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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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채성 

 

 

 

 

사설로 질러보랴,

풍자로 찔러보랴?

 

  

  

   

 

  김수영 시인은 그의 시 「누이야 장하고나!」에서 “누이야 /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라고 외쳤다. 김지하 시인은 1970년《시인》6·7월 합병호에 발표한 평론을 통해 이 시구를 자기 방식대로 변조했다. “선택하라, 풍자냐 자살이냐?”라고. 김지하 시인의 “풍자냐, 자살이냐?”는 외침은 김수영 시의 오독(誤讀)이 아니었다. 엄혹한 시대 속에서 젊은 시인이라면 저항적 풍자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냐는 결연한 질문이자 풍자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한 열정의 토로였다

  김지하 시인은 입으로만 풍자를 외친 게 아니었다. 그는 「풍자냐 자살이냐」가 발표되기 직전인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특권층의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통렬히 비판한 담시 「오적」을 발표하였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팔아넘긴 ‘을사오적’에 빗대 ‘오적(五賊)’이라 지칭하며, 그들의 부정부패와 비리의 사슬을 통렬하고 신랄하게 질타했던 것이다.

  군부 독재가 횡행하던 시절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활동하며 고통과 수난의 세월을 겪은 시인이 김지하였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1년 앞둔 상황에서 정치권과 사회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꼬집은 시인과 이 시가 퍼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오적」이 실린 《사상계》를 폐간시키고, 김지하 시인은 “계급의식을 조성하고 북한의 선전 자료로 이용되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김지하 시인이 풍자적 의미로 썼던 ‘오적’은 아직까지도 사회적 병폐를 풍자하는 상징적 단어로 회자되고 있다.

  풍자의 대척점에 있는 말로 ‘자살’을 택한 김지하의 시각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며, 그때부터 풍자는 우리 문화계의 중심 화두가 됐다. 풍자(諷刺)는 사회적 현상이나 인물의 결함, 죄악 등을 과장하거나 왜곡 또는 비꼬아 표현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표현 방법이다. 냉소나 조롱, 익살, 야유, 희화화 등으로 대상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풍(諷)은 ‘다른 사물에 기대어 말한다’는 뜻이고, 자(刺)는 ‘찌르다, 꾸짖다, 헐뜯는다’는 뜻이다. 풍자의 궁극적 목표는 서정적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대상의 인식 전환을 유도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풍자의 화살은 단연 최고 권력자나 사회 지도층을 향할 수밖에 없다. 권력자나 지배자, 또는 권력을 가진 세력에 대해 피권력자나 피지배자, 억압받는 한 개인이 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무기가 풍자이기 때문이다.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라는 말은, 풍자 외에 권력에 도전할 방법론이 차단돼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약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강자의 무력에 저항할 힘이나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풍자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권력이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개인은 필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기에 권력에 대항해 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를 사회적 혁명을 선동하는 거대 담론으로 말하지 않고, 일종의 해학과 풍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철학은 「오적」을 비롯한 여러 편의 ‘담시’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공격적 어조의 풍자적 어법을 통해 공격 대상을 희화화하고, 당대 권력을 겨냥한 준엄한 비판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할 실천 의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야유와 조소, 비난과 조롱, 과장된 웃음과 대담한 축약 등을 수사적 기법으로 차용하였다. 그는 민요와 현대시의 결합을 통해 참다운 민족 문학을 정립시키려고 했다. 소박한 서정요, 노동요로부터 판소리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표현형식 체계를 올바르게 계승·발전시킨다면, 현대성과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시 형식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창작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그가 ‘담시’라고 명명한 일련의 장시(長詩)들이었다.

  김지하가 창안한 ‘담시’는 판소리의 유장한 호흡을 수용하여 서술자의 기능을 강조하고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판소리와 탈춤 등의 제 양식을 수용하되, 서구의 틀을 도용하거나 전통양식의 단순한 수용 차원을 벗어나 새로운 양식으로의 진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의 ‘담시’는 유려하면서도 일사불란한 판소리계 가락을 타고 있다. 그것은 4음보로 이어지는 민족 전통의 시가 장르인 시조의 가락이자 시조를 길게 늘여놓은 사설시조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다라 안자

  건넛산 바라보니 백송골(白松骨)이 떠 있거늘 가슴이 금즉하여 풀덕 뛰여 내닷다가 두험 아래 잣바지거고

  모쳐라 날낸 낼싀 만졍 에헐질 번하괘라

    

  위의 시는 『청구영언』(진본)에 전하는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다. 컴퓨터 자판으로 입력하기 어려운 고어 표기를 현대적인 자·모음으로만 바꾸었을 뿐 음가는 그대로다. “두꺼비가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올라가 앉아 /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흰 송골매가 날고 있어 가슴이 섬뜩하여 풀쩍 뛰어내리다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 때마침 날쌘 나이기에망정이지 피멍 들 뻔했구나”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두꺼비’는 낯짝이 두꺼운 ‘탐관오리’, ‘파리’는 힘없는 ‘백성’, ‘두엄’은 탐관오리들이 부정 축재한 더러운 ‘재물’ 또는 ‘탐욕’, ‘백송골’은 암행어사와 같은 ‘감찰관’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당시 지방 관리들의 부정 축재와 허세를 풍자한 이 사설시조는 착취와 억눌림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서민들의 사회 고발이다. 작자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비굴한 두꺼비를 통해 당시 양반계층과 지방 관리들의 세태를 비꼬고 있다. 탐관오리의 수탈과 양반들의 허세 등 그 시대의 부조리한 측면을 우의적인 수사와 해학적인 표현을 통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지하 시인이 주창한 풍자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편들은 대개 사설시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형식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더 많은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변격 시조이다. 초장과 중장, 종장의 구별은 있지만 그것들의 길이가 늘어나 있다. 특히 중장은 평시조의 두 배 내지 세 배를 넘는 경우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평시조의 한 장은 4음보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위 작품의 중장은 10음보로 되어 있다. 이처럼 평시조보다 길어진 시조를 사설시조라고 부른다.

  시조를 잘 모르는 인사들이나, 일제강점기 조윤제 등에 의해 정립된 음수율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사설시조를 두고 시조가 아니라고 폄훼하거나 자유시를 추종하는 것 아니냐는 몰지각한 언사를 내뱉기도 한다. 사설시조가 현대 자유시의 모태라거나 오늘의 산문시를 낳게 한 밑그림과 같았다는 주장이 터무니없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설시조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설시조는 현전하는 최초의 시가집인 『청구영언』(1728)에 ‘만횡청류(蔓橫淸流)’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 엄연한 시조의 한 갈래이다. 전체 580수 중 사설시조가 116수를 차지하는 것만 보더라도 양식 자체가 한때의 ‘형식적 일탈’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향유자들에 의해 사설시조 형식이 널리 보편화 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는 사설시조라는 양식이 생겨난 것은 훨씬 이전이었고, 그것이 다수에 의해 사설시조다운 특질을 보여주며 정착한 것은 최소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라는 이야기다. 사설시조의 본격적 창작에 힘입어 18세기 이후의 시조는 단아하게 균형 잡힌 평시조와 분방한 미의식을 구사하는 사설시조가 어우러지면서 훨씬 더 풍부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사설시조의 보편화 현상은 서민 의식의 성장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양반 지배 계층의 무력함을 절감한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비판 의식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서민의 자각은 문학에도 반영되어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한글로 쓴 소설과 사설시조가 이러한 서민문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판 의식을 통해 본격적인 서민문학의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형식과 교리, 체통과 위신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의 지배 계층인 양반 사대부들에 대한 반발심에서 사설시조가 융성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유교적 절의(節義)와 자연 친화적 풍류를 담고 있던 이전의 시조와는 달리, 조선 후기의 시조에는 서민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설시조 형식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거리낌없이 토로하게 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이 ‘풍자’를 시인의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담시’ 창작을 위해 주목한 지점도 바로 이때였으리라.

    

  저런저런! 양반님들

  떼로 몰려 나왔구려

 

  명색이 양반인데 탈바가지 덮어쓰고 꼴깝을 떠는 양이 한심도 하다마는 귀엽기도 하네그려. 모름지기 양반이면 육법전서 읽은 대로 세상주름 살펴주고, 가슴에 나라 국(國)자 붙였으면 국가대사 바로 읽어 옳은 처신 바랐더니, 남의 집 곳간 털어 지져먹고 볶아먹고 하나당 두나당 너거당 우리당 짝짜궁 궁합 제대로 맞춰 돌고 도는 모양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소인놈 대들보 들어 올려 호박에 말뚝 박고 똥 싸는 놈 까뭉개는 저 잘난 놈들을 향해,

 

  메방을

  놓아나 줄까

  똥침을 콱

  찔러나 줄까

  - 이달균, 「14. 얼쑤! 말뚝이, 양반 훈계」 전문(『말뚝이 가라사대』, 동학사, 2009)

   

  위의 작품은 ‘고성오광대’ 놀이를 주제로 한 이달균 시인의 장편 서사시조집 『말뚝이 가라사대』에 수록된 사설시조 중의 한 편이다. 이달균 시인은 마당극으로 펼쳐지던 광대놀이의 풍자와 해학을 현대판 사설시조로 풀어내었다. 그는 『말뚝이 가라사대』를 통해 허위와 허식에 물든 양반 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한다. 탈놀이의 여러 과장을 치밀하게 분석하며 10년간의 공력을 들여 펴낸 역작, 『말뚝이 가라사대』는 진보적 시대 감각의 풍자정신을 바탕으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 시학’의 한 전범을 창조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성행한 사설시조와 탈놀이는 여러 면에서 궤를 같이한다. 부조리한 현실과 부패한 기득권을 향한 풍자와 해학이 그렇고, 시전에서 주로 힘없는 서민들에게 향유되던 민중 문화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형식의 파괴를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기층 민중들의 자유의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봉산탈춤, 양주별산대놀이, 고성오광대 등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뚝이는 민중을 대표하는 캐릭터로서 지배 계층과 권력자들의 무능력과 부패를 고발하는 주인공이다. 곧 말뚝이는 탈놀이 마당의 심판자이자 서민들의 애환을 풀어주는 사설꾼인 셈이다.

  이달균 시인도 말뚝이의 눈을 통해 양반들, 즉 후안무치, 인면수심의 양반탈을 쓴 현대 우리 사회 지도층의 검은 속내와 허세, 거드름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에서 ‘국회의원(匊獪狋猿)’으로 희화화한 바로 그 모습이다. 가슴에 나라 국(國)자 붙여줬으면 국가 대사 바로 읽어 옳은 처신 흉내라도 내야 할 것인데, “남의 집 곳간 털어 지져먹고 볶아먹고 하나당 두나당 너거당 우리당 짝짜궁 궁합 제대로 맞춰 돌고 도는” 당리당략이 참으로 꼴볼견이다. 말뚝이의 눈이 곧 민심의 눈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기는 할까.

   

  금비늘 은비늘 빛살 좋은 봄날 어물전

 

  좌판에 나앉아 호객하는 생선들 틈에서야 비릿한 냄새가 판치는 세상에서야, 이렁성저렁성 살아간들 어떠랴 비싼 값에 팔린다면이야 저자거리에서 비늘이 벗겨진들 어떠랴, 알몸의 너덜거리는 부끄러움인들 어떠하랴 요리조리 뒤집어 보는 손길엔 세상 바닥에 철썩 들러붙어 살아가는 법을, 모로 뜬 눈으로 슬쩍 비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깨닫지 않고서야 어찌하랴 청정옥수(淸淨玉水)에 고기가 꾀이지 않듯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파리 떼도 불러모으고, 지나가는 바람에 비린 풍문을 띄워보내며 이렁성저렁성 살아간들 또 어떠하랴

 

  어물쩍 한물간 눈알로 바라보는 세상에서야…

 - 송정란, 「가자미」 전문

  

  송정란 시인의 「가자미」도 풍자를 기반으로 한 사설시조의 전통과 맥을 잇고 있다. 가자미는 넙치(광어)와 도다리, 서대 등 가자미목에 속하면서 그 이름이 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경우를 제외한 가자미목 가자미과의 생선을 총칭하는 말이다. 가자미과 어류는 세계적으로 약 10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에도 30여 종이 있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보통의 어류는 좌우 대칭형이지만 가자미, 넙치 등과 같은 어류는 위아래로 납작하고 넓적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등 옛 문헌에서는 이러한 외형으로 인해 가자미목에 속하는 어류를 ‘비목어(比目魚)’라 부른다고 했다. ‘양쪽 눈이 몹시 가까우면서 위쪽을 향해 서로 나란하기[比]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래 ‘비목어’란 말은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중국 자전인 『이아(爾雅)』에 나오는 전설상의 물고기를 지칭한다. 이 책에 따르면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마리가 짝을 짓지 않으면 헤엄을 치지 못한다. ‘비목동행(比目同行)’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가자미는 눈이 오른쪽에, 넙치는 왼쪽에 몰려 있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외눈박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비목어는 동해에서 나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접역(鰈域)’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접(鰈)’은 가자미를 뜻하는 한자다. 우리 말의 관용구 중에는 ‘가자미눈을 뜨다’, ‘가자미눈으로 본다’는 말이 있다. 정면으로 상대방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옆눈으로 비스듬하게 흘겨본다는 뜻이다. 송정란 시인의 「가자미」도 시장 어물전에 나앉은 ‘가자미눈’의 시각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처세술과 보신주의를 점묘법으로 풍자하고 있다. ‘가자미눈’으로 훑어보는 “이렁성저렁성 살아가”는 처세술이니만큼 반어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응당 숨어 있다. 이처럼 대상과 상황이 제대로 어우러지지 않는 부조화로부터 발생하는 재미와 우스꽝스러움 등을 장착한 골계(滑稽) 미학은 풍자의 의미를 드높여 주는 것은 물론, 사설시조를 자유시와 구별 짓게 만드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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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ㅣ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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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호