실이다

ㅡ「엄마의 독」 전문

    

  시의 화자는 병실에서 죽음을 앞둔 동생의 곁에 있다. 시인은 가족이라는 뗄 수 없는 존재들을 등장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더없는 진실이다.”, “한 치의 의심도 느낄 수 없다”와 같이 시의 초반부터 명료하게 반복되는 확언을 통해 우리는 죽어가는 가족의 곁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동생의 곁에 선 화자의 목소리는 서늘하기만 하다. 가족을 위로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동생을 보면서도 그는 동생을 죽게 만든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동생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세상 멍청한 우리 어머니”이다. 엄마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동생에게 해가 되는 독들을 아낌없이 먹여주었고, 동생은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다. 시인은 ‘엄마’와 ‘동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기 연민에 빠진 인간과 의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무비판적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갉아먹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의 비극적 결말이 더욱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동생이 죽고 나서도 엄마의 독은 결코 해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최고로 불쌍히 여긴 사람이 실은 어머니 자신”임을 볼 때 엄마는 무지와 자기연민이 만들어낸 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엄마’와 ‘동생’의 이자 관계가 만들어내는 탈출구 없는 불가능성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김상혁은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내 감정으로부터 밀려나고 만다”는 화자의 모습처럼 이 역시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태도를 통해 독자는 언제든 이야기로부터 밀려나와 현실에서 시를 바라볼 수 있다.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독자들이 오고 갈 공백을 만들어 두는 것은 김상혁의 시가 가진 강점이다. 시인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가 아닌 곳곳이 비워진 세계에서 읽는 이들은 긴장을 덜어내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자장가」 역시 ‘너’와 ‘나’의 공존이 불가능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의 화자는 ‘네’가 눈을 감고 나서야 움직인다. 두 사람이 깨어 있는 시간은 다툼만이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네’가 잠이 들고 나면 화자는 “목소리가 열린 어깨처럼 환해지”고 “침묵이 열린 가슴처럼 들뜨”게 된다. 하나가 잠들어야만 다른 하나가 숨을 쉬게 되는 너와 나의 관계는 ‘우리’의 시간조차 어긋나게 하는 것이다. “늦은 밤으로 도망치”거나 “혼자서 야근하고 들어와 식은 아침밥 긁어대는”것처럼 이미 어긋난 둘의 톱니바퀴는 계속 삐걱대며 움직이고, 너와 나는 영원히 마주 볼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그러나 불가능성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선택하고 싶어진다. “나라는 썩어버린 밧줄”을 붙잡아 세계를 계속 유지시킬지, 아니면 너에게 결별을 고하고 세계의 끝을 불러올지 말이다. 독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의 이후를 상상하게 되고, 그렇기에 김상혁의 시는 불가능성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실제로는 가능성을 향해 있다.

   

오래전에 죽은 할머니가 어디 산책하고 돌아온 것처럼 현관문 열고 들어올 때 죽도록 소리를 지를지 그녀를 안아줄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

 

더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 위독하니 무슨 병원 찾아가 손 한번 잡아주라 그녀가 조심스레 부탁할 때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릴지

이 불길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지는 또 당신의 선택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쏟을 시간과 정성 다 모아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다 죽은 영혼 앞에 한 다발 꽃으로 엮어 가져갈 때

당신은 세계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지 아니면

이 세계가 선한 사람을 나약한 사람으로 하나둘 대체하고 있다고 느낄지

 

나쁜 아버지가 죽고 나쁜 어머니도 죽었는데 그들이 내 강아지 짖는 문밖에 저녁으로 돌아올 때, 현관문 열고 나가서 멀어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확인할지 블라인드 내리고 숨죽일지는 당신의 선택

 

자식도 없으면서 자식 잃은 부모 마음 운운하는 친구는 너무 시끄럽고

무름병 걸린 과실수에서 성한 열매 골라내는 이웃은 너무 평화롭다 느끼는 당신에게

오늘 하루 잘 견딘 선물로 술 한 병을 줄지 조용한 문장 하나를 줄지도 역시 스스로의 선택

 

그러다 화구 속에서나 뜨거워 잠에서 깰지 아니면 사는 동안 무슨 이야기라도 될지

하여튼 할머니 할아버지는 있던 데로 돌아갔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온 당신이 과연 어떤 영혼을 눈 비비게 만드는 먼지가 되느냐 

ㅡ「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 전문

     

  공백을 통해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은 위의 시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시는 죽은 이들과 얽힌 이야기들을 독자의 앞에 데려다 놓는다. 죽은 할머니가 귀신의 형태로 집에 오는 사건, 할아버지의 임종 직전에 일어나는 만남, 죽은 영혼 앞에 바쳐지던 시간을 펼쳐놓으며 시인은 독자들을 불러모은다. 여기에 다 같이 모여 나누기에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김상혁의 시가 참여적인 형태를 띠는 것은 시에 나타나는 선택과도 관련이 있다. 시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두 가지 선택 중 옳은 선택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을 골라도 도덕적인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생과 사가 얽힌 보편적인 이야기들은 독자에게로 가 그들만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의 과정을 통해 읽는 이들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삶을 이야기로 바꿀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선사하는 공백은 시의 마지막 행에 가서 힘을 발한다. “바람 부는 거리로 나온 당신이 과연 어떤 영혼을 눈 비비게 만드는 먼지가 되느냐”는 참여의 두 가지 층위를 보여준다. 첫째는 ‘당신’ 이라고 지칭되는 독자에게 ‘먼지’가 될 것을 바라는 윤리적 차원의 참여 촉구이며 둘째는 ‘먼지가 되느냐’ 이후의 시행을 독자들이 직접 채울 수 있게 하는 실제적 차원의 참여 유도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실제적 층위이다. 시를 따라 읽다 보면 마지막 연에만 두 가지 선택지가 아닌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 있는데, 시인은 “먼지가 되느냐”의 이후를 공백으로 두어 시의 완결을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참여의 형태이다. 시인에게 참여는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각각의 책임을 쥐고 천천히 나아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는 뛰어난 한 사람을 믿기보다 평범한 여러 사람을 믿는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에서조차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이후를 맡기고 미래를 기꺼이 부탁하며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백의 시학은 시의 창작 방식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세계를 마주하는 태도에도 드러난다. 김상혁의 삶은 집요하지 않다. 그는 삶을 물고 늘어지며 질문하고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이야기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힘 빠진 저녁 빛들이 이마에 잠깐 모였다 떨어지므로

   나는 묘하게 칠이 벗겨진 채로 혼자인 것 얼룩처럼

   조용한 모든 것 좀처럼 누리기 힘든 한순간에

 

   (…)

  

   강 건너 김포 하늘에서 다가오는 느린 비행기 하나

   아주 새로운 곳 아주 낡은 곳도 아닌데 나름 기쁨을 찾는 마음인 것 흉물이고 쓸모없어 하나둘 철거되는 육교를 배경 삼아 아직도 편지 건네고 이별하고 눈물까지 흘리는 어떤 화면 속 인물에게 진심인 것 한편

나의 세계는 아니어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 조깅하는 이웃들 보고 미소 짓게 되는 애매한 현실인 것

ㅡ「한 세계」 부분

   

  신작시 「한 세계」는 시인이 가진 비움의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시는 해가 지는 시간을 배경으로 ‘힘 빠진 저녁 빛’과 같은 슬픔을 보여준다. 이는 시인이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색을 띤다. “너무 슬플 땐 무서운 게 없더라”(「슬픔의 왕」,2시집), “나한테 왜 그랬어!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 소릴 지르고”(「길은 어떻게든 다시」,3시집)와 같은 빼곡하고 짙은 슬픔이 아닌 “묘하게 칠이 벗겨진” 화자의 모습은 슬픔마저도 사이가 비어있는 채로 풍화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넓은 도로를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나, 급하게 무단횡단을 하는 어린이 등 육교 위에 홀로 서 있는 화자에 비해 세계는 바쁘게 움직인다. 세계와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기에 화자는 색이 바래고 괜히 슬퍼진다. 그러나 그는 희끗희끗해진 슬픔을 애써 메우려 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기쁨을 찾”는다. 나와 떨어져 있는 “어떤 화면 속 인물”이나 “조깅하는 이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세계를 응시하는 화자에게서 불안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과 세계 사이의 공백이 커질지라도 그 공백을 채워줄 이들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혁의 시가 공백이 있음에도 무책임해 보이지 않는 것은 허무와 슬픔을 겪으면서도 시인은 끝내 이야기를 이어나가리란 확신이 있어서이다. “사람 정말 싫다”,“세상 참 싫다”(「노크」)며 허무 속에 빠지다가도 그를 건져 올리는 다정한 손길에 의해(「노크」), 자꾸만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들에 의해(「잘못 살았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묵묵히 일어나 이야기를 만든다. 불가능성의 세계에서 유령처럼 투명해진다고 하더라도(「유령이 없다면 슬프다」) 이야기로 들어올 이들을 믿으며. 누구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김상혁의 시집은 2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문학동네, 2016), 3시집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현대문학, 2019), 4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3)이다.

 

 

 

 

 

 

 

 

 

시인론_황사랑.png

황사랑  l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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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