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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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ㅡ 울타리의 체제 혹은 체계
장미는 어느 한 귀퉁이가 쓸쓸하고 아름다운 이름. 사랑과 이별, 축하와 애도, 미안과 안녕의 다른 이름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는 장미이다”(거트루드 스타인)라는 말은 아마 장미에 따라붙는 수많은 수식어와 이야기를 통칭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장미는 어떻게 그 많은 운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걸까. 외모와 향기 때문일까. 아름다운 끝에는 항상 시기와 질투가 따라붙는 것처럼. 한없이 아름답다는 말은 한없이 슬프다는 말로 이어지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대신 전해 주던 한 다발의 꽃. 거리가 온통 꽃을 들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서점 앞에서 카페 앞에서 공원 앞에서 사람이 사람을 기다리던 날들에 꽃이 함께 있었다. 꽃을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꽃 속이었고 나비가 몰려들기도 했다. 흥취라고 해야 할까, 거리도 사람도 모두 향기로 채워지던 때가 있었다. 있, 었, 다. 다만 있, 었, 다고.
지금은 어떤가. 가로수마다 화단이 조성되어 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비록 생화라고 해도 인공미에 가깝다. 자연미와 인간미는 상통하는 지점이 있어서 인간은 자연스러운 미에 더 끌린다. 자연스럽다는 건 뭘까. 거리엔 꽃 대신 강아지를 안고,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살아 있는 온기를 느끼고 싶은 걸까. 이제 사람들은 은은하게 눈을 감는 향기보다 바로 곁에서 느낄 수 있는 숨소리와 온기를 더 원한다.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위로를 하고 싶은 것이다. 개인의 영역과 생활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다. 그래서 ‘당신’과 ‘우리’보다는 ‘나’와 ‘자기’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는 시절이 되었다. 인터넷이나 매체에서도 ‘자신을 위해 사는 일’에 더 많은 기사와 에너지를 쏟아붓는 듯하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이 세계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상을 한다. 외롭도록 무서운 시절은 언제나 가시를 뻗친 후에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인지 이 세계는 온통 시끄러운데 한없이 적막하다.
장미 빌라. 그 빌라 옆에는 수선화 아파트와 개나리 아파트도 나란히 살고 있었다. 장미 빌라에 살던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삼십 년 전엔 빌라에 산다는 게 꽤 있어 보이고 조금 산다는 집 같아서 부럽기까지 했다. 나도 언젠가 빌라에 사는 날이 올까 그런 생각으로 높은 벽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작고 아늑한 세계. 그 집 안으로 들어가면 세계는 바깥과 달라 보였다. 지금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거나 획일적인 닭장 같다고도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오롯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살고 있는 듯했다. 낡고 거친 습성들로 채워진 지상의 어지러움을 순식간에 잊게 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선 들락거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되었고, 온갖 벌레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나만의 공간을 갖기 어려운 환경이다. 지금 나는 횟수로 이십칠 년째 한 빌라에서 살고 있다. 변화는 환경에서 환경 속의 인간으로 옮겨간다. 지금은 아파트나 빌라가 아니라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공간의 변화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으로 진화했다. 대면보다는 비대면적인 삶을 더 많이 추구 하고 누리는 현실이다. 그래서 글을 참는다는 말은 말을 참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소셜 네트워크라는 공간은 글의 가치성보다는 말의 일회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자고 나면 수많은 글(말)이 쏟아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일반화하기는 힘들다. 당연히 문학성이 높은 글 또한 실린다. 하지만 대체로 자신의 일상이나 감정을 툭 던져놓고 사라지기 일쑤인 글들이다. 무슨 음식을 먹고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시시콜콜 털어놓는다. 마치 커피숍에 앉아 대화하는 것처럼. 일대일 대화가 일대 다수의 대화로 옮겨갔을 뿐이다. 어떤 날은 온통 가시 돋친 말들로 도배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감정에 동요하는 쪽과 무관심한 쪽으로 나뉜다. 어느 쪽도 논란을 피해가지 못한다. 동요하는 쪽에서는 흑백의 논리로 싸우고 무관심한 쪽에서는 그 둘이 합심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어느 쪽도 장미 덩굴의 가시가 뻗치지 않는 곳은 없다. 우리는 이제 네트워크라는 울타리에 갇혀 숨을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우리는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던 시대를 지나 디지털 세계에서 잊힐 권리를 외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계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넘어서 존재의 잊힐 권리를 주장하는 세계에 와 있다. 죽어도 끊임없이 내 이름이 불리는 세계. 꽃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피는 것처럼 인간은 이제 디지털 세계에서 끝없이 부활하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뚜렷한 명제에서 점점 모호해지는 인간이라는 생명체. 물질과 영혼을 넘나들며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사건들을 접한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라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꿈꾼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인간이 쳐 놓은 어떤 울타리에 의해 부서지고 망가지고 다시 조작되면서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장미 넌출이나 끊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울타리 너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웰의 장미』(리베카 솔닛),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라고. 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삶과 작가적 철학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이면서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닭을 키우고 꽃을 심는 일에 매우 골몰한 사내였다. 그렇다면 장미와 사회주의는 어떻게 한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이 책에서 오웰의 글은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거짓말과 프로파간다(그리고 대충 넘어가기)로 인한 언어와 정치의 타락, 정치적 자유의 근간인 프라이버시의 잠식 같은 주제로 널리 알려졌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오웰의 무정부주의자 친구 조지 우드콕은 “그의 자기 재생 능력은 그가 평범한 것,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경험, 그리고 특히 자연과의 접촉에서 누리는 기쁨에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라는 말로 오웰이 자연에서 누리고 있는 기쁨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어떤 체제와 신념 사이에 감정의 변화를 중화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치적 체제와 시대적 사회체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와 맞지 않든 불공정하든지 간에. 그곳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일 또한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다. 체제와 체계를 위해 싸우되 자연의 감각을 잃지 않을 때 행복이나 기쁨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또 마이클 폴란은 『욕망하는 식물』에서 말한다. “우리는 길들이기라는 것을 우리가 다른 종에 대해 행하는 무엇으로 생각하지만, 반대로 특정한 동식물이 살아남기 위한 영리한 진화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행해온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오웰의 장미』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물체를 길들였다기보다 오히려 생물체가 인간을 길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제는 이렇게 뒤바뀐 걸 모르는 채 흘러가기도 한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울타리는 썩어간다. 장미가 울타리를 덮어 울타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모르게 된다. 울타리와 장미의 관계는 서로를 알아차릴 만큼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자리를 지키면서 각자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때 체제는 다양성과 모순을 알아차리며 균형을 이루려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시가 많은 사람.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오기도 힘들고 내 울타리를 내가 넘어가기가 힘든 사람. 원칙주의자이면서 이중적인 면도 없지 않으니까. 상황에 따라 신념이 흔들리기도 하니까. 나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그 다름이 내가 지켜온 어떤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가치관이나 신념이 어긋날 때 지금까지의 나는 돌아서는 쪽을 택했었다. 그래서 어떤 관계는 더 이상 기차가 들어오지 않는 폐역으로 변하기도 한다. 차단기는 영원히 올라가지 않은 채 계절마다 잡풀로 채워지는 풍경. 그 잡풀 사이로 장미가 핀다면 나는 좀 달라졌을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말이다. 장미가 오고 장마가 오고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돌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때 가시가 있어도 꽃이 더 아름답게 돋보이는 건 아닐까.

김효선 l
2004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문화체육관광부우수도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합동시집 『시골시인-J』가 있음. 〈시와경계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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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