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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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도현 

이달의시인_안도현.png

 

 

  [이달의 시인] 안도현
  신작시: 북천 / 북산 / 북문

  자선시: 모래무덤 / 마음에 대하여

 
  [시인론] 이대흠 "안도현 시에서의 북쪽의 장소성"

 

 

 

 


 신작시 


 

 

 

 북천    

  

 

      

 

 

  경남 하동에도 있는 북천 경북 상주에도 있는 북천 강원도 고성에도 있는 북천

  지명에도 있고 하천명에도 있고 간이역 이름에도 이대흠의 시에도 스님 법명에도 있는 북천

 

  북천의 뒷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살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출시되고 아이스크림 장사보다 참나무 장작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은 북천 청둥오리 떼를 잡아 연탄불 위에 굽는 저녁이 왁자할 것 같고 큰 강의 얼음장은 국어대사전보다 두꺼울 것 같고 이런 추측은 북천이니까 가능할 것 같고

 

  꽁꽁 얼어붙은 북천에는 투기꾼들이 묵을 여관이 없고 고층아파트를 짓지 않으니 은행에 대출하러 갈 일이 없고 은행원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고 연대보증 부탁하는 시간에 처마 끝 고드름을 따먹을 수 있어 좋고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동요를 부를 수 있어 좋고 북천의 언덕에서는 마을의 지붕이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처럼 다 보이고

 

 북천 주변의 산골짜기에는 자작나무가 살고 산꼭대기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고갯마루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경사지에도 자작나무가 살고 산속의 화전민도 자작나무를 때고 산속의 사찰에서도 자작나무를 때고 일 년에 딱 한 번 초파일에 절에 가는 여자가 사는 집에서도 자작나무를 땐다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북천에 노천탕이 있나 생각할 것이고 삼복염천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은 북천의 마구간에도 에어컨이 들어오나 걱정할 것이고 천상병의 시를 읽어본 사람은 북천이 소풍 가는 곳인 줄 착각할 것이고 부천에 사는 사람은 부천에 왜 기역자가 하나 더 붙었지 하며 의아해할 것이고

 

  나는 북천에서 태어나 보지 못한 사람 북천에 나가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럼에도 친절해져서 북천의 스피커처럼 말한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

 

 

 

 

 

 

 

 

 

 

 



 

 

 북산

     

     

    

 

 

북산은 함경남도 장진군 중남면과 장진면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2,070미터의 산이다 장진은 백석이 함흥에 살 때 장진 산골 날여멕이 바람이 강물을 스쳐와 희미한 선미(仙味)가 구름 우헤 떳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그 장진인데 그가 노루 새끼를 만난 장터에서도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어 넘석하는 거리라고 한 오지다 북산은 부전고원의 남쪽에 있다 부전고원은 개마고원의 서쪽에 있으므로 북산은 그러므로 한반도의 지붕이라 해도 되고 백두대간의 왼쪽 어깨뼈라 해도 좋겠다 북산에서는 벼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거머리나 벼메뚜기를 구경하기는 힘들 것 같고 감자밭이나 옥수수밭을 둘러싸고 있는 산중에 늑대 우는 소리는 들릴 것 같다 함흥에서 북산을 가려면 북산의 동쪽 부전호반까지 연결된 송흥선인가 신흥선인가 하는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함흥역 가담역 부민역 장흥역 영광역 풍상역 천불산역 신흥역 동흥역 경흥역 송하역 송흥역 부전령역 함지원역 도안역 부전호반역 그 이름들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는 기어이 낙엽송이나 가문비나무 숲속에 있을 듯도 하다 철도의 일부 구간은 급경사 때문에 인클라인(incline) 장치를 설치했다 하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쇠밧줄철길이라 부른다 산꼭대기에서 늘어뜨린 쇠밧줄이 산허리 경사면에서 쩔쩔매는 기차를 끌어당긴다는 것인지 기차와 기차를 연결한 쇠밧줄이 아래쪽 기차를 끌어당긴다는 것인지 나는 당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북산, 북산, 하면 참 아득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북문

       

   

    

 

      

  눈보라가 들어와서 무릎 꿇고 울던 북문

  오래전 여진족 기마 부대가 들이닥치던 북문

  땔감 장수들이 지게 내려놓고 유곽 쪽을 힐끔 바라보던 북문

  팔목에 쇠갈고리 끼우고 상이군인들이 찾아오던 북문

  현판에 북풍한설이라 쓰고 태평천하라고 읽던 북문

  월북 작가들이 빠져나간 북문

 

  나무들이 발목에 흰 붕대를 감고 산에서 내려오는 북문

  피부가 거친 굴참나무와 화상 자국이 또렷한 노각나무가 사는 북문

  아는 나무보다 모르는 나무가 많아서 좋은 북문

  나 제일 친한 친구의 집 어두운 처마 안쪽이 환하던 북문

  장끼가 떨어뜨린 꽁지깃으로 벽에다 시를 몇 줄 끄적이던 북문

  내가 쓴 시가 하늘로 가서 흰 눈이 되던 북문

 

  늙은 모텔과 고시원의 달방이 즐비한 북문

  냉동 돼지고기 앞다리로 찌개 끓이는 식당이 많은 북문

  고등어를 쌌던 피 묻은 신문지가 날리는 북문

  폐경기 지난 이모가 옥상에서 빨래를 털어 너는 북문

  감나무가 더디게 자라서 감꽃이 늦게도 피는 북문

 

  북문 가까이 얼씬대지도 말라고 하던 북문

  북문의 여자들을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던 북문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눈발이 쏟아지던 북문

 

 

  

 

 

 

 

 

 

 

 


 자선시 


 

 

 

 모래무덤

 

      

 

 

 

  우리가 몸을 섞을 때 정말 짜릿했지

  너는 자주 나의 가슴 위로 스르르 미끄러졌어

  

  냇물이 모래톱에 글자를 적다가 떠나면

  냇물이 만든 문장을 해가 질 때까지 읽었고

 

  너를 만나면 너를 위하여

  발목과 무릎을 떼어 내고 나는

  허벅지까지 서늘하게 도려냈지, 그때

  부드러운 살을 열어주던 너는

  들어가기 딱 좋은 무덤이었지

 

  냇가에서 흰목물떼새의 발자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처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아이를 낳았지

  날개와 날개가 맞닿는 순간의 온도를 체크하고

  별안간의 이별과 망각의 농도를 예측하면서

 

  억새와 갈대와 달뿌리풀과 버드나무가 이주해 왔다더군 그들이 몸속에 이상한 정부를 세웠던 거야 너나 나나 어제보다 오늘이 극한상황이라는 거 몰랐어, 정말

 

  너를 만지는 내 손, 이게 도무지 뭐냔 말이다

  눈송이를 받을 줄 아는 손바닥이 있어도

  허공이 헐거워져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싶은 귀를 가졌어도

  너의 메마른 숨소리 귓가에 쌓이지 않는

 

  모래 속에 몸을 묻을 때

  그때 내 무덤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봐도 좋았으련만

  삼겹살을 굽는 일도 싫증이 날 때쯤 술잔을 버리고 새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 주저앉아 있어 봐도 좋았으련만

 

  자갈은 언제 냇물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잘게 부서지나

  나는 어느 때쯤 물소리를 팔아 거창하게 한몫 벌게 되나

 

 

 

 

 

 

 

 

 

 

 


 

 

 

 마음에 대하여

        

   

    

  

 

  마음이란 게 있어서 마음이 발 달린 짐승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굴러가다가 제일 나중에 가닿고 싶은 그곳을 마음의 처소라고 부르자 더 이상 갈 데도 없고 해야 할 말도 없는 마음이 앞에 앉은 여자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리, 성스러운 것도 속된 것도 없는 마음이 발소리 죽이고 어깨를 낮추고 빈 술잔에 입술을 댔다 뗐다 하는 자리, 이어지지 않았지만 끊긴 것도 없고 풀어놓지 않았지만 묶어 놓은 것도 없는 논바닥의 지푸라기 같은 심정을 마음이라고 부르자 볕 잘 드는 오후쯤에는 마른 들깻대를 털다가 들깨꽃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셋방을 놓을 수 없을까를 생각하고 그 셋방 얻으러 오는 마음에게 셋방 내주는 마음으로 술 마시고 싶은 자 술 마시게 하고 울고 싶은 자 울게 하고 인생 탕진하고 싶은 자 탕진하게 방치한들 어떠리 여기에도 마음이 있고 저기에도 마음이 있는 것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려고 애쓰는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니 창틈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바람의 마음이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끼의 마음이나 바위 속에 식솔들 재워두고 세상 구경 나온 마애불의 마음이나 대처나, 안팎이 없으리 꽃에 손을 대면 그때부터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밥을 입에 대면 그때부터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처럼 마음이여, 가까이 닿으면 금세 사라지는 방아깨비 다리여 멀리 멀어지면 이마로 들이받고 싶은 천둥소리여, 너나 나나 마음이 편지가 아니니 전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연못이 아니니 담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보자기가 아니니 펼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칼이 아니니 새기려고 하지 말 일이다 빨랫줄을 받치고 선 바지랑대의 마음이나 빨랫줄에 몸을 걸친 빨래의 마음이나 다 잇대어 있고 겹쳐 있는 것을 세상 한 바퀴 휘 돌아와 가까스로 알아채는 날이 오면 그 어떤 의도도 목적도 없이 마주 앉아 한 끼 밥을 먹어도 좋으리, 그 어떤 계획도 행선지도 없이 지갑도 카드도 없이 길을 나서는 궁리를 해봐도 좋으리

 

 

 

 

 

 

 

 

 

안도현  l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석정시문학상〉 수상.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시인론 / 이대흠 


 

 

 

 

 

안도현 시에서의 북쪽의 장소성

 

        

 

 

 2022년 12월 6일(화요일)

《공정한시인의사회》 류미야 대표로부터 안도현 시인론 혹은 작품론을 써달라는 청탁(請託)을 받았다. 청탁의 청을 푸를 청(靑)으로 읽고 싶어 하는 나를 보았다. 청(請) 자를 다시 읽으니, 말이 푸르다. 풀싹 같은 말을 내밀어야 하겠구나.

   

  

2022년 12월 18일(일요일)

홉스테드의 문화차원이론를 대입해 보았을 때, 안도현의 시에서는 화자와 대상 간의 권력 거리가 작다. 권력 거리가 작다는 것은 관계가 상하 관계보다는 평등 관계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안도현의 세계 인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안도현의 시에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도 이러한 시각이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안도현의 시에서는 화자가 우위에 있지도 않고, 대상을 지나치게 높이지도 않는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안도현의 시에서는 화자와 대상이 대체로 평등하다. 안도현의 등단작이라고 해야 할,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봉준이 이사람아/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오늘 나는 알겠네”라는 구절에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나는데, 역사적 인물인 ‘전봉준 장군’을 “봉준이 이 사람아”라고 부르는 시적 화자는 한국시사에서 처음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형광등 불빛 따라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나늘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책을 덮고 생각중이다/저 곤충손님들에게는 내가/모기장 안쪽에 있는가”(「모기장 동물원」 부분,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 2004)에서 보이듯, 모기장 안의 인간이 여러 곤충의 구경거리가 된 상황은 역설적이다. 또한 곤충과 인간의 관계가 뒤집어지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충격을 준다. 화자와 대상 간의 권력 거리가 작은 상황에서 화자는 대상을 이해하려고 하고, 갈등하지 않는다.

   

  

2023년 1월 20일(금요일)

오래전에 안도현에 대한 시인론은 썼다. 십 년이 넘었다. 그 때 그는 전주에 있었고, 나는 제주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동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시인’이라고 안도현 시인을 평가했다. 한 사람에 대한 어떤 평가도 그를 가둘 수 없다. 나아가 어떤 메타언어도 명령어가 되어 한 시인의 작품 세계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 대해서나 작품에 대한 글은 그와 그의 작품을 더 자유롭게 놓아주는 쪽이어야 한다.

   

  

2023년 1월 27일(금요일)

안도현 시인의 신작시와 근작시를 메일로 받았다. 신작시 제목은 「북천」, 「북산」, 「북문」이다. 그 중 ‘북천’은 나도 여러 편의 시로 쓴 바가 있어서 눈에 번쩍 들어왔다. 전체적인 제목에 ‘북’자가 들어가 있다. 예전에 썼던 「북항」이라도 시도 있었지. 안도현의 「북항」을 다시 읽었다. 북항, 북천, 북산, 북문은 돌림자가 같은 형제들처럼 보인다.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로 시작하는 「북항」은 목포의 ‘북항’을 배경으로 한 듯 보인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는 북항은 분철식 표기법에 따라 ‘북항’으로 써야 하지만, 연철을 하면 ‘부캉’이 된다. ‘북’자의 종성 ‘ㄱ’과 ‘항’자의 초성 ‘ㅎ’이 만나 축약되어, ‘ㅋ’으로 유기음화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음음론적인 이론을 가져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인이 ‘北’이라는 글자에 끌린 이유가, ‘인생한테 패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으니, 이것만으로도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 그래서 마침내 북항은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이 된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중략)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 「북항」 부분, 『북항』(문학동네, 2012)

 

‘북항’은 너와 내가 헤어진 곳이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자인 나는 너와 헤어지는 게, 인생에서 패하는 것만 같다. 모든 맹서를 저버리고, 배신하거나 배신당하는 북항. 굳이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 같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나는 너와 북항에서 헤어졌다. 그 북항에서는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다.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 뱃고동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북항이다. 그런 북항은 마침내 현실적인 공간을 넘어 상징적 공간이 된다.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은 모두 북항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북항에서의 이별은 화자의 인식에 변화를 줄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용악의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이용악, 「그리움」 부분)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용악의 ‘북쪽’과 안도현의 ‘북항’은 그립고 서러운 곳이다. 거기에는 또 백석의 ‘북관’이 있고, 백석의 「함주시초4-선우사」에 나오는,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쓸쓸한 저녁을 먹는다//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다. 백석의 시에서 보이는 근원적 쓸쓸함이나 원초적 공동체 의식이 안도현의 시에서 곧잘 보이는 것은, 안도현의 백석에 대한 애정과도 관련이 있다. 안도현은 백석을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라고 했으며, “백석을 베끼고 싶었다”고도 하였다.

안도현에게 북쪽은 “봄에 눈이 온다는/물 맑은 청진항 부근에서/꿈의 벌레 같은 눈송이들이/이부자리를 따뜻하게 적시는 밤/아내를 남쪽에 두고/나는 죄짓는 마음도 모르고/헝클어진 머리카락 미역냄새를 맡으면/부끄럼 없이 굵어지는 어깨와 팔뚝/한반도의 허리를 꼭 껴안듯이/더 깊은 신천지 속으로/힘차게 나를 밀어 넣으면/온 바다로 파도치는/청진 여자, 그녀와 하룻밤 자고 싶다”(「청진 여자」 부분)고 표현했던 ‘청진여자’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북쪽은, 인생한테 패했던 이별이 있는 곳이며, 분단 이후 우리 겨레의 반이 있는 곳이고, 반드시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할 나의 절반이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안도현의 북쪽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는 ‘북천’이 있고, ‘북산’이 있고 ‘북문’이 있다. 안도현의 북쪽은 아직은 다 밝혀지지 않는 한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표되는 신작시까지 살펴보았을 때, 안도현에게 북쪽은 이상 공간이자, 현실 공간과 상상 공간이 합쳐져서 낯설고도 정다운 세계를 이루는 공간이며, 또한 역사적 의미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통시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로도 읽힌다. 먼저 「북천」을 보자.

 

북천의 뒷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살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출시되고 아이스크림 장사보다 참나무 장작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은 북천 청둥오리 떼를 잡아 연탄불 위에 굽는 저녁이 왁자할 것 같고 큰 강의 얼음장은 국어대사전보다 두꺼울 것 같고 이런 추측은 북천이니까 가능할 것 같고

 

(중략)

 

나는 북천에서 태어나 보지 못한 사람 북천에 나가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럼에도 친절해져서 북천의 스피커처럼 말한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

- 「북천」 부분

 

북천의 화자는 북천을 가보지 않았고, 추측만 한다. 즉 북천은 상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북천이 너무나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은 구체성 덕분이다. 디테일한 묘사가 북천의 뒷산과 청둥오리와 큰 강의 얼음장까지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풍경이 시의 말미에서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의 세계로 변한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청둥오리 떼가 나는 하늘이 있는 커다란 세계가 마치 손아귀에 쥐어진 조그만 세계로 축소되는 느낌이다. 역으로 말하면 손에 든 조그마한 북천이 한 세계로 그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축소와 팽창이 자유로운 것은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산과 강과 바다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 구슬처럼 축소시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산뜻한가.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에 앞서 북쪽이 지니는 상징성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오행론에 의하면 북쪽은 현무가 있는 곳이고, 검은 물이 흐르는 곳이며, 모든 좌향의 뒷배가 되는 곳이고, 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풍수적으로도 북쪽은 높은 곳, 산이 바람을 막아주는 곳, 조상들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집을 짓거나 무덤을 쓸 때, 북쪽 산에 기대어 남쪽을 향하는 것을 이상으로 본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말은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배산(背山)’은 ‘북산(北山)’을 뜻한다. 배산임수를 다른 말로 하면, 장풍득수(藏風得水)가 된다. 바람을 막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 명당의 기본 조건이다.

안도현의 북쪽도 이런 배산(背山)과 관련이 있다. 북항, 북천, 북문, 북산을 읽으면서, 북(北)과 배(背)와 현무와 종산과 조종산과 검은 강과 비빌 언덕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북쪽은 부모, 고향, 조상, 지혜의 땅이다.

   

  

2023년 2월 11일(토요일)

안도현의 「일기」란 작품을 찾아 읽는다. 안도현의 시에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국화도 사람이고, 사슴벌레도 사람이고, 감나무는 고장나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고, 감나무 그늘도 수리할 수 있는 세계의 것이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고/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든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일기」 전문, 『북항』, 문학동네)

 

시에서 의인법은 흔히 쓰는 비유법이지만,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는 대목은 아무나 상상해 낼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더구나 “지난여름 마루 끝을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다니!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부분,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작과비평사, 2004)쯤을 생각하는 시인의 감각이라야 발견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감나무가 고장 났는데, 그것을 고치러 온 사람이 ‘의원’이다. 따라서 감나무는 고장 난 기계로 보이다가 이내 사람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서 이 시에서 감나무는 고장 난 사람이다. 그런데 고장 난 사람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사람의 그늘은 보이지 않는 그의 내면 혹은 이면을 뜻한다. 혹은 쉽게 찾아내기 어려운 내력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고, 드러나지 않는 사연이라고 봐도 좋겠다. 어떤 사람에게든 눈에 보이는 상처나 이면도 있겠지만, 표면적인 것에 가려진 사연이 또 얼마나 많던가. 이 시에서 화자가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한 걸로 봐서 화자는 감나무의 깊은 상처를 이미 간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대상의 표면만 보고 지나치지만, 속 깊은 사람은 그것의 뒤란까지 살핀다.

그런데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1연과 2연 사이가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을 통해 시의 세계는 더 확장된다. 다음과 같은 황현산의 지적은 예리하다.

 

"그렇다고 해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앞의 빈 줄이다. 짧거나 긴 성찰의 시간이 그 빈 줄 속에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황현산, 「은유의 울타리」 부분

 

1연과 2연 사이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반성하는 자아일 수도 있지만, 제3자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묻는다. 국화꽃과 사슴벌레와 감나무와 감나무 그늘을 생각하다가 밥을 먹는 것은 너무 평이한 일상의 모습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화자가 대답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우리가 가장 중요한 공기와 물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살듯이, 시적 화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며 산다. 그렇지 않는가. 하루에 한 번이라도 국화꽃의 웃자란 눈썹을 잘라주고, 감나무를 고치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를 부탁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2023년 2월 12일(일요일)

안도현의 「북산」은 시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의 시이다. 백석이 살았다는 ‘장진’을 떠올리며, “장진은 백석이 함흥에 살 때 장진 산골 날여멕이 바람이 강물을 스쳐와 희미한 선미(仙味)가 구름 우헤 떳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그 장진인데 그가 노루 새끼를 만난 장터에서도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어 넘석하는 거리라고 한 오지다”(「북산」 부분)라고 한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평북 방언을 그대로 쓰며, 북산의 낯선 이미지를 그린다. 이렇게 그리운 것들을 되새기는 시작 태도는 다음과 같은 산문에서도 볼 수 있다.

 

후배 시인들이 좋다. 나희덕은 가끔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를 해서 좋고, 이병률은 마종기 선생님과 허수경을 잘 챙겨줘서 좋고, 박형준과 김성규는 결혼을 해서 좋고, 이윤학은 내가 심고 싶은 나무를 트럭으로 실어다 붜서 좋고, 문태준은 제주도 카페 마당의 잔디를 잘 깎아서 좋고, 휘민은 동시를 잘 써서 좋고, 이대흠은 장흥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자 해서 좋고, 김수영과 김선우와 김윤이는 몇 년째 연락이 두절되고 있어서 좋다.

- 「자유롭고 독자적인」, 『꽃이 오고 사람이 온다』(모악, 2022)

 

좋아하는 이유를 읽어보면,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마치 사람의 집과 들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북산의 이미지와 닮았다.

   

  

2023년 2월 19일(일요일)

신작시 「북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시상전개 방식을 썼다. 아무래도 서울의 북문인 ‘숙정문’을 의미하는 것 같은 북문의 역사성에 대한 내용이 1연을 이룬다. 그러나 이런 데서도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숙련된 시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의 구체성이다.

 

눈보라가 들어와서 무릎 꿇고 울던 북문

오래전 여진족 기마부대가 들이닥치던 북문

땔감 장수들이 지게 내려놓고 유곽 쪽을 힐끔 바라보던 북문

팔목에 쇠갈고리 끼우고 상이군인들이 찾아오던 북문

현판에 북풍한설이라 쓰고 태평천하라고 읽던 북문

월북작가들이 빠져나간 북문

- 「북문」 부분

 

달리 해석을 하지 않아도, 병자호란과 6.25가 떠오르고,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땔감 장수와 유곽의 기녀들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그런데 2연의 “아는 나무보다 모르는 나무가 많아서 좋은 북문”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그러고 보니 안도현의 이번 신작에서는 “태어나 보지 못했다” “의미 없다” “모른다” “알지 못한다” “아득하다” 등 불가해성을 드러내는 서술어가 많이 나온다. 이는 시인이 분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뜻하며, 새로운 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태도로 보인다. 말할 수 없고, 의미 없고, 실체가 분명하지 않는 세계를 긍정함으로써 그의 세계는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이러한 문학적 자기 갱신이 보편성을 획득할 때 우리는 또 놀라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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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l 

1994년 《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  등, 장편소설 『청앵』 등, 연구서 『시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등, 산문집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 등이 있음. 〈조태일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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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